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현아," "응?" "나 오늘..서준이랑," "뭐?" "저녁, 같이 먹어도 돼?" 내가 온갖 눈치를 보면서 손가락을 꼼지락댔어. 백현이가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고 짐짓 고심에 빠진 표정을 지어. 저래놓고 보내줄거면서. "오늘, 너 당직서면..나 혼자 밥 먹어야 하는데." 내 말에 백현이가 침을 꼴깍 삼켜. 혼자 밥먹는 걸 내가 유독 싫어해서 툭하면 밥 거르곤 했거든. "집에 반찬도 없고, 나 혼자 먹으려고 반찬 하기도 좀 귀찮고.." 결국 백현이가 졌어. "저녁만 먹고 들어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내가 바로 몸을 훽 돌려서 차트를 챙겨 스테이션을 빠져나갔어. 뒤에서 백현이가 용건 끝나자마자 간다며 서운한 소리를 했지만 애써 못들은 척 발걸음을 뗐지. 이따 저녁시간을 맞춰 퇴근하려면 할 일이 산더미였기 때문이야. ㅡ "쌔애앰!!!!" "아이고, 찬열아! 병원에서 소리지르는 거 아니라고 말 했, 어? 퇴원해?" 등 뒤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반가움 섞인 목소리로 잔소리를 하며 뒤를 돌아봤는데 찬열이가 환자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서있었어. 항상 환자들을 퇴원시킬 때 마다 느끼는 거지만 환자복을 입은 모습으로 첫인상을 심어서 그런지 이렇게 사복을 입은 모습을 보면 뭔가 어색하고 그래. "뭐야아, 누나 완전 나한테 관심 없네요." 찬열이가 입을 삐죽이며 섭섭한 티를 냈어. 그 때 찬열이 뒤에서 백현이가 쏘옥 나타났어. "너, 누나가 뭐야. 이게 어디서." "어, 쌤도 보러 가려고 했는데!" "너 내가 일순위가 아니었다 이거지?" "아니이, 쌤이 일순위죠. 쌤이 내 뱃속을 몇 번이나 봤는데." 백현이가 찬열이 등을 톡톡 두드렸더니 찬열이가 제 팔을 쫙 벌리고 백현이에게 달려들었어. 백현이는 징그럽게 왜이러냐면서도 찬열이를 꼭 안아주었지만, 그 다음 찬열이가 향한 곳은 내 쪽이었지. "누나도!" "안돼." 백현이가 단칼에 거절하며 찬열이의 뒷목을 잡아 끌었어. 찬열이 뒤에 서 있던 보호자, 그러니까 그 여학생도 오만 인상을 찡그리며 찬열이의 팔을 잡아당겼어. "야, 좀 진상 그만부리고.." 여학생의 나지막한 말에 백현이가 고개를 숙이고 웃었어. 그 틈을 타 찬열이가 다시 팔을 벌렸고 나는 못이기는 척 찬열이의 포옹을 받아줬지. "보호자분도 고생했어요. 박찬열 요거 중간에 응급수술만 몇 번이야. 그 때마다 동의서 때문에 수고많았어요." 백현이가 평소처럼 다정다감한 말을 건넸어. 저런 모습을 볼 때마다 신기한게 백현이는 이것저것 작은 일까지 전부 기억하는 능력이 있었어. 그래서 꼭 환자들이 퇴원할 때 인사하러 오면 보호자들에게도 한마디씩 건네곤 했는데 나로서는 절대 기억 못할 그런 일들이야. 이번 찬열이의 경우에도 난 찬열이 응급뜨자마자 멘탈이 무너지고 그 때의 상황이 생각이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아. 그냥 무작정 백현이에게 콜 넣었던 것만 머릿속에 가득할 뿐인데 백현이는 그 때 보호자가 무엇을 했는지까지 기억하고 있으니 신기할 따름이야. "너도 잘해드려. 너 때문에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셨다." "술 한번 사주면 되죠. 그치, 정수정?" 찬열이의 말에 뒤에 있던 여학생이 입을 슬쩍 삐죽였어. 찬열이는 그것도 못보고 스테이션 안을 기웃기웃거려. "누구 찾아?" "그, 초짜.." 초짜 간호사? 보미랑 초롱이? 아, 초롱이. "초롱아!" 내가 안 쪽을 향해 초롱이를 불렀더니 초롱이가 허겁지겁 뛰어나와. 뭘하고 있었던 건지 머리가 엉망이야. 그 뒤로 종인이도 졸졸 쫓아나왔어. 잘됐다 싶었지. 종인이도 찬열이가 제 환자였던 거나 다름 없으니까. "아, 퇴원하시나봐요. 축하드려요." "그, 저 때문에 고생많으셨어요." 찬열이가 내뱉는 말에 백현이가 옆에서 코웃음을 쳤어. "박찬여얼? 인턴쌤은 아주 보이지도 않지?" 백현이 말에 종인이가 깜짝 놀라서 백현이를 쳐다봤어. "너 응급터진 날 요 인턴쌤이 라인잡고 수술방 잡고 했던 거 기억도 안나지?" "아파죽겠는데 그걸 어떻게 기억해요, 쌤은 참.." 찬열이가 툴툴거리며 종인이를 맘에 안든다는 듯 쳐다봤어. 정작 종인이는 그런 찬열이의 마음을 눈치도 채지 못한 듯 손에 들린 차트로 책상을 톡톡 치며 딴청을 부리고 있었어. "무튼, 고마웠어요." 종인이도 탐탁치않은 찬열이의 인사를 받아냈고 찬열이는 꼴깍, 침을 한번 삼킨 다음 초롱이에게 시선을 돌렸어. "저, 그리고.." "네? 저요?" "이거.." 찬열이가 손에 꼬옥 쥐고 있던 편지봉투 하나를 초롱이에게 건넸어. 초롱이는 이런 걸 처음 받아본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지. 찬열이 뒤에 있던 여학생도 이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백현이는 입을 쩌억 벌렸어. "..쌤들 것도 있어요." 그러면서 찬열이가 가방을 열어 우리에게도 자그마한 카드를 하나씩 내밀었어. 근데, 너 왜 초롱이는 편지고 우리는 카드야. 초롱이 손에 들린 편지 봉투에는 뭔가 사랑고백같은 구구절절한 사연이 담겨있을 것 같고 우리 손에 들린 카드에는 굉장히 형식적인 문장이 적혀있을 것 같은, 그래. 그런 느낌이었어. "저, 선생님." 우리에게 찾아온 정적은 종인이가 초롱이를 부름으로써 깨져버렸고 초롱이는 깜짝 놀라며 종인이를 쳐다봤어. "이거, 약품창고가서 확인 해봐야 할 것 같은데요." 누가봐도 핑계인 것 같은 종인이의 말에 초롱이는 종인이를 따라 스테이션을 빠져나갔어. 삐리리-, "엥? 무슨 소.." 종인이가 떠나자마자 백현이 가운 주머니에서 콜이 요란하게 울렸고 찬열이는 이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어. "가봐야겠다, 찬열아 건강하고. 외래진료 때 보자." 속사포처럼 찬열이에게 작별인사를 한 백현이가 수신기의 화면을 확인하고 계단을 향해 뛰어갔어. 이제 곧 우리 스테이션의 전화가 불이 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해져오는 느낌이었어. "와, 쌤 존멋." 그 와중에 찬열이는 입을 반쯤 벌리고 백현이가 뛰어간 계단을 쳐다보고 있었어. "정수정, 봤지. 나도 간지나게 의대갈 걸 그랬나." ㅡ "또? 또!?" 백현이가 잠깐 로비로 내려와보라는 말에 후다닥 내려갔더니 내게 오늘도 집에 못들어가는 이유에 대해 설명을 했어. "너 말이 된다고 생각해? 아니, 무슨 병원이 사람을 삼주동안 집에 발 한 번 못 들이게 만들어!" "오늘은 어떻게든 오프 만들어보려고 했는데.." "뭐야, 진짜..우리 결혼한 거 맞아? 매일 나 혼자 자고.." "나도 죽겠다, 자기야." 백현이가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면서 울상을 지었어. 내가 반드시 언젠가는 이 병원을 폭파시키리라 다짐을 하며 백현이를 돌려보냈어. 잔뜩 우울해진 기분으로 병동을 올라와 자리에 앉아 키보드에 손을 올렸어. "김가안-," 열심히 모니터를 쳐다보며 손을 움직이고 있는데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어. "어?" "바빠?" "아니, 거의 다 했어. 약은 먹었어?" 스테이션에 턱을 괴고 싱글싱글 웃던 서준이가 빈 약봉투를 내 눈 앞에 살짝 흔들어. "그것도 직업병이네요, 볼 때마다 그게 궁금해? 나 잘 잤는지는 안 궁금하고?" "약을 잘 먹으면 잘 잤겠지. 거르면 안된다?" "그러엄, 내가 너랑 밥 한 끼 같이 먹으려고 발버둥을 친다, 아주." 서준이가 빈 약봉투를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어. 가끔 서준이를 보러 병실에 들를 때마다 먹지 않은 약 봉투가 서랍 속에 쌓여있는 걸 보고 내가 몇 번이나 잔소리를 해도 듣지 않길래 조건을 내걸었던 게 저녁식사였고, 서준이는 그 조건에 아주 만족스러워하며 약을 꼬박꼬박 챙겨먹고 빈 약봉투를 차곡차곡 모아왔어. 백현이는 내가 서준이의 정신건강을 위해 몇 번 얼굴을 비추는 것까지는 허용을 했지만 서준이의 구체적인 치료에 개입하지 않길 원했고 서준이가 지속적으로 나에게 의존하는 것도 싫어했어. 그래서 나는 백현이에게 서준이와의 약속을 말하지 않았고, 그냥 한 번씩 생각날 때마다 들른다는 이야기만 했었지. 그래도 나가서 같이 저녁을 먹는다는 사실은 허락을 받아야겠다고 생각을 했고 아까 그 허락을 받아낸 것이었어. "저녁 뭐 먹을래?" "난 이 동네 아예 몰라." "음, 뭐 먹고 싶은데?" "주변에 포장마차 같은 거 있나? 닭발 먹고 싶은데." 확실해서 좋아, 역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대충 끝나가는 일을 마무리 짓고 있는데 백현이 담당 교수님이 스테이션에 나타나셨어. "조금 늦었네요, 미안해요." 내가 정리해서 올려놓은 차트를 확인한 교수님이 늦어서 미안하다며 사과를 건네셨고 나는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지. 이번 회진이 내 타임에는 마지막 회진이었고 이 회진만 끝나면 나는 퇴근이었기 때문에 차트를 정리해서 올려놓고 교수님을 기다리고 있었거든. "변백현 선생은 좀 늦을거예요, 자꾸 당직시켜서 미안해요. 요 근래 일이 많네." 교수님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웃으셨고 서준이는 눈인사를 건네고 스테이션에서 사라졌어. 나는 교수님을 쫓아 병실로 향했지. 첫번째 병실 앞에는 회진시간 마다 보는 레지던트들과 인턴들이 몰려있었고 교수님은 자연스럽게 맨 앞으로 가서 병실 문을 열었어. 나도 교수님 옆으로 자리잡고 첫번째 병실로 들어섰지. 이 교수님은 회진 때마다 담당간호사를 옆자리에 두고 싶어하셨고 덕분에 나는 편히 환자상태를 보곤 했어. "점심 드신 거 소화는 잘 되세요? 속 더부룩하거나 답답하면 꼭 간호사선생님께 말씀드려요. 수술은 잘 되셨구요. 이제 약 잘 드시고 퇴원할 일만 남았네." 넉살좋게 환자에게 말을 건네는 교수님이 허허 웃으셨고 환자 보호자분은 퇴원이라는 소리에 기분이 좋으신듯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였어. "이 환자 분 주치의 누군가?" 교수님께서 뒤에 몰려있는 흰 무리들을 향해 물으셨고 그 사이에선 정적이 흘렀어. "어디보자, 주치의가.." "교수님, 변백현 선생님입니다." "아, 백현이. 그러네요." 내가 조용히 말씀드리자 교수님이 베드에 걸린 표를 확인하시고 고개를 끄덕이셨어. 그 때 병실 문이 드르륵 열리며 백현이로 추정되는 사람이 빠른 걸음으로 들어와 무리에 합류했고 교수님은 무리 너머를 쳐다보며 다시한 번 물었지. "박승희 환자 주치의, 누군가?" "네, 교수님!" "왔네요." 교수님이 환자를 보며 또 다시 허허 웃으셨고 백현이가 그 틈을 타 맨 앞으로 비집고 나왔어. 반가운 얼굴에 내가 백현이 옆모습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데 환자 분이 나보다 더 반가워 하시며 백현이 손을 잡아. "아이고, 이 선생. 칭찬 좀 해 줘야 쓰겠어요. 어찌나 조근조근하고 친절한지.." 연신 예쁘다는 듯 백현이 등이고 허리고 쓰다듬으시는 환자를 보며 교수님은 그 보기 드물다는 아빠미소를 입에 걸으셨고 백현이는 쑥쓰럽다는 듯 웃었어. "좋으시겠어요, 저도 몸져 누울 때 즈음 이 선생보고 맡아달라 하렵니다." 이것처럼 백현이는 누가 봐도 눈에 보이게끔 교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어. 처음에는 자기 학교 병원도 아닌 곳에 와서 적응하려나 했는데, 모두 괜한 걱정이었지. 그렇게 마지막 회진을 모두 끝낸 나는 사라진 백현이를 찾다 포기한 후 탈의실로 향했어. 정말 눈코뜰새없이 바쁜 건지 문자를 남기기도 조심스러워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다시 가방에 넣었지. 옷을 갈아입고 서준이랑 만나기로 한 시간에 딱 맞추어 로비로 내려갔어. "제 시간에 끝났네?" "내가 시간 맞춘다고 기계처럼 일했다, 가자. 월급날이니까 내가 쏠게." 그렇게 신나게 도착한 포장마차에서 나는 고된 하루를 되새기며 소주잔을 만지작 거렸어. 내 앞자리에 앉아 이모, 닭발 이인분이요!를 외친 서준이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작게 웃었어. "소주도 시켜?" "..안돼, 너 술 먹으면 안돼." "나는 안 마실게. 너 상당히 술이 고파 보이는데?" "사실 삼주동안 입에도 못댔어." "처음처럼?" "..참이슬." 와, 세네. 서준이가 감탄을 내뱉으며 소주 한병을 추가했어. 사실 매일같이 김종대와 소주잔을 기울이던 포장마차에서 닭발만 먹으려니 상당히 심심한 기분이긴 했거든. 서준이는 자기 술잔에 맹물을 따라서 나와 잔을 부딪혀 주었고 난 오늘따라 소주가 굉장히 달다고 생각하며 꼴깍 넘겼지. "여자애가 소주 한 번에 털어넣는 것 좀 봐." "너도 병원에서 일 해봐." "힘들어 보이더라. 우리 병동 오는 간호사들만 봐도." "힘들지, 죽지 못해 산다. 진짜." 서준이는 자기가 병원에서 본 간호사들 이야기를 해주며 내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어. "어제 우리 병실에 아저씨 한 명이 그 뭐냐, 너네 끌고 다니는 거." "카트?" "어, 그거. 그거 발로 차서.." "아오, 진상!" "그래서 간호사들 한 세명이 와서 수습하더라, 그거 보면서 너 생각했어." "내가 제-일 싫어하는 환자 다섯 순위 안에 들어, 트레이 엎고 카트 발로 차서 앰플 죄다 깨먹는 환자들.." 백현이도 예전에 트레이 뒤엎은 환자 때문에 앰플 조각에 발등 찔린 적 있었는데, 그 때 바빠서 제 손으로 유리조각 뽑고 처치했던 백현이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저릿해져오는 느낌이야. "..뭐, 그래도 그러고 싶어서 그러겠냐. 다 아프니까 병원에 있는거지." 내 한숨섞인 말에 서준이는 내 소주잔을 채워주었어. 이번에는 잔을 부딪히기도 전에 내가 입으로 털어넣었고 그렇게 순식간에 소주 한 병이 비워졌지. "야, 웃기다 진짜. 너도 환잔데 환자한테 환자얘기 하고 있네." "네 친구가 먼저였는데, 뭐 어때." "퇴원하면 김종대랑 셋이 한번." 내가 손으로 컵모양을 만들어 꼴깍, 마시는 흉내를 냈고 서준이가 웃기다는 듯 웃었어. "한 병 더 시켜봐." "와, 얼굴색 하나 안 변하네. 너 주량 얼마야?" 서준이의 그 말을 끝으로 나는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어. 그래, 내 쓰레기같은 주사를 하나 꼽자면 취할 때까지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있다가 갑작스레 테이블에 머리를 메다 꽂는 거, 그리고 그대로 정신줄을 놓아버리는 거.. ㅡ 아오, 속이야. 쓰린 속을 부여잡고 침대에서 일어났어. 오늘이 오프였기에 망정이지 출근해야하는 날이면 정말 자살감이겠다 싶었어. 어제 어떻게 들어온 건지 기억도 나지 않고 이렇게 나이를 먹어 갈 수록 자꾸 필름이 끊기는 구나하며 신세를 한탄했지. 백현이는 바빠서 다음주까지 집에 못 들어올 것 같다고 했고.. 삑삑삑삑-, 했고, 그랬는데..집 번호키가 눌러지는 소리에 나는 몸을 벌떡 세웠어. 이 집에 비밀번호 누를 사람이 백현이밖에 없는 건 당연한건데 백현이가 오늘 오프를 받았을 리가 없는데, "..백현아?" 집으로 들어온 백현이가 내 목소리에 내 쪽을 쳐다봤어. 그런데 쟤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게.. "어, 오늘 오프야?" 내가 어제 술 먹고 들어온 걸 백현이한테 걸렸구나, 싶었어. 서준이랑 저녁을 먹는다하고 나가서 술을 먹고 들어왔으니. 술냄새 킬러인 백현이는 내 몸에서 나는 술냄새를 아주 잘 잡아내었거든. "..어제 술 마신 건 미안. 그러려고 나간 건 아니었는데.." 백현이의 심각한 표정을 눈치채고 내가 먼저 수그렸어. 내 말에도 아무 반응 없는 백현이는 단단히 화가 난 듯 까만 편의점 봉투를 들고 주방으로 향했어. "백현아아.." 결국 내가 침대에서 내려와 주방으로 향했고 백현이에게 다가가자마자 훅 풍겨오는 담배냄새에 반사적으로 미간을 좁혔어. "담배 피웠어?" 여전히 백현이는 묵묵부답이었어. 난 살짝 핀트가 나감을 느꼈고 언성도 자연스레 높아졌어. "어제 일은 내가 미안한데 그래도 너 담배는 하지 말," "너 어제 집 어떻게 들어왔어?" 내 언성이 높아짐과 동시에 백현이의 낮은 목소리가 내 말을 가로막았어. 백현이의 질문에 나는 뭔가 상당히 잘못되었음을 느꼈지. 평소처럼 술에 반쯤 취해서 들어왔을거라 생각했던 내 생각과 어제의 상황은 다르다는 걸 확실하게 짐작할 수 있는 분위기였어. "어제 집 어떻게 들어왔냐고." 당연히 기억이 안나지..술만 먹으면 필름이 끊기기 시작했던 게 하루이틀이 아닌데. "술 먹고 자기 몸 제대로 간수 못하는 여자 제일 싫다고." "..." "내가 말했었지." 백현이 말에 나는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었어. 분명 백현이는 할 말이 많은데 지금 꾹 눌러참으며 하지 않는 것인게 분명했어. 그래서 그런지 저 한마디에서 나는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지끈거렸지. 백현이가 늘 하던 말이었어. 술 마시는 건 터치 하지 않겠지만 제 정신으로 걸어서 집 찾아갈 정도에서 멈춰라. 대학생 시절부터 귀에 못박히도록 말해왔었지만 나는 한 번도 저 말을 깊게 생각한 적이 없었고 힘들면 힘들다고, 좋으면 좋다고 온갖 일에 술을 들이부었고 일년에 한 두번 꼴로는 인사불성이 되기도 했어. 사실 대학생때는 김종대가 항상 옆에 있어서 나를 케어했고 입사하고 나서 힘들다고 술을 퍼부을 때는 백현이가 옆에 있었지. 김종대는 망할년 정신나간년, 하며 나를 집에 던져두고 가버렸지만 백현이는 달랐어. 친구 생일이라서, 시험 끝나서, 종강해서 술을 마시던 대학생 때와는 달리 취직을 하고 나서는 그 이유가 아예 상반되어버렸으니까. 입사 후 처음 본 환자의 사망에, 자꾸 머릿속에 맴도는 응급환자의 잔상에, 체력의 한계에 부딪혀 갈 때 나는 술잔을 들었었고 백현이는 그 때마다 나를 타박하기는 커녕 등을 토닥여주었고 다음 날 다정하게 숙취해소 음료를 손에 쥐어주곤 했지. 백현이는 자기가 제일 싫어하는 모습을 하고 내가 종종 나타났음에도 항상 내 상태가 제일 중요했던거야. 나는 그걸 지금에서야 깨달아버린거고. ㅡ 쓰다 상당히 길어지길래 잘라왔어요! 내안의 배틀이 살아난다..살아난다..이번엔 배켠 갑 시켜줘야겠음. 덥다!덥죠 더위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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