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과 다정 그 사이
by. 워커홀릭
무대뒤는 어둡고 정신이 없었다. 현빈이 곧 무대에 올라 갈 차례가 되어, 자리를 옮기는 순간 내 옆에 있던 조명기가 휘청하면서 내쪽으로 기울었다.
그 순간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어어!' 하는 소리와 함께 조명기에 맞을 줄 알고 눈을 질끔 감았는데 현빈의 '괜찮아?!'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다행히 누군가 조명기를 잡아 맞지 않았지만, 뒤돌아서 상황을 본 현빈이 바로 내게 달려온거다.
"괜찮아???"
"...네..!!"
"진짜 괜찮아? 안다쳤어??"
몸에 닿지도 않았는데 누가보면 큰사고라도 난 줄 알만큼 현빈은 날 살펴보며 걱정해준다. 현빈이 올라가야 할 차례가 되어 금방 무대로 가야했지만 순식간에 끝내고 내려와 다시 나를 걱정한다.
"병원 안가도 돼?"
"ㅋㅋㅋㅋㅋㅋㅋㅋ오빠..ㅠㅠㅠㅠ 닿지도 않았어요ㅠㅠㅠㅠ"
"그래..? 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안다쳤어?"
"네ㅠㅠㅠ"
"그럼 다행이고"
나도, 현빈도 그 조명기를 잡은 건 하정우라는 걸 몰랐다. 아, 현빈은 다 봤으니까 알고 있으려나.
-
시상식을 끝내고 회식까지 갔다가 새벽에 들어와 눈을 떠보니 벌써 3시다. 요새는 일어나면 습관적으로 인터넷을 켜고 나도 모르게 '현빈'을 치며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도 네이버에 '현빈'을 쳤는데 어제 의상 진짜 멋있다는 반응이 제일 많이 보인다. 그 중, '현빈 스타일리스트'라는 글이 눈에 띄어 들어가보면 얼마전에 광고 촬영하던 날 현빈 움짤이 잔뜩 있다. 아마 메이킹 필름으로 올라온 것 같은데.
'김태평 눈빛 뭐야..? 누가 스타일리스트를 저렇게 쳐다봐;;'
'와... 현빈이랑 스타일리스트 사이에 서사 오조오억개잖아'
'눈빛봐라~ 좋아하네'
에...? 현빈 눈빛이 어땠길래; 하고 움짤들을 자세히 보면
..인정.
.
..이거 뭐 내가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눈빛이 사연이 많아보이기는 하네... ㅋㅋㅋㅋㅋ.... 혼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게 너무 어이없어서 헣.. 하며 움짤을 계속 보고있는데 마침 또 현빈한테 카톡이 온다.
[일어났어~~?]
-네! 방금 ㅎㅎ
[ㅋㅋㅋㅋ하루종일 잤네]
-오랜만에 쉬잖아요..ㅠㅠ
[그럼그럼. 쉬어야지 ㅎㅎ]
-오빠는요?
[운동 갔다가 이제 집 가는중]
-와.. 운동을 갔다구요..? 진짜 대박이다
[ㅋㅋㅋ밥 먹어야지]
-음.. 일단은 귀찮아요.. 오빠는 밥 먹었어요?
[이제 먹으려구]
-뭐 먹으려구요?
[글쎄. 뭐 먹고 싶어?]
-저요? 음.. 저는 지금 초밥 먹고싶어요
[초밥 좋아해?]
-네!!! 완전!!! 조금이따 시켜먹어야겠다요
[겠다요? ㅋㅋㅋ]
-ㅎㅎㅎ
내가 할 말 없게 답장해서 끊긴 줄 알았는데 10분정도 지났을까, 현빈한테 전화가 걸려온다.
"여보세요!"
-집이지?
"네~"
-잠깐 내려 올 수 있나?
"네..? 지금이요????"
-응. 초밥 먹고 싶다면서
"아..?"
-내려와서 가져가~ 그냥 지나가는길에 있길래 사온거야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말한 후, 대충 씻고 나와서 쌩얼인척 눈썹만 그리고 마스크를 쓴채 슬리퍼 끌고 나갔더니 집 바로 앞에 차가 서있다.
'똑똑-'하고 창문을 살짝 두드리면 현빈이 창문을 내리고 날 쳐다본다.
"조금만 기다리라면서 30분이나 기다렸어"
"앜... 죄송해요ㅠㅠㅠㅠㅠ"
"까먹은 줄 알았잖아"
"ㅋㅋ큐ㅠㅠㅠㅠㅠ"
창문 너머로 초밥을 건네주는 현빈에 우물쭈물하다가 그래도 이대로 보내는 건 아닌 것 같아 '그..!'하고 말을 꺼낸다.
"오빠도 밥 안먹었으면..! 그.. 같이... 음..."
"같이 먹자고?"
"...네...! 집에서... ㅎㅎ... 괜찮으시면..."
"집에서?"
"...역시 별로겠죠? ㅋㅋ..ㅎㅎㅎ.."
"좋은데?"
.
결국 현빈이랑 같이 집으로 올라와 거실에 현빈을 앉혀두고 셋팅을 하는데 현빈이 '혼자 사는데 집이 넓네' 라며 말을 걸어온다.
음.. 그치, 이 집은 나 혼자 살기에 내 능력에 비해서는 많이 크다. 하정우가 해줬으니까..
"ㅎㅎ.. 어쩌다보니..."
어색할것 같았는데 나름 어색하지 않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밥을 다 먹고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전화 오는데!'하며 소파에 있던 내 핸드폰을 가져다 주는 현빈이다.
핸드폰을 건네받아 아직도 울리는 전화를 확인하는데 발신자는 하정우였다. 이걸 받아야하나 말아야하나 죄진사람마냥 핸드폰만 붙잡고 현빈 눈치를 보자, '편하게 받아' 하며 자리를 피해준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집이야..?
"네"
-어.. 그때 두고 간 수트- 지금 가져가도 되나?
"알았어요. 근처 와서 연락하면 내려갈게요"
-그래.
예전에 우리집에 두고 간 수트를 지금 찾으러 온다는 말에 전화를 끊고 방에 들어가 수트를 찾아 갖고나온다. 거실에 앉아있던 현빈이 내 눈치를 보기에 웃으며 '정장 찾으러온다구..ㅎ..'하고 말하면 아아-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빤히 쳐다보는데, 이 눈빛. 아까 아침에 인터넷에서 본 눈빛이다. 사람들 말로는 서사가 오조오억개라는 그 눈빛. 아무말도 없이 한참을 내 눈을 쳐다보는 현빈이 너무 어색해서 내가 먼저 눈을 피해버린다.
"..나 갈까?"
"..."
"같이 있어줄까?"
같이 있어주냐는 말이 왜이렇게 따뜻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실은, 아무렇지도 않은척. 괜찮은척 하고 있지만 다시 하정우를 마주해야 한다는게 벌써 힘들고 떨렸는데..
내가 아무말도 안하자, 거절로 받아들였는지 '갈게 ㅎㅎ'하고 옷을 챙기기에 급한 마음에 손을 살짝 잡았다.
"같이..! .. 같이 있어주세요..."
손을 잡고, 작게 속삭이는 내 말을 들은 현빈은 별다른 반응 없이 '응'하며 다시 소파에 앉는다.
내가 내려갈테니 근처에 오면 전화하라는 내 말은 기억도 안나는지 자연스레 집 비밀번호를 치고 들어오는 하정우다.
그렇게 나, 현빈, 하정우는 우리집 거실에서 삼자대면을 하게 됐다.
"..."
"..."
서로에게 상황설명을 하는것도 웃기지않나.. 아무말 없이 정적이 흐르는 이 상황을 깰 수 있는건 하정우가 이 집에서 나가는 것 뿐이다.
얼른 챙겨두었던 수트를 건네주자, 하정우가 '아. 땡큐-'하며 받아들고 현빈을 살짝 바라보더니 '연락할게.'하며 현관을 벗어난다.
".."
"..."
"연락을 왜 해?"
침묵을 깬 건 역시나 현빈이었다.
"네??"
"이미 끝난 사이잖아. 연락을 왜 하냐고. 넌 안 불편해?"
"아.."
"그걸 왜 다 받아주고 있어"
"..."
그러게. 다 맞는말이다. 불편하고 받아 줄 이유도 없는데 나는 그걸 왜 다 받아주고 있을까.. 할 말이 없어 바닥만 쳐다보고 있자, 현빈이 '아니. 답답해서 그래-'하며 내 눈치를 본다.
내가 계속 아무말 안하고 제자리에 서있자 현빈이 일어나 내 앞에 와서 선다.
고개를 숙여 내 표정을 확인한 현빈은 양손으로 내 볼을 만지며 '왜그래~ 난 그냥 걱정되서 말한건데'하고 안절부절 못하는데 난 오랜만에 느끼는 따뜻한 감정에 나도 모르게 현빈 허리에 손을 두른다.
내 마음 다 이해한다는 듯 또 아무렇지 않게 내 볼에 있던 손을 내려 내 등을 감싸 끌어안아 토닥여준다.
토닥여주는 이 손길이랑 안아주는 품이 너무 따뜻해서, 정말 큰 위로를 건네는 것 같아서 눈물이 핑 돈다. 실은 지난 1년은 너무 지옥같았는데, 그리고 여전히 지옥같은데 기댈 곳이 없어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있던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도 따스하게 날 위로해주는 사람이 생기니 다시는 믿지 않기로 했던 감정들이 올라오는 것 같다.
한참을 말없이 날 끌어안고 다독여주던 현빈 품에서 살짝 벗어나 고개를 들어 얼굴을 쳐다보니 싱긋 웃어보인다.
역시 이럴땐 아무말없이 옆에 있어주는게 가장 큰 위로인 것 같다. 그리고 이걸 누구보다 잘 알고 그렇게 해주는 현빈이 너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