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사, 삼, 이, 일, 땡! 초침이 정확히 여덟시 삼분을 넘기고 딱 5초를 세면 지훈이 집에 도착한다. 지호는 오늘도 칼퇴근을 하고 자신을 보러 온 지훈이 기특했다. 우리 아저씨는 날 너무 좋아해. 지호가 이를 드러내며 입꼬리를 한껏 양 옆으로 끌어 당겨 웃으면, 지훈도 따라서 슬쩍 웃어 보인다. 꼭 신랑을 기다렸던 새색시마냥, 지훈의 서류 가방을 받고, 소파로 걸어가는 지훈을 종종 걸음으로 따라간다. 지훈이 소파에 풀썩 소리를 내며 앉는다. 피곤한지 목을 뒤로 젖히고 잠시 눈을 감는다. 넥타이 선을 따라 시선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간다. 지호는 그 모습을 좋아했다. 평소에는 얼굴의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던 남자다운 목선이 드러나는 순간 지호의 입 속에 괜히 침이 고였다. 들키지 않게 침을 삼키고 지호가 지훈의 옆에 앉았다. "피곤해요?" "응? 아아니." 지훈이 한 쪽 눈만 살짝 떠서 지호를 내려다 봤다. 그 모습에 지호가 또 심장이 내려앉는 설레임을 느낀다. 아, 아저씨 너무 좋아... 지호는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것을 겨우 참아냈다. "근데 너 내가 사준 거 입어봤어?" 아, 그거. 얼마 전 지훈이 옷을 잔뜩 사서 귀가한 적이 있었다. 분명 같이 영화를 보러 갔다가 아이쇼핑을 하던 중 저 옷 귀엽네, 하고 지나치기만 했던 옷들이었다. 지호도 그 때 그냥 응, 귀엽다, 하면서 넘겼던 일이었는데, 설마 그 옷들을 바로 다음 만남 때 선물이라며 들고 오다니. 가격대가 제법 있는 브랜드제품이었기에 지호는 부담스럽다고 사양했지만, 꿋꿋한 고집으로 안 받으면 서운해 할 거라는 애같은 투정까지 부리며 기어이 지호가 지호 손으로 옷장에 집어넣는 것까지 확인한 지훈이었다. 사실 그 날 이후로 한 번도 입은 적이 없었다. 부담스럽다는 2차적인 이유보다도, 1차적으로, 눈으로 대충 봐도 사이즈가 꽤 컸다. 의아했다. 이전에도 지훈이 생일 선물이라거나, 심지어 어쩔 땐 그냥 기분 좀 냈다고도 하면서 사줬던 옷들은 다 입기 난감할 정도로 큰 옷들이었다. 밑에 바지를 입기엔 길이가 어정쩡해 보였고, 반바지를 입는 건 더 이상했다. 처음 선물을 받았을 때는 난감했지만 그래도 성의를 생각해서 지훈이 보는 앞에서 한 번 입은 적이 있었다. 그 땐 혹시 아저씨가 이런 걸 좋아하나, 싶어서 일부러 바지를 입지 않고 '아저씨 나 어울려?' 했었다. 그 때 지훈의 반응은 생각과는 달리 그저 담담한 '응, 괜찮네.' 였다. 지호는 지훈의 모든 것이 다 좋았지만, 이 부분은 아무리 생각해도 항상 의문이었다. 아저씨 나 m 사이즈 입는다니까요. 계속 말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모호한 것 뿐이었다. 어떨 때는 성장기라 옷이 금방 작아질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다가, 어떨 때는 원래 그 옷은 그렇게 크게 입는 거라는 말도 안되는 이유들까지. 그리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큰 옷을 사오고. 패턴 반복. 지훈이 질문의 답이 바로 나오지 않고 우물쭈물 거리는 지호를 응시했다. 그 사이에 지호가 그 옷을 안 입어봤다는 것을 눈치 챈 모양이다. "입어봤냐니까." "으... 아저씨 근데 사이즈가..." "안 입어봤어?" "......" 지훈이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지호는 할 말이 없었다. 기껏 선물을 해줬는데 잘 입고 다니는 것을 보여준 적이 없으니, 지훈의 섭섭한 마음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훈에게 맨 다리를 보여주는 것은 아직 지호에게는 민망한 일이었다. "......" "...안되겠다." 지훈이 몸을 일으켰다. "입고 나와." 아. 설마. 오늘은 꼭 지호가 그 옷들을 입은 모습을 두 눈으로 보겠다는 뜻이었다. 지훈이 지호의 손목을 잡아 끌어 지호의 방 문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뜻밖의 상황에 지호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훈은 단호했다. 얼른. 결국 지호가 한숨과 함께 발을 직직 끌며 방으로 들어갔다. - 지호는 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이 모습을 다시 보여주는 날이 오다니. 지호가 막막한 마음에 발을 동동 굴렀다. 분명 문 밖 거실에서 지훈은 기다림에 지쳐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단순한 민망함인지 혹은 자존심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기분이었다. 이번에 지훈이 사준 옷은 큰 후드티였다. 분명 자신의 취향에도 맞고, 색깔도 무난한 예쁜 옷이다. 사이즈만 어떻게 하면 완벽할텐데. 그러나 실현되지 않을 바람이었다. 으으! 결국 지호가 감정을 못 이기고 작게 소리를 질렀다. "들어가도 돼?" 헉. 설상가상으로 지훈이 지호의 방 문 앞에 서있었다. 놀란 나머지 입만 벌리고 있던 지호에게 마침내 올 것이 오고 말았다. 지훈이 기다림을 못 참고 먼저 문을 열었다. "......" "아... 어..." 지훈의 눈이 잠깐 커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빠르게 스캔. 그제서야 지훈이 만족스러운듯이 웃었다. 지호의 얼굴에 열이 훅 올라왔다. 긴 소매에 덮인 지호의 손가락이 티의 밑단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민망해! 지호가 고개를 푹 숙였다. 지훈은 웃는 걸로도 모자라 이젠 소리를 내며 웃기 시작했다. 눈이 초승달을 그리며 휘어진다. 그러다 지훈은 팔짱을 끼고 노골적인 눈빛으로 지호를 관찰했다. "......뭐." "흐흐. 귀엽네." "진짜 아저씨 같다." "아저씨 맞는데. 우지호의 아저씨." 능글거리는 말투에 지호는 귀 끝마저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하필이면 이와중에 지훈의 목소리는 지호가 제일 좋아하는 잠긴 목소리였다. 고개가 더 밑으로 숙여졌다. 그 덕에 보이는 지호의 정수리와 머릿결에 지훈은 순간 마음이 동해졌다. 지호를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창피해?" "......아니." "어, 안 창피해?" 지훈이 등을 굽혀 지호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이래도?" "......아, 진짜." "응? 안 창피하냐고." 지호가 눈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이리 저리 돌렸다. 끝까지 집요한 지훈의 시선에 지호가 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제서야 지훈이 허리를 펴 장난을 멈춘다. "편한 걸로 입고 나와. 오늘은 외식하자." 지훈이 큰 손으로 지호의 머리를 쓰다듬곤 다시 거실로 나갔다. 지호는 얼굴이 펑 터져버릴 것 같았다. 잠깐 감정의 여운에 멍해져있다가, 지훈이 기다리고 있음을 기억해내고 고개를 도리질했다. 근데 다음에 또 이런 옷 사오면 어떡하지... 지호가 그 때마다 겪게 될 부끄러움을 예상하며 옷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참고로 지훈이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고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는 건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