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븐라희 2
– 일탈은 헤븐라희로 -
할일이 쌓였을 때 훌쩍 여행을
아파트 옥상에서 번지 점프를
신도림 역 안에서 스트립쇼를
야이야이야이야이야
익숙한 음악이 귓전을 때렸다. 여주가 한껏 인상을 찌푸리며 팔을 휘적였다. 손에 잡힌 휴대폰이 계속 울고 있었다. 왜 알람을 안 꺼놨지. 늘어지게 늦잠 잘 계획은 어떤 방식으로 방해받든 짜증났다. 하지만 불이 난 듯 뜨거운 휴대폰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휴대폰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했을 때는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아 쉬발, 왜 전화했지. 얘기 끝난 거 아니었나.”
여주는 전화가 끊길 때에 맞춰 무음으로 바꿨다. 그러고 서둘러 노트북으로 PC 카톡을 켰다. 그나마 사람이 많아 읽은 티가 나지 않는 체인락 단체채팅방을 먼저 들어갔다. 역시나 사라진 앰프를 찾다 여주의 행방을 묻고, 여주의 탈퇴소식을 접한 멤버들이 메시지를 잔뜩 풀어놨다. 개인 톡은 말 할 것도 없었다. 몇몇은 회식이 아니라 송별회를 해야 했던 것 아니냐며, 어떻게 귀띔도 없이 나갈 수가 있냐며 잔뜩 우는 소리를 냈다. 반응했다가는 송별회 일정을 잡을 것만 같아 몇 자 적으려던 것을 관뒀다.
체인락 회장은 끝난 이야기를 끌고 오며 여주를 다시금 붙잡았고, 현준에게는 ‘나 때문이야?’ 이 한 마디가 와 있었다. 아니 일개 동아리 멤버1의 탈퇴 소식이 이렇게 핫할 일이냐고. 여주가 머리를 헝클었다. 여주는 몰랐겠지만, 그렇다. 핫할 일이다. 장장 8년 동안 기타를 쥐락펴락 했던 여주는 체인락에서 단번에 기타 탑 자리를 꿰찼고, 무던한 성격 때문에 실감은 못했지만 선후배 할 것 없이 모두 여주를 동경하거나 아끼며 이따금씩 질투어린 시선을 보내기도 했으니.
여주가 있었기에 지금의 체인락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기수마다 기타 좀 친다 하는 애들은 있었으나 모두 여주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더랬다. 때문에 다들 여주와 팀을 꾸리지 못해 안달이었고, 기타 솔로가 있는 곡을 찾지 못해 복달이었다. 게다가 여주가 나간 공연에서의 상금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여주가 속한 팀은 회장까지 합세해 보컬을 고르고 고른 걸 미뤄보면 이런 반응이 나오지 않는 게 이상했다.
허나 언제까지고 동아리에 뼈를 묻을 수는 없었다. 이제 곧 3학년이고, 3학년이 끝나면 휴학할 예정이니 동아리에는 더더욱 나오기 힘들 테고. 과 생활보다 동아리 활동에 열심이었던 자신을 조금 더 과에 정착시키려던 것이었는데. 그리고 그게 현준의 고백으로 조금 일러진 것은 맞는데. 여주는 이 모든 것을 일일이 설명하기 어려웠다.
[ 선배 ]
[ 자고 있어서 전화 못 받았어요 ]
[ 저번에 이야기 마무리 된 거 아니었나요 ]
[ 저도 애들이 이래서 마음이 좋지는 않은데.. ]
[ 제 선택도 존중해주세요ㅠㅠ ]
[ 단톡방은 제가 말하고 나갈게요 ]
[ 애들한테 갠톡 답장은 천천히 하겠다고 전해주세요 ]
[ 그동안 고마웠어요! ]
단톡방에는 장문의 톡을 보낸 여주는 그제야 다시 침대에 누웠다. 말은 그렇게 해도 어제의 떨어지지 않는 걸음이 어딘가를 사무치게 했다. 껄끄러운 사이가 생기기 전에 나온 게 잘한 일인지 의심 들 만큼.
그래서 괜히 ‘ㅠㅠ’가 수두룩한 목록을 뒤적거렸다. 그래도 인생 헛살진 않았구나. 씩 웃고는 이불을 덮었다. 늦잠 잘 계획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 일탈 – 자우림
여주가 다시 깬 건 엄마의 성화 때문이었다. 거실에 준비돼 있는 상차림에 입을 벌리다가도 오늘이 몇 달에 한 번 있는 가족식사라는 것을 깨닫고 옷을 주워 입었다. 가족식사는 여주네뿐만 아니라 남준네도 함께 했다. 여주네가 이사 올 때 친해진 남준네는 여주가 수험생일 때를 기점으로 서로의 집을 깊게 왕래했다. 몇 달에 한 번씩은 함께 외식을 나가거나 집에 초대하기도 했다. 오늘이 그 날이었다. 남준네 가족이 여주네에 초대받는 날.
여주는 상 한가운데에서 보글보글 끓는 전골을 멍하니 바라봤다. 너무 오래 자는 바람에 도리어 기운이 없어 먹는 둥 마는 둥했다. 자리가 무르익자 어른들은 여주가 수험생일 때 남준이 과외해준 것부터 추억팔이를 시작했다. 지난번에 귀에 앉은 딱지가 떨어지기도 전이었다. 어쩜 그렇게 옛날이야기를 좋아하는지. 그리고 또 어쩜 그렇게 래퍼토리는 같은지. 여주는 상추를 입에 욱여넣고 눈짓으로 남준을 끌어냈다. 둘의 래퍼토리도 항상 같았다. 식사가 마무리 될 때쯤 다른 집으로 넘어가 게임을 하는 것.
“나는 내가 제일 못생겼을 때 이야기 하는 게 제일 재미없어.”
“난 제일 재밌던데.”
“왜 재밌는데.”
“너 그때 진짜 웃겼으니까.”
“빨리 이거나 켜줘. 어떻게 켜?”
“매번 가르쳐줘도 까먹는 네가 대단하다.”
남준이 조이스틱을 건네며 말했다. 여주는 소파에 녹을 듯이 앉았다. 게임이 켜지는 동안 여주는 벨소리를 바꿨다. 공연이 끝났으니 이제 너도 안녕이다.
“이번에 공연했던 거네?”
“어엉.”
“너네 잘하더라.”
“오빠네도 잘하던데. 이름 뭐였지?”
“타임 이즈 러닝 아웃.”
“아니 곡 말고 팀명. 헤븐……헤븐…….”
“헤븐라희.”
“그래, 헤븐라희. 왜 이렇게 안 외워지냐.”
마침내 켜진 화면에 여주가 조이스틱을 잡았다. 남준은 게임을 고르면서도 그런 여주 눈치를 봤다. 이야기 꺼낼 타이밍을 재는 중이었다.
밸런타인데이 공연은 끝났지만 화이트데이 공연이 남아 있었다. 곡 선정은 진작 끝내고 밸런타인데이 공연 곡을 중심으로 찔끔찔끔 연습해왔는데. 한 달을 남겨놓고 생긴 공석을 세컨드 기타인 지민이 채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민은 몇 개월 전 팀에 합류하면서 기타를 제대로 만져봤고, 그마저도 선재가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아 거의 독학으로 연주했으니. 선재의 빈자리를 메우기에는 지민 스스로도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여주가 필요했다.
야, 너네 저번에 본 체인락 기타 기억나지.
기억나죠. 개잘 치던데.
솔직히 걔가 다 발랐다. 강선재도 좀 쫀 것 같지 않았냐?
어어 그래. 걔가 내 아는 동생이거든?
뭐? 그걸 왜 이제 말해?
아무튼 걔 다음 공연까지만 어떻게 섭외해 볼 테니까 지민이는 일단 네 파트만 연습하고 있어.
남준은 어젯밤에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여주 같은 인재를 체인락에서 쉽게 내어줄 것 같지 않았다. 더군다나 체인락은 학교 산하에 있는 중앙동아리니. 정식회원을 바깥에서 도는 밴드로, 그것도 상금이 걸린 공연에, 동시 연주를 시켜줄 리가 없었다.
“체인락도 쉬운 이름은 아닌데.”
“2년을 있었는데 안 외우겠어? 게다가 얘네는 세 글자잖아.”
“‘얘네?’”
남준이 눈을 빛내며 빈틈을 찾아냈다. 여주에게 들은 바로 1학기는 쉬엄쉬엄 하다 2학기부터 동아리 활동을 관둔다고 했으니, 잘만 구슬리면 화이트데이 공연에서는 손을 빌릴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나 탈퇴했어.”
근데, 헐, 대박. 무려 탈퇴라니.
“탈, 아니. 왜?”
“고백 받았거든. 그래서 예정보다 좀 빨리 나오게 됐어.”
“세상에.”
남준이 바로 본론부터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입가에는 이미 웃음이 비식비식 새어나오고 있었다.
“사귀려고 나왔어?”
“아아니.”
“그 친구 상처가 대단했겠는데.”
“상대방 상처 안 주겠다고 받아주는 것도 좀 그렇잖아.”
“그건 그렇지.”
남준은 제가 머리 굴리는 소리는 여주에게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조이스틱을 흔들어댔다. 신랄한 플라스틱 소리가 거실 가득 울렸다.
“아, 거기서 위로 가면 안 되죠 김남준 씨.”
“아아 미안미안. 그래서, 아예 동아리 나온 거야?”
“응. 짐 뺐어.”
“하!”
“위로 가지 말라니깐? 집중 안 하세요?”
여주가 조이스틱을 던지듯 내려놨다. 웃음을 감추지 못한 남준의 얼굴이 여주를 향했다.
“웃어? 지금 웃음이 나와? 시작한 지 1분도 안 돼서 죽었다 지금?”
“여주야.”
“할 말 있으면 유언으로 하시지.”
여주가 주먹을 들어보였다.
“헤븐라희 들어올래?”
“뭐? 유언 치고 꽤나 센데. 나 체인락 탈퇴했다고 방금 말했다?”
“응, 그러니까 말하는 거지.”
“허. 머리 굴리느라 게임을 이 따위로 했다 이거지.”
“계속 해달라는 게 아니라 한 달만. 우리가 지금 퍼스트 기타가……음. 공석이 됐거든.”
“왜?”
“사정이 생겨서……. 그러니까 새 멤버 찾을 때까지만 네가 해주면 안 될까? 화이트데이 공연 끝나면 바로 나가도 돼.”
팀워크 와장창을 염려해 동아리 탈퇴에 이른 여주이니. 남준은 팀 내 불화가 있었다는 말은 쏙 빼고 말했다.
“페이도 쳐줄게.”
“얼마?”
그리고 그 사이에 공 몇 개를 붙여 넣었다.
“딜.”
머리에 꽃을 달고 미친 척 춤을
선보기 하루 전에 훌쩍 삭발을
비오는 겨울밤에 벗고 조깅을
야이야이야이야이야
헤븐라희 공석, (구) 체인락 메인기타 최여주가 (한 달간) 꿰차다!
가히 대서특필로 날 만한 소식이었다.
김남준 26
헤븐라희 리더, 드럼, 작곡
해든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졸업
민윤기 27
헤븐라희 총무, 키보드, 작곡
연화예술대학교 작곡과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