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진 오빠가 중간 끝나고 시간 있냐는데.”
“있을 것 같은데. 근데 언제 또 ‘오빠’가 됐어?”
“뭐가? 아, 좀 됐어. 이제 선배 아니잖아 졸업했으니까.”
“이상한 규칙이네. 그럼 다른 형들은?”
“걔네는 박지민, 김태형이잖아. 그리고 석진 오빠랑은 나이 차이도 있는데.”
근데 네가 그걸 왜 신경 써?
한가로운 주말 오후였다. 여주와 정국이 주말 오후에 단둘이 만날 일이 뭐가 있냐면, 조별과제. 교양이라고 조별을 피해갈 수는 없다. 교양일수록 조별과제를 통한 협동심 기르기에 혈안 될 확률이 높다. 2인 이상이 한 조를 이루기 때문에 여주와 정국은 말 안 해도 한 조가 되기로 했다.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웃겨. 넌 동갑이니까 오빠 소리 꿈도 꾸지 마라.”
“허, 나 그런 욕심 없거든?”
그리고 나누는 대화는 조별 첫 날에 나누기에는 조금 산으로 가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제멋대로 튀는 대화의 중심을 볼 때마다 정국은 속을 졸였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본심을 자존심으로 눌렀지만 여주의 말과 행동에 저가 스며들었으면 했다. 절대로 싫어할 거라고 예상하면서도 정말로 그런 것일까 봐 겁이 났다. 그래서 자존심을 세웠는데. 자존심을 세우는 여주를 보고 또 도리어 착잡해졌고. 그게 또, 저와 같은 마음에서 파생된 것은 아닐까 가슴을 졸였다.
“커피나 받아오세요, 커피 안 마시는 정국 씨.”
“…….”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지독히도 유치하게 다툰다고.
내가 티낼 것 같아? 자존심이 있지 11
“이상으로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여주와 정국의 조별과제도 끝이 났다. 질의응답이 이어지는 동안 여주는 속으로 식당을 골랐다. 발표도 끝나고, 곧 점심시간이니 맛있는 걸 먹으며 회포를 풀 계획이었다. 투닥거리면서 몇 번이고 산으로 갔던 대화들이었지만 과제는 꽤나 성공적이었으니.
둘은 이제 말하지 않아도 수업이 끝나면 함께 밥을 먹었다. 나란히 앉아 수업을 들었고, 조별과제 뒤풀이라며 상관도 없는 지민과 태형을 불러 술을 마셨고, 시험기간에는 같이 도서관을 가기도 했다. 이 모든 것에는 같은 교양을 듣는다는 전제가 담겨 있었다. 때문에 이제는 사진과 동방보다 패디과 과제실을 더 자주 오는 정국을 지민과 태형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정국과 여주가 둘이서만 무언가를 해도 몰아가거나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지민은 조금 달랐지만.
그 전제가 같은 교양을 들어서가 아니라 정국이 여주에게 마음을 갖고 있어서 라는 걸 지민은 알았다. 다만 이것이 언제까지 갈지 지켜보려 했다. 둘의 일이니까, 관여할 필요도 없고. 김상현 같은 짓만 안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한숨이 터져 나왔다. 너무 답답해서.
서로의 마음이 뻔히 보이는데 정국은 아닌 척했지만 은근히 마음을 흘리고 있었고, 여주는 자기 마음도 모르는 것 같았다. 태형은 둘의 기류를 눈치도 못챘고, 눈치 챈 지민만 속이 터졌다. 이걸 어쩐다. 지민은 지켜보려고 했던 계획을 틀 수밖에 없었다. 여주가 과제 때마다 태형을 갈구던 것과는 별개의 감정으로 갑갑했다. 김상현 같은 놈은 그냥 치면 해결이지만(이러면 안 됩니다) 이런 부분은 또 처음이라. 그래서 지민은 만병의 근원이자 모든 것의 해결책인 술자리를 만들었다. 여주와 지민, 단둘이.
“너 김상현 전에 만난 사람 있냐?”
훅 들어오는 말에 여주가 입에 있던 것을 뿜었다. 말없이 휴지를 건네는 지민의 몸은 이미 의자 등받이에 딱 붙은 채였다.
“뭐 그런 걸 물어 봐?”
“그냥, 우리 만나기 전 정여주는 어땠나 싶어서.”
“과사 탈탈 털어서 봤으면서 뭘 또. 너나 잘해.”
여주가 신경질적으로 소맥을 말며 말했다. 안주가 나오기도 전에 서두르는 손길은 지민의 말에 얼마나 당황했는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묵묵히 소맥을 받아든 지민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상현 전의 연애가 어땠는지 알 수 없었으니 상현과의 상황을 둘러 비교할 생각이었다.
“시작은 좋았어도 끝이 지랄 맞은 것보다, 시작이 지랄 맞아도 끝이 좋은 게 낫지 않아?”
“뭔 소리야.”
여주는 지민이 몇날 며칠을 과제실에 붙어 있어서 돌았나 싶었다. 제 몫의 술을 만 후 잔을 칠 뿐이었다. 짠. 건배소리는 경쾌했으나 둘 사이에 감도는 대화는 썩 쾌쾌했다. 적어도 여주는 그렇게 느꼈다. 지민이 뱉는 말의 의중을 알 수 없었다.
“정국이 얘기야.”
“걔가 갑자기 왜 나와?”
“수업 같이 듣는다더니 맨날 붙어 있는 게 웃겨서.”
“뭐가 웃겨!”
“그렇잖아. 허구한 날 기 싸움 하다가 과제까지 같이 할 줄 누가 알았겠냐고. 원래 과제로 만난 거긴 하지만.”
그렇다. 지민은 빠꾸가 없었다. 나름대로 빙빙 돌려 말하는 것이긴 했으나 직진이라는 방향에는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여주는 대수롭지 않게 부대찌개를 뒤적이며 앞치마는 필요 없냐 물었다. 직원에게 앞치마를 받고 건네는 모습에 지민이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얘는 뭐가 이렇게 철벽이야? 미동도 없는 여주의 스루력은 정국에게만 해당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야! 왜 너네만 마셔!”
뭔가 좀 더 캐내기도 전에 태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나가던 차에 지민과 여주가 보여 들어온 것이다. 자연스러운 합석에 지민은 정국과 관련된 일은 일단 함구하기로 했다. 나중에 따로 태형에게 말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둘의 일이지만, 이런 식의 삽질이 지속된다면 빠꾸 없는 지민에게 고역이었다. 몰래 정국에게 전화했으나 신호대기음만 진창 들어 포기했다. 그래. 오늘은 빠꾸다.
“나 잘래.”
여주가 취했으니 빠꾸다.
“이미 겁나 마셨네.”
음. 아닌가?
“어 국이다~”
“뭐야 떨어져. 아 개무거워 진짜.”
정국은 술자리가 파할 때쯤 뒤늦게 나타났다. 자다 일어나서 지민의 연락을 확인한 것이다. 이미 여주와 태형은 이 세상 정신이 아니었고, 그나마 또렷한 지민이 정국을 맞았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나 자고 있었는데. 기다렸어?”
“어. 계산 끝냈으니까 너는 짐꾼 해라.”
지민이 자연스럽게 여주의 가방을 걸쳐줬다. 원래 계획은 이게 아니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너는 여주 데려다줘. 난 태형이 맡을게.”
“둘이 같은 빌라잖아.”
“태형이 오늘 우리 집에서 자기로 했어. 그러니까 먼저 가.”
“형 집에서 잔다고?”
“어.”
“왜 굳이……? 버스 타고 가야 하는 거리를……?”
“그럴 일이 있다. 안 가?”
“간다, 가.”
지민이 혼신의 방어를 하는 줄도 모르고 정국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여주를 부축했다. 과제가 또 있나. 생각할 뿐이었다.
4월의 밤은 꽤나 선선했다. 벚꽃은 다 떨어지고 잔재만 남았지만, 그 위를 걷는 것도 꽤나 운치 있었다. 옆에서 잔뜩 꼬인 걸음을 걷는 여주만 아니라면 더욱 그랬을 것이다. 결국 정국은 여주를 들쳐 업었다. 함께 비틀거리며 걷는 것보다 훨씬 빠를 테니. 게다가 그 걸음으로 더 걷다가는 또 다리에 힘이 풀릴 게 분명했다. 웬일로 별다른 말없이 순순하게 구는 여주에 정국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지간히 취했나싶었다.
엘리베이터를 잡고 한숨 돌린 정국이 여주를 고쳐 업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늦게 내려오는 엘리베이터. 귓가에 여주 숨소리가 나긋하게 들렸다. 엘리베이터에 타고서는 층수가 올라갈수록 제 심장박동도 올라가는 것 같았다. 아무렇지 않다가도 한 번 인식하니 무시하기 어려웠다.
“야, 정여주. 비번 뭐냐. 빨리 치고 들어가.”
그래서 부러 퉁명스럽게 내려놓고 집에 들어갈 것을 종용했다.
“비번? 비번……비번 내 생일.”
“네 생일이 언젠데…….”
“7월 9일…….”
하지만 절대 손을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는 여주에 결국 정국의 손이 움직였다. 여전히 비틀거리는 여주를 침대까지 옮겨놓고 나니 다리에 힘이 풀렸다. 잠시 앉아서 숨을 고르다가도 예전 생각이 났다. 반대되는 상황이 웃겼다. 전에는 정국이 취했었는데 지금은 여주가 취해 있다. 그리고 협탁에 놓인 멍 빼는 연고에 웃음기가 가셨다.
정국은 덩그러니 있는 연고를 멍하니 쳐다봤다. 뒤척이는 여주가 아니었다면 언제까지고 보고 있을 기세였다. 이불을 정리해주고 베개 속에 파묻힌 휴대폰을 친히 충전까지 해두고 일어섰다. 더 있다가는 진짜로 기분이 이상해질 것 같았다.
“나 간다.”
“야.”
“왜.”
취해서 흐물텅하더니, 갑자기 부르는 목소리는 또 멀쩡했다. 정국은 앉는 대신 일어선 채로 여주를 내려다봤다. 멀쩡한 목소리에 비해 눈은 감겨 있었다.
“박지민이 이상한 얘기 하더라.”
“뭔 얘기.”
“자꾸 네 얘기 해.”
“내 얘기?”
“어. 네 얘기.”
어쩌라는 거지. 정국인 헛웃음을 지었다.
“그게 그렇게 심각한 목소리로 불러서 할 만한 얘기야?”
“걔가 너 좋아하나 봐.”
“개소리 할 거면 자라.”
“진짜야.”
“자라고.”
여전히 눈을 감고 말하는 여주를 뒤로했다. 그 입은 정국이 신발을 신는 와중에도 다물지를 않았다.
“시작이 좋고 끝이 지랄 맞은 것보단.”
“…….”
“시작이 지랄 맞아도 끝이 좋은 게 낫지 않느냐고 묻던데.”
“…….”
“너는 어때?”
지민은 철벽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하나하나 귀담아 듣고 있었던 여주의 입이. 계속 나불댔다.
“……너 이거 또 기억 못할 거지.”
정국이 현관 앞에 서서 말했다. 뒤돌아 본 여주는 눈을 뜨고 그런 정국을 보고 있었다.
“글쎄. 네가 어떻게 대답 하냐에 따라 달라질 듯싶은데.”
정국은 티내지 않겠다던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제야 지민이 저를 부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쓸모없이 금간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에 파묻힐 뻔 하다가도 정국은 이성을 잡아 올라 탔다.
“대답 안 하면 기억 안 할……”
“아직 끝을 안 봐서.”
“…….”
“어떨지 모르겠는데.”
“…….”
“네가 내일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또 그때처럼 기억 안 나는 척하면 나는 그대로 묻고 갈 거야. 어쨌거나 우리 시작은 안 좋았던 게 맞으니까.
술은 여주가 마셨는데 취중진담은 정국이 내뱉었다. 결국 붙잡은 이성에도 데롱데롱 매달린 셈이었다. 도어락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깊은 밤이었다.
안녕하세요, 육일삼입니다. 하하... 오랜만이에요... 이 글을 기다리신 분이 있을런지 ..^^
원래 잊고 있다 등장하면 더 반가운 법 아니겠어요? (뻔뻔)
이게 정말 너무 안 써져서 오랫동안 질질 끌고 있었는데요.. (얘네 아직도 안 사귀네요)
그래도 늦게 들고 오는 만큼 두 편을 들고 오고 싶었는데 그랬다가는 더 늦어질 것 같아 그냥 왔습니다.
이 다음에는 자존심 말고 다른 글이 올라옵니다.
원래 캠퍼스 시리즈 어쩌구 하면서 차례대로 쓰고 싶었는데 마음대로 되질 않네요^^
자존심은 써지면 바로 들고 오는 걸로,, ㅠ.ㅠ
모쪼록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 드리고.. 건강 조심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