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선생님이 교실에서 나오시며 성규와 여주의 이마에 딱밤을 두기 시작했다. 다음부턴 일찍들 오라며 화내듯 웃는 선생님의 미묘한 표정에 아프다고 짜증을 낼 수도, 마냥 웃으며 알겠습니다! 할 수도 없었다. 성규하고 교무실 앞에서 같이 떠드는 게 아니었는데, 보건실을 다녀왔다 둘러대기라도 할 걸...... 뒤늦게 노트북을 챙겨 온 성규와 함께 아무런 생각도 못 하고 무작정 반으로 뛰다가 수업중임을 잊고 뒷 문을 벌컥 열었었고, 나 자신도 너무 정신이 없어 보건실을 다녀왔다 둘러댈 타이밍도 놓치고 성규와 함께 고개를 조아리며 죄송하다 하기만 했다. 그러니 선생님은 변명거리도 생각해오지 않은 우리가 더욱 얄밉게 느껴졌는지 복도에서 양 팔을 들고 무릎꿇고 있으라며 소리쳤다. 초등학생 혼내는 것도 아니고 뭐 하는 짓이람...... 하지만 성규와 나는 모범생이니까 군말없이 밖으로 나가 무릎을 꿇고 앉았었다. 뒤에선 회장과 부회장이 저래서야 어떻게 4반이 제대로 돌아가겠냐며 선생님의 혀를 차며 하는 험담이 들려왔다.
그런데 성규는 뭐가 그리 좋은지 양 팔을 아프게 들고 있으면서도 내내 실실 웃기만 했다. 왜 웃냐며 중간 중간 물었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내내 웃기만 했다. 처음으로 성규는 참 이상하다, 느껴진 순간이었다. 원래 모범생들이 뒤에서 좀 일탈을 하고 다니거나 이상한 아이들이 많다던데 혹시 성규도 그런 사람인가. ㅡ모범생을 비하하는 말은 절대 아니다ㅡ
복도에서 벌을 받을 때 하필 그 곳을 지나가던 선생님들이 전부 오늘 수업의 교과목 선생님들이셨기에 몇 번이고 깨졌다. 공부도 안 하고 잘 하는 짓이라고, 그래서는 대학은 어떻게 갈 거냐며 수업도 하지 않은 채 우리를 나무랐다. 나는 너무 억울해, 학교 구조도 알려주지 않고 이 곳에 데려온 게 누군데 왜 내가 그 사람의 실수로 혼이 나야 하는 거야! 속으로만 되뇌었다. 절대 바깥으로 꺼낼 수 없는 말이었다. 그렇게 몇 번이고 선생님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깨지고, 점심 시간이 돌아왔다. 급식비는 낸 건가? 안 낸 건가? 잠깐 책상에 엎드린 사이에 반 아이들은 전부 제 친구들과 함께 반을 빠져나갔다. 내 친구는 누굴까, 친구가 없다면 누구랑 친해져야 할까, 생각 할 틈도 없이 우르르 나간 친구들과 그 텅 빈 방에는 친해질 사람도 없는 나 뿐이었다.
가방을 대충 뒤지니 지갑 속에 천원 짜리가 꽤 있었다. 대강 지갑을 챙기고 매점을 찾으로 무작정 걸어다녔다. 반 게시판에 붙어있던 점심 시간과 지금 시간을 확인해보면 점심 시간이 꽤 남아있었다. 매점을 찾으러 몇 번이고 돌아다니니 사람이 북적북적한 곳이 보였다. 저기구나, 매점이. 억지로 낑겨 들어가며 거의 매점 문 앞으로 도착하니 어쩔 줄 몰라하는 성규가 보였다.
"죄송해요, 아주머니, 500원이 부족한데 500원만 다음에 갖다 드리면 안 될까요?"
"이게 한 두번이어야지! 내일 바로 가져다 주지도 않잖아, 뒤에 사람 많아."
"아, 아주머니......"
"제가 대신 계산할게요, 얘 거랑 소세지빵 하나 추가해서 계산해주세요."
성규가 벙 찐 표정으로 가만히 날 쳐다봤다. 똑같이 성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괜히 어색해 입꼬리를 올리고 웃어보였다. 성규의 눈썹이 가운데로 쏠려 올라갔다. 팔 자. 그 한자 팔 자. 순간 좀 귀엽다고 느껴졌다. 정신을 차리자며 머리를 계속 좌우로 흔들었다. 그렇게 계속 정신이 나간 듯이 머리를 흔들다가 어느 순간 딱, 정신을 차리니 여주는 성규 손에 이끌려 매점 앞에 쌓여있는 아이들 사이에서 탈출한 후였다. 매점 옆 학생 휴게실에 테이블 하나를 잡고 앉아 그냥 가만히 빵을 먹었다. 반대편엔 성규가 앉아있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고,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았을 뿐더러 아무런 말도 할 게 없었다. 그냥 고개를 숙이고 빵만 먹고 있으니 고맙다는 개미만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뭐라고? 하며 고개를 들고 되물었다. 성규는 왜인지 부끄러워 하고 있었다. 이건 무슨 내가 남자같고 성규가 여자같다...... 고맙다는 말에 대강 괜찮다며 계속 먹다가 곧 들려오는 성규의 말에 사레가 걸려 켁켁댔다. 성규가 자신이 마시던 우유를 내밀었다.
"방과후에, 학교 앞에 설빙에서 빙수 먹을래? 내가 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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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떨결에 끌려왔다. 무슨 빙수가 좋냐길래 초코라고 작게 말 했더니 의자에 여주를 앉히고 ㅡ여주가 앉기 편하도록 의자를 살짝 빼주는 성규에게 살짝 설레기도 했다ㅡ 자신의 가방을 옆에 놓은 성규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계산대 앞으로 갔다. 아, 성규는 카드 쓰는 남자구나? 멍하니, 그냥 아무 생각이나 하고 있는지 10분 정도가 지나자 벨이 울리면 가지러 가는 것도 모르고 계산대 앞에서 주구장창 서있던 성규가 빙수가 담긴 쟁반을 들고 헤벌레 웃으며 다가왔다. 쟁반을 테이블 위에 놓고 성규는 제가 앉기도 전에 헤실대는 것을 멈추지 않고 수저를 여주에게 내밀었다. 어버버, 갑자기 다가오는 수저를 아무런 생각도 없이 받았다. 이럴 쯤 되면 분명 무엇이 이상한 것 같다, 라고 생각했어야 했는데 전교 5등 (뒤에서) 여주는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야, 김성규"
"응, 여주야. 왜?"
"넌 왜 안 먹고 나 보기만 해, 나 부담스러운데."
"아, 미안해. 먹을게."
혼자 벌써 반이나 비워놓고 그제야 제 살이 걱정되는 여주가 부담스러움을 핑계로 대며 성규에게 빙수를 먹을 것을 강요했다. 그러자 성규가 깨작깨작 수저로 대강 그릇을 휘젓기 시작했다. 야, 뭐 해. 먹을 것에 민감한 여주가 화를 내자 성규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눈이 꽤 작은데 저게 저렇게 떠질 수도 있구나. 자꾸 다른 쪽으로 새는 생각을 다시 부여잡고 다시 한 번 화를 냈다. 제대로 좀 먹어, 네가 사는 거잖아. 나 미안하게 왜 그래. 하니 내가 미안한 것은 싫은 지 그제야 빙수를 먹기 시작했다. 그러니 빙수가 조금 더 빨리 줄기 시작했다. 불안해진 여주가 먹는 것에 조금 더 스퍼드를 내기 시작했고 성규가 그런 여주를 보며 웃음을 참다가 결국 빵 터져서는 테이블을 치며 웃어댔다. 여주가 뭐냐는 눈빛으로 성규를 쏘아봤다. 그럼에도 성규는 계속 웃어대었다. 그러다 수저를 내려놓고 계속해서 빙수를 먹는 여주를 바라보며 입을 떼었다.
"내가 널 좋아한다고 한 게 어쩌면 네 말대로 정말 외면만 보고 좋아했던 것도 같아."
"응?"
"내가 널 좋아한다고 고백했을 때, 네가 그랬잖아."
"......"
"넌 내가 예쁘장하게 생기고 공부도 잘 하고 하니까 좋아한다고 하는 거 아니야? 그냥? 이랬잖아."
"아......"
"그런데 지금 보니까, 난 네 모든 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라고 느꼈거든, 넌 항상 공부를 핑계로 체육시간엔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네가 체육을 싫어할 거라 생각해왔는데 네가 오늘 체육시간 때처럼 웃으면서 체육하는 걸 보니까 아, 얘는 정말 공부때문에 좋아하는 것까지 포기하고 있구나 느꼈고, 급식실은 물론 매점도 잘 가지 않는 너였기에 이렇게 먹을 걸 좋아하는지도 몰랐고, 돈 없는 친구한테 돈을 대신 내준다던가 하는 은근히 남 배려해주는 성격도 전혀 있을 줄 몰랐어. 애들이 널 싫어하는 이유가 혼자 공부하고 혼자 지내고 사람하고 가까워지려 하지도 않는단 이유 뿐이었잖아. 걔네들이 지금의 널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이제야 네가 날 차며 했던 말도 이해가 가기도 하고."
분명 앞 뒤도 맞지 않는 말이었는데도 전부 귀에 박혀 들어왔다. 성규는 나에게 좋아한다며 고백을 한 적이 있었구나, 하지만 곧 드는 생각은 행복보다는 불행이었다, 내가 얘가 좋아하던 그 여주가 아니라서, 이제야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이라서, 그래서 싫어하게 될까봐, 실망하게 될까봐. 속임을 당한다는 게 얼마나...... 순간 목이 메어 성규의 저 말 이후에 나오는 질문들과 말에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 했다. 내가 싫은데 사귀고 있단 이유로 ㅡ심지어는 사람은 차는 것이 너무 미안하다는 이유까지 포함하여ㅡ 자신의 쌍둥이를 대신 데이트에 내보내며 나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던 전 남자친구가 생각이 났고, 그를 욕하며 한 달 내내 방 문을 잠그고 펑펑 울었던 게 생각이 났다. 그 때 내가 욕하고 있던 사람이 지금은 내가 되었다. 그래서 성규에게 너무 미안했다.
"여주야, 여주야, 왜 울어. 응?"
"아니, 그게...... 흑, 흡... 미안해서, 미안해서 성규야."
눈물이 멈춰질 기미가 보여지지 않았다. 조금 남은 빙수와, 벙 찐 상태의 성규를 앞에 두고 옷 소매로 수없이 눈가를 닦으며 울어대었다. 집에서 우는 것마냥 크게 울어대었다. 성규가 앉아있던 자리에서 내 옆자리로 넘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계속 꺽꺽, 대며 숨까지 넘어가듯 울고 있는데 옆에서 성규가 가만히 안아왔다. 눈물이 묻으면 더러울까봐 억지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데 성규가 그걸 눈치라도 챈 듯 강하게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