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후배 3
17 민윤기:
선배 잘 들어가셨어요? (오후 9:12)
17 민윤기:
선배 같이 해장하러 가실래요?
일어나면 답장 주세요 (오전 9:39)
일어나자마자 본 메시지였다. 머리가 깨지는 정도는 아니고 조금 묵직한 걸 보니 엄청난 과음은 아니었나 보다. 시계를 보니 아직 오전이었다. 어제 일찍 마시고 일찍 자서 그런지 일찍 일어나졌다. 그래봤자 10시였지만. 민윤기는 잠도 없는 건지 아니면 나보다 덜 취했어서 그런지, 메시지는 9시에 와 있었다. 나는 대충 답장을 넣고 욕실로 향했다. 양치를 하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더라. 밥 먹고, 술 마시러 가서…… 배틀 떴다. 조별과제 불행 배틀. 캐릭캐릭 체인지 피피티…… 거기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뒤 기억들은 죄 드문드문이었다. 계산은 내가 한 거 맞겠지? 황급히 칫솔을 물고 결제 내역을 확인했다. 어젯밤으로 찍힌 글자들을 보고 한숨 돌렸지만, 내가 마시자고 해놓고 내가 취한 꼴이 웃겨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같이 해장하자는 거 보니 아주 나도 모르게 사고 친 건 없는 것 같았다. ……아니면 얼굴 보고 말 할 만큼 심각했다거나. 그래도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들 사이로 떳떳하지 못 한 것들은 없었기에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아무렇지 않긴 해도 속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었기에.
민윤기 집은 우리 빌라 뒷 건물로, 사이에 골목 하나를 두고 떨어져 있었다. 우리 집은 뒤쪽으로 창이 나 있어서 그 사이의 골목이 보였다. 무심코 본 창밖으로 민윤기가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창문을 열고 아는 체 하려다 말았다. 여태까지 내 친구들은 전부 통학 아니면 기숙사인 탓에 자취하는 사람을 본 게 너무 오랜만이라 혼자 앞서나가는 것 같아서였다. 나는 민윤기가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 옷을 껴입고 집을 나섰다.
“잘 들어 가셨었나 보네요.”
내가 나오자마자 민윤기가 건물 옆에서 나타났다. 나는 느릿하게 웃었다.
“너도.”
“뭐 드실래요?”
“마라탕 잘 먹어?”
민윤기가 고개를 끄덕이고 내가 앞장섰다. 같이 마라탕 먹을 사람이 생겨서 기쁜 나머지 발걸음이 자꾸 빨라졌다. (친구들은 마라탕 안 먹음)
“속 안 쓰려?”
“저는 괜찮은데, 선배는요?”
“조금 쓰린 것 같기도 하고.”
“어제 주량 넘기셨댔는데.”
“내가 그런 말도 했구나.”
나도 모르게 사고 친 건 없어도 나도 모르게 헛소리는 많이 한 것 같은 불안감에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건 그냥 바람이 차서인 거다. 바람이 차서.
가게에 들어가자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었다. 바구니에 이것저것 담고 계산을 끝냈을까 민윤기가 뒤따라 앉으며 말했다.
“선배 어제 일 기억나요?”
“부분 부분. 왜?”
“어제 무슨 말 했는지는요?”
“무슨 말 했을까 내가.”
“별 거 아니에요.”
“별 거 아닌데 왜 물어 봐. 빨리 불어.”
“아, 진짜 별 거 아닌데.”
웃으면서 말하는 게 꼭 별 거 인 것 같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수저를 꺼냈고, 민윤기는 물을 따랐다.
“선배가 저한테 뭐 부탁한 게 있는데, 제가 기억하면 들어준다고 했거든요.”
“내가 부탁할 게 뭐가 있지…….”
“잘 생각해 봐요.”
“없는데…….”
“잘 생각해 본 거 맞아요?”
“……없는데 진짜로.”
민윤기는 소리 내 웃으며 물 잔을 넘겨줬다. 나는 그것을 벌컥벌컥 들이키며 어제 일을 곱씹었다. 조별과제 불행 배틀을 하고…… 술을 더 시키고…… 계산도 하고…… 밖에 나와서…… 담배? 담배도 피웠네. 그러고 집 갔던 것 같은데. 전체적인 흐름만 생각나지 세세한 대화가 기억나는 건 아니라 인상을 찌푸렸다. 이래서야 내가 부탁한 게 뭔지 알 수 없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을까 음식이 나왔다. 민윤기 쪽과 내 쪽, 그리고 가운데에 놓이는 또 하나.
“어, 이거 안 시켰는데.”
“제가 시켰어요. 선배가 어제 술 샀으니까 이건 제가 살게요.”
“아니야 반반 해.”
“이미 계산했고 계좌는 앞으로 안 알려줄 거예요.”
“카톡으로 보내줄게.”
“아, 그러지 마세요.”
웃는 얼굴이었지만 꽤나 완고해 그러라고 했다. 사주겠다는데 굳이 말릴 필요는 없었다. 평소 같으면 건더기부터 건져먹었을 것을 오늘은 해장목적이기 때문에 국물 먼저 떠먹었다. 매콤하고 알싸한 향이 가득 퍼졌다. 어제는 혈관에 알콜을, 오늘은 마라를 채운다는 느낌으로 수저를 놀렸다. 먹는 속도는 어제와 비슷했다. 집도 가까운데 먹는 속도까지 비슷하니 이렇게 밥 친구로 안성맞춤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먹는 동안의 침묵이 어색하지도 않았다. 아닌가. 나만 어제 생각하느라 바빠서 그런가. 그리고 어느덧 국물의 바닥이 보일 때쯤 민윤기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선배, 기억났어요?”
“안 났는데……. 그냥 말해주면 안 될까.”
“안 돼요.”
단호한 말투 사이에 웃음이 서려있었다. 이 정도면 필히 뭔가 있다. 자꾸만 묻는 것도 이상했다. 나 진짜 뭐 실수했나.
“나 뭐 실수했어?”
“그런 건 아니에요.”
그건 또 아니란다.
“음 그럼 부정적인 쪽이야?”
“그것도 아니에요 굳이 따지자면 좋은 쪽.”
“하 더 어렵네.”
“맞혀 봐요. 그럼 부탁 들어 줄게요.”
내가 기억 못하는 부탁을 들어줘야 무슨 소용이 있겠냐만은. 평소 같았으면 대충 넘겼을 것을 그 ‘부탁’이라는 게 뭔지 너무 궁금해 더 꼬치꼬치 캐물었다.
“누구한테 좋은 건데?”
“……글쎄요.”
“좋은 거 맞아?”
“맞을 걸요?”
“지금 나 놀리지.”
“아니에요.”
“맞는 것 같은데.”
“아닐 걸요.”
“이거 봐 맞네.”
내 말에 민윤기는 또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스무고개 하는 것도 아니고. 죄다 아니라 하지도 죄다 맞다고 하지도 않는 게 아예 없는 말을 지어내는 것 같지 않아 또 다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이미 안개 낀 기억에서 더듬어 봤자 나오는 건 한껏 단편적인 것들뿐이었다. 포기 선언을 할까 했으나 그건 또 하기 싫었다. 뭔지 꼭 맞혀서 내 무의식이 했던 부탁을 들어주고 싶은 괜한 오기도 생겼다.
……뭐, 꼭 오늘 맞혀야 하는 건 아니니까. 오늘은 이만 물러나기로 했다.
“학교 나왔네? 며칠 입원한다더니.”
“응. 일찍 퇴원했어. 행사는 잘 끝냈고? 경황이 없어서 연락도 못 했네.”
“대타 덕분에 수월하게 했지 뭐.”
지혜는 내가 병원이름과 호실을 받은 게 무색하게 일찍 퇴원해버렸다. 이제 괜찮냐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정신은 딴 데 가있는 것 같았다. 저렇게 바쁘게 살면 무슨 기분일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딱히 느끼고 싶은 건 아니고, 그냥 궁금만.
“아, 밥은 종강하면 사줄게. 이제 더 바빠질 것 같아서.”
“응? 종강?”
“그래, 곧 있으면 시험이니까.”
“아직 한 달이나 남았는데.”
“한 달 아니고 3주, 여주야. 3주도 안 남았어.”
“……시험 안 치고 그냥 종강만 하면 안 되나?”
“그럼 너는 코스모스 졸업을 하게 되겠지.”
“바로 졸업을 미뤄버리네.”
지혜는 정말……정말 철두철미했다. 말하지 않아도 내게 밥을 사줄 생각이었는지 민윤기와 묶어서 종강 후에 사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시험 얘기를 하는데 잠시 아득해졌다. 조별과제 끝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기말고사가 저쪽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뭘 흔들어 인마. 안 반가워.
지혜와 헤어지고 민윤기와 같이 듣는 현사광 강의실로 왔다. 민윤기는 먼저 앉아 있었다. 항상 같은 자리에.
“제가 뭘 받았게요.”
그리고 아득해졌던 정신을 잡아주는 건 민윤기 손에 들린 ‘그것’이었다.
“족보?”
“방금 수훈 선배가 주고 가셨어요.”
“교수님 바뀌었는데 괜찮을까.”
“밑져야 본전이죠. 어쨌거나 공부는 우리가 하는 거고…….”
맞는 말이었다. 족보든 뭐든 일단 공부는 스스로 하는 거였다. 다들 평소와 다르게 고개를 번쩍 들고 있는 걸 보아하니 시험기간이긴 한가 보다 싶었다. 분명 중간고사를 쳤는데 공부하는 법을 까먹은 사람처럼 수첩만 바라봤다. 학교를 4년이나(초중고 합치면 그 이상) 다녀놓고도 매번 시험 칠 때마다 기억이 리셋 됐다. 기말고사 계획을 어떻게 짜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일단 족보가 있는 과목부터 보는 게 낫겠다 싶어 출석 부르는 틈을 타 물었다.
“너 그거 언제부터 볼 거야?”
민윤기가 교재를 펼치다 말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만 끔뻑이는 게 내가 꼭 대답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말 안 하면 모른다. 같이 눈만 끔뻑였다.
“선배는 언제부터 보실 건데요?”
“나? 그거 정하려고 너한테 물어 본 건데.”
그러자 민윤기가 또 그 은은한 웃음을 짓고는 대답했다.
“그럼 같이 봐요.”
교수님이 내 이름을 부르고 곧바로 민윤기 이름을 불렀다. 우리는 나란히 대답했다. 서로에게 대답하는 것처럼.
“주말에 학교 올 거야?”
“안 가.”
“너무 단호한데.”
“왕복 세 시간인데 왜 가니. 동네 도서관을 가고 말지.”
지혜가 철두철미하다면 희재는 단호했다. 통학의 애달픔을 모르는 건 아니라 굳이 말을 얹진 않았다. 나도 통학시절에는 그랬다. 평일엔 학교 오니까 학교에서 공부하고 주말엔 집이나 집 근처에서 공부하고. 희재도 매번 그랬지만 혹시나 싶어 물어 본 것은 역시나로 돌아왔다.
“끝까지 자취 안 하는 너도 대단하다.”
“집에 금쪽같은 강아지가 기다리고 있는데 어떻게 집을 나가…….”
희재는 가방에 필통을 쑤셔 넣으며 말했다. 기말고사 시즌이 되자 도서관이며 카페며 꽉꽉 들어차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어찌 저찌 카페에 자리 잡고 한참동안 전공을 들여다봤을까 벌써 막차 시간이었다.
“논문 쓰랴 기말 준비하랴 뒤지겠어 아주. 너는 학회에서 쓴 거로 보충한댔나?”
“응, 작년에 쓴 거로.”
“부럽다. 나도 이럴 줄 알았으면 학회나 들걸.”
“대신 넌 동아리 들었었잖아.”
내 말에 희재가 분개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아무래도 전 남자친구들이 생각난 모양이었다. 머릿속을 스치는 오천만 번 들었던 희재의 이야기가 다시금 재생됐다. 같은 이야기를 여러 번 듣는 건 고역이었지만 희재는 같은 이야기도 항상 다르게 말해서 재미는 있었다. 물론 재미는 재미고, 화나는 포인트는 매번 같았다. 언제나 그랬듯 CC는 해선 안 된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동아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우리 과였고 또 공교롭게도 모두 희재를 화나게 하는 사람이었으니 당연한 결론이었다.
“근데 난 항상 미스테리했던 게, 중학교나 고등학교에서는 같은 반에서 사귀지 말라는 말이 잠언처럼 떠돌아다니지는 않았잖아. 그때는 같은 반에서 사귀다 헤어지면 반 전체가 고역이었는데.”
“흠, 그건 그래.”
“왜 유독 대학에서만 그런 걸까?”
희재는 잠깐 생각하는 듯 말이 없었다. 버스 정류장에 다 와서 희재가 탈 버스를 확인하고 있을까 희재는 유레카를 외치듯 말했다.
“사람이 더 많잖아!”
“전교생?”
“고등학교는 많아 봐야 천 명 남짓인데 대학교는 몇 만 명이 다니잖아. 대숲이나 에타 같이 퍼다 나를 소식 창구도 많고.”
“일리 있네.”
희재가 탈 버스는 잠시 후 도착이었다. 멀리서 버스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희재에게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근데 그런 건 갑자기 왜 생각난 거야?”
“뭐가 갑자기야.”
“CC 하려고?”
“무슨. 나?”
“아님 말고.”
흔들던 손이 허공에 어색하게 멈췄다. 황당하다는 내 표정을 뒤로 한 채 희재는 버스에 올랐다. 멀어져가는 버스를 하염없이 보다 뒤 돌았다. 이야기가 어떻게 그 쪽으로 튀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주말의 묘미는 알람 없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 잘 수 있다는 것인데, 묘미를 깨뜨린 나는 9시에 기상했다. 혹시 몰라 10분 간격으로 맞춰둔 다섯 개의 알람을 모조리 끄고 침대를 벗어났다. 마지막 시험인 만큼 긴장을 놓치지 않으려는 나름대로의 발악이기도 했다.
대충 아무렇게나 입고 가방을 멨다. 도서관 자리를 잡으려면 일찍 나가야 했다. 오늘따라 학교로 향하는 걸음이 무거웠다. 발악은 발악이고, 하기 싫은 건 하기 싫은 거다. 잠이나 깨자 싶어 모자를 벗었다가 도로 썼다. 이제 정말 겨울인지 바람이 셌다. 머리카락을 머금은 채로 도서관에 도착하고 싶지 않았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자리는 꽤나 널널했다. 학생증을 찍고 열람실에 들어갔다. 따뜻한 히터바람에 벌써부터 노곤해졌다. 자리를 잡고 수업시간에 쓴 계획(계획은 원래 수업시간에 짜는 거다)을 펼쳐봤다. 오전에는 교양을 보다가 오후부터는 전공을 공략하기로 했다. 그나마 막 학기라 공부할 과목은 적었다. 물론 그러기까지 많은 시간표들이 희생당했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 할 때가 아니었다. 베개 같은 전공책을 꺼내 폈다. 나름대로 열심히 들은 것인지 표시된 것 대부분이 기억났다. 하지만 중요한 건 페이지가 넘어갈 때마다 졸음이 몰려왔다. 적당히 히터바람 없는 곳에 앉았다 싶었는데, 어젯밤 논문을 수정하느라 늦게 잤더니 따뜻한 공기의 데미지가 컸다. 종이에 글자를 쓸 때마다 머릿속에 들어가기라도 하는 듯 꾹 꾹 눌러 써서 중지에 벌건 자국이 생겼다. 아, 세 페이지만 더 보면 한 챕터 다 보는 건데. 잠시 눈이라도 쉬자 싶어 주위를 둘러보자 어느새 사람들이 꽤 차 있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12시였다. 한 건 없는데 시간만 간 기분이었다. 거뭇해진 종이는 자기만족용일 뿐인 느낌. 머릿속에 제대로 입력됐는지 불안했다. 시험기간만 되면 도지는 몹쓸 병이었다.
꾸역꾸역 한 쳅터를 다 본 나는 짐을 쌌다. 짐은 두고 밥만 먹고 오면 됐지만 오후에는 카페에서 공부하기로 했기 때문에.
“선배.”
얘랑.
“어, 왜 여기서 나와?”
“저도 여기서 공부하고 있었어요.”
“언제부터?”
“10시쯤?”
“나랑 비슷하게 왔네. 왜 못 봤지?”
“제가 더 늦게 왔어요. 선배 봤는데 방해될까 봐.”
한 번 고개 들고 인사하는 건 딱히 방해되는 게 아니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란히 도서관에서 나온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같은 방향이라 또 나란히 걸었지만. 집에서 밥 먹고, 카페 가서 커피 마시면 딱이겠다. 내 말에 민윤기가 공부는요? 하고 반문했다. 나는 모자를 벗었다. 바람이 아까보다 잠잠해지기도 했고, 패딩모자는 부스럭거려서 말소리가 잘 안 들렸다.
“공부는…… 선택사항이야.”
내 말에 민윤기가 웃었다. 표정변화가 없는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웃는 모습을 자주 보니 그것도 아니었나. 초반에는 낯을 가린 건가 싶을 정도였다. 지난번에 웃는 걸로 무슨 얘기 했을 때는 그런 말 처음 듣는다고 했었는데. 그럼 잘 웃고 다니는 건 아닌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까 빌라 앞에 도착했다. 민윤기가 나중에 보자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마주 흔들어주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사람이 웃으면 웃는 거지 뭘 그렇게까지 신경을 써. 공부나 하자.
눈으로 무언가를 마실 수 있다면 지금 나는 커피보다 족보를 더 많이 마셨다고 할 수 있겠다. 족보는 이미 여러 번 거쳐 온 것인지 손 떼가 꼬질꼬질했지만 내 손 떼를 덧칠해야만 했다. 전공책과 족보를 번갈아 보려니 목이 뻐근했다. 너무 오랫동안 붙잡고 있나 싶어 보고 있는 페이지까지 보고 민윤기에게 넘겨줬다.
“벌써 다 봤어요?”
“아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보려고. 아, 나머지는 내가 찍어갈게.”
내 말에 민윤기는 잠시 말이 없더니 족보를 내게 넘겨줬다.
“선배 다 보고 주세요.”
“응? 너는 어쩌게?”
“저는 대충 다 봤어요.”
같이 보려고 만난 건데 그러면 의미 없지 않나. 마지막 말을 마치고 제 책으로 시선을 내리기에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곧바로 샤프를 움직이는 손이 꽤나 분주해보여 입을 열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다시 족보를 펼쳐들어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내 집중력이 바닥이 났음을 알 수 있었다. 같은 문장을 다섯 번째 읽고서야 고개를 들었다. 민윤기는 여전히 샤프를 움직이고 있었다.
“잠시 쉬고 싶지 않아?”
내 말에 민윤기가 고개를 들었다.
“쉴까요?”
“아니……그냥 해 본 소리야. 너무 열심히 하는 것 같아서 좀 쉬라고.”
나는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커피 잔에 송글송글 맺힌 물이 종이에 스밀 것 같았다. 아슬아슬하게 거리를 벌렸다. 분명 재즈 음악이 나오고 있었는데 알바생이 바뀐 건지 활기찬 댄스곡 이 나오고 있었다. 같은 문장을 다섯 번 읽은 이유가 있었다.
“그럼 가실래요?”
민윤기가 눈짓으로 뒤를 가리켰다. 흡연실이었다. 어쩐지 얘랑 있을 때는 술, 담배, 마라탕, 커피…… 하나같이 자극적인 것만 같이 하는 것 같았다. 정작 대화의 흐름은 삼삼한데. 하지만 시험기간의 대학생을 막을 수 있는 건 없었다. 있어도 없었다. 우리는 누가 물으면 대답하지 않아도 주섬주섬 챙기게 됐다.
시간은 가차없이 흘렀다. 벌써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평일에는 희재와, 주말에는 민윤기와 공부했다. 중간 중간 논문 컨펌 받으러 다니느라 피곤해 죽을 것 같았다. 그때마다 담배와 커피를 수혈하듯 했다. 물론 그 옆에는 항상 민윤기가 있었다. 비흡연자에다 마라싫어인간인 희재와 할 수 없는 것들을 민윤기와 함께 하기 시작했다. 공강일도 겹쳐 우리는 더 자주 만났다. 족보를 돌려 보고, 모르는 게 있으면 서로 알려줬다.
민윤기는 그냥 말을 잘하는 것 같았다. 회의 때도, 발표 때도 그러더니 설명할 때도 그랬다. 조곤조곤하게 핵심 먼저 머릿속에 넣어주고 부가설명을 해 이해가 쉬웠다. 다만 그 가르침을 받는 게 4학년인 나라는 게 아쉬웠다. 입장이 바뀌어도 한참 바뀐 듯했다. 어쨌거나 나는 누군가를 가르치는 데 소질이 없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인 점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다행이지 않은 점은 집 근처 카페의 흡연실은 항상 우리차지라는 것이었다. 갈 때마다 재떨이에는 조금 전 우리의 흔적밖에 없었다. 바로 내일이 전공 시험이라 그런지(상관없음) 우리는 더 뺀질나게 들락거렸다. 추우면 빨리 피우고 들어가기라도 할 텐데 흡연실에도 히터가 되는 건지 따뜻한 공기가 그럴 수 없게 만들었다. 세 번째 자리에 돌아왔을 때 나는 수북한 재떨이를 떠올리며 잠깐 생각의 시간을 가졌다.
“우리 너무 자주 자리 비우는 것 같아.”
“가끔은 이렇게 머리를 쉬어줘야죠.”
“너 설득의 왕이다.”
둘 다 웃었지만 그게 가끔이 아닌 건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우리, 목표를 정하자.”
“목표요?”
“난 이 챕터 다 보고 담타 간다. 너는?”
“음 저도요.”
“그래.”
담배도 한 번씩 생각 날 때마다 피웠지 이렇게 자주 피우지는 않았다. 졸업논문 때문인지 멘탈에 타격이 큰 모양이었다. 문득 희재가 안타까워졌다. 나보다 더 스트레스 받고 있을 텐데 어떻게 풀고 있으려나. 잡생각을 하는 동안 카페에 울리는 음악 장르가 바뀌었다. 발을 까딱이기를 몇 번, 어제 본 부분을 복습이라고 또 보고 있자니 온 신경이 발에만 쏟아지는 게 느껴졌다.
바깥에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점점 짧아지는 해가 시간을 단축시키는 것만 같았다. 맞는 말이긴 했다. 날이 갈수록 해는 짧아지고 한 해가 지나고 있었으니. 반 챕터를 겨우 훑은 나는 테이블 위에 쓰러지듯 엎어졌다.
“난 이 챕터가 이렇게 긴 줄 몰랐지.”
“힘들어요?”
“응.”
“그럼 갈래요?”
“어디? 집?”
“아뇨.”
민윤기는 흡연실을 가리켰다. 나는 순간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가늠하려 허공을 훑었다.
“안 돼. 우리 목표 정했잖아.”
“목표는 목표고…… 담배는 담배고…….”
답지 않게 웅얼거리는 목소리였다. 답지 않다고는 했지만 꽤나 잘 어울렸다(?). 그리고 나는 역시 또 그 목소리에 홀려 일어났다. 우리는 그렇게 주말과 공강을 폐에 연료를 쏟아 붓듯이 했다. 다음 날부터는 몰아치는 시험에 그럴 수도 없었다. 다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여전했다. 민윤기는 어떻게 안 건지 그럴 때마다 열심히 했으니 괜찮을 거라고 했다. 전처럼 표정변화 없이 말했다면 뭐 이런 서투른 위로가 있나 싶었을 텐데 지금 민윤기의 표정과 그 말이 어우러지니 기분이 묘했다. 마치 주문처럼, 정말로 괜찮을 것 같아서. 만약 결과가 안 좋게 나오더라도 열심히 한 것에 의미를 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그렇게 말하는 민윤기를 천천히 뜯어보았지만 무엇이 원인인지 알 수 없었다. 표정이 뭔가 다르긴 한데 설명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멀뚱히 사람 얼굴만 쳐다보고 있을 수가 없어 시선을 거두길 몇 번. 시험 직전에는 정말로 가라앉은 불안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옆에서 괜찮을 거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런 걸까. 익숙한 목소리가 맴도는 듯했다.
듣는 과목이 몇 개 없어 시험은 며칠 만에 금방 끝났다. 시간이 정말 속사포로 지나가 허무할 지경이었다. 자가진단을 해 봤을 때 결과도 나쁘지 않을 듯싶었다. 어쨌거나 백지로 낸 문제는 없었다. 대부분 시험이 끝나는 금요일에는 졸업논문을 최종 컨펌 받기까지 해 홀가분해졌다. 최종_찐최종_진짜진짜최종_찐찐찐찐최종 파일이 넘어갔으니, 이 역사적인 순간에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유죄다. 곧바로 휴대폰을 들어 희재에게 연락했지만 희재의 종강은 다음 주 월요일이었다. 졸업논문도 방학 내내 쓰게 될 것 같다는 말에 유감을 표하고 자연스럽게 민윤기에게 연락했다.
“선배 오늘은 주량대로 마셔야 돼요.”
역시나 집 근처였지만 지난번과는 다른 술집이었다. 종강한 사람들의 축제 같은 분위기가 대학로 전체를 울리는 듯했지만 민윤기는 저렇게 말했다.
“나 원래 주량만큼도 안 마시는 사람이야.”
“못 믿겠는데…….”
“거짓말을 잘 가려내네.”
민윤기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웃음소리가 소음을 뚫고 전달됐다.
“너는 이번 방학 때 본가 내려가?”
“아니요. 근처에 형 가게가 있어서 일해주기로 했어요.”
“오, 무슨 가게?”
“양식 레스토랑이요.”
“와, 멋지다. 요리도 해?”
“가끔 일손 부족할 때만. 주로 서빙 해요.”
“그래도 멋지다.”
“선배는 본가 가요?”
“나 본가 가까워서. 딱히 간다는 개념이 없어. 버스 타고 1시간 반?”
“딱히 가깝진 않네요.”
초저녁에 마시는 술보다 완전히 어두워졌을 때 마시는 술은 더 잘 넘어갔다. 더군다나 이런 분위기에 이런 상황이라면 잘 안 넘어갈 리가 없었다. 주량을 넘기지 말라는 민윤기의 말은 먼 과거의 일이란 듯 잔을 채웠다. 저번엔 의도치 않게 취했지만 이번이야 말로 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밤이었다. 그동안 고생했다는 말과 함께 잔을 부딪쳤다. 같이 공부했던 전공은 둘 다 만족스럽게 친 듯했다. 민윤기가 받아준 족보는 꽤나 쓸모가 있었으니까.
내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뜰 때쯤 대화 주제는 자취로 넘어가 있었다. 조별과제 불행 배틀에 이어 자취 불행 배틀이 시작됐다. 보증금을 안 돌려주는 집주인과…… 자취방을 노래방으로 쓰던 이웃…… 바퀴벌레 퇴치를 위해 했던 수만 가지 행동들과…… 집주인 없는 집에서 파티하고 간 선배동기후배들……. 승자는 없고 패자만 있는 기분이었다. n년간의 자취경험을 털고 잠깐의 정적이 찾아왔을 때, 나는 마지막 술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윤기야.”
“네.”
“너 은은하게 웃는 거 알아?”
“알아요.”
“어떻게 알아?”
“선배가 말해줬잖아요.”
“맞다 그랬지.”
“선배 취했죠.”
“응…….”
“이제 그만 일어나요.”
취하려고 취한 거라 부정하지는 않았다. 내 말에 민윤기가 또 웃으며 휴지를 건네줬다. 언제 묻은 건지 손에 묻은 술이 끈적해질 때쯤이었다. 나는 그런 민윤기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휴지를 받았다. 일어나는데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는 걸 보니 확실히 취한 게 맞았다. 그래도 휘청이지 않는 것에 감사하며 가방을 챙겼다.
“윤기야.”
“네.”
“너 웃는 거 되게 예뻐.”
“…….”
“전에 학과설명회 때 느꼈어. 몰랐는데 은은하게 말고도 잘 웃더라.”
“…….”
“강요는 아니고…… 그냥 웃는 거 예쁘니까 자주 웃었으면 좋겠다고.”
밤바람이 차서 술이 깨는 듯했다. 물론 희망사항이었는지 입은 마음대로 나불대고 있었다. 이미 자주 웃고 있는 애한테 할 말은 아니었다.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몰랐으나 민윤기는 꽤나 진지하게 받아줬다.
“그것도 부탁이에요?”
“강요 아니니까…… 부탁이겠지?”
“나 들어줄 부탁 두 개나 생겼네.”
“그 하나가 뭔데 그래서?”
“기억하면 말해 줄게요.”
“그래? 그럼 우리 저기서 담배 딱 하나만 피우고 갈까?”
내 말에 민윤기가 뭐라고 했지만 주위가 시끄러워 들리지 않았다. 다만 골목으로 향하는 걸음에서 부정이 아니라는 것만 유추할 수 있었다. 번쩍거리는 간판들과 사이사이 서 있는 사람들, 판촉 알바와 반갑게 인사하는 소리들로 텅 비었던 거리가 북적였다. 골목으로 들어가자 그 소리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라이터를 찾고 있을까 민윤기가 가만히 쭈그려 앉았다. 나는 담배를 입에 물다 말고 물었다.
“넌 왜 안 피워.”
“아, 저번에 다 피우고 아직 안 샀어요.”
“내꺼 줄까?”
“괜찮아요.”
“그래.”
심심한 대화가 끝나고 불을 붙였다. 아득해진 소리만큼이나 연기가 아득하게 퍼져나갔다. 입김인지 연기인지 모를 것들이 한데 뭉쳤다. 문득 쳐다본 민윤기는 내내 나를 보고 있었던 건지 눈이 마주쳤다. 평소 같았으면 왜, 하고 묻거나 우연히 마주쳤겠거니 눈을 피했을 테지만 술기운인지 담배기운인지 끝까지 시선을 마주했다. 처음 민윤기를 봤을 때와 비슷한 표정이었으나 미묘하게 달랐다. 나는 자꾸 그 미묘함이 어디서 나타나는 건지 파악하려 애썼지만 이 또한 아득해졌다.
“누나.”
“응.”
“나 말 편하게 했으면 좋겠어요?”
“응.”
“누나 지금 이것도 기억 못할 거죠.”
“응 아마?”
“아 뭐야, 진짜예요? 나 지금 헷갈려.”
미묘함이 뭔지 파악하기도 전에 민윤기는 웃으며 대답했다. 대범해진 웃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머리를 굴려 봐도 딱히 나오는 게 없었다. 그러니까, 처음에 낯 가렸구나 하고 넘어가면 될 것을 왜 자꾸 곱씹고 있느냔 말이다.
“뭐가?”
“장난인지 아닌지 헷갈린다고요.”
“무슨 소리야, 너 웃는 거 예뻐.”
저 웃는 얼굴을 왜 자꾸 분석하냐고. 의문이 떠오르면 흐려지고 떠오르면 흐려지고를 반복했다. 꽁초를 밟으면서도 이를 놓지 못해 작게 인상을 썼다. 내가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리고 나는 얼렁뚱땅 결론을 내렸다. 내가 느끼는 미묘한 차이는 민윤기가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미치겠네.”
내가 그를 알아채기 시작한 것이라고.
Q. 분량 왜 이런가요?
A.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너무 편하게 써서 그런가 봐요 막 쓰는 느낌.. 그래도.. 재밌게 읽어주세요 이건 부탁 아니고 강제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