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후드
02
가방을 정리하고 비어있는 자리에 얹으며 시선이 마주쳤다. 누구랑? 그 편의점 후드랑
“알바야. 너도 이 수업 들어?”
기억할 리가 있구나···.
찌푸려진 미간에도 빤히 저의 얼굴을 보고 있는 그였다. 결국, 여주는 표정을 조금 푼 채 인사를 건넸다. 여주의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그의 얼굴은 웃음으로 가득 채워졌다. 쓸데없이 웃는 건 예쁘네. 머릿속을 스치듯 떠오른 문장에 다시금 표정을 굳혔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어설픈 미소와 함께 시선을 돌린 여주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뒤이어 교수의 목소리가 사이를 헤집었다. 전정국. 이어진 목소리는 당연하게도 옆테이블에 자리한 그 사람이었다. 편의점 후드.
“뭐야, 너 저 선배 알아?”
여주만 빤히 보던 정국과 눈이 마주치자 태형은 어색하게 씩 웃었다. 둥근 눈매를 살풋 접어가며 웃는 정국의 짧은 목례에 따라 고개를 꾸벅이던 태형이 속삭였다. 어쩌다 보니. 작은 눈짓에도 아아- 감탄사를 뱉어낸 태형은 소리 죽여 웃었다. 안 봐도 뻔했다. 얼굴에 대문짝만하게 그래서 뭔데? 무슨 사인데? 따위의 물음이 드러나는 표정.
길었던 강의는 교수의 인사로 끝이 났다. 약속이 있다며 순식간에 강의실을 빠져나간 김태형을 뒤로한 채 느긋하게 가방을 챙기던 여주를 막아선 건 다름 아닌 정국이었다. 가만히 서서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채로, 미간을 좁히던 여주는 짧게 꾸벅 인사 아닌 인사를 건네곤 정국을 휙, 지나쳤다. 그럼에도 정국은 당연스레 여주의 뒤를 따랐다.
한 뼘 떨어져서, 졸졸.
하아, 저 선배는 대체 뭐하는 사람일까.
“알바야, 너 우리 과였어?”
“아뇨.”
아, 구래? 근데 이 수업 들어? 청강했어요. 아, 그래에? 단호한 여주의 대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말을 하는 정국 덕에 조용할 틈이 없었다. 시끄러운데 시끄럽다고 말할 수도 없고, 내가 무슨 홍길동도 아니고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급격히 몰려오는 피로감에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아, 꿈이었으면 좋겠다. 이곳저곳 옮겨 다니는 저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정국에 결국 한숨을 뱉어낸 여주였다. 뭔데요, 대체. 어엉? 아니 그냥.. 대답을 어영부영 흐릿하게 끝맺는 정국에 다시금 되물을 용기도 없었다. 그냥 가는 방향이 같을 뿐일 거라고, 좋게 생각하기로 결정했다. 강의와 강의 사이, 그러니까 시간표의 좁은 공간에 속하는 짧은 시간에 향하는 곳은 당연하게도 편의점이었다.
“저기 알바야.”
“저 알바 아니에요.”
“엉?”
“알바, 아니라고요.”
아, 먄.. 그러곤 또 웃는다. 여주는 잔뜩 굳은 얼굴에 힘을 풀었다. 괜히 머쓱해졌다. 뭘 또 그걸 미안하대. 학관 내에 위치한 편의점에 들어서자 뒤따라 들어서는 정국에 흘긋 쳐다보곤 익숙하게 음료가 가지런히 정리된 공간으로 향했다.
음료 냉장고에서 이온음료를 꺼내어 드는 여주의 움직임에 쪼르르 같은 방향으로 오던 정국이 휙 사라졌다. 그러더니 양손 가득히 캔커피와 삼각김밥을 든 채로 나타난 정국이었다. 계산대 위로 높여진 이온음료 옆으로 후두둑 쏟아내더니 시선을 맞추고는 또 씨익 웃는다.
“이거 다 같이 계산해주세요.”
“네? 아, 아니”
21700원입니다. 순식간에 바코드를 잃히는 알바생에 헛웃음이 흘렀다. 계산을 끝낸 이온음료를 손에 쥐여 주는 정국에 멈칫한 여주였다. 이거 고맙다고 인사하기도 애매한 상황인데. 여주는 고개를 꾸벅였다. 감사합니다.
해맑게 웃던 정국이 여주의 양손 위로 삼각김밥을 올려 놓았다. 이것도 같이 먹어. 그러곤 또 웃는다. 어떨떨한 표정으로 또 한 번 인사를 건넸다.
“또 보자!”
해사하게 웃으며 특유의 목소리로 하는 말이 또 보잔다. 동글한 뒤통수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여주는 바람 빠지듯 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참, 독특한 선배다 싶었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선선하던 날씨에는 점차 쌀쌀한 바람이 맴돌았다. 하나둘 긴 팔을 꺼내 입고 얇은 겉옷을 챙겨 다녔다. 낮과 밤의 온도가 하늘과 땅의 차이였다. 유독 더위에 약한 여주는 서늘해진 바람이 괜스레 반가웠다.
예상과는 달리 넓디넓은 캠퍼스에서 정국을 마주치기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어떤 날은 학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또 다른 날은 중앙 도서관 입구에서. 게다가 정국은 어딜 가나 꽤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 동그랗게 생긴 외모처럼 호탕한 웃음소리 하며, 한시도 가만히 쉬질 않는 도톰한 입술. 조용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알고 보니 태형과 겹치는 전공 강의만 두 개라더라. 그 선배, 원래 좀 그래. 여주의 짜증 섞인 이야기 끝에 픽 웃으며 건넨 태형이 말했다.
알바생이 아니라고 말한 그 날 이후, 마주칠 때마다 다시금 얘기를 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마주칠 때 마다 꼭 한번은 ‘알바야’하고 부르는 정국이었다. 아니, 나 알바 아니라니까. 수 없이 고쳐주었음에도 정국은 딱히 고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듯하다. 결국 승자는 정국이었다.
신기하게도 여태 정국과 마주한 곳이 열에 반은 대부분 학관 근처였다. 같은 건물을 사용하는가 싶을 정도로, 어느 날은 학관 앞 분수대를 지나면서, 또 어느 날은 학관 로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또 다른 날은 지금처럼 학관 내의 그 편의점에서.
“알바야, 집에 가는 거야?”
“아뇨.”
아하. 간결하고도 짧은 대답에도 되돌아오는 반응이 남달랐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모습이 꼭 애완견을 연상케 했다. 꾸벅이고 뒤돌아선 여주를 당연하다는 듯 뒤따르는 것 역시.
“알바야”
얇은 카디건이 팔락였다. 휙 돌아선 여주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수없이 얘길 해도 변함이 없다.
" 아, 맞다. 여주야."
두 눈을 마주한 후에야 정국은 새삼스럽게 놀라는 시늉을 했다. 그러고는 또 세상 해맑게 웃는다. 진짜 특이한 사람이다.
나란히 걸으면서 시답잖은 이야기만 오갔다. 정국이 말하면 여주가 대답하는 그런 일방적인 대화. 결국엔 자취방 건물 입구에 도착했다. 안 데려다 줘도 된다는 여주였지만, 데려다 준다며 웃는 정국에게 정색하며 안 된다고 할 사람이 되지는 못했다.
“여주야, 나 네 번호 알려주면 안돼?”
한참을 꼼지락 거리더니 한다는 말이 여주에게 핸드폰을 주며 번호를 달라는 것이었다. 그에 여주가 대충 번호를 찍어주니 그에 정국은 다시금 해맑게 웃으며 고맙다고 했다.
자취방 안으로 들어온 여주는 생각해 보니 어이가 없었다. 내가 왜 그랬지? 거기서 왜 단칼에 거절하지 못했는지, 왜 정국이 번호를 달라했을 때 바로 제 번호를 찍어준 것인지. 적절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여주는 머리를 헤집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반짝이는 액정에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액정 위로 떠오른 것은 저장 되지 않은 번호였다. 하지만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 편의점 후드. 전정국.
프로필 사진도 꼭 자기 같은 걸로 해뒀다. 양 볼에 음식을 잔뜩 넣은 채 미소 짓고 있는 사진. 저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졌다. 어? 웃었다고? 내가 왜? 순식간에 표정을 굳힌 여주가 휴대폰을 저 멀리로 내던졌다.
- 나 이제 집 도착했다!
- 또 보장~
정국이 보내온 메시지의 마지막에 띄워진 큼지막한 토끼 이모티콘이 정국과 똑 닮았다고 생각했다. 죽을 때가 되어가나, 왜 그 선배가 귀여워 보이지. 휴대폰을 다시 쥔 여주가 짧은 답장을 전송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울리는 휴대폰 알림에 여주의 표정이 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