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열아.”
어김없이 늦은 날이었다. 새벽 세시가 넘도록. 동거 초반에는 그럴 때마다 꼬치꼬치 캐묻고 왜 늦었냐, 다음에 또 그럴거냐, 잔소리를 쏟아내던 백현은 그런 패턴이 지속되다보니 어느 샌가 화내는 법을 잊은 듯 했다. 그런 걸 보면 그만해야지, 그만해야지, 생각하지만 무슨 살이라도 낀 건지 고쳐지지 않았다. 당장에 문제가 드러나지 않는 것도 요 몹쓸 버릇을 못 고치는 데 한몫했다.
요샌 새벽 늦은 시간 집에 들어오면 늘 침대 한 쪽 구석에서 둥글게 몸을 말고 잠들어있는 백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침에 뭐라고 얘길 할까 머리통을 굴리고 있으면, 어젠 언제 들어왔어? 일찍 잤는데. 하고 먼저 이야길 해주는 통에 어, 어제 일찍 들어왔어, 하고 거짓말을 둘러대곤 했고. 딱히 밖에서 누가 좋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집에 들어가기가 싫나. 백현이가 싫은 것도 아니고, 여전히 좋은데. 찬열은 스스로도 이런 제 자신이 이해가 잘 안됐다.
오늘도 잠들어 있겠거니, 하고 조용히 도어락을 열고 거실에 들어섰는데 찬열아, 하고 부르는 백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뜻 시계를 확인하니 세시 반, 찬열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어, 백현아.
“열아, 늦었네.”
“어? 어...”
“화내려는 거 아니야. 피곤하지? 그래도 잠시만 여기 앉아봐. 금방 끝낼게.”
기운 없어 보이는 목소리가 맘에 걸렸다. 그래도 희미하게 웃어 보이는 얼굴에 저도 슬쩍 따라 웃으며 백현이 통통 두드린 자리에 앉았다. 에이, 편하게 앉지. 쇼파 끝에 살짝 걸쳐 앉은 저를 보고 건네는 백현의 다정한 말에 조금 더 마음이 편해졌다. 자연스레 조금 굳어있던 몸을 편하게 쇼파에 기댔다. 근데 무슨 이야기? 찬열이 물었다.
“찬열아. 너 나 사랑하지.”
“어?”
“나, 사랑해?”
뜬금없는 질문에 찬열이 당황했다. 오늘 늦은 거나 내일 늦을 거, 에 대해서 물어보겠거니 했는데. 아이, 당연히 사랑하지. 조금 늦었지만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 내가 너 안 사랑하면 누구 사랑하겠냐, 하면서 농담까지 얹었다. 백현이 빙그시 웃었다. 어, 약간 불안한데? 찬열이 생각했다.
“그럼 내 부탁 들어줄 수 있어?”
무슨 부탁? 뭐 갖고 싶은 거 있어? 안 그래도 나 이번 달 월급 나온 지 얼마 안됐다? 하나도 안 건드렸어! 백현아 너 사고 싶은 거 있음 다 사! 그 불안감 때문일 거다. 이렇게 속사포처럼 막 이야기가 입에서 튀어나오는 건. 무슨 생각을 하고 이야기하는 건 진 저도 잘 모르겠으나 뭐든 이야기해야 할 것만 같아서, 그래서 찬열은 계속 입을 놀렸다. 그것도 잠시. 백현이 찬열아, 하고 다시 한 번 제 이름을 불렀을 때 찬열은 입을 가만 다물었다.
“열아,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에 무조건 응, 이라고 대답해줘야 해.”
“어?”
“응, 이라고. 응?”
“응...”
왠지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내키진 않았지만 가만 대답했다.
“열아.”
“응.”
“우리 아파트 앞 상가에, 반찬 가게가 하나 있어. 일주일 치 반찬 매주 일요일 오전에 배달부탁 드린다고 했으니까 해 주실 거야. 늦잠 잔다고 까먹지 말고 꼭꼭 받아. 그리고 상하지 않게 바로 냉장고에 집어넣고.”
“응.”
찬열의 눈은 마주치지 않은 채, 백현이 줄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입은 셔츠랑 옷들, 금요일에 저 커다란 부직포 가방에 넣어서 요 앞 세탁소에 맡기면 토요일 저녁까진 세탁해서 주실 거야. 자잘한 속옷이나 양말 같은 건 세탁기 돌릴 줄 알지? 그렇게 하고. 사람들 많이 만나는 직업인데 깔끔해야지, 꼭꼭 챙기고.”
“응..”
“도우미 아주머니가 평일에 두 번 왔다 가실 거야. 믿음직스러운 분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밥 먹은 설거지 정도만 네가 정리하면 다른 건 아주머니가 도와주실 거야.”
“응...”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아, 여름엔 음식물 쓰레기 같은 거 바로바로 버려야하는 거 알지? 귀찮아도 아침에 출근할 때 가지고 나가서 처리 해. 안 그러면 벌레 꼬인다? 알았지? 도대체 백현이 왜 이런 이야기를 저에게 늘어놓는 걸까. 찬열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백현을 바라봤다. 그리고 물었다.
“백현아 너 어디 가?”
여행 가니? 어디? 혼자? 그래, 너도 혼자만의 시간이 좀 필요할거야. 얼마 정도 다녀오는데?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 보니까 며칠 다녀오는 건 아니구나. 한 한달 쯤 다녀오니? 닫혀있는 백현의 입이 열리면 어떤 이야기를 뱉을 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듣고 싶지 않아 백현이 입을 열 타이밍을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가만히 제 손을 잡아오는 백현을 보니 자연스레 말문이 막혔다. 백현아... 찬열이 백현의 손을 꾹 잡았다.
“찬열아. 아까 약속 했잖아, 뭐든지 응, 하고 대답해주기로.”
“백현아, 그거 취소하면 안 될까? 미안, 이거 못 들어주겠다.”
이번엔 백현이 찬열의 손을 꾹 잡아왔다.
“찬열아. 약속, 지켜줘야지.”
가만히 눈을 마주쳐오는데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백현이 눈이 이렇게, 이렇게 슬펐나. 그 슬픔이 한 번에 제게로 몰려오는 것 같아 괜히 가슴 언저리가 아팠다. 그리곤 제가 먼저 눈을 피했다. 집요하게 눈을 마주쳐 오는 백현을 이기지 못해 결국 응, 하고 대답을 해버렸다.
“열아.”
“응.”
“나랑 헤어져주라.”
“...뭐?”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생각한 것과 귀에 들리는 것은 그 충격의 깊이가 달랐다. 더 묵직하게 눌러오는 기분에 술기운도 완전히 달아난 것 같았다. 잡아야 하는데, 안된다고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서든 잡아야하는데.
“찬열아?”
촉촉하게 젖은, 살짝 쳐진 그 순한 눈망울이 너무 슬퍼서 저도 모르게 대답했던 것 같다.
“응.”
그렇게 백현이 제 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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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도 솔론데 둘이 붙어먹는거 시렁..^^
존나 아련하게 쓸라켔는데 망했어 망함
나 신분세탁했어 아무도 모르겠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