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형들이 이상하다.
아무리 바빠도 쉬는 날이면 나와 함께 놀아주던 형들이 개인플레이를 시작했다.
물론 나도 가끔씩 국밥이 먹고 싶으면 혼자서 밀양 찍고 오는 홍길동 코스프레를 한다.
하지만 지금의 분열현상은 이런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특히, 저기...
"악!"
"..."
"박찬열, 뭔데?!"
"..."
"야야!!!"
백현형의 발을 밟고도 시치미를 떼는건지,
사과도 없이 무시하고 지나쳐 소파에 앉아 멍때리기 시작하는 찬열이형.
요새 며칠 째 저러고 있는 찬열이형을 한심하게 쳐다보며 쯧쯧, 하고 혀를 찼다.
찬열이형이 언제부터 저랬더라... 그래, 그 날부터다.
오징어에 대해서 무언가 말하려다가 끊은 뒤로 계속 저러고 있다.
왜냐하면 그 때부터 나도 좀 이상해진 것 같거든.
나쁜년... 배신한 것도 모자라 우릴 또 이상하게 만들어놓다니... '^'
처음 회사에 입사했을 때,
회사 구경을 시켜준다던 실장님이 갑자기 급한 볼 일이 생겼다며 사라지셨는데,
실장님을 기다리다가 너무 지루해 혼자서 회사 구경을 하기로 했다.
치, 건물이 다 거기서 거기지. 라는 생각은 정말 안일한 생각이었다.
가는 곳마다 눈이 왕방울처럼 커지고 입은 쩍쩍 벌어졌다.
여긴... 머지......? (동공지진)
옷을 흠뻑 적실 정도로 땀을 흘려가면서 춤을 추고 있는 형들과
핏대를 세워 노래하다가 콜록거리며 목을 부여쥐는 누나들.
tv에서는 화려하고 편해보이기만 하던 연예인들이 tv에 나오기 전에는 다 이랬던거야...?
혹시 내가 악마에게 꼬여 지옥에 스스로 걸어들어온게 아닌가, 라고 생각할 만큼
형과 누나들은 그렇게 힘든 연습을 계속 하고 있었다.
"와..."
어떤 문을 지나려고 하는데 창문 너머로 어떤 여자애가 보였다.
아씨.. 창문은 왜 이렇게 높아... 쪽팔리지만 까치발을 들고 좀 더 자세히 창문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여자애가 벽이 거울로 된 방안에서 노래에 맞춰 격렬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완전 날아다니네, 날아다녀. 작은 몸인데도 그 여자애가 움직일 때마다 뭔지 모르겠지만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다.
여자애가 춤 추는 것을 그만두고 제자리에 털썩 앉아 숨을 고를 때에도, 난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감탄하고 있었다.
여기에 있으면 나도 저런 춤을 출 수 있을까...?
아주 잠깐 쉬었을 뿐인데 또 일어나서 춤을 추려고 하는 여자애를 빤히 쳐다보다가 난 헉, 하고 숨이 멈췄다.
"..."
"너 누구야?"
"아.. 저..."
갑자기 뒤를 확 돌아본 여자애와 눈이 마주쳤고, 바로 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문을 열더니 누구냐고 묻는데
너무 놀라서 찌질하게 대답도 못하고 입만 뻥긋뻥긋, 했다. 아, 진짜 쪽팔려...
얼굴까지 화끈거리는 것 같아서 얼른 도망치려고 눈을 질끈 감고서 몸을 돌렸다.
그런데 뒤에서 '저기!!' 하는 소리가 들려 뛰려던 것을 멈추고 슬쩍 여자애를 쳐다보았다.
"난 오징어야!!!"
"..."
경계할 땐 언제고 지금은 이빨까지 훤히 드러내고 웃으며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는 그 여자애가,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낯을 전혀 가리지 않았던 그 애와 친해지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장님이라고 하는 아저씨와 얘기를 하고 있을 때, 누가 노크를 하더니 들어온 게 바로 그 애였다.
안으로 쫑쫑하게 걸어들어와 날 본 그 애는 어?! 하고 놀라다가도 베시시, 웃었다.
뭐라 말하지도 않았는데 자기 혼자 알아서 척척, 걸어와 내 옆에 앉은 그 애는 이것저것 물어댔다.
"너가 오세훈이야?"
"..."
"어쩐지 반말하고 싶더라.ㅋㅋㅋ 너 나랑 동갑 맞지?"
"..."
"왜 아무 말도 안 해? 나 기억 안 나? 우리 아까 봤는데??"
옆에서 재잘재잘, 떠들어대는 그 애에 비해 나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아저씨는 그런 나를 보면서 살짝 웃으시고는 그 애에게 나를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괜히 입술이 삐죽 삐져나왔다. 쟤, 나랑 동갑이라며? 근데 뭘 부탁한다는거야...
하지만 나는 생각보다 심각한 찌질이였다.
"저,저리 좀 떠뤄져..."
너무 가까이 붙어 앉은 것 같아 그 애에게 좀 떨어지라고 말을 하려는데,
왜 말을 더듬고 난리... 혀까지 꼬여서 이상한 발음이 새어나와 버렸다.
그 애는 날 멀뚱히 쳐다보다가 풉, 웃음을 터뜨렸고 난 그대로 쥐구멍에 숨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 뿐이었고, 그 애는 아무렇지 않게 내 목에 팔을 둘러오며 손날을 세워 내 머리를 통통 쳤다.
"뭐라고?! 야! 내가 너 선배거든?!"
"아!"
"이 건방진 녀석! 내가 빡세게 굴려주마!!"
".. 이,이거 놔!"
"어쭈~ 어림없지! 따라 와! 다른 사람들한테도 인사해야 할 거 아냐!"
그 애는 팔을 풀고 순식간에 내 손목을 끌어당겼다.
무방비로 끌려나가다가 아차, 하며 아저씨를 쳐다보니까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인자한 얼굴로 바라보고 계셨다.
근데 얘, 여자 맞아? 힘은 왜 이렇게 쎄?!
고민이 생겼다.
요새 눈이 좀 안 좋아진 것 같다.
멀리서 글씨가 안보인다, 뭐 그런 게 아니다.
이래봬도 난 우리 반에서는 시력이 제일 좋은 놈이었다.
"야! 그거 안 내놔?!"
"시른데.ㅋ 넌 그만 좀 먹어."
"아씨, 밥 먹을 땐 개도 안건드리거든?!"
"넌 개가 아니라 돼지잖아, 하루에 밥을 4끼나 먹는 초돼지."
"아니거든!!"
"거짓ㅁ.." "난 5끼 먹는다!!!"
"..."
미치겠다. 절대 귀엽지 않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난 요즘 얘가 너무 귀여워보인다.
그럴 리가 없는데...
우리 학교 일진 잡는 여자같지도 않은 애가,
욕도 잘하고, 돼지같이 먹기만 하고, 연습중독벌레에 애교는 눈곱만큼도 없는 얘가,
왜 귀여워 보이냐고!!!
"어? 오빠!!!"
"아.. 형..."
"꼬마들~ 여기서 뭐하고 있어?"
"꼬마 아닌데..."
"오구오구, 우리 세훈이 키 좀 컸어?"
"컸어!! 2센치나 컸다고!!!"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는 찬열이형이 굉장히 얄미웠다.
자기는 키가 크다고 나는 완전 꼬마 취급이다. 흥. 나는 꼬마 아니야. 쟤만 꼬마지.
찬열이 형을 빤히 바라보던 그 애는 인상을 구기면서도 나에게 말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를 냈다.
"잠깐만.. 오빠도 또 컸지? 씨이.. 왜 자꾸 크냐고!! 맘에 안들어!!"
"에이. 징어가 오빠 좋아하는 거 다 아는데?"
"누, 누가!!!!"
자기도 모르게 애교를 섞어 내는 소리가 거슬렸다. 우웩, 완전 안어울려...
찬열이형의 말에 발끈하면서도 그 애의 볼은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찬열이형도 그게 싫지 않아보였다. 흐뭇한 미소로 그 애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내가 장난으로라도 머릴 건드리면 죽기살기로 덤벼드는 주제에,
찬열이형의 손만큼은 아무말도 없이 받아주는 그 애에게 조금 섭섭하기도 했다.
갑자기 속에서 무언가 몽글몽글하게 뭉쳐지면서, 짜증이 났다.
며칠 전, 그 애의 생일 날에 주려고 고심끝에 준비했던 선물은
파티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고스란히 내 손에 들려있었다.
음.. 역시 목걸이는 좀 오버인가...?
게다가 걔는 악세서리도 잘 안하는데...
케이스를 열어 반짝반짝 빛이 나는 음표 목걸이를 빤히 내려보았다.
다들 우산이라든가, 티셔츠라든가, 아니면 연습용 머리끈을 한아름 안겨주는데 거기서 차마 목걸이를 건네줄 수가 없었다.
현실적인 선물들에 비해서 목걸이에 대한 의미가 너무 특별해보였기 때문이다.
"언제 주지..."
머리를 긁적이며 사옥에 도착한 난 눈으로 그 애를 찾았다.
이 시간이면 분명 연습을 하고 있을텐데... 하지만 그 애는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그 애를 찾다가 발견한 형들에게 다가가려는데,
뭐지? 분위기가 안좋은 것 같은데...
"그게 정말이에요?!"
"응. 오늘부로 징어가 계약해지하고 회사에서 나갔대."
"왜?!"
"나도 모르겠어. 그런 말은 한마디도 없었는데..."
뭐...? 내가 잘못 들은건가?
귀를 의심하면서도 가까워지는 형들의 얼굴이 너무 어두워 방금 들었던 말들을 다시 떠올렸다.
회사에서 나갔대...회사에서 나갔대...회사.. 나갔대...나갔대...
"형들 모여서 뭐해여?"
"아.. 세훈아..."
"응? 준며니형 표정이 왜케 안좋아여? 무슨 일..."
"세훈아. 징어가 회사에서 나간 모양이야."
"..."
아. 역시 잘못 들은게 아니였어.
목걸이 케이스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연락도 안되고, 자취하던 방에서도 이미 짐을 다 뺀 모양이야."
"하."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거야. 젠장!"
"..."
찬열이형이 손톱을 톡톡 깨물면서 폰을 열어 그 애에게 전화를 했지만,
정말 전화를 받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냥 잠깐 잠수 탄 걸 수도 있잖아. 그렇게 생각하는 머리와 달리 가슴은 쿵쿵 뛰고 있었다.
너 뭐야. 갑자기 이렇게 사라지는게 어딨어.
우리, 평생 같이... 같이 가기로 했잖아. 같이 데뷔하기로 했었잖아!!!
손에 쥐고 있던 케이스가 악력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 찌그러져 버렸다. 내 마음과 같이.
그 애가 우리 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지 벌써 3일이나 지났다.
밤마다 그 애에게 전화를 걸어보느라 잠을 뒤척인 나는 무거워진 눈꺼풀을 부릅 뜨고 사옥을 찾았다.
오늘따라 게시판 앞에 사람들이 북적인다.
아.. 오늘 월말평가 결과가 나오는 날인가...
다시 그 애가 떠오른다. 월말평가를 볼 때만 해도 그 애는 아무렇지 않게 우리 앞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했었는데...
회사에서 나갔으니까 결과표엔 그 애 이름도 빠져있으려나?
아니, 게시판에는 그 애가 있었다.
이게 뭐야... 누가, 누가 이 딴 짓을!!!
나는 게시판에 붙어있는 몇 장의 사진들을 보자마자 눈에 불을 켜고 그 사진들을 잡아뜯어냈다.
갈기갈기 찢어내고서야 씩씩거리며 주위에서 숙덕거리는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다 연습 안해요?! 이러고 있을 시간이 어딨다고!"
거의 발악수준으로 외치자 사람들이 그제야 일일이 흩어지면서 게시판 앞이 조용해졌다.
"뭐야, 다들 있었어? 근데 왜 그냥 보고만 있어여?"
"..."
"뭔데.. 설마 다 믿는거야? 그래여?"
그 애가 그럴 리가 없잖아!!! 누구보다 가수가 되려고 노력해왔던 애였다.
쟤는 언제 노나, 싶을 정도로 연습에 매달리던 애였다.
그랬던 애가 어떻게 남자와 딴 짓을 할 시간이 있었겠냐고!!!
"우리도 당연히 아니라고 생각해. 하지만..."
"하지만 뭐여!"
"징어가 우리 앞에서 왜 도망간건지 모르겠다, 난..."
준면형이 얼굴을 쓸어내리며 툭 고개를 떨구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 애는 정말 까도까도 나오는 양파같은 애였던 걸까...
울면서 모든 것을 털어놓겠다고 그 애가 자신을 꾸준히 괴롭혀 왔다고 주장하는 기집애를 어떤 얼굴로 봐야할 지 이제는 모르겠다.
거짓말치지 말라고, 무작정 화를 내며 멱살을 잡기에는 그 애는 나에게서 너무 멀어졌고 다시 돌아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준면이형의 말처럼 언젠가 이런 것들이 모두 밝혀질 줄 알고 우리 곁에서 미리 도망친 게 아닐까, 라고 생각이 먼저 들었다.
우리가 서서히 그 애를 붙잡고 있던 손의 힘을 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애의 데뷔소식을 듣게 됐을 때,
우리는 아예 완전히 그 손을 놓고,
나름대로 피해자가 되어 그 애를 아주 원망하고, 미워하고 있었다.
"형!"
"..."
"맨날 내 말 씹기나 하고, 진짜 때려주고 싶고, 짜증나는 형.."
"... 세훈아. 혼날래?"
"... 뭐야.. 듣고 있으면서 왜 대답안해여."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뭔데요. 형 요즘 이상한 거 알아여?"
"..."
"형, 설마 오징ㅇ.." "엑소 무대 올라갈게요~!!"
쳇. 스태프의 말에 혀를 차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기실에 cctv라도 달았나. 항상 중요한 순간에만 들이닥쳐..
내내 옆에서 시끄럽게 굴던 구미호도 이제 좀 지 방으로 가줬으면 좋겠다.
쟤는 여기가 지 대기실인 줄 아나봐. 다리도 다친 애가 왜 이렇게 잘 돌아다녀?
그 애 앞에서야 예전에 괴롭힘을 당했다고 하니까 조금은 안타까운 마음에 챙겨줬지만,
이제는 좀 귀찮다.
무엇보다 이 기집애를 보면 인상을 쓰고 불편해보이는 표정을 짓기는 하지만,
한 짓에 비해 우리 앞에서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그 무엇도 불안해하지 않는 그 애의 태도는,
확실히 얼어붙었던 우리들의 마음에 혼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제와서 구미호에게 너 바른대로 말하라고 다그치는 것도 웃기고..
나는 아직도 그 애에게 주고 싶었던 음파 목걸이를 가지고 다닌다.
-
세훈아. 하나도 안 웃겨.
그래서 있을 때 잘하라는거야. 후회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얼른 정신차려, 인마.
어쩌면 좋아하는 마음을 가졌던 오세훈이 가장 큰 배신감을 느꼈을 지도..
근데 분명 특별편이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사이다를 주문하시는 거죠...?
그래서 다음 편은 탄산빠진 사이다.
교환/환불은 불가합니다.
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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