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저녁 식사시간, 테이블에 둘러앉은 자매들의 화제는 당연히 다니엘이었다.
"우리 다니엘, 잘 하고 있어야 되는데 말이지... 나는 너희들도 어서 빨리 좋은 사람 만나서 시집을 가버ㄹ...아니 갔으면 좋겠단다."
"얼...다니엘은 우리가 걱정 안해도 잘 하고 있을 것 같아요. 가끔 다니엘이 웃는 얼굴로 비수를 꽂긴 하지만, 물론 내가 보니 알베르토란 사람은 다니엘이 그 얼굴로 욕을 날린다 해도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볼 사람 같았지만, 아무튼 그것만 빼면 얼마나 스윗한 아인지 우리 다 알잖아요?"
"그래, 위안아. 지금 동생 걱정할 때가 아니고 너부터 모범을 보여야지?"
"커헉..."
"엄머머머 위안언니 얼굴 빨개졌대여~!!!"
"사레들려서 그런거거든? 밥이나 머거 로빈."
"히이잉..."
"우리 다니엘 언니...이런 쪽으로는 눈치가 정말 없기에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그만큼 적극적이고 아껴주는 사람 만나서 이제 발 뻗고 잘 수 있겠어. 마침 날씨도 우리 언니를 돕는구나."
타일러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닭고기를 썰었다. 다들 이 집의 진정한 고수는 타일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하며 저녁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타일러는 2층 창가의 늘 앉는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비는 아까보다는 조금 그친 듯 보였다. 창문을 조금 여니 빗물 어린 공기가 향기로웠다.
문득, 타일러는 월계수나무 옆의 그림자를 발견했다.
"또 왔네...오늘은 비도 오는데. 저 사람은 언제쯤 나무 뒤에서 나올까.."
타일러는 며칠 전부터 누군가가 월계수 나무 뒤에 숨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당연히 경계를 했었다. 그러나 우연히 눈이 마주쳤을 때, 얼굴이 빨개지며 나무 뒤로 숨었지만 머리카락이 미처 숨지 못하고 삐죽 튀어나온 그의 모습에 타일러는 살풋 미소를 지었었다.
오늘 오후 시장에서는 사람들에게 천진하게 웃으며 살갑게 대하는 모습을 보았다. 나쁜 사람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 섣부른 판단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타일러는 12살 때 프로이트 심리학 책을 전부 읽었다는 우답 정도는 해 줄 수 있다.
"어라. 사라졌네. 책 다 읽었나."
문득 기욤은 머리 위로 더이상 빗방울이 느껴지지 않음을 깨달았다.
"비가 그쳤나??"
"이렇게 오래도록 비 맞으면, 감기 걸려요."
"으아악!!"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방금전까지 방 안에서 책을 읽던 타일러가 제게 우산을 씌워주며 미소짓고 있었다.
"아이고, 실례했습니다!!!"
말을 마친 기욤은 급히 뛰어갔다. 타일러가 몇 번이고 불러보았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기엔 너무 부끄러웠으리라.
"우산이라도 쓰고 가지."
기욤이 8살 쯤 되었을 때였다.
아버지가 일하시는 대장간에 처음으로 구경을 간 날이었다. 기욤은 아버지의 손에서 이런저런 물건이 탄생하는 모습을 그저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이내 첫 손님이 찾아왔다. 손님은 예쁜 아이들의 손을 잡고 왔다.
기욤은 뚱한 판다같은 아이도, 사슴같은 눈망울의 아이도 아닌, 유독 작고 요정같은 분위기를 지닌 아이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아이는 자신을 자신을 바라보는 기욤을 보고는 이내 웃음지었다.
손님이 떠난 후에도 자꾸만 아이의 웃음이 떠올랐다.
허나 그 날 이후로 그는 아이를 본 적이 없었다. 며칠 전까지는.
며칠 전, 시장에서 유독 요정같은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기욤은 그 아이가 아닐까 생각했다. 이에 자신도 모르게 하던 일도 멈추고 뒤를 따라가 보았다.
운이 좋게도, 집 안으로 들어간 그가 창가에 나타나 책을 읽기 시작했다. 기욤은 그 집 앞 큰 나무에 몸을 숨기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볼수록 그 아이가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 때였다. 2층 창가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기욤은 놀라서 황급히 나무 뒤로 숨었다.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뛰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렇게 그를 바라보기만을 며칠 째. 오늘 그가 자신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기욤은 그 자리에서 바보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도망쳐버린 자신을 책망한다.
아침이 밝아왔다.
"얘들아. 우리가 너무 노린 티가 나면 안 되니까 예의상 누군가 가서 다니엘을 걱정한 척이라도 해야겠다. 위안아, 네가 가렴."
"제가요?"
"응. 네가 언니니깐?"
위안이 알베르토의 집에 도착했을 때, 마침 그 집을 방문한 타쿠야와 다시금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여기서 또 만나네요. 이런 것도 인연이 아닐까요?"
"네. 아닌 것 같아요."
"그런데 왜 그렇게 뚫어져라 보세요. 혹시 제가 너무 잘생겼나요?"
잠시, 아주 잠시, 백마 탄 왕자님이 있다면 저렇게 생기긴 했겠구나, 생각했던 위안은 그런 자기 자신에게 놀라며 진심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지금 자기 입으로 자기가 잘생겼다고 한 거예요? 허!!"
위안은 말을 마치고 집 안으로 쌩하니 들어가버렸다. 타쿠야는 어디선가 많이 겪은 것 같은 상황에 낙담한 모습으로 위안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다니엘!!"
"어머. 언니 왔어?"
다니엘은 거실에서 알베르토와 차를 마시는 참이었다.
"동생이 본의 아니게 신세를 지게 되었네요."
"허허. 신세라니요. 머무는 동안 불편하진 않을까 제가 오히려 걱정했는걸욥."
그렇다기엔 어딘가 모르게 다니엘의 얼굴이 핼쓱해 보였지만, 위안은 기분 탓이려니 생각했다.
"타쿠도 왔는데 같이 식사하고 갈래욥?"
"아니요. 전 집에서 먹고 와서.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 아벨라와 다시 떨어져 있어야 한다닙... 하루 빨리 우리 집으로 데려와야겠어욥."
"아이, 알베도 참."
위안은 동생의 낯선 모습에 두번째로 얼굴을 찡그리며 최대한 빨리 이 집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형, 나도 작업 거는 방법 좀 가르춰줘어..."
위안과 다니엘이 떠나고 난 후, 타쿠야가 알베르토에게 한탄했다.
"걱정 마, 타쿠. 내게 맡겹."
"언니. 타쿠야 씨에게 너무..그 뭐라 하지, 철벽치는 거 아니야? 언니한테 관심있는 것 같던데."
"뭐어? 다니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아니야~ 진짠데??"
"다니엘...그런 쪽으로는 눈치 없다더니..."
"뭐? 누가 그래??"
"아...아니야. 감히 누가 그런 발언을 했겠어."
"빨리 말해 언니^^"
"ㅌ....타일러가..."
"타일러가 그랬단 말이지?^^"
다니엘의 미소를 보며 위안은 집에 가자마자 타일러에게 사죄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집에 도착하니, 그 장본인과 동생들이 모두 부엌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너희... 뭐해?"
"아니 글쎄 아침부터 블레어가 도시락을 싸야겠다는데..."
"난 또 얘가 토마토를 기절시키려는 줄로 알았지 뭐야."
"그게 무슨 말이냐아아악!!! 그 정도는 아니지이!!!!"
"아 깜짝이여!!! 과일이나 이쁘게 깎아."
"힝..."
"으이그, 블레어. 내가 버거 만들어 줄게."
"와아!! 언니 사랑한다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