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1. 이마를 만지다
BGM) 이마를 만지다: 헤르쯔 아날로그(Herz Analogue) (Vocal by 강현준)
"야, 멍멍아."
"...왜-"
"그렇게 좋냐?"
"...방해하지 말고 저리 가."
...얼굴에 그렇게 티가 나나?
마음을 들킨 것이 무안해 애써 무심한 척 했지만, 장난스레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준면은 아마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백현이 평소보다 얼마나 들떠있는지 말이다.
오랜만에 찾은 준면의 카페에는 갓 내린 커피향과 따뜻한 빵 냄새가 변함없이 가득했다.
덕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입맛이 돌았지만, 백현은 평소처럼 들어서자마자 준면을 들볶지 않고 혼자 창가 자리를 찾아 앉았다.
카페 안에 흐르는 노래에 맞춰 테이블 위로 똑똑 리듬을 세는 이 순간에도 자꾸만 헤실헤실 웃음이 난다.
지나가다 그 모습을 발견한 준면의 놀림에 좀 민망해지긴 했지만.
"...박찬열."
오는 내내 가슴에서 베어나와 입 안에 가득 찼던 이름을 툭 꺼내놓으니, 그게 새삼 쑥스러워 백현은 또 베시시 웃었다.
늘 아무렇지 않게 부르던 이름인데 오늘따라 설레고, 들뜬다.
"...찬열아-"
테이블 맞은편 빈 허공에 대고 백현은 또 한 번 찬열을 불러보았다.
'박찬열-'
제 입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뱉어진 이름 하나하나가 이렇게나 부끄럽고도 두근거릴 수 없다.
상대가 없는 빈 공간에 그 사람의 이름을 불러본다는 것은 생각보다 뭐랄까...
이럴 때 사람들은 낭만적이란 말을 쓰는걸까.
"너, 지각이다."
물론 이 매너없는 자식이 약속시간이 꽤나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는 점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지만.
입을 삐죽거리다가도 금세 '...그래, 뭐. 공부 열심히 해야지 우리 찬열이.' 하고 혼자 마음을 추스린 백현은
요 근래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떠오르는 '그 날'의 기억에 또다시 빠져들었다.
처음으로 마음을 전한 그 날,
그 날의 오후는... 어땠더라?
조금은 쑥스러웠고, 어색했고, 그리고-
설레고, 달고...
소리치고 펑펑 울었던 것이 잦아들자 서서히 맨땅에 닿은 무릎이 서늘해졌다.
스물스물 퍼지는 냉기 덕에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과 찬열 주변을 둘러싼 웅성거림이 느껴진다.
그제서야 자신과 찬열이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떠올린 백현의 머릿속으로 싸아-하게 파도가 쳤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생각나는 것이라고는 이게 전부.
현실로 완전히 돌아오지 못한 채 바싹 얼어있던 백현이 제 팔을 조심스레 잡아오는 손길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끌리는 대로 비틀비틀 일어서는데, 어깨를 감싸오는 온기를 느낄 새도 없이 누군가 장난스럽게 던진 휘파람 소리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나 미쳤나봐, 찬열아..."
제 옷자락을 꼭 쥔 백현의 난감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 반응 없이 묵묵히 침묵을 지키는 찬열 때문에 머릿속은 점점 더 와르르- 붕괴상태.
그래도 그 와중에 녀석은 한참 바닥에 닿아 저릿저릿한 백현의 무릎까지 꼼꼼히 털어주었다.
...진짜 미쳤나보다.
심지어 이 녀석 학교에서, 학교 친구들이며 아는 사람들이 다 있을지도 모르는데-
변백현 너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여기까지 정신이 돌아오자 등줄기를 따라 서늘한 소름이 돋았다.
부끄러움과 그보다 더 큰 당황스러움, 그리고 그보다 더 커다란 미안함에 달아오른 귓가로 심장이 하나 더 자라난 듯 쿵쿵 요란하게 뛰어댄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식혀야할지, 섬칫한 제 가슴을 쓸어내려야할지, 어디로 숨기라도 해야할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백현이 어쩔 줄 모르고 서있는 사이 슬그머니 찬열이 빈 손을 맞잡아왔다.
“가요.”
그래, 변명도 사과도 일단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난 후에 해야겠다.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얼굴이, 혹은 심장이 펑 터져버릴 것 같아서 백현은 잡은 손에 꼭 힘을 준 채 찬열을 따랐다.
넋이 나간 이 상황에도 계단을 하나하나 일러주는 찬열의 목소리는 오랜만에 듣는만큼 너무 좋다.
나도 참 답도 없는 놈이지.
하지만 오랜만에 듣는 녀석의 말투 하나, 단어 하나.
이 다정한 목소리가 그 동안 얼마나 그리웠는지...
자꾸만 자꾸만 속으로 곱씹어보는 찬열의 말들 때문에 입 안에 단 맛이 가득 퍼지는 것 같다.
이미 지팡이는 제 역할을 잃은지 오래, 머리가 복작복작한 백현은 그저 자신을 이끄는 찬열을 따라 종종걸음을 옮겼다.
겁도 없이 혼자 찾아올 때는 수월하던 길이 돌아가려니 왜 이렇게 겁이 나는지, 새삼스레 발 끝에 온 신경이 곤두섰다.
그래서 백현은 찬열의 말 끝에 묻어나는 희미한 웃음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한참 걷다보니 어느새 캠퍼스를 벗어난 듯-
시끌시끌한 자동차 소음이 요란스러워졌다.
'밖인가...?' 싶어 머뭇머뭇하는 백현의 손을 고쳐잡은 찬열은 어차피 수업도 다 끝났다며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
아닌 것 같은데... 라고 생각했지만, 차마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묵묵히, 하지만 제 발걸음에 맞춰주는 찬열을 따라 함께 걷는 길은 올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스쳐지나가는 가게에서 흘러나온 달달한 음악 하나, 자동차 매연 속에서도 흔적이 남은 가로수 나무향,
드러난 뺨을 스치는 오후의 바람과 발 끝에 느껴지는 오돌도돌한 보도블럭의 느낌까지- 돌아오는 길은 마치 올 때와는 다른 길처럼 느껴진다.
함께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함께 걷는다는 것.
놓고 싶지 않은 온기.
영원히 걷고 싶은 길과 멈추고 싶은 시간...
백현은 문뜩, 이 길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하면서도 미울만큼 이기적인 자신이 싫어 입술을 꼭 깨물었다.
이 길이 끝나면, 너에게 뭐라고 해야할까.
미안하다고 해야할까, 아니면... 데려다줬으니 고맙다고 해야하나...?
그렇게 머리를 데굴데굴 굴리다 집 앞에 도착했을 때는 감당할 수 없을만큼 너무 많은 생각과 느낌들이 몰려와 정신이 몽롱했다.
뭔가 고르고 골라 꼭 해야할 말이 하나쯤 있을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어 백현은 한참을 맞잡은 손만 꼬물거렸다.
"하아..."
"..."
"..."
"...미안해..."
돌아오는 길 내내 이어진 침묵의 끝, 아직 복잡한 마음을 채 추스리지 못한 백현을 아는지 모르는지 찬열이 의미 모를 한숨을 흘렸다.
그 바람에 제 풀에 놀란 백현이 결국 아슬아슬 입에 담고있던 한 마디를 망설임 끝에 꺼내놓았다.
찬열이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볼 수 없어서, 더더욱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네가 그럴 녀석도 아닌 걸 뻔히 알면서 왜 그 순간에는 그렇게 서러웠던 것일까.
덕분에 아예 이성을 놓고 남의 학교에서...
...아아... 이게 무슨 민폐야...
뒤엉킨 마음은 정리하려하면 할수록 더 어지러워져서, 다시 울고만 싶다.
"...뭐가요?"
잠시의 정적을 지나 다시 들려온 찬열의 목소리는 이 와중에도 너무 좋다.
그래서 백현은 잠시 대답할 말조차 떠올리지 못한 채 가만히, 몇 번이고 찬열의 말을 꼭꼭 곱씹었다.
찬열은 백현이 무언가 대답할 때까지 더 이상 아무 얘기도 하지 않을 생각인 듯 했다.
아직 놓지 않은 두 손 위로 몇 번이고 바람이 더 지나간 후에야 백현은 고르고 고르던 말을 우물쭈물 꺼내놓았다.
"나 때문에 학교에서 괜히..."
'네 입장이 곤란해졌잖아.' 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덜컥 말을 꺼내놓고나니 다시금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아 맥이 빠진다.
사과하려고 꺼낸 말인데, 입 밖으로 내뱉으니 더 엄청나게 느껴졌다.
그리고 돌아온 것은,
"아... 뭐 그건, 변백현 씨가 앞으로 책임지고 데리고 살아주면 되는 거니까 괜찮아요."
"...어?"
입술만 꼭꼭 깨물고 서있던 것이 허무할 정도로, 빙글빙글 웃음이 섞인 가벼운 대답이었다.
"앞으로 나 미팅이고 소개팅이고 하나도 안 들어오게 생겼으니까 바람피울까 걱정은 전혀 안해도 되겠어요."
...나는 지금 네 녀석 학교 생활에 뭔가 문제라도 생길까,
혹시나 네 녀석이 안봐도 될 눈치를 보게 되고, 안들어도 될 나쁜 소리라도 듣는게 아닐까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인데.
이 괘씸한 녀석이 지금... 뭐라는거야?
"너...!"
"흐아... 좀 봐줘요.
쪽팔려서 멀쩡한 척은 하는데, 사실 나 지금 엄청 제정신 아니예요."
그냥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말투지만, 차마 숨기지 못한 떨림은 맞잡은 손 끝으로 전해졌으니까.
그러면서도 고집스레 더 힘을 주어 손을 잡아오는 녀석 때문에 백현도 입을 꾹 다물었다.
그저 오고가는 침묵 속에 마주 서 있으려니 점점 자신과 찬열, 둘의 모습이 우습게 느껴져 베실베실 자꾸 입꼬리가 올라갔다.
마주닿은 곳의 감각만 괜시리 예민해져 녀석이 조금만 움직여도, 바람만 휙 스쳐도 움찔움찔-
또 그런 제 움직임에 녀석의 손 끝도 덩달아 바들바들 떨리는, 이 상황... 이거 뭘까.
TV 드라마나 영화 속 주인공들이 늘 준비된 자세로 무드 있게 날리는 멋진 명대사, 명장면으로 길이남을 멋진 씬도 우리에겐 없다.
심지어 자신은 아까 맘놓고 펑펑 울어버려서 솔직히 지금 무슨 꼴일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그렇게나 많이 본 영화며 책이며... 그 안에서 그림처럼 펼쳐지던 장면들은 다 어디로 잊혀지고 우리는 이렇게나 볼품없이 마주하고 있을까.
참 어리고 서툰 나와 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도 미안해요."
"니가 왜 미안해..."
"용기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는데.
...결국 용기있는 변백현 씨가 미남을 얻었네."
"야. 너..."
"아씨... 진짜 멋없다, 박찬열.
아오- 이럴 땐 뭐라고 해야되는거냐..."
되도 않는 말을 꺼내놓고 또 혼자 어쩔 줄 모르는 찬열의 혼잣말에 결국 웃음이 터진다.
나는, 이렇게 어리숙한 네 모습이 좋다.
"나 뭐라고 해야 되는거예요?
...나도 좋아한다고 하는 걸로는 좀... 부족한 것 같은데."
마냥 가볍지 않은 네 모습도 좋다.
"그냥...한 번만 더 안아봐도 돼요?"
그냥...네가 좋다.
네 마음이 나와 같다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맞다.
대답 대신 그냥 맞잡은 손을 끌어당겼다.
성큼 다가온 체온이 금세 백현의 가슴에도 옮겨온다.
옷깃을 꼭 쥔 채 끌어당긴 품 속은 따스했고, 백현과 똑같이 설레는 열기가 묻어났다.
가만히 그 품에 얼굴을 묻자 긴장한 듯 굳어있던 찬열도 이내 푸스스 웃음을 터뜨리며 조심스레 백현의 어깨를 감싸왔다.
"...정말 내가 좋아요...? 진짜죠...?"
담담한 척 했지만 떨리는 목소리가 어찌나 미안하고 또 고마운지.
백현은 이 대답 하나, 몸짓 하나에 제 진심이 고스란히 전해지기를 빌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네가 좋아.
이런 네가, 나는 너무 좋다.
어리숙한 나에게 서툰 네가 주는 이 꾸밈없는 애정을,
한껏 조심스런 손길에 담긴 소중한 감정을,
그 설레는 행복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디에 숨어있었는지도 모를 마음은 점점 자라나서, 이내 좋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할만큼 커져간다.
그 짧은 대답 하나에 한 번 더 떨림 가득한 한숨을 내쉰 찬열이 백현의 어깨에 폭 얼굴을 묻어왔다.
어깨 위로 안개처럼 퍼져드는 온기가 그 동안 찬열이 꼭꼭 눌러담아왔던 마음만큼 무겁고도 깊어서,
백현은 뭐라고 더 말을 꺼내야할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저 좀 더 일찍 알아주지 못해서.
나도 널 이만큼이나 좋아한다고 말해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말로는 다 전할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을 담아 백현은 찬열을 할 수 있는 한 더 꼭 끌어안았다.
사람의 체온이 이렇게나 기분좋은 온도구나- 생각하고 있으려니 찬열도 제 목덜미에 고개를 폭 파묻었다.
간지러운 숨결에 저도 몰래 키득거리는 백현에게 찬열이 조용히 중얼거린 말이 꿈결처럼 아득하게 들려왔다.
"아... 내일 시험보러 가기 싫다...
우리 아침까지 계속 이러고 있을까요?"
몽롱하고 기분좋은 온기에 취한 백현이 무슨 시험...? 하고 나른하게 물어보니 한다는 소리가 내일이 전공과목 시험이란다.
그 말에 정신이 바짝 든 백현이 '너 내일 시험이야?!' 하고 묻자 별 것 아니라는 듯, 심드렁한 대답을 흘리곤 다시 자신을 끌어안으려는 녀석을 얼른 떼어냈다.
내가 무슨 짓을 한거야.
심지어 시험공부하는 애 학교까지 찾아가서 난동을 피웠어!!
그제서야 현실로 완전하게 돌아온 백현이 찬열의 등짝을 찰싹찰싹 때리며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그런 건 진작 말했어야지, 이 자식아!!
'얼른 집에 가서 시험 끝날 때까진 얼씬도 하지 마!!' 하는 다부진 소리에 어차피 내일이면 끝인데,
사람 참 보기보다 야박하네, 낭만이 없네-
한참을 궁시렁거리면서도 녀석은 어슬렁어슬렁 걸음을 옮겼다.
어른답게 잘 대처했다고 스스로를 흐뭇해하다가, 문뜩 혼자 남은 골목에 부는 바람이 어제 이맘때보다 더 썰렁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누군가와 함께 있어서일까.
아직 품에 남은 온기가 찬 기운에 식는 것이 아쉬워 백현은 얼른 열쇠를 찾아 대문을 열었다.
그러면서도 돌아선 골목 멀리에서는 무슨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아 자꾸만 멈칫멈칫,
그렇게 몇 번이나 귀를 기울이다보니 현관까지 들어오는 시간이 평소보다 꽤나 오래 걸렸다.
따뜻한 물에 한참 몸을 덥히고 나니 온통 보송보송해서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자꾸만 붕붕 뜨는 마음을 숨기지도 못한 채 한껏 침대 위를 뒹굴고 있는데, 거실에 둔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누구...? 하는 마음 한 켠으로 사실 답은 이미 내려져있다.
...녀석이었으면, 참 좋겠다.
거실로 나가 집어든 핸드폰, 발신자는 기대에 걸맞게도 '박찬열' 님.
그 사실만으로도 벌써 가슴이 콩콩 뛰어대는데, 이렇게나 작은 일에도 두근두근대는 이 심장이 오늘 낮에는 대체 무슨 용기였을까.
-여.. 여보세요?
마른 침을 애써 삼키고 조심스럽게 전화를 귀에 댔을 때, 긴장한듯 말을 더듬는 찬열 때문에 덩달아 백현도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여태 아무렇지 않게 함께 보낸 시간이 얼마인데 새삼스레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으면서도 쉽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어쩐지 이거 너무, 부끄럽잖아....
니가 먼저 말을 더듬어서 그런거야, 이 멍청아-
-여보세요...? 변백현 씨...? 자..잘못 걸었나...?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당황한 찬열의 목소리는, 쑥스럽지만 또 너무 좋아서-
백현은 제 뺨이 화르륵 달아오른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입술만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얼른 가서 공부하라며 야멸차게 돌려보내긴 했지만 사실...한 번쯤 녀석이 덩치에 안 어울리게 응석이라도 부렸다면 못 이기는 척 받아줬을지도...?
...그러니까 왜 그렇게 어리고 난리야, 이 자식아.
이런 날 시험공부나 해야 하고. 쳇.
-...번호 맞는데...? 변백현 씨? 저기요-
억지로 억지로 한 번 부르게 했나 싶었는데 역시나 그 놈의 호칭은 또 제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형 소리보다 이것도 나름 괜찮을지도.
그렇게 어렵게 얻어낸 형 소리였는데 지금 보니 이것도 나쁘진 않다 싶다.
뭐 나이 많은 게 자랑도 아니고...
또...
녀석의 목소리로 불러주는 제 이름은 썩, 괜찮다.
"...응."
짧은 대답 하나를 뱉어놓으니 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불러놓고는 말이 없는 찬열의 목소리를 가만히 기다리며 귀를 쫑긋 세우고 있으려니, 문뜩 푸스스 웃음이 났다.
이게 뭐야...
우리 지금 뭐하냐.
-...왜 웃어요-
그 소리를 또 들었는지, 부루퉁하게 물어오는 찬열의 말끝에도 희미하게 웃음이 묻어났다.
마주하고 있지 않아도 전화 너머에서 느껴지는 온기 때문일까-
그렇게나 우기고 우기던 형 소리도 이젠 중요하지 않다.
그런 건 모두 다, 이젠 의미가 없다.
-내일 뭐해요? 나 시험 오전에 끝나는데...
"오전 시험이면 지금 전화할 시간도 없이 공부해야하는 거 아니야?"
-나 진짜 그 동안 변백현 씨 잊어보려고 공부만 죽어라 했거든요? 이러다 이번 학기 장학금 타게 생겼어요.
...수업도 안 들어온다는 소리 종인이한테 이미 다 들었는데.
그래도 장난기 서린 말 끝에 담긴 서운함이 어쩌면 저를 탓하는 것만 같아서 백현은 더 할 말이 없어졌다.
저라고 해서 마음 편히 지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한테 미안하다 그랬죠?'
"...응."
미안하지 않을리 없다.
늦게 알아준 것도,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한 것도,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상처준 것도.
-그럼 나 내일 놀러가도 돼요?
"...언제는 내 허락 받고 온 줄 알겠다."
솔직한 마음 그대로 '그래!' 라고 외칠 뻔한 것을 간신히 다잡은 백현이 애써 퉁퉁, 말을 던졌다.
사실, 녀석이 찾아오지 않은 집안은 얼마나 허전하고 심심했던가.
그래도 내가 어른인데, 너무 그러면 내가 너무 없어보이잖아...
핀잔 같은 백현의 대답 뒤에 숨겨진 허락의 의미를 눈치챘는지, 수화기 너머 찬열이 웃었다.
가볍게 흐트러지듯 퍼지는 그 소리가 좋아 한참을 수화기에 귀를 대고 있으려니 찬열도 또 말이 없다.
그렇게 침묵이 흐르다 찬열이 나즈막히 '그럼 잘자요.' 하고 인사를 던졌을 때는,
녀석에게 보이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한참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묘한 아쉬움과 설렘을 가라앉히며 전화를 끊었을 때, 저도 몰래 눈물이 핑 돌았다.
"어..?"
당황해서 얼른 소매 끝으로 눈을 훔쳤지만 또 눈가가 글썽하게 번져왔다.
눈가가 아릴만큼 자꾸 닦아내도 한 번 터진 눈물은 결국 옷자락이 다 젖도록 멈추지 않았다.
사람이 이런 기분으로도 울 수 있구나.
백현은 그 설렘과 벅찬 마음이 낯설어 밤새도록 잠들지 못한 채 울다가, 두근대는 가슴을 가라앉히려 서성이다가, 또 울기를 반복했다.
.
.
.
다음 날부터 찬열은 그 동안 끊었던 발길이 민망할만큼 당연하게 백현의 집을 찾아왔다.
며칠 안되어서 백현의 집 열쇠는 이미 찬열의 열쇠고리에 찬열 자신의 집 열쇠와 나란히 자리를 함께 했다.
예전처럼 둘이 마주앉아 한 사람은 제 공부에, 한 사람은 제 일에 빠져있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함께 책을 읽기도 했다.
백현도 '본' 적이 있을만큼 오래된 영화를 빌려다가 둘이 대사를 달달 외울만큼 보고 또 본 적도 있었다.
크게 변한 일상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 안에서 소소히 마주치는 발 끝, 맞닿은 어깨 하나에도 의미가 생겼다.
처음 며칠은, 그동안 아무렇지 않게 베고 눕던 찬열의 무릎 위에 뺨을 대고 있다가 괜히 가슴이 욱씬거릴만큼 쑥스러워 벌떡 일어나기도 했다.
함께 있을 때 우연히 닿은 손에서는 녀석의 것인지 자신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심장박동이 느껴져 혼자 남았을 때까지 설렘이 계속됐다.
마치 이전의 자신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런 변화가 가끔은 당황스러웠지만 결코 기분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보니 둘 사이에 조금씩 변화도 생겼다.
초반에는 자꾸만 가슴이 떨려 소심소심, 조심스럽던 백현은 그런 생활이 익숙해지면서 점차 엉뚱하면서도 과감한 행동들도 서슴치 않았다.
처음에는 가볍게 찬열의 뺨을 쿡쿡 찔러보거나 머리를 꼬는 정도로 시작했던 것들이,
점점 갑작스레 녀석의 손바닥에 뺨을 부비거나 입을 맞추는 정도로 발전해나갔다.
이쯤되니 애 취급을 받기 싫어 능청맞은 '척' 하고 있던 찬열이 되려 어쩔 줄 모르고 바짝 긴장하기도 했다.
어떤 날은 책을 읽는 찬열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채 녀석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만지작거리다 아그작 씹어버리는 바람에 찬열이 기겁하고 소리를 지른 적도 있었다.
녀석이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반응이 재밌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제 손 끝에, 뺨에, 입술에 닿는 그 생소한 감촉과 설렘이 즐겁고 행복했다.
오히려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소심하고 조심스러워지는 찬열이 이러다 심장병에 걸릴 것 같으니 제발 예고 좀 하고 해달라 애걸복걸하는 판이었다.
그렇게 평범하면서도 설레는 일상을 함께 나누다 오늘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찬열을 준면의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수업 끝나자마자 출발했다는 문자를 마지막으로 이 녀석 대체 어디서 한눈을 팔고 있는건지...
“어른을 이렇게 기다리게 하다니, 괘씸한 놈.”
투덜투덜거리면서도 입가에 번진 미소는 지워지지 않는다.
녀석을 만난 이후로는 기다림조차 그 의미가 달라졌다.
너와 시선을 마주쳐줄 수 없는 나로 인해 혹여나 가끔 지치지 않을까, 겁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마냥 네 손의 온기만으로 설레고 행복해하기에는, 나는 조금 어른이니까.
아마... 우리는 언젠가 조금 지칠 수도 있을 것이다.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없다는 사실에.
네가 손을 내밀어도 끌어주기 전에는 맞잡아줄 수 없다는 사실에.
그 사실을 매 순간 깨닫는 너는, 얼마나 지치고 무거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와 내가 꼭 만나야만 할 사람이었다면,
...날 놓지 말아줘.
너를 만난 후,
내가 몰랐던 세상이 여기에 있다.
늘 고요하고 변함없던 일상에 햇살처럼 찾아든 사람.
이제는 보이지 않는 빛의 기억, 그 조각조각을 모으다보면 어느새 네가 된다.
너무 빛나서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볼 수는 없지만, 대신 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들로만 이루어진다.
눈이 시리도록 빛나서 바라볼 수 없는 태양, 그러나 네 따스한 온기는 늘 그 자리에 있다.
너와 함께 하는 시간들은 하나하나 새롭고 소중해서-
오랜 시간이 지나 설령 색이 조금 바랜다고 해도 늘 그대로 남았으면 좋겠어.
그 익숙함과 편안함 또한 너와 함께라면...
어쩌면 우리에게 한없이 잔인할 세상도 너와 함께라면...
어느 하루가 너를, 혹은 나를 울리더라도 너와 함께라면...
그렇게 나는 우리의 미래를 믿는다.
...고마워.
널 볼 수 없어도 날 사랑해주는 사람.
보이지 않는 창 밖을 응시하는 백현의 까만 눈동자에 찬열을 닮은 오후 햇볕이 물들었다.
...그래도 기다리게 한 건 괘씸하니까, 엄청 화난 척이라도 좀 해볼까?
아니면 늦은 시간만큼 형이라고 부르기...?
아마 유리문이 열리는 순간부터 요란하게 미안하다 난리를 치고 들어설텐데.
어떻게 반응을 해줄까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는 것만으로도 이미 헤실헤실 웃음이 난다.
그러니까 빨리 와라, 박찬열-
...보고 싶으니까.
카페 안을 흐르는 음악에 맞춰 가볍게 몸을 흔드는 백현의 머리 위로 블라인드 사이를 파고 든 오후의 햇살이 내렸다.
보이지 않는 창 밖을 응시하는 백현의 눈가에도 따사로운 볕이 부드럽게 녹아들었다.
그런 백현을 멀찌감치서 지켜보던 준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남긴 말은, 이미 저만의 세상에 한껏 빠진 백현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거 참... 똥강아지 같은 놈들... 이 놈이나 저 놈이나, 눈꼴셔서 못 봐주겠네..."
못마땅한 표정으로 준면이 내다본 유리창 밖에서는 찬열이 그 긴 다리를 착착 접어 쪼그리고 앉은 채 유리창 너머 백현을 넋이 나간 듯 헤에- 바라보고 있었다.
저러다 침 흘리겠다...
혀를 찬 준면이 이내 시끄러워질 카페 안을 예상하듯 오디오의 볼륨을 높였다.
.
.
.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눈을 뗄 줄 모르다 뒤늦게 준면의 시선을 느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팔을 마구 휘저은 찬열은
준면이 못말린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서야 다시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별 말없이 돌아서는 것을 보니 '아는 척 하지 마요!!!' 라고 연신 입을 뻐끔거려댄 것을 어떻게 잘 알아챈 모양이다.
허우대 멀쩡한 총각이 남의 카페 유리창 앞에 서서 난리를 치고 있으니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 손에 들고 있던 까만 비닐봉지를 보물처럼 조심스레 난간에 잘 걸어놓은 찬열은
본격적으로 긴 다리를 구부리고 앉아 유리창 너머 백현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는 비닐봉지 안에는 학교 앞을 지나다 찬열이 사들고 온 달고나가 잔뜩 들어있었다.
마음은 이미 카페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고 있을만큼 다급하게 걷던 찬열의 눈에 들어온 것은,
여기 이런 게 있었나- 기억조차 나지 않을만큼 작은 달고나 노점상이었다.
대부분의 수업이 끝난 시간.
다른 건물로, 혹은 집이나 약속장소로 향하는 바쁜 발걸음 사이로 등이 굽은 할아버지 한 분이 낡은 점퍼 하나를 걸치신 채 미동도 없이 앉아계셨다.
다리는 바삐 움직이는데- 그 모습에 차마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점점 느려지던 걸음이 어느새 멈추고, 다시 타박타박 뒤로 돌아 걸으니 몇몇 빠르게 걷던 사람들의 행렬이 찬열로 인해 좌로 우로 흩어졌다.
"와..."
그러고보니 이런 달고나 가판대 앞에 멈춰본 것이 대체 얼마만일까.
찬열이 잊고 지낸만큼 달고나의 모습들도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예전에는 동그란 판에 별모양, 물고기 모양 같은 단순한 그림들이 새겨진 것이 다였던 것 같은데
이제는 어디서 보던 캐릭터 모양부터 예술작품 뺨치는 하회탈 모양까지 별의별 모양이 다 있다.
"할아버지, 이렇게 다 하면 얼마예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몇 개 마음에 드는 것을 잔뜩 골라들었는데도 만원짜리 한장을 드리니 2천원을 돌려주신다.
그 2천원으로는 납작한 별모양 두 개를 더 골라잡아 만원을 채우면서 '할아버지, 이거 완전 예술작품인데- 너무 싸게 파시는 거 아니예요?',
제가 되려 툴툴거리자 그저 말없이 허허 웃으시는 미소에 찬열의 입가에도 기분 좋은 웃음이 스몄다.
"또 올게요! 많이 파세요-"
그러고보니 어릴 때 친척 형들이랑 이거 엄청 해먹었는데.
맛있겠다, 맛있겠어.
어린애처럼 들뜬 찬열이 신나게 돌아서는데, 그 모습을 보고 지나치던 행인 몇 사람이 더 노점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고마워요, 총각-'하고 인사를 보내던 할아버지의 얼굴에도 희미한 생기가 돌았다.
바삐 오가는 사람들 사이 홀로 멈춰있던 달고나 가판대 주변이 금세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그 모습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찬열의 마음에도 괜시리 뿌듯함이 가득찼다.
그냥... 기운없이 앉아계신 할아버지의 어깨가 마치 홀로 강가를 걷던 그 날 백현의 모습 같아 한 번 더 시선이 갔던 것 뿐인데...
생각지도 못하게 조금... 아주 아주 조금, 잘한 것 같다.
이렇게 변백현 씨 덕에 좋은 기억이 하나 또 생겼네요.
그렇게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부르며 도착한 카페 앞.
유리창 너머 보이는 백현의 모습은 어딘가 감동스럽기까지 해서-
조심스레 훑어보느라 1분만, 3분만,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카페 앞에 구부정하게 앉아있는 참이었다.
같이 있을 때는 조심스러워 제대로 손 한 번 못 대면서,
이렇게 유리창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그 동안 심장이 떨려 만져보지 못했던 이마며, 눈썹이며, 콧등에 입술까지 조심스레 그려본다.
서늘한 유리창에 대고 그러고 있으려니, 그것만으로도 달고나 하나를 와작와작 씹어먹은 양 입이 달다.
...이러고만 있어도 이렇게 심장 떨리는데, 변백현 씨는 대체 어떻게 그렇게 장난을 잘 치는 거람.
한 번씩 백현이 장난스레 스킨쉽을 해올 때마다 가슴이 철렁하는 자신은 덕분에 심장이 하루에도 몇 번씩 곤두박질을 친다.
놀이기구도 높은데서 떨어지는 건 잘 못타는데, 날 죽이려고 작정한건가?
사실 백현에 대한 마음을 인정한 후 제 감정 하나만으로도 벅찼던 찬열은 요즘 도통 백현을 어떻게 대해야할지 알 수 없는 상태에 빠져있었다.맘 같아서는 드라마의 카리스마 넘치는 주인공도, 영화 속 핸섬한 로맨티스트도 모두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현실은 코미디 영화나 만화 쯤에나 나올 어리버리한 개그 캐릭터다.
이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했던 행동 하나, 닿는 손길 하나마다 자꾸 신경이 쓰이고 깜짝깜짝 놀라서 찬열 스스로도 참 죽을 지경이었다.
요즘의 찬열은 가끔, 백현이 이런 제 모습을 보지 못하는 덕분에 자신이 차이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면 용감하다고, 혼자 일방통행이라고 생각해 감정을 꼭꼭 접어넣었던 시절의 자신이 차라리 지금보다는 훨씬 더 나았을지도.
마냥 주기만하면 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받는 방법은 잘 모르겠다.
제 것이 아닐 때에는 몰래몰래 마음에 품었는데, 막상 제 것이 되고 보니 이젠 마냥 보듬기만 할 수도 없다.
이런 건 누구한테 물어봐야 알 수 있는걸까?
누나...? 동네방네 소문이나 내고 다니면서 놀리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렇다고 김종인한테 물어보기에는- 자존심도 상할 뿐더러 그 자식 분위기도 요 근래 심상치 않다.
이렇게 고민하는 제 마음은 아마 아무 것도 모를 듯, 달랑달랑 다리를 흔들고 앉은 창 너머 백현이 새삼 원망스럽다.
갑자기 억울한 마음에, 찬열은 유리창 너머 백현의 머리께를 한 대 쥐어박았다.
백현 대신 맞은 죄 없는 유리창에서 꽁, 하는 소리가 났다.
"..."
그래놓고 또 마음이 쓰여 유리 위로 문질문질, 백현의 머리 대신 찬 기운을 쓰다듬는 찬열은 제가 봐도 참, 어리다.
다시 한 번 한숨을 폭- 내쉬던 찰나, 하늘 한가운데를 넘어 기울어가던 오후의 태양이 흰 구름 사이 모습을 드러냈다.
금빛으로 빛나는 은은한 그림자가 찬열을 지나 한가로운 카페 안으로 길게 드리웠다.
통유리창을 반쯤 가렸던 블라인드 사이를 타고 넘어간 햇살은 이내 테이블 위를 또닥또닥 두드리던 백현의 손등 위로 쏟아졌다.
그렇게 셔츠 아래 드러난 예쁜 손목을 타고 생각보다 꽤 어른스러운 어깨를 지나 보들보들한 백현의 뺨에 머무른다.
포근한 한낮의 햇살 아래, 천천히 깜빡이는 눈썹 끝으로 잠시 맺혔다 떨어진 빛의 방울들이 눈부시게 번졌다.
경계마저 희미하도록 반짝이는 머리카락 사이, 한껏 투명한 눈동자에도 가득 따사로운 온기가 스몄다.
눈부심을 인지하지 못한 채 느리게 감았다 뜬 두 눈, 보석처럼 빛나는 눈망울이 참 곱다.
"아..."
어느새 찬열은 유리창에 코가 닿을 듯 바짝 다가서 있었다.
벅차도록 아름다운 빛의 마법에 한숨 같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언제나 그의 앞에서는 어쩔 줄 모르고 감탄하게 된다고 생각했는데, 또 한번 새롭게 심장이 뛴다.
자꾸만 자라나는 이 마음들은 어디까지 끝을 모르고 번지게 되는 것일까.
저도 몰래 꾹 움켜쥔 주먹 안에서, 서툴지만 견고한 찬열의 사랑이 또 하나 움을 틔웠다.
참 예쁜 사람.
그래서 감히 함께 할 미래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사람.
...어떻게 나한테 왔을까.
그렇게 넋을 잃은 것도 잠시, 이내 다시 구름에 가린 태양 때문에 카페 안은 평온하게 가라앉았다.
모두 다 제 모습을 찾은 풍경 안에서 찬열의 떨리는 심장 하나만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달음박질쳤다.
그가 자신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찬열에게 이미 오래 전부터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가끔 그의 느닷없는 스킨쉽에 머리꼭지까지 폭발할 듯 온 몸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꼴사나운 모습이라던가
제 무릎을 베고 누운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출까 말까, 고개만 까딱까딱 몇 번이고 망설이는 모습 같은 것들.
아무리 '네가 좋아'라고 마음을 보여준 백현이라지만,
별로 멋져보일 것들은 아니니까 이대로 영원히 몰라줬으면 좋겠달까.
백현의 앞에서는 언제나 한껏 어른스럽고 한껏 여유롭고 싶다.
그가 마음 편히 기댈 수 있을만큼,
그를 양껏 보듬을 수 있을 때까지.
누군가를 제 품에 오롯이 담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했던 기분이라 가끔은 무서울만큼 행복해졌다.
뭐든 주고 또 주기만 해도 이렇게나 벅차게 만들어주는 사람이라니.
더 이상의 보물이 또 있을까.
다만 그렇게 들뜬 마음에 혹여나 잠시 자신을 잃고 그에게 너무 부담을 주는 것은 아닐지-
제 스스로에게 거는 제동장치들 때문에 점점 페이스를 잃어가는 것도 사실.
그리고 또, 그렇게 억눌러도 자꾸만 생기는 욕심에 자신이 이리저리 꼴사납게 휘둘리고 있다는 것 또한 찬열은 알고 있었다.
백현이 미처 빛을 보지 못한 채 뜨거운 태양 아래 서 있으면 자신은 어느새 그늘을 드리운 나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가 미처 길을 보지 못해 망설이고 있을 때, 손을 잡아 이끌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어른스럽고, 뭐든 다 알고 있고 할 수 있는 그런 사람.
처음으로 스스로를 잊을만큼의 감정에 휘둘리는 것과 동시에, 가슴에 담긴 마음만큼 그에게는 멋진 사람이고 싶은 욕심이 뒤섞여
이제는 어떻게 해야할지 조금 모를...
요즘의 자신이 그런 상태라는 것은 찬열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아마... 그가 들으면 한 번 더 나는 아직 어린애라고 생각하고 웃지 않을까.
...아... 배가 울렁울렁한 기분이야...
...진짜 이런 나라도 괜찮은 거예요?!!
하루에 몇 번이고 던져도 아무도 답을 내려주지 않는 질문은 오늘도 이어졌다.
결국 제 마음 속에 하나 둘, 자신도 모르게 싹튼 크고 작은 감정들이 자라고 또 자랐을 때 비로소 스스로가 바라던 커다란 나무가 될 수 있음을,
아마 두 사람 사이의 시간이 충분히 여문 미래의 찬열이라면 어느 날 문뜩 깨달을지도.
약속시간이 한참 지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울상으로 혼자 땅을 파기 시작한 찬열의 뒤로 그렇게 어느 오후가 지나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지구여행자입니다.
안녕하세요, 지구여행자입니다.
말없이 숨었다가 또 7월에 돌아오겠다, 기약없는 약속을 남겨두더니 이제서야 이렇게 인사를 드립니다.
먼저 그 동안, 다들 건강히 잘 지내셨나요 :)
너무 늦게 찾아뵙는 점 다시 한 번 고개숙여 사죄의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사과 1편을 언제 썼나, 보니 벌써 1년이 넘었네요-
하루가 멀다하고 장마가 지속되던 어느 날 갑자기 필을 받아 쓰기 시작하던 것이,
공백이 길어지고 무려 1년하고도 1달이 더 지난 지금에서야 뒤늦은 21편으로 찾아뵙습니다.
1년 동안 여러 가지 일도 겪고 하기도 하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 조금은 더 성숙해진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은 역시나 꿈...
그대로, 어쩌면 조금은 더 늘어지고 방향을 잡지 못하는 채로 돌아왔네요.
사실 21편을 쓴 것은 7월 중이 맞지만, 그 동안 이리저리 시달리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낭만세포가 다 말라버렸는지...
아니면, 이만큼 늦었으니 뭔가 만리장성 같은 글로 인사드려야한다는 부담감 때문인지 한 달 이상을 별 것도 없는 이야기에 흘려보냈네요;;
제 스스로도 중간에 1년의 공백을 두고도 포기하고 싶지 않을만큼 사과 속 녀석들에게 애정이 깊다보니
더더욱 힘에 부치는 욕심을 부렸던 것 같은데...
그냥, 처음의 사과가 아무 생각없이 그렇게 시작했던 것처럼
시작한지 1년이 지나도록 이제 막 20여편- 뒤늦게 찾아뵙는 21편도 그냥 어깨에 힘 빼고 부끄럽게 올립니다.
...너무 뺐을까요;;
너무 바빠서, 결국은 못 돌아가는건가... 사과를 쓰던 그 때로-
하는 생각에 서러워서 울었던 날도 있었는데-
여전히 달라진 것은 없지만, 괜히 나이만 한 살 더 먹었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어 늦게 늦게 이렇게 오랜만에 인사를 드립니다.
너무 오랜 시간 무례하게 숨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잊지 않고 찾아주시고 댓글 남겨주시던 분들께
부끄럽지만 고민 끝에 오랜만에 굳게 닫혀있던 사과의 문을 엽니다.
남겨주신 메일링 메일들은 전부 소중히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몰래몰래, 1화부터 차근차근 수정해올라오던 사과 전 이야기들은 아직 뒷부분에 손볼 부분들이 남아있네요.
그 사이에 음악도 다 사라지고 보내주셨던 소중한 표지들도 다 파불이 떠있더라구요..ㅠ
아직 손보지 못한 19, 20, 22화에는 제목에 (공사중) 이라도 써붙여야할까봐요;;;
보시면 안돼요!!ㅠㅠㅠㅠㅠㅠㅠ
남은 부분들을 고치고 마무리하고, 또 남은 사과의 이야기들도 천천히...(라니 대체 또 얼마나...;;;) 이어나간 후에
남겨주셨던 주소로 메일링해드리겠습니다.
...사실 인티에 이렇게 올리는 것이 부끄러워서(;;;) 남겨주신 주소로 모두 메일로 보내드리자,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제가 하도 오랜만에 하다보니 BGM 넣는 방법조차 다 까먹어서....(-_-;;;;)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인 건 아닌데 하여튼 그렇습니다...ㅠ
...모두모두, 뵙고 싶었어요ㅠㅠㅠ...
오랜만에 누르는 확인 버튼은, 한 살 더 먹어도 여전히 떨리네요....ㅠㅠㅠ;;;
한 분이라도 기억하시고 읽어주시면 정말 감사...한데 뭔가 엄청 초라한 글 하나 달랑 들고 1년만에 돌아오려니 굉장히 부끄럽네요;;;
갑자기 얼굴이 막 화끈거려요;;;;;;;;;
그래도 다시 만나뵙게 되어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