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아는 척을 안 하고 싶었는데 성규는 그게 아니었는가보다. 일부러 모르는 척을 하려고 시간차를 두고 들어가자고 한 것이었는데 성규는 들어오자마자 나에게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넸다. 아이들의 시선이 모조리 우리를 향했다. 나도 이 상황이 불편하긴 했지만 왜인지 자꾸 내 몸이 그를 계속 부담스러워 하고 있었다. 이것도 게임의 부작용인가? 싶었지만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그럴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대답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가방에서 책을 꺼내는 척 그의 말을 무시해버렸다. 그러자 아이들의 부담스럽던 그 시선들도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성규의 손이 허공에서 무안해 하다가 주먹을 그러쥐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미안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성규는 그 때까지도 내가 아침에 건네 준 막대사탕을 물고 있었다.
쉬는 시간만 되면 김성규를 피해다녔다. 수업 시간에 열심히 공부를 하고 ㅡ하는 척을 하고ㅡ 수업 끝나는 종이 치자마자 성규가 나에게 다가오려 하는데 그 행동을 몸이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성규의 눈빛을 애써 무시하고 종이 치자마자 나에게 움직이는 성규를 피해 화장실로 도망갔다. 그 이후에도 나는 성규의 머리칼만 보더라도 피해다니기 시작했다. 난 성규가 좋았는데, 내 몸은 자꾸 성규를 피하라고 하고 있었다. 설레는 그 감정이 간질거리고 좋았는데, 내 몸은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 마냥 낯설기만 한가보다. 그렇게 매일 매일을 피해다니면서도 성규가 붙잡아주길, 붙잡아 세워선 왜 날 왜 피하느냐, 내가 그렇게 싫냐, 해주길 바래보기도 했지만 내가 여태 봐왔던 성규라면 그럴 용기가 없었고, 정말 성규는 나보다 교실에서 한 발 늦게 나와 날 찾아다니기만 할 뿐, 쉬는 시간 종이 치자마자 달려 와 손목을 붙잡고 하지는 않았다. 내 손목에 성규의 온기가 남았던 것은 그 날 밤이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부턴가 우리 반에 소문이 생겼다.
[야, 김성규 옆 학교 중3이랑 사귄대. 미친 거 아니야?]
성규가 날 좋아하고 있음을 몇 번이나 표현했고, 그것을 알았음에도 성규의 소문을 들었을 때 나는 정신이 멍해지기 시작했다. 직접 가서 물어보고 싶어도 물어볼 수가, 다가 갈 수가 없었다. 내 발은 종이 치자마자 자연스레 다시 화장실로 향했으니까. 그리고 또, 이렇게 피해다니기만 하다가 소문에 혹해선 갑자기 가서 물어보는 것도 웃기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멍한 정신으로 꿋꿋이 7교시를 버텼다. 성규를 피해다니느라 일찍 매점으로 가서 사왔던 점심 빵도 살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복도를 휘젓기만 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집에 오자마자 교복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억지로 잠에 청했다. 한 시간 정도가 지나서야 잠에 빠졌다.
그리고 그 날, 나는 성규와, 하교 할 때마다 보던 옆 중학교 교복을 입은 여자 아이가 함께 손을 맞잡고 웃고 있는 꿈을 꿨다. 나는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사실 다가가기도 했지만 성규는 내가 보이지 않는 듯 했다. 성규와 그 아이는 눈을 맞추고는 다시 꺄르르 웃었다. 싫다. 꿈을 꾸지 않으려, 잠에서 깨려 고개를 좌우로 휘저었지만 꿈도, 잠도 깨지 않은 채로 나는 계속 그 아이들을 보고 있었야만 했다.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내 어리석은 행동으로 성규는 이미 다른 사랑을 찾았다. 그게 너무 슬펐다, 내가 설렜던 감정들은 이제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릴까봐 겁도 났다. 너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며 우울해하던 성규가, 내가 무시하는 와중에도 내가 줬던 사탕을 꼭 물고 있던 성규가, 이제 더 이상 날 품는 게 아니라는 게 강하게 다가왔다. 다시 고개를 도리질쳤다. 그러자 잠에서 깨어났다. 눈물이 앞을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눈 앞에 있는 것은 행복해하던 그들이 아닌 어두운 내 방의 천장이었다. 옷 소매로 몇 번이고 눈물을 닦아도 계속 눈물이 흘러내렸다. 첫 사랑 같지도 않은 그 첫 사랑은 내 미련함으로 놓쳐버리고 말았다.
[성규]
휴대폰이 지잉, 징, 대며 제 몸을 흔들었다. 그리고 액정으로 당당하게 시간 대신 성규라는 이름을 내뱉었다. 전화를 받았다, 목이 잠겨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여보세요, 하고 말 하고 싶었는데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은 채 목이 턱 막혔다.
"여주야, 중학생 얘기, 오해야...... 알지?"
"......"
"제발, 제발 대답 좀 해줘."
"......"
"다시 고백할까 많이 고민 했는데 네가 날 피해서 못 했어."
"......"
"잠시만 집 앞으로 나와주면 안 될까?"
옷도 갈아입지 못 하고 성규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현관으로 달려나갔다. 신발을 신고 싶었는데 앞이 통 보이지 않는다. 아무거나 신었다, 아마 슬리퍼였을 것이다. 잠옷에 슬리퍼에 눈물 범벅인 못생긴 얼굴까지 호감을 떨어뜨릴 것들을 고루 갖추고 성규에게 달려나갔는데 성규는 방긋 웃으며 양 팔을 벌리고 있었다. 무작정 그 안에 들어가 안겼다. 첫 날 처럼 성규가 다시 나의 등을 토닥였다.
"김여주, 의외로 울보네."
"......"
"울지 마, 내가 울린 것 같잖아. 난, 너 웃게만 해주고 싶은데."
"......"
"여주야, 있잖아. 아직 나에게 호감이 없어도 한 번만 나 봐주면 안 될까?"
"......"
"난 아직 너에 대해 알아가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네가 날 자꾸 피해서, 네가 자꾸 다가 갈 기회를 안 줘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
"조금만 널 알아갈 기회 주면 안 돼?"
성규의 품에서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성규의 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성규가 중학생과 사귄다는 그 말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 너무도 좋았다, 직접 내게 아니라며 말 해주는 것도, 날 알아가고 싶다는 그 한 마디까지도 너무 달게만 들려왔다. 좋아한다고 속으로 몇 번이고 속삭였다. 내가 널 좋아한다고, 성규야 내가 널.
"여주야, 좋아해."
나는 정말 울보라도 된 듯 다시 눈물이 터졌다.
그리고 갑자기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은 담배를 펴고 있는 일진 무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