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들의 괴롭히는 정도가 심해졌다. 첫째 언니는 요새 부쩍 예민해졌다. 나만 보면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라고 느낄 정도로. 무척 예민하다 싶은 날엔, 내 머리채를 잡은 적도 있었다. 둘째 언니가 겨우 말리긴 했었지만, 그때는 정말 미친년이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내 감정을 억누르려고 노력했다. 오물단지나 다름없는 그 집에서 살 바에야, 이렇게 후드려 맞는 게 더 낫다고. 몇 번이나 나의 처지를 위로하면서 말이다. 게다가, 첫째 언니가 왜 화가 나있는지 나는 뻔히 알고 있었다. 형부때문일 것이다. 자신에게 전혀 애정을 주지 않는 형부. 형부는 윤서희를 사랑하지 않으니깐.
“이러시면 안돼요.”
“…….”
“우린 그냥,”
“근데, 어떡해. 내가 너 좋다는데.”
“…….”
“너도 내가 싫지 않잖아. 그럼 된 거 아냐?”
알면서도, 형부의 손길을 거부할 수 없었다.
“아.”
“…….”
“좋다.”
이렇게 평생 너와 안고 있고 싶을 만큼. 형부가 결박하듯, 나를 안은 채 귓가에 중얼거렸다. 형부가 숨을 쉴 때마다 뜨거운 공기가 닿았다. 그리고, 형부가 더이상 서희언니에게 주지 않는 애정은 모두 나에게로 왔다. 한 번 즐기고 나니, 그 다음부터는 정말 상습적이었다. 우리 집에 찾아온 형부는 첫째 언니가 없는 틈을 노려 항상 내 방에 들렀고,
“오늘 밤도 올 거지?”
“…….”
“12시가 되면, 뒷문으로 차가 한 대 올거야. 그거 꼭 타고.”
그 다음은 내가 형부의 집에 가는 거였다.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서희언니도, 우리 가족도 모두 잠든 새벽에.
형부와 밤늦게 밀회를 나누고 아침해가 뜨기 전에 집으로 돌아오면서 매일, 매일 후회했다. 내가 어쩌자고 이런 무모한 짓을 저질렀지? 다시는 형부를 보지 않으려고 했다. 분명히 그랬는데, 그의 앞에만 서면, 그의 눈빛만 보면 손바닥 뒤집듯이 생각이 바뀌었다. 오늘도 윤서희, 그 년이 너 괴롭혔어? 내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형부는 그런 식으로 나를 위로하곤 했다. 분명 아침까지만 해도, 첫째 언니가 내 머리채를 잡고 이리저리 흔들 때까지만 해도, 형부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잖아. 불쌍하잖아. 라고 생각하며 감추었던 설움은 그때서야 터져나왔다. 네. 뺨을 맞았어요. 언니가 미친 것 같아요. 저 정말 그곳에 있기가 너무 싫어요. 형부의 허리를 끌어안고 매일, 매일 그렇게 울었고, 형부는 내 거친 손을 움켜잡곤 한 손으론 등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너는 그 년들이랑은 달라.”
“…….”
“내가 늘, 구원해주고 싶게 만들잖아.”
중독적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단순히 운이 좋아, 부잣집에 굴러들어와 박힌 돌 신여주가 아닌, 전정국이 사랑하는 여자가 되어있었으니깐.
“약혼식을 더 미루면 안되겠어.”
“서희씨, 내가 바쁘다고,”
“벌써 몇 번째야? 원래 예상보다 3달이나 넘어갔어. 정국씨 때문에.”
식사자리의 공기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첫째 언니는 완강했다. 더는 형부의 입맛대로 놀아날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원래도 모자라던 형부의 애정은 이제 바닥을 기었으니깐. 첫째 언니는 이대로 꿈에 그리던 결혼 생활을 망칠까 초조한 것이었다. 나는 아무런 말 없이 묵묵히 고기를 씹었다. 한참 식사자리엔 정적이 감돌다, 형부가 이내 웃었다.
“그래.”
하자, 약혼식. 형부의 말에 새엄마와 아빠가 기쁘다는듯 웃었다. 전서방이 빠르게 결정해줘서 다행이라고. 다시 화기애애해진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가 차츰 둘째언니와 나에게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여주는 언제 시집갈래?”
“네?”
새엄마가 꺼낸 얘기는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내용이었다. 에이. 아직 어린 애인데, 결혼은 무슨. 아빠가 그런 새엄마를 보며 혀를 내두르자, 새엄마가 왜요. 여주도 이왕이면 미리 좋은 애로 물어다 주는게 좋죠. 하고 정말 생각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소개시켜줄 듯이 말을 했다.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테이블 밑에서, 형부의 손길을 그대로 받아내며. 여주야, 생각있으면 말해. 내가 알아봐줄게. 새엄마가 미소띄며 말했고 내가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형부가 잡은 손에 억세게 힘을 주었다. 흘깃 쳐다본 형부의 얼굴이 냉랭했다. 나는 그 상황에서 아프다고 할 수도, 손을 뺄 수도 없었다.
내게 입을 맞추려는 형부의 뺨을 때렸다. 형부가 아무런 표정변화 없이, 고개를 다시 정면으로 돌렸고, 이내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것도 잠시, 다시 내 손을 잡아오려는 형부의 손길을 피한 내가 입을 열었다.
“정신 차려요.”
“갑자기 왜그래?”
“이건 미친 짓이예요.”
“내가, 윤서희랑 약혼식을 한다고 해서, 화가 나서 그러는 거지? 응?”
“약혼을 할 사람이니깐, 더더욱 이러면 안되는 거잖아요.”
이제 진짜 이 관계를 끊어내야 할 때였다. 약혼식이 머지 않았다. 언제 들킬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것도 이제 슬슬 지쳤다. 더 최악이 되기 전에, 얼른 이 관계를 벗어나야한다는 생각이 내내 머릿속을 감돌았다. 그런 반면, 형부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던 건지 점점 표정이 굳어져갔다.
“여주야.”
“이러지 마요.”
“신여주, 나 봐.”
“여주 아니고, 처제.”
앞으론 그렇게 불러야 해요. 우리 관계를 딱 명확히 해줄 호칭이잖아요. 앞으로는 명백히 선을 긋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형부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다 이내 허탈한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이내 웃음기를 싹 거둔 표정으로 천천히 다가와 내 앞에서 무릎을 구부렸다. 어떤 짓을 할지 몰라, 잔뜩 경계하며 형부를 내려다보았다. 형부의 눈이 깜빡, 깜빡 거리며 나를 바라본다. 커다란 눈망울이 조금씩 빨갛게 변하는 것도 같았다. 형부가 내 손을 잡고, 내 거친 손을 잡고, 뺨에 비비적 대기 시작했다. 생채기 하나 없이 부드러운 뺨이었다.
“내가 너를 처제라고 생각했으면, 어떻게 너와 그런 짓을 했겠어?”
그러면서 내 손가락 하나, 하나에 입을 맞췄다. 쪽, 쪽 소리가 넓은 방 안에 울려퍼졌다. 하. 한숨을 느릿하게 뱉은 내가 더는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이내 내 손을 놓아준 형부였다. 웬일인가 싶었더니, 외투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모양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개를 돌려 창문 어딘가에 시선을 두었다. 그저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가길 바라면서.
“지쳤어요.”
형부는 내 말에 대답이 없다.
“그만하고 싶어요.”
아무런 대답 없이, 또 다시 내 손을 가져간다. 진짜 손 페티쉬라도 있는 건가.
“이렇게 말하고 또 형부는 화난 언니를 달래러 나가겠죠. ”
형부의 손이 내 손을 찬찬히 어루만진다. 마치 귀한 보석을 쓰다듬듯이.
“전부 싫어요. 빨리 약혼해서 둘 다 내 눈앞에서 안 보였으면 좋겠어요.”
“…알아.”
그 때, 손가락 위로 무언가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천천히 내려다보니, 형부가 나의 네번째 손가락에 무언가를 끼우고 있었다. 그것은 반지였다. 아주 영롱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루비반지. 형부의 눈빛만큼이나 내 시선을 빼앗는, 그런 예쁜 반지였다. 다행히 꼭 맞네. 형부가 나를 올려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약혼만 할 거야.”
“…….”
“결혼은 안해. 약속해.”
그럼 뭐가 달라지는데요? 묻고 싶었다. 그런데, 형부는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다 아는 사람처럼 굽혔던 무릎을 세워 일어나서는 내게 입을 맞춰왔다. 또 마음이 약해졌나. 형부를 밀어내는 손길에 차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주 길고 농밀한 입맞춤이 되었다. 형부와 지금껏 해왔던 입맞춤들과는 비교도 안될정도로. 그러면서 습관대로 형부는 반지가 끼워진 내 손가락을 쓸고, 어루만지고, 아프게 그러쥐었다. 마치, 반지가 제대로 끼워져있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사람처럼.
그리고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 반지는 족쇄구나. 나를 도망가지 못하게 묶어놓는, 족쇄가 되겠구나 하고.
동화의 모티브, 첫번째 이야기
<신데렐라>
中
파티 준비가 한창이었다. 저마다 분주하게 호텔의 한 층을 꾸며내고 있었다. 모든 것은 V호텔그룹 막내 도련님의 입맛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전부 다 바꿔. 이 벽지 패턴도 이제 지긋지긋해. 셰프랑 악단은 무조건 1류로 불러오고. 저 번 생일때 같이 머저리같은 새끼로 불러오면 뒤질 줄 알아. 초대장도 무조건 화려하게. 호텔 VVIP들한테는 전부 돌리고, 명단 따로 뽑아놓은 사람들이랑 같이. 응? 제발 똑바로 좀 해, 똑바로 좀. 그의 비위를 거슬리는 일이 없도록 저마다 사색이 된 채 파티를 준비했다. 제대로 하지 않으면 도련님께서 혼을 내실 거야. 도련님에게 밉보이면 안돼…. 우리 도련님에게 밉보이다간….
아, 지루해.
태형은 호텔 옥상에 올라 서울의 야경을 관망했다. 옥상은 이 호텔에서 제일 유명한 코스이기도 했다. 호텔에 묵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곳에 올라왔고, 누구나 감탄을 금치 못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이라도, 이곳에 올라오면 언제 그랬냐는듯 넋을 놓고 야경을 바라보았으니까. 태형은 아름답기 짝이 없는 그 풍경을 아주 무료하고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젠 파티도 질렸다. 하나같이 맘에 안들어. 참 재미없는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이 놈의 절제된 인생에선 어떻게 뭐하나 흥겨운 일이 없지? 다들 겉치레로는 하하호호 웃으면서 내 앞에서는 굽실굽실 거리더니, 뒤에선 어떻게 해야 저 사람을 내 발밑에 기게 할까, 어떻게 해야 피라미드 꼭대기에 오를까, 고민하며 발톱을 감추고 있었다. 숱하게 그런 꼴을 봐왔으니 이제 적응될 법도 한데. 정말이지, 이골이 난다.
“뭐, 재밌는 일 없나.”
태형이 한참동안 한강 발치를 응시하며 와인을 음미하다, 이내 바닥에 전부 쏟아부었다.
“금요일 저녁에 파티가 열린대요.”
“…….”
“파티에선 뭘 해요?”
성급하게 자신을 끌어안는 형부를 살짝 떼어놓으며 물었다. 며칠 째 다같이 하는 식사자리에선 파티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질 않고 있었다. 새언니들은 파티때문에 잔뜩 들떠있었다. 유명 호텔그룹 막내 아들의 생일파티라는데, 둘이 속닥이는 말을 들어보면 둘째 언니는 그 분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얘기만 나오면 얼굴을 붉히곤 했으니깐. 새엄마 말로는 그 파티는 저명한 집안의 자제들만 모여 청춘을 즐기는 자리라고, 부자들의 특권이나 다름없다며 내게 꼭 가보라고 말씀하셨다. 같이 가자. 새엄마 말씀처럼 형부도 내게 그렇게 권유하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같이 가? 그게 가능한 일이기나 할까.
“재밌을 거야.”
“…….”
“그 사람의 파티는 늘 완벽하거든.”
형부가 내 입술을 감쳐물었다. 그 순간에 내 머릿속은 온통 처음 가보는 파티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금요일이 되었으나, 나는 파티에 가지 못했다.
“설마 너도 그 파티에 가려는 건 아니겠지?”
“…….”
“네가 어떻게 그런 거대한 사교파티에서 우리와 나란히 이름을 올리고 들어가? 주제도 유분수지.”
새언니들은 그렇게 말하며 내 초대장을 벽난로에 불태워버리고는 나를 방에 가두었다. 들떴던 기분이 한 순간에 가라앉기 시작했다. 창문 바깥으로는 첫째 언니와 둘째 언니만을 태운 차가 정문을 빠져나가고 있는 풍경이 보였다. 모든 것이 무력해졌다. 마음만 먹으면 문도 딸 수 있었고, 새엄마와 아빠에게 말해서 호텔로 향하게 해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할 힘도, 의지도 없을만큼 새언니들에겐 넌더리가 난지 오래였다. 파티에 간다 한들, 또 나를 괴롭히겠지. 집에 와선 내게 죽일듯이 욕을 퍼부을 것이다. 자신들과 내가 하나의 성으로 묶인 추태를 보였다면서. 가지 않는 편이 나을 거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우울했다. 아빠는 늘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파티에 갔고, 그때마다 자신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어떤 사람들과 어떤 얘기를 나누었는지 술에 취한 상태로 얘기하곤 했었다. 머리가 좀 자란 뒤로는 술주정도 듣기 싫어서 항상 귀를 틀어막곤 했었는데, 어렸을 때는 꽤 재밌게 들었는지 마음 한켠에 파티에 대한 환상이 남아 있었다. 형부도 완벽한 파티라고 칭찬을 할 정도인데. 얼마나 대단할까. 파티에서는 무엇을 할까. 아쉬운 마음을 애써 지우고, 새언니가 시켰던 일을 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던 그때였다.
쾅, 하고 창문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돌이라도 던진 것 같은 굉음이었다. 놀라서 창문을 열어보는데, 뒷뜰에 차가 한대 주차되어있었다. 난 이미 그 차가 어떤 차인지 단박에 알아봤다. 형부의 집에 갈때마다 밤에 탔던 차량이었다. 운전석에 타고 있던 익숙한 그의 비서가 차창을 내리고 내게 내려오라 손짓했다. 형부가 정말 날 데리러 왔어. 같이 가자고. 나는 그걸 알자마자, 그의 집에 갈 때마다 꼭 꼈던 루비반지를 습관처럼 손에 끼우고 바깥으로 달려나갔다.
나를 태운 차가 그렇게 향한 곳은 백화점이었다. 그 백화점이 어떤 백화점인지는 너무 잘 알았다. 형부의 백화점이었다. 말만 들었지, 실제로 들어가기는 처음이었다. 주차장에서 내리자마자, 입구에 나란히 서있던 직원들이 나를 데려갔고 그 이후부터는 알아서 하나하나 손을 봐주기 시작했다. 명품관에 있던 백화점 직원들은 나를 보자마자 다들 고개를 수그렸다. 난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들의 정성어린 손길에 의해 탈바꿈 되어갔다. 이런 호의들이 생전 처음이었던 지라, 아빠는 대체 어떻게 늘 가면을 쓰고 부자인척 살았는지 모르겠다.
“……와.”
“마음에 드세요?”
“제가 아닌 것 같아요.”
구두까지 맞춰 신고 나온 후 거울을 봤을 땐, 정말 낯선 사람처럼 바뀌어있었다. 그래도 차려입느니라고, 새엄마가 주신 옷들을 그동안 입어보긴 했었는데, 이렇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손을 대보기는 처음이었다. 분명 그 전까진 빈티가 있었는데. 정말 부잣집 딸로 환생한 것 같았다. 아니, 그냥 부잣집의 자손같아. 넋을 놓고 거울을 바라보는데, 옆에 있던 직원이 내게 꽃다발을 건넸다.
“전사장님이 전하셨습니다.”
꽃내음을 맡으며 안에 든 편지를 꺼내보았다. '반지 꼭 하고 와요.' 처음이었다. 처음 느낀 감정이다. 마음이 급히도 들뜨기 시작했다. 손가락에 끼워진 루비반지를 바라보며 웃었다.
밤이 되자, 호텔 외관에 불이 켜졌다. 호텔 외관은 그 명성답게 아름다웠고, 고개를 올려도 전부 우러러 볼 수 없을 만큼 높고 규모가 컸다. V호텔 앞에서 내린 나는 긴 드레스를 입은 채 엉거주춤 서있었다. 호텔로 가면 전사장님이 금방 올거라고. 그럼 같이 들어가면 된다고, 분명히 비서가 그렇게 말씀했는데. 형부는 한참 기다려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왜이렇게 늦지. 시간이 가고 사람들은 계속, 계속 호텔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럴수록 초조해져만 갔다. 새언니들과 마주치는 거 아니겠지? 결국 혼자 입구 안으로 들어가보았지만, 초대장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다며 나를 제지했다. 새엄마의 이름을 대보아도 소용없었다.
“전정국 사장님은 모르세요? JK백화점 전정국 사장이요. 그분을 한 번만 불러주시면,”
“자꾸 이렇게 나오시면 억지로 쫓아내드리는 수 밖에 없습니다. ”
입구 앞을 지키고 있던 경비는 서로 눈짓을 하더니 뒤에 있던 다른 경비들을 불렀다. 제발로 나갈테니 조금만 더 기다리고 있을게요. 정말 조금만이예요. 조금만! 다른 경비들이 하나 둘 달려와 내 팔을 붙들고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안돼! 여기까지 겨우 이렇게 왔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집으로 돌아갈 순 없다고 생각했다. 정말 조금만 기다릴게요. 한 번만 놔주세요. 네? 내 말에도 완강히 나를 끌던 경비에 의해 저 구석으로 밀려날 쯤이었다.
“그냥 들여보내 줘.”
또각, 또각. 구두소리와 함께, 입구에 서있던 정장을 입은 남자들 모두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나를 잡고 있던 손들도 다 풀린지 오래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질질 끌리는 드레스 끝단을 털고, 고개를 들었다.
처음보는 남자와는 그렇게 어렵지 않게 눈이 마주쳤다. 내 앞으로 성큼 성큼 걸어오는 폼이 마치 백조같이 우아하고 기품있다고 느껴졌다. 한눈에 봐도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란 걸 알았다.
“이렇게 아리따운 여성분을 그냥 내쫓는 건 예의가 아니지.”
남자가 내 앞에 서자, 짙은 향수 냄새가 흘렀다. 남자가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내게 눈높이를 맞춰왔다. 향수 냄새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가까이서 보이는 모든 것이 화려했다. 향기도, 귀걸이도, 옷도, 이목구비도.
숨을 참는데, 남자가 이내 다시 허리를 세우더니, 내 옆에 서서 팔을 비스듬히 굽혔다. 그런 남자를 멀뚱, 멀뚱 쳐다보는데, 남자가 팔짱. 하고 입을 열었다. 그제야 뜻을 알아차린 내가 남자의 팔 안쪽에 내 팔을 끼웠다. 남자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내딛었고, 한 발 한 발 걸을 때마다 홍해가 갈라지듯 사람들이 비켜 나왔다.
파티는 정말 화려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들리던 클래식 음악소리는 실제 현장에서 즉석으로 악단들이 연주를 하고 있었다. 눈부신 샹들리에 옆에 색색의 조명들이 이 곳을 더 밝게 비추고 있었다. 무대 위에서 정석적인 춤을 추고 있는 무용수들과, 그 아래에서 음악에 맞춰 살랑살랑 몸을 흔드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 중에는 빈티가 나보이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다. 커다란 케이크 옆에 테이블에는 값비싼 음식들이 즐비했고, 많은 수의 웨이터들이 손님들에게 음식을 나르고 있었다. 누군가 샴페인을 터뜨려 흥건해진 바닥에도 다들 아무렇지 않아 하며 오히려 즐거워했다.
와, 와….
파티의 풍경에 연신 감탄하며 넋을 놓는데, 사람들이 점점 하던 행동들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보며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전부 옆에 있는 이 남자 때문인 것 같았다. 남자가 길을 걸으며 살짝 입꼬리를 올리자, 여자들이 얼굴을 붉히며 손을 흔들었고, 남자들도 하나같이 시선을 떼지 못했는데, 그런 그들의 눈빛에는 하나같이 선망이 가득했다. 더 안쪽으로 걸어가자, 남자는 내게서 팔을 풀고 지나가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의 주위에 점점 더 사람이 몰리는 걸 보며, 나는 옆에서 어정쩡하게 서있다가, 운좋게 어떤 남자를 통해 이곳에 들어왔으니 이제부턴 혼자 형부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클래식 노래 분위기가 경쾌한 재즈풍 음악으로 바뀐 건. 동시에 사람들이 웃으며 서로의 짝을 찾아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보는 광경에 나도 모르게 움직이려던 발을 멈췄다. 나를 데리고 온 그 남자의 곁으로 사람들이 더 몰려왔다. 저와 춤 추실래요? 도련님, 저랑 춤 춰요! 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저렇게 사람들이 다 춤을 추자고 할까. 남자는 그런 사람들의 말에도 꿈쩍 않고 있었으며, 난 점점 더 불어나는 인파를 뚫고 뒤를 돌아 형부를 찾으려고 했다. 그때, 남자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그와 가까스로 시선이 맞닿았다.
“오늘은 데려온 여성분이 있어서.”
“네? 그게 정말이에요?”
“올해는 도련님과 꼭 같이 추고 싶었는데!”
그리고 남자가 내 앞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대리석 바닥에 부딪힌 구두가 또각, 또각 소리를 내었다.
“같이 춤 추시겠어요?”
아가씨. 남자가 내 앞에서 한쪽 무릎을 살짝 굽혀 손을 내밀었다. 나에게로 쏠린 시선에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남자는 저기 누구하나 빼어나지 않은 사람 없는 화려한 여자들이 아닌, 내게로 손을 내민 것이다. 같이 춤을 춘다는 게 여기선 어떤 의미로 통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다들 하나같이 놀라는 모습들을 보니 이 남자와 춤추는 게 대단한 일이란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아, 아니요. 저는 춤을 잘 못춰서.”
내 말에 남자가 고개를 들어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이내 큰눈을 접어 샐쭉 웃었다. 잇새에서 언뜻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이네. 재밌네요. 그런 남자의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남자는 굽혔던 다리를 펴고 일어나, 내 양 손을 느릿하게 잡았다. 춤을 추고 있던 다른 사람들마냥 자세를 취하며. 그때까지 남자가 대체 무슨 행동을 하려는지 감이 오지 않아 그저 얌전히 있을 뿐이었다.
“괜찮아요. 나만 따라와요.”
남자는 그 말을 끝으로 내 손 안으로 깍지를 끼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자를 따라 내 몸도 끌려가 자동적으로 발을 맞췄다. 전혀 예상치 못한 급작스러운 전개에 당황한 내가 놀란 얼굴로 남자를 바라봤지만, 남자는 이런 상황이 꽤나 즐겁다는 듯 나와 발을 맞추며 점차 중앙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춤을 추는 사람들 사이로 얽혀 이내 일부가 되었다. 내가 다급하게 남자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저, 저기, 잠시만.”
“턴.”
남자가 그런 내 팔을 잡은 손을 높이 들고 내 머리 위로 한바퀴 돌렸다. 그의 몸짓에 따라 내 몸이 빙그르르 한바퀴 돌아갔고, 기우뚱 휘어 곧 쓰러지려다 남자가 허리를 받쳐준 덕에 넘어지지는 않았다. 그것마저 춤의 일부인 것 마냥 잘했어요, 하고 내 귀에 속삭이는 남자의 행동에 기겁하며 허리를 폈고 남자는 또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내 허리를 감싸왔다. 우물쭈물 거리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남자의 어깨의 손을 올렸다. 음악에 맞춰 남자의 구두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자의 걸음을 쫓아 한 발, 한 발 움직였다.
“왼쪽.”
템포가 빨라지고, 움직이던 구둣발의 속도도 점차 빨라져갔다. 왼쪽, 오른쪽. 어설픈 내 발짓을 보며 남자가 이따금씩 방향을 알려줄 때 겨우 맞춰 따라가는 정도였는데, 속도가 더 빨라져가자 머리가 어질해져왔다. 한 발을 떼면 몸이 돌아갔고, 다시 또 한 발을 떼면 몸이 돌아갔다. 남자가 웃으며 나를 바라 봤다.
“이렇게 서툰 춤을 추는 사람은 처음 봐.”
“…….”
“당신, 대체 어디서 온 사람이야?”
남자의 물음에도 나는 얌전히 답을 해줄 정신이 없었다. 어떻게 빠르게 춤추는 동시에 말을 건네는 여유까지 보일 수 있는 지, 이런 것쯤은 별 거 아닌 것처럼 움직이는 그의 몸짓은 몹시 현란했다. 남자가 점프, 하고 말하면 남자의 손길에 의해 내 몸이 높이 들여올려졌고, 다시 땅 위로 발을 밟게 되면 음악에 맞춰 함께 원을 그려내었다. 남자가 손, 하면 남자에게 붙잡힌 양 손이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하다 다시 내 허리를 감싸오는 손길에 똑같이 그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어느 정도 반복되는 춤의 패턴이 익을 때 쯤, 음악의 속도가 절정에 다랐을 때.
“턴.”
“…아!”
높은 구두굽이 삐끗해 넘어진 내가 비명을 지르며 그의 손을 잡은 채로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음악이 끝났다. 피날레였다.
“정말 병원에 안가도 괜찮겠어요? 여기 호텔 안에 유능한 의사가 있어요.”
“괜찮아요. 그냥 삐끗한 정도라서, 신발만 바꾸면.”
“호텔 백화점 가서 굽 없는 신으로 하나 사와.”
남자가 내 발을 내려다보며, 옆에 서 있던 비서로 보이는 사람에게 단화를 사오라고 시켰다. 아까 보았던 호텔 내부에 있던 백화점은 명품관밖에 없었다. 신 하나에 족히 몇 백은 넘을 것이 뻔했다. 내가 남자에게 손사래를 치며 아니요, 그 신 말고! 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남자가 큰 눈을 뜨고 나를 보며 뭐, 갖고싶은 신발이라도 있어요? 물었고, 나는 망설이다 입을 떼었다.
“…슬리퍼요.”
남자가 잠시 큰 눈을 깜빡이더니, 헛웃음을 지었다. 호텔 슬리퍼 가져와. 남자의 명령에 따라 비서가 고개를 숙인 후 급히 응접실을 떠났고, 남자는 여전히 내 발목을 손에서 놓치 않은 채 들여다봤다. 그저 맨발을 만지고 있는 것일 뿐인데, 발가벗은 맨 몸으로 앉아있는 기분이었다. 좀 전에 남자의 손을 놓지 못하고 끌어당기다 속수무책으로 남자까지 넘어뜨렸던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그렇게 내 위로 쿵, 떨어졌을 때 우리 중심으로 모든 사람들이 놀라 다가왔고, 파티장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내 위에서 날 바라보던 눈동자, 그리고 단숨에 내 허리와 종아리에 팔을 끼우고 들어올리는 행동에 그의 품에서 얌전히 파티장을 빠져나온 순간까지. 다시금 떠오르는 장면에 금세 얼굴이 홧홧해지는 것 같았다. 남자는 비서가 가져온 슬리퍼를 내 발에 손수 끼워주기까지 했다. 딱봐도 부잣집 도련님 같은데, 이런 행동까지 스스럼없이 하는 행동이 선뜻 이해가 가지않았다. 남자는 아랑곳 않고, 아프죠. 내가 괜히 억지로 춤추자고 해서. 진짜 춤을 잘 못추실 줄은 몰랐어요. 하고 순수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자, 남자는 아, 내 말이 기분나빴나? 하고 미안해요, 라며 다시 정정했다. 그렇지만 솔직하게 내 춤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는 그의 말에 기분이 나쁘다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신기해서. 이런 상황이 조금 신기해서 멍했을 뿐이었다.
“정말 춤 처음 춰봐요?”
“네.”
“그럼, 파티도 처음이겠네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삐끗했던 왼쪽 발을 한바퀴 돌려보았다. 괜찮은가. 형부를 얼른 만나야할텐데. 언뜻 발목 안의 이름모를 부위가 쓰라려 오는 것도 같았다. 그래도 걷는 데엔 크게 지장이 없을 것 같아 일어나 한 발, 한 발 떼는데, 남자가 내 팔을 잡고 뭐하는 거에요. 아직 아플텐데, 하고 눈썹을 찡그러트리며 말했다. 아, 걸을 순 있을 것 같아서 가보려고요. 내 말에 남자가 짐짓 황당하단 얼굴로 날 바라봤다. 가겠다고요? 도리어 내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남자의 얼굴에 그제야 인사를 안드렸다는 것을 깨닫고 얼른 허리를 깊이 숙였다.
“죄송해요. 제가 손을 잡는 바람에 같이 넘어지셔서.”
“…….”
“그리고, 신발도 새로 주시고 너무 감사해요.”
“잠깐, 정말 이렇게 간다고?”
“…왜요? 저때문에 파티도 못즐기고 계시잖아요. 저는 방해라도 될까봐.”
남자가 내 대답에 잠시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찰나의 정적 끝에 남자의 입술이 움직였다.
“알았어요. 그럼 그렇게 해요.”
이내 그렇게 대답을 지은 남자는 나를 바라보다, 누구 만날 사람이라도 있는 거예요? 하고 다시 물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네. 하고 대답했고, 다시 남자친구? 하고 물어오는 말에 이번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런 나를 보며 곤란하면 대답 안해도 되고. 라고 말하는 남자였다. 나는 이제 정말 밖으로 나가야겠다 싶어 고개를 숙였으나, 다시 내 팔을 붙잡아오는 손길에 뒤돌아 보지도 못한 채 남자를 마주봐야만 했다.
“이 파티는 처음이라면서요.”
“네… 그런데요?”
“어디로 가야하는 지는 알아요?”
그제야 내가 이 곳 지리를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가 파티장에 데려갔을 때에도, 나를 안아 들어서 응접실로 데려왔을 때에도, 워낙 정신이 없어서 미처 주변을 둘러볼 틈이 없었다. 화려한 호텔의 풍경에 그저 넋이 나가버렸으니깐. 아. 멍청한 신음을 뱉는 나를 보며 남자가 정말 희한하단 얼굴로 날 바라보다 이내 소매를 걷어 시계를 확인했다. 어차피 곧 시작될 거니깐, 다들 호텔 옥상에 모여있을 거에요. 거기까진 내가 데려다줄게요.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내게 따라오라고 손짓했고, 나는 남자에게 뭐가 시작되는데요? 하고 급박하게 물었다.
“불꽃놀이요.”
“…….”
“파티의 꽃이라고 할 수 있죠.”
남자가 싱긋 웃으며, 이번에는 내 손을 잡아왔다.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깍지를 껴왔다. 춤을 췄을 때처럼, 남자의 발걸음이 향하는 방향을 따라 내 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브금을 중간에 넣었더니 앞 내용이 짤려서 당황 당황;ㅅ;.....
무도회장에 온 에피처럼 꾸며봤는데 신데렐라 느낌이 얼추 났으려나요 ?ㅅ?!!
그럼 하편에서 뵐게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