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일곱의 순간
“아, 더워-“
정우는 중얼거리며 대청마루 바닥 위로 드러누웠다. 작년보다 퍽 빨리 찾아온 여름의 푹푹 찌는 열기는 여느때보다 매서웠다. 돌돌 돌아가는 선풍기 소리와 나무에 들러붙어 목청껏 제 존재를 알리는 매미 울음소리가 유일하게 정적을 매꾸었다. 한참이나 바닥에 드러누워 멍하니 빈 천장을 올려다보던 정우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허한 시야 속에 곧 네가 담겼다. 주변의 소음이 아득히 멀어진다.
정우의 입가에 나른한 미소가 퍼졌다.
‘정우야!! 우리 냇가에 갈까?’
‘더워. 정우야, 아이스크림 먹을래?’
‘너네집 오는 길에 넘어졌어. 이거 봐. 무릎 다 까졌어.’
무료한 하루를 빠짐없이 채우던 너와 추억은 떠올리기만해도 한결같이 아름다웠다. 너의 움푹 파인 보조개. 내 손을 잡아 끌던 작고 야무진 손. 울상을 지으면 축 내려가던 눈꼬리. 무언가에 집중할 때마다 마중나오던 입술. 나의 여주.
언제쯤 네가 다시 오려나. 우리가 20살이 되던 해, 마을을 떠나며 내 품에서 펑펑 울던 네가 떠올랐다. 눈가에 눈물을 잔뜩 매달고, 매년 찾아오겠다며 새끼 손가락까지 꼭꼭 걸어잠그고 떠난 네가 가끔씩 조금 원망스럽긴 했다. 김여주. 왜 약속 안지켜. 너 못본지 벌써 3년이 지났어. 그동안에 우리는 벌써 스물 일곱을 마주했다.
정우가 눈커풀을 들어올렸다. 정우의 큼지막한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이렇게하면 너가 만져질까 싶어서. 물론, 저가 먼저 찾아갈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뭐 어쩌랴. 에어컨도 없는 이 촌구석에서 스마트폰? 바랄 걸 바라야지. 집전화로 간간히 여주와 연락을 주고받고는 했는데, 별안간 여주가 번호를 바꾼 모양인지 그마저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보고싶다. 여주야.”
목소리라도 듣고싶은데, 그래서 가끔 이렇게 사무치도록 그리워 질때도 있다.
아무튼. 정우는 항상 이렇게 아련한 기억을 붙잡으며 여주를 더듬을 뿐이었다. 아, 종종 너의 행복을 빌기도 했다. 밤하늘에 수놓은 별들을 올려다보며, 우리 여주 행복하게 해달라고. 너의 길에는 비탈길 없이 좋은 일들만 가득하라고. 제가 기억하던 그 어여쁜 미소가 영원하기를. 밤의 별들이 마치 너의 눈동자와 같아서, 정우는 구름 한 점없이 까만 하늘에 별들이 수없이 떠오를때면 그렇게 빌었다.
나는 너를 떠올리기만해도 이렇게 행복하니까. 그거면 됐어. 여주를 떠올리는 정우의 낯빛에 여전히 밝은 빛이 감돌았다.
“정우야!”
아, 생각보다 여주 네가 많이 그리운가 보다.
난데없이 들려오는 여주의 목소리에 정우는 피식 웃고 말았다. 이젠 환청도 들리네. 허공 위로 잠시 멈칫한 정우의 손이 다시금 움직였다. 여주를 그리는 듯한 그의 손이 유연하게 바람결을 타고 흘렀다.
“울 깡아지, 거기 누워서 뭐해.”
울 깡아지. 종종 여주가 저를 부르던 애정어린 별명. 정우는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급하게 고개를 틀면, 곧 낮은 대문 위로 자리한 조그마한 머리통이 시야에 담겼다. 여주다. 저 말간 웃음의 사랑스러운 존재는 여주가 분명했다.
“정우야, 나 왔어.”
“……진짜 여주야?”
“응. 진짜 나야.”
빨리 이리와서 안아줘.
여주의 말이 어릴 적 달리기 출발 총성이라도 된 양, 정우가 한달음에 여주에게 달려갔다. 퍽 급한 모양인지, 신발도 채 신지 못한 그의 맨 발바닥이 매마른 흙바닥 위를 아무렇게나 내달렸다. 빠르게 대문을 빠져나온 정우가 여주를 한 품에 껴안았다. 정우는 정신없이 그녀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 힘에 못이겨 살짝 뒤로 밀려난 여주가 푸스스 웃으며 제 어깨 위로 놓인 정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강아지. 나 많이 기다렸나보네. 여주가 중얼거리며 일정한 간격으로 정우의 넓다란 등을 토닥였다. 그녀의 말에 정우는 여전히 여주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무 오랫동안 기다렸어, 나. 정우는 팔로 감은 여주의 허리를 바짝 잡아당겼다. 이제 그들의 사이엔 조그마한 그 어떤 틈도 존재하지 않았다.
정우는 지난 3년의 공백을 그렇게 채웠다.
/
“어떻게 지냈어?”
조금 늦은 안부인사에 여주는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오랜만에 누워보는 정우의 집 대청마루 바닥의 차가운 온기가 등 뒤로 여실히 느껴졌다. 아 좋다. 이 얼마나 오랫동안 잊혀졌던 나른한 오후인가. 여주는 몸을 뒤척이다 옆자리에 누워있던 정우의 허리에 팔을 휘감았다. 그럼 정우는, 익숙한 듯 여주의 목 아래로 제 팔을 끼워넣었다.
“잘 못지냈어, 나. 보고싶었어 정우야.”
“근데 왜 연락은 안했어?”
“너 걱정할까봐.”
편안한 정우의 품 속에서 여주는 눈을 감았다. 정우는 그런 여주를 쉴새없이 눈에 담았다. 꼭 감은 눈커풀 아래로 웅얼거리는 입술이 꽤 귀엽다 생각했다. 정우는 반대편 손으로 여주의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힘들었구나, 우리 여주.”
“조금.”
“좀만 더 빨리 오지.”
그럼 내가 위로해줄 수 있었잖아.
3년이나 끊긴 시간을 정우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여주도 그를 그다지 원치 않은 듯 해서. 정우는 여주의 목 뒤로 꿴 손을 빼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그리고는 토닥토닥. 여주의 어깨부근을 일정한 간격으로 슬며시 두드렸다. 마치 위로라도 해주듯이.
그런 정우의 다정함이 늘 좋았다. 이렇게 함께하기만 해도 늘 위로가 되는 사람. 그가 바로 김정우의 존재였다. 정우가 저에게로 달려오던 그 순간, 여주는 도시의 그 모진 각박함을 순식간에 잊을 수 있었다. 여주가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자 바로, 정우의 다정한 눈동자와 시선이 얽혔다.
비로소 숨이 터진다.
“이번엔 꽤 오랫동안 있으려고.”
“얼마나?”
“이번 여름내내.”
여주의 말에 정우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짧막하지만 솔직한 대답에 여주가 웃었다. 착하네. 우리 깡아지. 궁금한게 많을텐데. 말을 삼키며 정우의 까만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손틈 사이로 부드러운 머리칼이 낱낱이 흩어졌다. 오자마자 제 집이 아닌, 정우를 제일 먼저 만나러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주의 입술이 다시한번 움직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신이나 있었다.
“우리 냇가도 가고, 자전거도 타고, 다 하자.”
“응.”
“아, 오랜만에 학교도 가보고 싶어.”
“좋아.”
“그 다음,…….”
“밤에 슈퍼 앞에서 아이스크림도 먹고?”
“응 맞아!”
정우와의 추억을 되새김하듯 바쁘게 중얼거리는 그녀의 말에 정우의 두 눈이 예쁘게 휘어졌다. 내가 그를 잊을리 있나. 잠시 멈칫하며 귀엽게 눈동자를 굴리는 그녀에 이번엔 정우가 입을 열었다. 매일 밤, 약속이라도 한 듯 찾던 동네 슈퍼. 각자 아이스크림을 손에 하나씩 들고 나누던 이야기들. 오늘은 누구네 집 강아지가 새끼를 낳았다더라. 오늘 상일이 아저씨가 크게 넘어져서 이빨이 부러졌대. 오늘 지각할 뻔 했는데 너때문에 살았어.
뭐,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들. 그리고 마지막엔 늘,
“그래서. 정우야, 그동안 행복했어?”
오늘도 행복했어?
하고 말간 미소와 함께 묻던 너의 말. 나는 그 미소에 홀려 항상 같은 대답을 내놓을 수 밖에 없었다.
“응. 너 덕분에.”
네 생각하면서. 나는 늘 행복했어.
/
시간은 속절없이 빠르게만 흘렀다.
그동안에 정우와 여주는 밤이면 함께 동네 슈퍼 앞 정자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물었고, 낮이면 냇가에, 가끔 서로의 밭일을 도와주기도 하며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리고 오늘은 함께,
“오랜만에 학교 오니깐 너무 좋다.”
한때 그들이 머물렀던 그 곳에 왔다.
마을과는 조금 먼 시내 안에 있는 학교라, 늘 그랬던 것처럼 자전거를 끌고서는. 몇년이 지나도 자전거를 타지 못하는 여주를 늘 그랬던 것처럼 뒷안장에 태우고서는. 조금 늦은 시각이라 불이 다 꺼진 학교가 무섭지도 않은지,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안장에서 내려 쏜살같이 운동장으로 뛰어갔다. 그런 여주를 보며 실실 웃던 정우도 자전거에서 내려 그녀의 뒤를 따랐다.
“여주야, 넘어져. 천천히 가.”
다정한 걱정과 함께 말이다.
그 걱정이 무색하게도 해맑은 미소와 함께 뛰어간 여주가, 이내 운동장에 굴러다니던 축구공을 집어들었다. 그를 빤히 내려다보던 여주가 곧 긴다리로 휘적휘적 가까이 다가온 정우를 올려다봤다.
“정우야, 아직도 축구 좋아해?”
“축구 재밌지.”
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촌마을 학교이기에 학년마다 반도 딱 하나. 그래서 늘 함께하던 학창시절 속 떨어져있던 유일한 시간이 바로 체육시간이었다. 축구를 좋아하는 정우가 운동장을 뛰어다닐 동안 여주는 벤치에 앉아 그를 응원하고는 했다. 그때 정우 참 멋있었는데. 여주는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옛기억 속을 허덕였다.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던 행복한 시절. 나는 왜 이렇게 나약해졌을까. 여린 입술을 잘근잘근 짓이겼다. 그런 여주를 말없이 내려다보던 정우가 여주의 손에 들려있던 축구공을 뺐어들었다.
“여주야. 축구 해볼래?”
“응? 나 축구 못해.”
“내가 알려줄게.”
더이상의 대답은 필요 없다는듯, 정우는 발 밑에 축구공을 내려놓고 신발 밑창으로 공을 굴렸다. 가자, 여주야. 정우의 말에 여주의 발이 그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우의 공을 뺐으려고 아등바등. 정우는 뺐기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운동장을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둘의 입가에서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마치 그 시절, 그 기억처럼.
잊고있던 행복에 젖었다. 곧 여주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주춤거리던 그녀의 두 발이 이내 땅바닥에 붙어버린듯 멈춰섰다. 그에 맞춰 정우의 뜀박질이 멈춰섰다. 여주는 자리에 웅크려 앉아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울음이 새어나온다. 왜 그 행복을 잊고있었을까. 무엇이 나를 이렇게 이렇게 만들었는가. 그 견디기 힘든 비애가 갑작스레 온 몸을 휘감았다.
“여주야,…”
정우가 빠르게 여주 곁으로 다가왔다. 안절부절,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여주의 곁을 맴돌던 정우가 결국 그녀의 앞에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큰 손으로 여주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축축하게 젖은 그녀의 눈동자와 시선을 맞추었다. 유리구슬 속에 제가 가득찼다. 가슴이 아렸다. 정우의 입꼬리가 한 없이 떨어졌다. 그녀의 눈가를 조심스레 쓸어내리는 손가락은 한없이 다정했다.
“울거면,”
“……”
“혼자 울지말고 기대.”
여주의 몸이 쓰러지듯 정우의 품 속에 들어왔다. 그 조그마한 몸을 정우는 단번에 끌어안았다. 정우의 어깨 위로 얼굴을 묻은 여주가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네가 행복하길 바랐는데, 그 기도가 하늘에 닿지 않은 모양이다. 조금 더 간절하게 빌어볼걸. 정우는 생각했다. 와중에도 여주를 토닥이는 손길은 멈출 기미도 없었다.
아프다. 네가 아프면 내가 더 아파. 너를 짓누르는 무게가 얼마일까. 그 무게가 얼마든 될 수 있으면 자신이 대신 짊어지고 싶었다. 정우는 가늘게 떨리는 여주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여주의 울음소리가 쓸쓸한 적막을 채웠다.
/
“그거 뭐야?”
“술.”
정우가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집에 돌아오는 길, 별안간 슈퍼 앞에서 자전거를 세운 정우가 사온 것은 다름아닌 맥주 두 캔이었다. 정우는 슈퍼 앞 정자에 앉아 옆자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뭐해, 앉아. 여주가 홀린 듯 정우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술 마시고 자전거 타면 코 깨질걸?”
“내려서 끌고가면 돼.”
“아직 집에 도착하려면 멀었는데?”
“날 새서 걷지, 뭐.”
정우의 대답에 여주가 피식 웃었다. 여전하다. 너는. 정우가 건낸 맥주캔을 건내받으며 여주가 중얼거렸다. 여주가 모를리 없었다. 원체 술을 입에 대지않는 그 성정에 정우가 이러는 이유를. 분명, 방금 전 자신의 눈물이 내내 마음에 걸렸을테지. 늘 그리웠다. 저 대책없는 다정함이. 여주가 맥주를 입에 한모금 머금었다. 곧 식도를 타고 흘러들어온 차가운 온도가 온 몸에 스며들었다.
“정우야.”
“응.”
“나 다 때려치우고 여기서 살까.”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까만 하늘을 빈틈없이 메꾼 별들이 시야에 담겼다. 정우는 그런 여주의 옆모습을 말 없이 바라보다 그녀를 따라 밤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정자 위로 아무렇게나 놓인 그녀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쳤다. 그러자 온 몸에 감돌던 찬기가 멎었다. 그리고 곧 그 공허가 정우의 따스함으로 채워졌다. 여주야. 하고 정우의 다정한 미성이 귓가에 안주했다. 언제들어도 편안한 그 목소리. 여주의 눈가에 그쳤던 빗물이 순식간에 차올랐다.
“너 하고싶은대로 해.”
“……..”
“여주야, 난 말이야. 밤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매번 기도했어.”
“……..”
“네가 행복만 알게 해달라고.”
여주가 고개를 돌려 정우를 담았다. 곧 정우도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끈질기게 두 시선이 얽혀들었다.
정우의 입꼬리가 짙은 호선을 그으며 휘어졌다.
“여주야,”
“…….”
“너는 내 별이야.”
“…….”
“매번 빛나게 떠오르는.”
아프지마. 내가 대신 아플테니까. 내 행복을 다 앗아가도 좋아. 그러니깐 넌 빛나게 살아. 그리고 어느순간 나에게 떨어지는거야. 그게 언제든 품을게. 내 품 속에서 네가 또 빛날 수 있도록.
/
안녕하세요. 달이랑입니다:)
이번에는 타락천사가 아닌 단편으로 찾아왔네요!
사실 이 단편을 상편, 하편으로 나누어서 좀 더 길게 써볼까 했는데요,
뭔가 망글삘이라 그냥 단편으로 했습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원하신다면 하편으로도 찾아올게요>< 댓글로 의견 부탁드려용!
타락천사는 지금 쓰고 있는데요, 여주의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아직 고민중이라 계속 늦어지네요ㅜㅜ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ㅎㅎ
다음은 꼭 타락천사로 찾아뵐게요!
오늘도 부족한 글 재밌게 읽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한주 무사히 즐겁게 보내시고, 곧 다시 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