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十一
붉고 푸른 단청이 새겨진 가마가 황궁 문 앞에 다다랐다. 가마를 내린 가마꾼들은 안에 있는 이가 나올 때까지 가만히 몸을 숙이고 시선을 땅 끝에 고정했다. 말에서 내린 윤기는 그들을 헤치고 가마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곤 느린 손길로 가마 문을 들어올렸다.
“내리시지요.”
“어찌 존대를 하십니까?”
윤기의 무미건조한 손을 맞잡고 가마에서 내리던 소소가 물었다.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윤기는 대답 없이 그런 소소를 내려다보았다. 빨갛게 충혈된 눈가가 곧 쓰러질 사람처럼 파르르 떨렸다. 가리개를 하고 있어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입술을 꾹 깨물고 있을 터였다. 소소는 아침부터 열이 올라 침상에서 일어나는 것도 힘겨워했다. 윤기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인상을 구겼다.
“태자비가 되실 분인데, 어찌 하대를 하겠습니까.”
“…….”
“미련한 건지, 아니면 멍청한 건지.”
누이의 손을 잡고 황궁 안으로 들어서면서 윤기는 대승상에게 내야했을 화를 소소에게 내었다. 아픈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다만 당장 혼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소소를 기어코 황궁으로 보낸 대승상이 잘못이었다. 제 손을 꼭 쥔 작은 손에 힘이 하나도 없어서,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윤기는 내색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걱정 대신 역정을 내었다. 태자비가 될 사람이니 공대를 하겠다 했으면서, 새어나오는 질책은 전부 하대였다. 소소가 희미하게 웃었다.
“버텼어야지. 죽어도 오늘은 못 가겠다, 떼라도 썼어야지.”
“아버님이 곤란해지십니다.”
대승상은 이깟 일로 난처해질 이가 아니었다. 황제도 제 손아귀에 쥐고 있는 이가 그인데, 이 황궁에서 어느 누가 고작 태자비의 입궐을 하루 늦춘다고 뭐라 할 수 있을까. 소소는 아무것도 몰랐다. 윤기가 답답한 듯 관복의 옷깃을 느긋이 풀었다. 황궁에서는 태자비의 입궐을 미리 전달받았을 것이나 그 흔한 연(輦)이나 초헌 하나 없었다. 그것은 태자가 오늘에야 북방에서의 전쟁을 마치고 돌아오기 때문이었다. 이제 막 전쟁이 끝난 가운데 사치스럽게 태자비를 맞이할 겨를이 없다는 것이 태자의 입장이었다. 이미 환영부터에서 태자가 소소를 달가워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 모든 게 그녀가 대승상의 여식이기 때문이겠지.
“대승상 댁 소저 되십니까?”
화려한 연(輦) 대신에 소소를 맞으러 나온 상궁 한명과, 그의 뒤를 따르는 열은 되어 보이는 수의 항아들이 있었다. 그들은 소소의 앞에서 나란히 읍을 했다. 소소가 따라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직은 이러한 것들이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눈동자만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삼킨 윤기가 그들을 향해 말했다.
“태자는 어디 계시지?”
“도성으로 환궁하신다고 기별하신 지 네 시진이 흘렀으니, 곧 당도하실 것입니다. 태자전과 가까운 화궁전에서 기다리심이 어떨는지요?”
전장에 미친 태자. 피를 몰고 다니는 붉은 투구. 윤기가 숨을 씹었다. 태자는 황궁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황궁에 있는 기간이 조금이라도 길어지면, 명분을 만들어서라도 전쟁을 했고 전장에 나갔다. 이 도성 안에선, 어리고 명석한 태자조차 대승상의 우리 안이었다. 아비가 대승상의 발 밑을 기는데, 태자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그게 족쇄라도 되는 것처럼, 대신 태자는 전장에서 활개를 치고 다녔다. 그 무자비하고, 무정하다는 작자가 과연 좋은 낭군은 될 수 있을까. 소소의 낭군. 소소의 부군. 잠깐 생각을 곱씹던 윤기가 입 안 여린 살을 깨물었다. 상궁과 궁녀들이 보는 가운데도 제 손을 놓지 않는 소소였다. 마음이 이상했다. 분명 대승상이 누이를 어떻게 해서든 태자비로 만들 것이란 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바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내정된 일이었다. 헌데 왜 심장 고동이 가파르게 움직였다.
“소인을 따르시겠습니까?”
화궁전으로 안내하겠다는 상궁의 말에 소소가 말없이 윤기를 올려다봤다. 가도 되겠냐고 허락을 묻는 눈동자였다. 윤기가 그녀의 손을 놓았다. 원래 더 빨리 놓았어야 했을 손이었다.
“상궁을 따라가십시오.”
그녀의 시선을 피하면서 윤기가 건조하게 말했다. 이렇게 가면 앞으로 그녀는 대승상의 집으로 돌아올 수 없다. 평생 이 곳에서, 처음에는 태자비궁, 그 다음에는 황후전에서 남은 생을 살아갈 테지. 언제면 집으로 돌아오냐고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자신을 기다리던 누이는 이제 없었다. 속이 쓰렸다. 윤기는 왜인지 이대로 숨을 토하면 피가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기 전에 소녀를 한 번도 안 보십니까?”
차갑게 시선을 돌리는 윤기에, 소소가 그의 손을 다시 잡으며 채근하듯 말했다. 생전 어리광 부릴 줄 모르는 그녀였지만, 윤기에게만은 아니었다. 균열을 들키지 않으려 애써 차가운 얼굴을 하는 윤기가 가장된 시선을 누이에게 던졌다. 소소가 손을 뻗어 그런 윤기의 뺨을 감싸 쥐었다.
“아버님이 또 손찌검하시거든, 무조건 그 자리를 피하세요.”
“…….”
“이젠 소녀가 곁에 있지 못하니까….”
“…….”
“그리고 아무리 바빠도 끼니를 거르진 마시어요.”
다정한 충고였다. 손이 아닌 눈빛으로도 제 얼굴을 쓰다듬듯 다정한 시선이었다. 윤기가 힘겹게 입술을 깨물었다. 얄팍한 감정의 끈을 간절히 쥔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겉으로 내보여선 안 되는 여린 속살 같은 감정이 윤기를 엉망으로 헤집었다. 윤기는 잔뜩 힘이 들어간 손으로 제 뺨에 얹힌 소소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곤 차갑게 내쳤다.
“허튼 소리 말고, 빨리 가시지요.”
“오라버니….”
“모시겠습니다.”
상궁은 어서 가자는 듯, 화궁전으로 향하는 길 쪽으로 손짓했다. 끝까지 제게 닿는 시선을 알면서도 윤기는 차갑게 돌아섰다. 미련하나 없는 사람인 것처럼, 소소를 그 곳에 두고 문 밖으로 걸었다.
“태자전하께선 황궁에 당도하시는 즉시 소저가 계시는 화궁전으로 가실 것입니다.”
“…네.”
열 때문에 귓전이 먹먹한 가운데도 윤기의 뒷모습에 시선이 갔다. 서운했다. 오라비는 이게 진짜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뒤돌아보지도 않는 윤기를 끝으로, 소소는 상궁을 따라 화궁전으로 향했다. 주나라의 황궁은 그 커다란 규모에 비해 사사로운 소음 하나 없이 조용했다. 각 관청의 일손들은 허튼 움직임 없이 제 일들을 하고, 이동하고 있었다. 실무를 담당하는 황청, 학자들이 연구하는 괴오각, 항아들 중 일부가 거주하는 일랑채 등 업무를 맡는 것에 따라 나누어진 건물 하나하나가 장대했다. 대승상의 사가도 이 도성 내에서 가장 큰 집으로 유명했지만 황궁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황궁의 그 장대함에 시선이 빼앗긴 소소는 머리가 아프다는 것도 잠시 잊고 주변을 둘러보느라 바빴다. 상궁은 그런 소소의 모습에 작게 미소를 머금었다. 화궁전은 한참 뒤에야 도착할 수 있었지만, 그 먼 거리는 소소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 곳 계단을 오르시면 넓은 정원이 나올 것입니다. 그 곳에서 태자전하를 기다리시면 됩니다.”
“네.”
“헌데, 소저.”
“네?”
상궁의 설명에 따라 화궁전 계단을 오르려던 소소가, 상궁의 부름에 잠시 멈춰 섰다.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혹여 어디 아프십니까?”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식은땀이 흐르고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며 상궁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소소가 의복에서 손을 내어 제 이마를 살짝 짚었다. 열이 펄펄 끓었다. 헌데도 소소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일로 대승상을 신경 쓰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끝까지 걱정을 놓지 못하는 상궁을 뒤로하고 소소가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치마를 살짝 들어 올리고 내딛는 걸음 하나하나가 힘겨웠다. 한참을 계단을 오르고 나서야 꽃이 한가득 심긴 정원이 보였다. 황궁에서 이곳이 가장 높은 데라 하였다. 정말 그런 모양인지 이곳에선 황궁 내부가 훤히 다 보였다. 황후가 깊게 숨을 내쉬었다가 다시 들이쉬는데 함께 들어온 꽃향기가 진동을 했다. 달큰한 향이었지만 몸이 안 좋았던 소소는 지독한 향에 속이 매스꺼웠다. 가리개를 했지만 올라오는 향을 막으려 소소가 코와 입을 틀어막고, 화궁전 한 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앉을 곳도 마땅히 없어서 소소는 가운데 덩그러니 한참을 서있어야 했다. 계속 기다렸는데, 태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소소는 점점 지쳤다.
“…….”
태자가 저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서, 일부로 늦게 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이대로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게 서러웠던 건지, 아니면 온 몸이 아픈 제 상황이 서러웠던 건지 소소는 곧 새어나올 것 같은 울음을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그렇게 기다린다기보다 견디다에 가깝던 시간이 지나가고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소소는 귀가 먹먹해서 잘 들리지 않았다.
방금 전 전장에서 돌아온 태자, 정국이 화궁전에 들어섰다. 여전히 갑옷을 입고, 투구만 벗은 정국은 생머리를 털며,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제 정혼자에게 다가갔다. 그의 작은 손짓을 따라, 소소가 그에게로 몸을 돌렸다. 갑옷…, 장수인가. 태자가 정녕 제게 오지 않는다는 소식을 전하러 온 사람일까. 소소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소소는 정국을 더러 그가 태자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고귀한 태자가 입기엔 투박하고 피묻은 갑옷 때문이었다. 태자가 오지 않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서러웠다.
“태자, 저하는… 언제 오신 답니까?…”
힘없이 물었다. 정국의 눈이 살짝 놀란 듯 팽창되었다. 답을 들어야 하는데, 도저히 무력함을 참지 못한 소소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힘없이 감긴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당황한 정국이 그녀를 급히 받았다. 보자마자 혼절하는 정혼자라니. 난감했다. 혼절한 그녀를 데리고 화궁전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서둘러 내려가야 했다. 정국이 그녀를 안아들었다. 가까이서 내려다 본 소소의 얼굴에 아픔이 가득했다. 살짝 찡그린 미간에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까지, 정국이 살짝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에 가져다댔다. 뜨거었다.
“왜 이런 몸으로….”
서둘러 그녀를 데리고 내려가려는데, 소소가 작은 손으로 정국의 품을 꼭 쥐었다. 걸음을 멈춘 정국이 그녀를 내려다봤다. 가까이, 아주 가까이 있는 소소의 아이같은 얼굴에서 눈물이 흘렀다. 뜨거운 숨이 가리개에 막혀 그녀에게 되돌아갔다. 숨쉬기가 힘들 것 같아서, 정국은 멋대로 가리개를 벗겼다. 그러난 소소의 입술에서, 뜨거운 숨과 함께 온전하지 못한 울음과, 단어가 흘러나왔다.
아버지….
소소는 대승상을 무서워했다. 제게만 위압적이고, 제게만 냉정한 아버지를, 그래서 그 아픈 몸을 이끌고도 기어코 이 황궁에 오게 만든 아버지를. 허나, 동시에 소소는 그런 아버지의 사랑이 갈급했다. 그래서 그에게 미움 받고 싶지 않아서 윤기의 말대로 못 가겠다 떼를 쓰지도 못했다. 어미가 죽고 남은 가족은 그녀에게 대승상과 윤기뿐이었으니까. 눈물이 새어나왔다. 그걸 본 정국이 제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울면 안 됩니다. 울면….”
정신을 잃은 소소에게 그렇게 읊조렸다. 들었을 리 없는 소소가 눈물을 감추듯이 정국의 품을 파고 들었다. 옷깃을 꼭 쥐는 소소에, 정국이 품을 살짝 조여 그녀를 더 끌어안았다. 바람이 불어 꽃바람이 날렸다. 도화냄새가 코를 찔렀다. 정국은 그렇게 소소를 안고, 그 가운데 잠시 우뚝 서있었다.
皇后
列傳
소소가 눈을 떴다. 지독한 통증이 머리를 띵하게 울려서 인상을 작게 썼다. 보이는 천정은 낯설었다. 그래서 온전치 못한 정신으로 주위를 살피는데, 제 침상 맡에 앉아 서책인지 모를 무언가를 보던 정국이 보였다. 인기척을 내는 소소에 읽던 것을 잠시 내려둔 정국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태의가 다녀갔습니다. 열이 많이 높았다 하더군요. 이대로 계속 있었으면 어디 한군데 상했을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아….”
소소는 천천히 상황파악을 했다. 그러니까, 화궁전에서 태자를 기다리던 자신이 혼절했고, 그런 자신을 이 자가 처소로까지 데려와 의원을 불러준 모양이었다. 바보같이. 괜히 이 소식이 대승상의 귀에 들어갔을까 걱정이 된 소소는 제 손톱을 깨물었다. 그리곤 문득 정국을 보았다. 그럼 이자는 누구일까. 태자가 대신해서 보낸 사람일까.
“헌데, 태자전하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
제 눈앞에 태자를 두고서, 태자의 행방을 묻는 소소에 정국의 얼굴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설마 자신이 태자임을 모르는 건가. 대승상의 여식이라길래 제 아비만큼 영악하고 매서운 인물을 기대했던 정국은 잠시 의아함을 느꼈다. 제 얼굴조차 제대로 모르는 정혼자라니, 정말 난감했다.
“태자전하를 만나지 못하셨습니까?”
“네…. 그곳에서 기다리면 입궁하시자마자 제게 오신다 하였는데,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정국이 소소의 얼굴을 또렷이 주시했다. 서운하단 건가. 왠지 힘 빠진 그녀의 얼굴이 그런 것 같아서 마음이 이상했다. 자신이 태자라 당장 말하면 놀라겠지? 허면 그 말을 어떻게 건네야 할까. 정국은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그런데 저를 구해준 공께서는 누구십니까?”
정국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소소가 순진하게 저더러 누구냐고 물어왔다. 정국의 얼굴에 눈에 띄는 당황이 스쳤다. 딱 이 때 내가 그대가 찾는 태자라 말하면 되었을 텐데, 정국은 왜인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대승상의 여식이, 태자가 아닌 자신을 어찌 대할지 궁금했다. 어차피 오늘 입궁한 대승상의 여식은 보름동안 태자비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기 위해, 외부인은 누구와도 만나지 않고 궁정 안에서 훈련만 한다고 들었다. 태자를 공식적으로 만날 일도 정식 혼인 전날까진 없을 것이란 뜻이었다. 해서 정국은 장난을 쳤다.
“저는 태자를 모시는 별감입니다.”
“아, 그렇군요.”
소소는 눈을 반짝이며 정국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순진한 얼굴에 웃음이 났다.
“저는, 태자전하의, 그러니까, 전하의….”
상대의 소개를 들었으니 제 소개도 해야겠다고 생각한 소소가 입을 열다 말고 머뭇댔다. 제 입으로 태자의 아내 될 사람이라 말하기 부끄러워서였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하지. 아직 정식으로 혼인하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태자비라 해도 될까? 아니면 정혼자, 아내? 그 무엇이든 뺨이 홧홧해졌다. 차마 말을 갈무리 하지 못하고 웅얼이는 소소에, 정국이 이번에는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눈이 동그랗게 커진 소소가 그런 정국을 봤다. 그런 시선에 정국이 뚝 웃음을 멈추었다. 그리곤 잠시 곤란하다는 듯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송구합니다. 웃어서.”
“아, 아닙니다.”
“소저가 누구신지는 알고 있습니다. 태자의 정혼자이신 것을.”
정국이 정혼자라는 말을 따라 붉어지는 소소의 얼굴에 웃음을 꾹 참고 말했다. 소소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아, 왜 자꾸 속이고 싶어지는지, 이만 하면 장난이라 진실을 밝혀도 됐을 텐데 정국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대승상 그 재미없는 양반의 여식답지 않게 재밌는 구석이 있었다.
“이 곳은 어디입니까?”
이번엔 자신이 있는 처소를 이리저리 살피던 소소가 물었다.
“소저의 궁이 될 곳입니다. 태자비궁.”
“아….”
“저도 태자를 따라 방금 환궁한 것이라, 좀 씻고 옷도 갈아입고 와야 할 것 같습니다.”
“네에.”
“여기서 기다리시면 소저를 모실 상궁들이 올 것입니다. 잠시 쉬시다가 그들에게 앞으로 무얼 해야 하는지 전해들으시면 됩니다.”
소소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피식 웃은 정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자신도 그만 가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궁으로 오자마자 문후도 먼저 말고 당장 대승상의 여식부터 만나라는 부황의 명을 따라 화궁전부터 가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부황에게 인사한 번 가지 않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부황이 계실 대명전으로 가려 했다. 그대로 처소를 나서려는 정국을 소소가 다시 한 번 붙잡았다.
“저….”
“예.”
“태자전하께선 저를 만나러 언제 오시는지 아십니까?”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태자는 이미 그대를 만나고 있는데.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 잠시 인상을 쓰고 변명을 생각하던 정국이 이내 입을 열었다.
“아, 태자는 전장에 나가있던 동안 밀린 일이 많아서, 아마 한동안은 소저를 뵈러 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군요.”
정국의 말에 소소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달싹거렸다. 허면 저는 그만. 그런 얼굴을 잠시 웃으며 바라보던 정국이 다시 나가려는데.
“헌데, 그대….”
“예?”
“태자전하를 왜 자꾸 태자라고만 부르십니까? 공대도 않으시고….”
“아….”
잠시 정국의 눈이 황급히 흔들렸다. 원체 공대가 익숙하지 않은 터라 자기 자신까지 높일 겨를이 없었다. 정국이 태자와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모르는 그녀의 입장에선 이상할 법도 했다. 다시 웃음이 나왔다.
“죄송합니다. 제가 태자‘전하’와 워낙 허물이 없는 사이라.”
웃음기 머금은 사과에, 소소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태자전하와 그렇게 친하십니까?”
“예, 뭐.”
그리곤 이내 궁금증이 가득한 얼굴로 물어왔다. 정국이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면, 허면 말입니다.”
“예.”
“전하께서 어떤 여인을 좋아하시는지, 뭐 이런 것도… 아십니까?”
허. 정혼자 이 한마디를 못해 쑥스러워하던 여인치곤 당돌한 질문이었다. 덕분에 잠시 기가 막히다는 얼굴을 하던 정국이 애써 그런 표정을 감추었다. 낭군 될 사내를 유혹하고자 하는 질문과 상극이게 순진한 눈동자가 이젠 기력을 되찾았는지 힘차게 깜빡이고 있었다. 금방 처소에서 나갈 듯 눈앞에 서있던 정국이 성큼성큼 걸어 소소의 앞으로 다가왔다.
“제가 잘 알지요. 태자전하의 여인 취향.”
“무엇입니까?”
그 투명한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괜히 장난이 치고 싶어졌다. 그래서 정국은 턱을 괴곤 소소를 가만 내려 보다, 장난스런 말을 던졌다.
“전하께선 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여인을 좋아하십니다.”
“…네에?”
놀라 크게 뜬 소소의 눈이 도륵도륵 굴렀다. 정국이 웃음을 꾹 누르고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 지었다. 덕분에 소소는 그게 정말이냐는 듯 의심 반 의아함 반이 섞인 얼굴로 정국을 보았다.
“참입니다. 전하께선 그런 여인만 좋아하십니다.”
“설마….”
“제가 이따 또 이곳을 들를 터이니, 한 번 그 머리를 제게 보여주세요. 태자전하를 뵙기 전에 괜찮은지 봐드리겠습니다.”
“…….”
소소가 입을 꾹 다물었다. 대체 이 사내가 진실로 태자의 취향을 말해주고 있는 건지, 아니면 자신을 놀리려 이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소소는 원래 이런 쪽엔 영 무지했다. 허나 어쨌든 정말 태자와 허물없이 친한 사이라면 자신도 어떻게든 친해져야 할 자라는 건 확실했다. 여태껏 사가를 나간 적도 잘 없었고, 그래서 집안에서 일하는 아이들을 제외하곤 동무를 사귈 기회도 없었다. 허나 친해지려는 사이엔 통성명이 가장 먼저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소소가 장난인지 모를 정국의 말은 잠시 묻어두고 무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이왕 황궁에서 평생 살아야 할 팔자라면 제 편을 하나라도 더 만들어주는 것이 필요했다.
“믿겠습니다.”
“…….”
“그대의 말, 그러니까 태자전하의 취향… 내 믿겠어요.”
예상치 못한 신뢰에 정국이 잠시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했다.
“허니,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
“저는, 소저가 아니라, 소소입니다.”
“…….”
“소소.”
태자비, 다음으론 황후가 될 여자의 이름은 평생 없는 것과 같을 것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이름으로 불리지 못할 테니까. 허나 소소는 신뢰의 첫째로 제 이름을 말했다. 그리곤 맞잡기를 청하며 손을 건넸다. 참으로 고전적인 방식이었다. 잠시 얼떨떨해하던 정국이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작고 따뜻한 손이었다.
“기억하겠습니다.”
“…….”
“소소.”
그래서 이건, 태자가 아니라 정국으로서 하는 말이었다. 그대의 이름을 기억할 것이라는 그 말. 평생 죽어도 잊지 못할 그 이름.
/ 황후열전
"소소"
제 이름을 부르는 정국에 왈칵 울음이 터졌다. 정말 그것 때문인지, 아니면 아까부터 배려 없이 나오는 황제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황후는 피가 날 때까지 입술을 깨물고 아무런 소리도, 말도 입 밖에 내지 않으려 애썼다. 울음조차도 삼켜냈다. 태형에게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당장 그를 내보내라고 애원해도 정국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으니, 제 스스로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황후가 힘이 하나도 없어 정국의 가슴팍에 고개를 기댔다. 허나 그럴수록 잔뜩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얼굴을 구기고 가혹하게 구는 정국 탓에 황후는 하는 수 없이 일반적인 말이라도 건네야 했다.
“어찌, 아셨습니까?”
“무얼”
“신첩,의 이름.”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웅얼대는 황후에 정국이 그녀의 목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굳이 대답을 구하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조금이라도 그의 시선을 분산시키고자 했는데 그 의도는 실패한 듯 했다. 귓불을 핥는 정국에 황후가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발간 눈꼬리에 눈물이 걸렸다. 그걸 내려다보던 정국이 사납게 고개를 뒤틀었다.
“그대가 말해주었는데.”
“신첩이요? 아,”
황후가 급히 정국의 뒷목에 팔을 감고 안겼다. 황후의 머리칼에 짧게 입 맞추던 정국이 잠시 고개를 돌려 태형이 있을 처소 문을 응시했다. 그 자가 황후에게 입 맞추던 잔상이 그녀를 품에 안고 있는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았다. 열이 났다. 발칙한 태형에게 제가 느낀 패배감보다 더한 상실감을 안겨주고 싶었다.
“저 자는, 그대의 이름을 알고 있었나?”
“몰라요….”
황후는 정국의 관심이 태형에게 향하는 것이 싫었다. 그저 빨리 이 순간들이 지나가길, 그래서 태형에게 더 아픔이 쌓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헌데도 자꾸, 자꾸 정국은 의도적으로 그러는 것처럼 엇나갔다. 황후가 바라는 것과 다르게 태형의 존재를 계속 상기시키는 말을 내뱉었다. 황후가 고개를 도리질 쳤다. 황제의 벗은 등을 할퀴는 손길이 서러웠다.
“허면, 어디까지 알고 있지?”
“…황상.”
정국은 집요하게 황후의 귓가를 짓씹으며 물었다. 황후가 계속해서 고개를 저었다.
“저 자도 그대의 이곳에 입 맞추었나?”
황제가 황후의 목 언저리에 입술을 가져다대며 말했다.
“응? 말해 봐.”
“…….”
난폭하게 답을 명령하는 것이 영락없는 지배자의 행동이었다.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 태형이 슬픈 게 싫었다. 자신이 태형에게 더 이상 남을 위해 참지 말라고 했는데, 태형은 또 저 때문에 한 없이 참고 있는 꼴이 되었다. 그 가슴 아픈 박탈감을, 그 잔인한 모멸감을. 황후는 그토록 원하던 황제가 제게 사랑을 속삭이고 있는 데도 정신이 거기밖에 쏠려있지 않았다.
“그대는 나의 여인이다. 나의 황후야.”
“…….”
“별감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대의 숨결 한 자락조차 얻을 수 없어.”
“…….”
“별감은….”
결국 사납게 속삭이는 정국의 입을 황후가 작은 손으로 틀어막았다. 그 행동에 정국이 잠시 얼빠진 눈으로 제 앞의 황후을 보았다. 잔뜩 미간을 조인 채, 붉어진 눈 끝에는 눈물을 매달고, 제 입을 틀어막은 황후. 제가 말하지 않아도 천천히 몸을 달싹이는 황후. 이게 전부 태형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았지만 이상하게 화보다는 다른 감정이 먼저 앞섰다.
“말 하지, 마세요.”
정국의 새까만 눈동자가 끝내 점멸했다. 당장 황후의 팔을 당겨 제 입을 막은 손을 치우고, 그 손가락을 입안에 넣고 굴리던 정국이 황후를 급하게 당겨 안았다. 참을 수 없는 목마름이었다.
/ 황후열전
어제부터 시작된 재녀선발은 사흘간 치러졌다. 황궁에 필요한 일손이 일손인 지라 뽑아야 되는 이가 상당했다. 상급 궁녀부터는 귀족의 자녀들부터 뽑는다. 수발 드는 일을 한다고 해서 무조건 무수리출신을 뽑는 것은 아니었다. 웃전을 곁에서 모실수록 원래의 신분역시 중요했다. 그래서 가장 높은 궁녀는 어제 선발을 모두 끝냈다. 오늘은 평민부터 시작해서 무수리들까지 지원할 수 있는 항아를 뽑는 날이었다. 선발관으로는 각 부처의 최고상궁들과 황청의 환관들이었다. 인사를 담당하는 태사관 역시 선발관 중에서도 가장 가운데 앉아 있었다.
“예순부터 일흔까지!!”
이공공의 말에 따라 똑같은 의복을 입은 여인들이 질서정연하게 일렬로 섰다. 이렇게 한조씩 줄을 지어 선발관 앞으로 나아갔다. 이들은 모두 첫 단계인 기술시험에서 합격을 한 자였다. 기술시험은 항아가 기본으로 해야 하는 허드렛일들을 평가하는 단계였다. 반면 이번에는 면접형식으로 치러지는데 간단히 임기응변 능력과 상황을 대처하는 기지 따위를 평가하기 위함이었다.
“어머니가 용한 무당한테 샀다는 부적은 죄다 엉터리야! 지금 품에 고이 안고 있는데도 심장이 여즉 뛰잖아!”
긴장을 풀어준다는 부적을 큰 돈 주고 샀던 용아는 일행을 따라가며 엉터리 무당을 향해 중얼중얼 욕을 마구 했다. 선발관이 있는 곳은 황궁 안 넓은 호수인 경화수 한가운데 정자였다. 항아 후보들은 그까지 나무로 된 다리를 건넜다. 폭이 좁은 의복치마 탓에 종종걸음이었다.
“바보냐. 심장은 멈추면 죽어 이것아.”
용아의 한풀이를 들으며 그 뒤에 서서 걷던 수인이 혀를 찼다. 그런 수인의 말에 잘 걷던 용아가 고개를 획 돌리며 수인을 노려봤다. 물론 빨리 가라고 재촉하는 이공공 탓에 금방 발을 급히 놀려야 했지만. 항아 후보들은 하나같이 긴장되고 떨려서 혼절할 지경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상민의 자녀였는데, 이번에는 농번기에 갑자기 가뭄이 들면서 다들 집안사정이 어려워졌다. 마지막 남은 수단은 항아가 되어 입궐해서 넉넉한 녹봉을 받는 것뿐이었다. 허나 그 사이에서 유독 초연하고, 평안한 얼굴이 눈에 띄었다. 용아는 제 앞에서 태연하게 가고 있는 태화의 어깨를 톡톡 치며 말을 걸었다. 워낙 적극적이고 사교성 좋은 용아의 성격 탓에 둘은 기술시험을 치룰 때부터 말을 텄었다.
“언니, 언니는 긴장 안 되우?”
“긴장할 게 뭐 있어.”
“흐음, 아무래도 언니네 집은 잘 사나 보오?”
용아의 의미심장한 물음에 태화는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꽤 길이 멀다,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선발관들이 앉아있는 정자가 보였다. 비단보가 씌인 탁상을 앞에 두고 한 여섯명 정도가 앉아있었다. 용아는 눈을 크게 뜨며 긴장감을 잠재워보려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너 합격하고 싶니?”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언니는 떨어지고 싶소?”
막 정자로 들어가기 전, 태화가 넌지시 용아에게 물었다. 용아가 그걸 말이라고 하냐는 듯 태화를 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마치 이 황궁에서 뼈를 묻고 말겠다고 다짐하듯이.
“허면 넌 합격할 것이다.”
“예? 그걸 언니가 어찌 아시오?”
“내가 그렇게 만들어줄게.”
용아를 보고 살짝 미소 짓던 태화가 다시 얼굴을 굳히고 정자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우뚱하던 용아도, 그 뒤에 선 수인도, 그 뒤의 다른 항아 후보들도 일제히 안으로 들어와 선발관들 앞에 섰다. 손을 가지런히 품 앞에서 포개고, 허리를 숙이고, 시선은 적당히 내리깔고. 모두의 의복과 자세가 동일했다. 그들을 찬찬히 훑다가, 선발관 중 하나인 주 상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먼저 기술시험을 통과하느라 수고했다. 이번이 황궁의 정식 항아가 되기까지 마지막 관문이 될 것이야.”
“허면 내가 하문할 것이니 오른쪽부터 차례대로 답하여라.”
“예, 마마님.”
주 상궁 옆에 앉은 장 상궁이 앞에 놓인 여러 두루마리 중 하나를 골랐다. 항아가 되기위한 면접이라 해서 과거시험에나 나올 것 같은 난제를 묻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짧은 질문을 통해 아이의 천성을 파악하고, 황궁에서의 일에 대해 얼마나 각오하는지를 묻기 위함이었다. 장상궁이 고른 두루마리를 풀고 안에 적힌 글자를 읽었다. 장 상궁의 눈썹이 흥미롭다는 듯 위로 치켜 올라갔다.
“첫 번째는 아주 단순하나 중요한 질문이구나. 그래, 너희가 황궁에 들어오려는 목적은 무엇이냐?”
하문을 하며, 선발관들의 시선이 가장 오른쪽에 있는 아이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빨리 답을 떠올리기 위해 눈동자를 굴리며 생각했다. 빨리 답할수록 좋다고, 그녀의 친인척 중 번살이 항아인 언니가 말했었다.
“도, 돈이 필요해서요!”
솔직한 게 제일이라고도 그랬다. 아이의 대답에 장 상궁이 싱긋 웃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황궁 말고도 갈 곳이 많지 않느냐? 세간에 널린 것이 장시고 여관인데, 왜 하필 황궁인 것이냐?”
부가되는 질문에 답한 아이의 얼굴이 점점 새하얗게 질려갔다. 식은땀이 곧 날 것 같았다.
“황궁이… 제일 돈을 많이 줘서….”
지나치게 솔직하고 건조한 답변이었다. 중간에 앉아있던 태사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제 앞 종이에 대충 세모 표시를 했다. 차례로 답변을 했는데 뭐 답변들이 죄다 비슷비슷했다. 몇몇은 맨 처음 아이처럼 집에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라 구구절절 사정을 이야기 했고, 몇몇은 황실에 충심을 갖고 있어 그렇다는 되도 않은 거짓부렁을 이야기 했다. 그나마 인상적이었던 것은 수인의 답변이었는데,
“황궁일이 소인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소인은 빨래하고 밥 짓는 것처럼 가내 일을 잘 해서 남의 집 살이 하기 적합합니다. 헌데 남의 집 중에 황제폐하의 집이 가장 크고 좋으니…, 잘 하는 일을 하면서 보수도 많이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지원하였습니다.”
결국 이 역시 돈이 필요하다였지만 선발관들은 가장 마음에 든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으로 용아의 차례 때는 정말 그녀의 어미가 사다준 부적의 효험이 하나도 없었던 것인지 말을 엄청 더듬었다. 내용도 그저 그랬다. 때문에 답변을 다 마친 용아는 곧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다음으로 태화의 차례가 되었다.
“저는… 갚아야 할 것이 있어 황궁에 왔습니다.”
“갚아야 할 것?”
“예. 죽어서도 못 잊을 빚이지요. 각골난망, 뼈에 새겨서라도 못 잊을 빚입니다.”
태화의 답에 용아는 저가 다 당황한 듯 눈을 크게 키우고 왜 이러느냔 시선으로 태화를 봤다. 이러다간 저를 합격시켜 주긴 커녕, 태화가 떨어질 것 같았다. 허나 태화는 굴하지 않고 아무도 못 알아들을 말을 이어갔다.
“황제폐하께 깊은 빚을 두 번이나 졌습니다.”
“…….”
“저는 그 것을 꼭 갚을 것입니다. 반드시.”
빚을 져서, 그래서 은혜를 갚겠다고 말하는 것 치고는 태화의 눈이 살기에 가득 차 번뜩였다. 그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고, 포부를 물었더니 황제를 더러 이상한 말을 중얼이는 태화의 이름에는 커다란 세모가 쳐졌다. 그럼에도… 재녀선발의 결과가 발표 나는 닷새 뒤, 태화는 대명전 새로운 항아 자리에, 심지어 대명전 항아에 떡하니 붙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二十二
대명전으로 향하는 백야의 발걸음이 아주 다급했다. 밤새 궁녀들 사이에서 소문이 돌았다. 황제와 황후가 전날 밤 합방을 했다고. 백야가 황제의 마음이 황후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챘음에도, 자신의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무언의 확신 때문이었다. 황제가 아무리 황후를 사모해도 죽어도 가질 순 없을 것이란 확신. 허나 그 믿음이 보기 좋게 박살났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합방을 피하더니, 어젯밤 황제와 황후가 합방을 했다고 했다. 백야는 손톱을 까득- 물어뜯으며 빠르게 걸음을 놀렸다. 백 재인이 지나갈 때마다 그녀를 본 별감과 궁녀들이 고개 숙이고 인사했지만 그러한 것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황후는 아직 대명전에 있느냐?”
“예, 그런 것 같사옵니다.”
백야가 잔뜩 심기 불편한 것이 티나 가서 대답을 하는 상궁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그에 급하게 걸음을 옮기던 백야가 우뚝 멈춰 섰다.
“그런 거면 그런 거지, 그런 것 같은 것은 무엇이냐?!”
“소,송구하옵니다! 그렇지만 황후마마께서 황후전에 없는 걸로 봐선 아직 대명전에 계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엄한 데에 열을 내던 백야가 허리를 잔뜩 굽히고 사죄하는 상궁에 겨우 화를 삭였다.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다시 몸을 돌리자, 저기서 관료들끼리의 회의를 마치고 오는 태부와 그의 일행들이 보였다. 태부를 보고 반색한 백야가 서둘러 그를 불렀다.
“태부!”
백야의 부름에 그녀를 본 태부가 곁에 있던 다른 신료들을 먼저 보내고, 백야에게 걸어왔다. 지난 번 정신이 반쯤 나간 것 같았던 얼굴과는 다르게 제법 살 것 같은 얼굴이었다.
“들으셨습니까?”
“무엇을? 아, 황제가 황후와 합방했다는 소식 말입니까?”
“예!”
백야는 아주 다급하고 초조하게 묻는데 정작 태부는 태연하게 말했다. 분명 자신과 같은 배를 탄 입장의 태부는 함께 초조해야 옳았다. 뭔가 이상함을 직감한 백야가 눈을 가늘게 떴다.
“혹여,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마마, 잘 들으십시오. 지금 황제의 얄팍한 애정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황후가 아무리 황제의 진심을 가졌고, 합방도 성사되었다고 하나 어찌 역적의 딸이 계속 황후 자리에 있겠습니까?”
“역적의, 딸이요?….”
태부의 말을 당최 알아들을 수 없어, 백야가 눈동자를 혼란스럽게 굴렸다.
“지금 사량부령이 은밀히 조사하고 있습니다. 대승상의 세력이 변방에 있는 망국의 유민들과 내통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이는 필히, 역모를 일으키기 위함입니다.”
“여, 역모라니…, 대승상이 어찌….”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던 대승상의 평안한 얼굴과, 자신을 욕보이고 깔아보던 황후의 오만한 얼굴이 스쳤다. 백야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대승상의 사병이 온 천하에 들통난 판국에, 길게 끌지 않겠단 뜻이겠지요. 조만간 대승상의 병력과, 진나라 유민 세력이 규합해 황제를 칠 것입니다.”
“허면, 만일 역모가 성공하면, 우린 어찌됩니까?”
만에 하나 대승상의 역모가 성공해서 정말 그가 절대 권력이라도 잡는다면, 태부와 백야는 참형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두려움에 질린 백야가 태부의 팔을 붙들고 간절하게 물었다. 태부는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마십시오. 대승상의 역모가 성공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사량부에서 이미 역모의 싹을 발견하고 조사 중이니 그 덜미가 잡힐 것입니다. 이것은 기회입니다. 대승상과 황후를 역적이라는 이름으로 처단하고, 마마께서 황후자리에 오르실 기회요.”
기대에 가득 찬 태부가 두 눈을 반짝였다. 허나, 백야는 두려웠다. 정말 태부의 말대로 잘 될까. 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 공고한 권력을 지켜냈던 대승상이, 그리 허술하게 계획을 세웠을까. 백야의 초조한 기색에도 태부는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하는 듯이 단언했다. 그래서 마마께선 가만히 황후가 되실 날만 기다리라 말하는 태부가 자리를 떠나고도, 백야는 발걸음을 돌리지 않았다. 그대로 대명전으로 향했다. 백야에겐 황제의 총애가 절실했다. 그동안 가짜 총애였어도, 그것이 주는 권력과 권위의 맛을 이미 본 이후였다.
皇后
列傳
잠에서 깬 황후는 맨살의 허리를 껴안는 큰 손길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자신이 있는 곳이 대명전 안, 황제의 침상 위라는 것을 방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럼 저를 안고 있는 이 손의 주인은 정국일 터였다. 그걸 상기하자마자 온 몸이 아파오는 것 같았다. 어제의 기억이 생생했다. 그래서 불현 듯 황후의 하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눈을 꼭 감았다. 그걸 알아채기라도 한 듯이, 뒤에서 정국이 황후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입술이 닿는 목 언저리가 간지러웠다.
“잘 잤어?”
정국의 잠긴 목소리가 귓전에 닿았다. 주먹을 꼭 쥐고 있던 황후는 의식 없이 제 허리를 안은 팔을 잡았다. 맨살의 근육이 탄탄한 황제의 팔뚝이었다. 불에 덴 사람처럼 급히 손을 뗐다. 황후가 정말 어찌 해야 할 바를 몰라서 눈동자만 굴렸다. 답을 해야 할지 아니면 다시 자는 척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대가 옆에 있어 잘 못 잤는데.”
“…….”
“그대는 당장이라도 내 품을 빠져나가고 싶은가보군.”
태연자약하게 말하는 정국에 황후가 입술을 깨물었다.
“황상….”
황후가 처음으로 입을 떼다 말고 놀라 나자빠질 번했다. 자신을 바라보게 황후의 몸을 돌리려는 정국의 손길 때문이었다. 어깨에 닿는 커다랗고, 투박한 손길에 흠칫 몸을 떨었다. 문득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황제와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는 절박하게 그 손길을 거부했다. 그리고는 덮고 있던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그런 황후의 태도를 보고 정국이 작게 웃었다. 황후를 돌려 눕히는 대신 뒤에서 그녀를 더 끌어안았다.
“연모한다.”
“…….”
“연모한다, 소소.”
황후가 아니라, 소소라고 했다. 그 전에 황후는 죽어도 제게 평범한 여인이 될 수 없다고, 황후는 황후일 뿐이라고 차갑게 내치던 정국이 떠올라, 황후는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저게 진심일까. 도미를 죽이고, 자신을 사지로 내몰았던 황제이지만, 사랑한다는 저 말만은 진심일까. 믿기 싫었지만 저 한마디에, 뜨겁게 닿는 황제의 맨살에 아랫배가 저릿해진 황후는 돌연 울고 싶어졌다. 그러다 황후가 저를 끌어안고 있는 정국의 손을 보았다. 고귀하고 무결한 황제의 손이라기엔 상처투성이인 손이었다.
“황상.”
“…….”
“아프셨습니까?”
황후가 제 작은 손으로 정국의 손을 매만지며 물었다. 칼날에 베인 자국도 있었고, 깨뜨린 잔에 찔린 자국도 있었다. 전부 황후의 짓이었다. 죽겠다던 자신을 막아 세우고 맨 손으로 칼을 받아낸 정국의 그 때 얼굴이 떠올랐다. 곧 울어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붉은 눈으로 저를 구원인냥 쳐다보던 황제를.
“…아니.”
헌데도 정국은 아프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그 답이, 베일 때마다 아픈 것은 손이 아니라 마음이었다고 답하는 것 같아서, 황후는 가슴이 저릿했다. 황후가 저를 안은 정국의 손을 풀고 돌아 누웠다. 코끝이 스치는 거리에 마주한 얼굴에, 황후의 돌발적인 행동에 정국이 잠시 숨을 참았다. 황후가 고개를 들고 정국을 바라봤다. 정국의 얼굴을 찬찬히 훑듯이. 정국이 마른 침을 삼켰다. 울대가 거칠게 한 번 움직였다.
“그렇게 보면…, 내가 참기 힘든데.”
황제가 퍽 수줍게 김빠진 웃음을 뱉으며 황후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런데도 황후는 정국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그 잘난 얼굴에 며칠 전 제가 뺨을 때리며 손톱으로 긁은 자국이 있었다. 그리고 목을 타고 내려오면, 전장에서 베인 것 같은 상흔이 빼곡했다. 악마의 붉은 투구, 무자비한 전쟁영웅이라는 명성이 괜히 붙은 것이 아니었다. 얼마나 많이 다친 것일까. 아니, 얼마나 자주 다친 것일까. 황후는 그토록 정국을 사모한다고 그동안 말해 왔지만 정작 황제의 상처 하나 제대로 아는 게 없었다. 마음이 아팠다. 그는 제게 상처 준 무정한 사내, 제 마음을 알고도 거부한 차가운 사내였지만, 황후는 여전히 정국이 다치는 게 싫었다.
소소.
황후가 목에서부터 이어지는 상처들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어젯밤 정국이 제 목에 난 상처에 다정히도 입 맞췄던 것처럼. 황후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는 맨살에선 민망한 젖은 소리가 났다. 황후의 갑작스런 행동에 놀라 점점 내려가는 황후의 작은 머리통을 쥐고 이름을 부르던 정국이, 이젠 붉어진 얼굴로 제 입가를 틀어막았다. 황후가 이러는 게 감당이 안 되었다. 그녀의 입술이 맨살에 닿을 때마다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어떤 여인도 이렇진 않을 것 같았다. 정국의 입에서 끝내 성마른 신음이 흘러나왔다.
皇后
列傳
“폐하, 백재인 마마께서 드셨습니다.”
갑작스런 백야의 등장이었다. 놀란 황후가 급히 침상에서 일어나려 했다.
“황상…!”
이렇게 된 거 서둘러 옷을 입고 황후전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팔을 잡은 정국이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왜이러냐는 듯 살짝 원망 섞인 눈으로 정국을 보았지만, 그럼에도 끄떡 없었다. 오히려 정국은 황후를 좀 더 당겨 제 품에 끌어안았다. 정국의 너른 품에서 고개를 파묻게 된 황후가 발짝 상기된 뺨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안에 황후께서 계시니, 돌아가라 이르겠….”
“아니, 백야를 안으로 들여라.”
정국이 왜 다시 자신을 끌어안았는지도 영문이었지만, 백야를 이 처소 안으로 들이겠다는 말에 화들짝 놀란 황후가 고개를 품에서 떼고 정국을 보고자 했다. 그러나 정국은 살짝 힘을 주고 황후의 뒷통수를 눌러 그러지 못하게 만들었다.
“대체 왜이러십니까!….”
“가만있어.”
정국은 당장 황후의 귓전에다 사근사근 읊조리며 황후를 진정시키려 했다. 기어코 처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주던 궁녀들도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안으로 들어서던 백야는 더 놀라 움직이던 발걸음을 잠시 멈췄다. 백야의 눈에 당황스러움이 가득했다. 황후가 함께 있을 것이라 예상은 하였지만, 저렇게… 황제의 품에 꼬옥 안겨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잠시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던 백야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손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황후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그녀를 안고 있는 황제의 얼굴이 보였다. 분을 못이기고 서있던 백야가 정국의 시선이 급히 무릎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폐하!”
“백재인이 무슨 일이지?”
백야의 음성이 들리자 품안의 황후가 몸을 바르작 떠는 게 느껴졌다. 그런 황후를 달래기라도 하듯이 정국이 등허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백야는 당장 눈앞에서 벌어지는 그 손길과 행태에 단전에서부터 당혹감과 분노가 올라왔다. 허나 감히 그것을 황제의 앞에서 티낼 수는 없었다.
“무슨 일로 왔냐고 물었는데.”
백야가 한참동안 황제의 질문에 답하지 않자, 정국이 싸늘한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사실 백야에게 특별한 이유 같은 것은 없었다. 그냥 정말 황제가 황후와 합방한 것이 맞는지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대명전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그것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 다른 변명거리를 찾느라 백야의 작은 머리통이 바쁘게 굴러갔다.
“그, 그것이….”
“…….”
“신,신첩이 지난 번 독을 먹은 이후로 여전히 배가 당기고 너무 아파서… 그래서, 태의를 청할까 하고요!….”
“…….”
“태의는 폐하를 치료하는 사람이니, 폐하께 허락을 맡아야, 그래야 할 것 같아서….”
방금 다급하게 지어낸 변명치고는 그럴 듯한 변명이었다. 황제가 무미건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해도 좋다.”
또 무미건조하게 말하면서 황후의 뺨에 입술을 찍어 눌렀다. 외설적인 소리가 났다. 얼굴이 붉어질 대로 붉어진 황후는 더 간절히 이 순간이 끝나길 빌었다. 반면 백야의 얼굴은 이젠 숨길 수도 없을 만큼 일그러졌다.
“…허면 신첩은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백야의 공허한 말에도 황제는 대꾸 한 번 않고 백야를 보지도 않았다. 지금 당장 그의 시선이 쏠린 것은 황후였다. 정국은 저만 황후를 내려다 볼 수 있게 황후의 얼굴을 제 품에서 살짝 떼어내곤, 다정히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조금 선명하게 보이는 황후의 눈이 눈으로 비난을 하고 있었지만 그는 멈춤 없었다. 끝내 비참함에 고개를 떨구고 주먹을 꽉 쥔 백야가 물러갔다. 그녀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처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황후가 힘을 주어 정국을 밀어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황후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붉어진 낯으로 소리쳤지만 정국은 그저 작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대가 못 다한 복수?”
“그걸 말이라고….”
실없는 말을 하는 정국에 깊은 한숨을 내쉰 황후가 정국의 가슴팍을 퍽 쳤다. 꽤 매운 손길에 진심으로 아프다는 얼굴을 한 정국이 엄살을 피웠다. 아주 오랜만에 황제의 처소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皇后
列傳
“그래서 지금, 망국의 유민과 손을 잡자는 건가?”
대승상의 사가에선 때 아닌 회의가 열렸다. 대승상과 문하시중 윤기를 주축으로, 조정에서 대승상의 뒤를 따르는 대부분의 관료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대승상에게 목숨을 빚졌거나, 재물을 빚진 자들이었다. 그래서 저들과 이해관계만
맞는다면 얼마든지 대승상에게 복종할 준비가 되어있는 이들이었다. 그럼에도, 망국인 진나라의 유민들과 손잡고 역모를 일으키자는 주장은 섣부른 동의를 얻어내긴 힘들었다. 아무래도 위험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렇습니다. 진나라 유민을 이용해야 합니다.”
“자네 지금 그 유민들과, 우리의 사병을 이끌고 황제와 내전이라도 벌이자는 말인가?”
윤기의 의중을 묻되, 상당히 아니꼽다는 어투로 예부령이 물었다. 윤기는 어떤 감정도 내비추지 않고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 미쳤군. 지금 황제를 몰라? 전장에 나가면 적게는 수백 많게는 수천을 혼자 도륙 내는 게 황제일세! 그런 황제와 이 도성에서 내전이라니, 승산 없는 싸움이야.”
“그렇네. 마땅히 역모를 일으킬 명분조차 없으니 민심 역시 황제를 향할 것이야.”
대부분의 의견은 역모를 일으키기엔 역량에서도 딸리고, 명분도 없어 무리라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윤기는 고개를 저었다. 윤기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그 늙은이들을 반드시 설득시킬 자신과 의무가 있었다. 여즉 대승상은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아무말없이 있었다.
“그 뭐야, 황후께서 어제 황제와 합방을 했다시지 않아. 그러니까 좀 기다려 보세. 갑자기 역모를 일으켰다간 우리 전부가 죽을 수도 있음이야!”
이부령이 탁상을 치며 한 말에, 이번에는 윤기의 얼굴에도 미묘한 균열이 일었다. 합방. 그러고보니 어제가 황후의 합방 날이었다. 이번에도 황제는 기어코 피해갈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 예상이 빗나간 모양이었다. 계획에 없던 말에 윤기의 심사가 잠시 뒤틀렸지만, 이내 태연한 얼굴을 한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진나라 유민들의 병력은 가히 도움이 될 것입니다. 어쩌면 아무리 전쟁영웅인 황제라 해도, 그들을 다 감당하긴 어려울 것이에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나라 잃은 자들의 울분과, 설움, 그리고 뼈에 새기는 그 원한을 아십니까? 어쩌면 진나라 유민들이 우리 사병보다 더 치열하게 싸울 것입니다.”
안그래도 진나라를 복속시킬 때는 여지껏 주나라가 다른 국가와 전쟁을 할 때보다 훨씬 더 애를 먹었다. 그들의 저항이 상상 이상으로 거셌기 때문이었다. 이미 패배가 확정된 상황에서도 진왕제와 그의 백성들은 끝을 모르고 싸웠다. 그건 대신들도 수개월간의 전쟁을 직접 보고받으며 느낀 것이었다. 윤기의 말에 잠시 대신들이 할 말을 잃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찌 그것만 믿고 황제에게….”
“익주에 아버님의 병력 10만 정도가 더 있습니다.”
“…뭐?!”
“그러나 이 역시 황제에게 들켰기 때문에 언제 관군에 귀속될지 모릅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어르신!”
순식간에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목숨 걸고 온 힘 다해 싸워줄 진나라 유민과, 대승상의 무소불휘한 사병의 수, 이정도 패면 어느 정도 걸어볼 만했다. 대신들이 웅성웅성 거렸다. 해볼만 하다는 의견과, 그래도 위험하다는 의견이 상충된 것이었다. 그 와중에 다시 예부령이 질문했다.
“헌데 진나라 유민들을 어떻게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거지? 그들의 입장에선 우리도 똑같이 자신들의 나라를 망하게 한 주나라 관리일 텐데.”
합리적인 반문이었다. 다른 대신들도 그게 궁금하다는 듯이 윤기를 바라봤다. 윤기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우리만으론 안 됩니다. 주나라 귀족들이 어찌, 한 품은 진나라 유민들을 설득할 수 있겠습니까.”
“허면….”
“대신,”
“…….”
“다른 이가 우릴 도울 것입니다. 존재 자체로도 명분이 되고, 진나라 유민들을 모을 힘이 있는 자가요.”
그렇게 말한 윤기가 옆으로 걸어갔다. 탁상 한 가운데서 주도적으로 회의를 이끌어가던 윤기가 옆으로 물러가고, 그의 뒤에 있는 병풍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마치, 자신을 소개하기까지를 잠시 기다렸기라도 한 듯한 등장이었다. 대신들이 일제히 숨을 죽이고 그쪽을 바라봤다. 까만 장포를 두른 이는 옷에 얼굴이 가려 당장은 모습이 드러나지 않았다. 온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그 자가 천천히 장포를 벗었다. 빛 아래에서, 얼굴이 드러났다.
“아니, 저 이는…!”
새하얀 여인의 얼굴이었다. 당연히 사내를 생각한 대신들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가득 들어찼다. 어딘가 살기가 어린 것 같기도 하고, 단단하고 무정한 듯한 눈빛의 여인이 대신들을 쭉 훑어보다가 윤기를 바라봤다.
“진왕제의 여식, 망국 진나라의 공주 태화입니다.”
태화의 눈동자가 복수심에 일렁였다.
태화 = 태형의 누이 = 진나라 공주 =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4화에서 지민이가 죽인 상장군의 정인 모두 동일인물입니다(태화가 윤기와 어떻게 손을 잡게 되었는지는 다음화에 나와요!)
+ 앞부분의 두 장면은 과거 일입니다! 4화에 나왔던 부분과 이어져요.
여러분.. 제가 얼마 만이죠..? 진짜 석고대죄라도 해야 할 판인데 뭐라 드릴 말씀도 없습니다, 다만 기다려주셔서 너무 감사하다는 말밖에는요ㅜㅜ 변명을 하자면 일단 현생이 너무 미쳐버렸고,, 써놓은 것을 수정하고 덧붙이던 지난 화들과는 다르게 처음부터 쌩으로 써야한다는 부분이 시간을 이토록 많이 잡아 먹었습니다 죄송해요..ㅠㅠ(심지어 재미도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머리 박아..) 다음화가 또 언제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꼭 완결내고자 노력할게요. 여러분도 느긋하게 봐주세요.. 그리구 말씀드리자면 요번 화가 앞으로 있을 10화 중에 제일 달달한 화입니다. 정국이 후회가 끝났냐구요..? 아니요.. 그냥 앞으로도 정국이는 계속 후회길만 걸을 거예요ㅋㅋㅋㅋㅋ 스포아닌 스포를 하자면 태형이도 후회할 거예요.. 이젠 그 누구에게도 친절하지 않은 소소를 보실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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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금은 천천히 추가할게요. 그럼 다음화 올라갈 때 다시 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