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븐라희 3
– 시작은 미끼였고, 너희는 미끼를 물어버린 것이여 -
현준의 고백을 매몰차게 거절하고 짐을 바로 빼놓고는. 여주는 공 몇 개에 휘둘린 제가 한심했다. 그러나 별 수 있나. 한 달 치고는 공의 개수가 너무 컸다. 이 오빠가 장난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래서 화이트데이 공연에 체인락이 온다는 것도 까먹고 덥썩 제안을 받아들였다. 정확히는 남준이 던진 미끼를 문 것이겠지만.
“나 진짜 이 돈 받아도 되는 거 맞아?”
- 액수가 적어?
“아, 아니. 그게 아니라.”
- 내 돈으로 주는 거 아니고 회비로 주는 거야.
그리고 최저시급에 조금 더 올려서 연습시간 계산하면 그 정도 나올 걸? 조금 더 얹긴 했지만. 남준의 말에 여주가 전화라는 것도 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언제부터 어디로 가면 되는데?”
여주는 자본주의의 노예였다.
♬ Beautiful Feeling – 데이식스
매일같이 오가던 길이었으나 오늘은 조금 낯설었다. 환승을 위해서가 아니라 연습실을 찾기 위해 길을 틀었으니까. 버스정류장으로 향하기 급급했던 날에 비해 차분한 걸음이 그 반증이었다. 남준이 보내준 주소로 지도 앱을 검색하며 주위를 살폈다. 역을 지나고, 편의점을 지나고, 서점을 지나고. 점점 상가와 오피스텔이 나타나자 도착점에 다다랐다.
건물 입구는 열려 있었다. 그리고 계단은 두 개였다. 올라가는 계단, 내려가는 계단. 여주는 잠시 뒤로 물러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층수를 가늠하기 애매한 높이. 높아봤자 이삼 층 정도 되는 듯했다. 게다가 보이는 창문 새로는 불도 켜져 있지 않았고, 그 흔한 커튼도 없었으며, 결정적으로 깨진 유리 사이로 비닐조각이 휘날리고 있었다.
“일단 위층은 아니군.”
여주가 내려가는 계단을 밟았다. 그제야 쿵 쿵, 드럼 소리가 들렸다. 철제 문 앞에는 헤븐라희 팻말이 걸려 있었다. 안에서 악기 소리가 들릴 때마다 팻말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여주는 진동이 멈추길 기다렸다. 연습 중에 들어가면 방해될 것 같아서.
“여기서 뭐해요?”
뒤에서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그러려고 했다.
“들어가요. 애들 다 있을 걸?”
태형이 사탕을 물고 말했다. 등 뒤에는 베이스를 맨 채였다. 요즘 베이시스트는 얼굴로 뽑나요. 여주가 속으로 중얼거리든 말든 태형은 뒤에 서서 문을 열어 재꼈다. 머뭇거리며 연습실 안으로 들어가자 태형이 익숙한 듯 저쪽에서 베이스 케이스를 열었다. 여주는 빈 소파에 앉았다. 비싸서인지 낡아서인지 모르겠는 푹신함이 등허리를 잡아먹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합주는 계속됐다. 베이스를 연결한 태형이 적당한 때에 치고 들어가자 악기가 가득 들어찼다. 밸런타인데이 때 공연했던 곡이었다. 타임 이즈 러닝 아웃.
여주가 찬찬히 세션들을 둘러봤다. 전체적으로 반박 느리게 치고 있었다. 박자가 어쨌건 보컬이 없어도 이 정도 박자를 맞춰갈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보통 노래를 틀어놓거나 보컬과 함께 맞춰야 악기들이 서로의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이미 서로가 서로의 기준이 되어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게다가 늦게 합류한 세컨드기타라더니, 퍼스트기타 부분을 꽤 잘 소화하고 있었다. 연습을 오래 한 게 느껴지는 부분들이었다.
“아 뭐야, 시작했네. 2절?”
그때 문이 요란하게 열렸다. 들어오면서부터 박자를 타던 정국이 윤기의 사인에 마이크를 쥐고 가사를 이어갔다. 여주는 가만 듣고 있다 감탄했다. 보컬이 들어가자 박자가 정박을 갖춰갔다. 보통 반주를 듣고 보컬이 맞춰가지 않나. 아니, 뭐가 먼저든 간에 익숙하게 치고 들어와 정박을 맞추는 모든 세션들이 새로웠다.
마침내 연주가 끝나고, 정국이 여주에게 신사 인사를 하며 말했다.
“이상, 기타 하나가 없는 앵콜 공연이었습니다.”
그러고는 마이크를 들고 의자를 끌어 와 앉았다. 어디서 주워온 건지 모를 컴퓨터책상 의자였다.
“이제 소개하면 되는 거죠? 저는 전정국이고요, 스물두 살입니다.”
정국이 바퀴를 굴려 윤기에게 다가가 마이크를 넘겼다.
“민윤기고요, 나이는, 네. 제일 많아요.”
“스물일곱이래요~”
태형의 외침에 윤기가 마이크를 던졌다. 가뿐히 받아낸 태형에 이어 지민까지 통성명을 마치고 여주 차례가 되었다.
“스물둘 최여주입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정국이 마이크를 가져가 남준에게 넘겼다. 이리저리 옮겨가는 마이크에 여주가 눈을 감았다 떴다. 자기들끼리 청춘영화 찍나 싶었다.
“여주는 다들 알다시피 옆집 사는 동생이고요. 저번에 본 것처럼 제가 아는 사람 중에 기타를 가장 끝내주게 잘 다룹니다. 저희 멤버들 만장일치로 여주를 데려왔고?”
만장일치라는 말에 멤버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여주를 쳐다보았다. 꼭 놀란 표정을 바라는 것 같았다. 여주는 그런 시선들에 눈썹을 긁었다. 아니, 저도 돈 때문에 온 건데.
“원래 있던 메인기타가 개인사정으로 팀을 나가게 돼서, 화이트데이 공연 때까지만 여주가 그 자리를 대신해주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지민이 기타도 조금 봐주고.”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가 더 잘 부탁드려요.”
지민이 악보파일을 건네며 말했다. 악보를 펼쳐보기도 전, 여주는 앞표지의 요란한 글자들에 눈을 굴렸다. 최-여-주-의-악-보-집. 통통 튀는 글씨 주위로 여기저기 귀여운 표정들이 수놓아 있었다. 여주는 악보를 펼치며 생각했다. 이런 청춘영화라면, 돈 받고 찍는 것 치고 꽤나 이득이라고.
당분간은 개인연습 기간이었다. 한 달 안에 두 곡을 완벽히 연습해야 하는 것은 꽤나 촉박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헤븐라희도 여주를 섭외한 것이고.
여주가 벨소리와 알람소리를 다시금 바꾸며 발걸음을 빨리 했다. 뭐든 익숙해져야 손에도 빨리 익는 법이었다.
“나 왔다~”
“일찍 왔네?”
“이 앞에 일이 있어서 잠깐 들렀었거든. 오전에 사람 많았어?”
“여기 사람들은 주말 아침에도 출근한다니?”
“바빴구나.”
여주가 미안한 기색을 띠며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헤븐라희 연습실을 다녀오느라 알바 시간을 바꾼 탓이었다. 소라가 제 앞치마를 여주에게 건넸다.
“오늘 오후에 알바 면접 있대.”
“오늘 매니저님 안 오시지 않아?”
“어, 근데 매니저님이 오늘 오는 남자애 그냥 뽑으라더라. 지원자 중에 걔만 경력직이라고.”
“경력 없는 사람은 억울해서 어떻게 사냐.”
경력 있는 사람이 하기에는 배부른 한탄이었다. 이렇게라도 배를 불려야 알바생 주제에 서럽지라도 않지. 소라가 고개를 끄덕이고 퇴근했다. 여기 알바생1 퇴근이요~
주말 오후는 오전보다 더 붐볐다. 카페인의 민족인 마냥 지겹게도 커피를 찾아댔고, 여주는 지겹게도 원두를 내렸다. 좀 전에 있었던 연습실 일을 떠올릴 짬도 없었다. 믹서 가는 소리와 전자레인지 시간 초 소리가 카운터와 주방을 가득 메웠다. 진동벨이 비면 불안해지고 진동벨이 가득 차야 안심이 되는 눈물 나는 상황. 여주가 출입구의 종이 ‘딸랑’ 소리가 아니라 손님 따라 ‘자몽에이드요’, ‘아이스초코휘핑존나많이요’ 소리가 났으면 좋겠다 생각할 때쯤, 누군가 들어왔다.
“언니, 알바 면접 오셨다는데. 들은 거 있어요?”
같은 타임 알바인 가연이 여주를 불렀다. 얼음을 믹서에 퍼 넣고 있던 여주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잠깐만 빈자리에 앉아 계시겠어요?”
매대와 포스기에 가려진 누군가가 빈자리를 찾는 게 보였다. 여주가 남은 주문을 훑다 가연에게 믹서를 넘겼다. 살다 살다 내가 면접을 다 보네. 이게 바로 1년 경력의 힘인가. 경력 없이 운 좋게 뽑혔던 첫 날을 떠올리며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카운터를 빠져나오자 그제야 매장 내 음악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면접 보러 오셨다고……어?”
“어?”
여주와 누군가가 동시에 서로를 보자마자 반응했다.
“이름이…… 지민? 씨? 님?”
여주가 호칭을 어찌 할 줄 몰라 갈팡질팡 하는 동안 지민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일하세요?”
“아, 네. 어쩌다보니 제가 면접을 보게 됐네요. 저도 알바생 신분인데. 그…… 이력서 좀 읽어도 될까요?”
아까는 여주가 면접자였다면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한 가지 같은 것은 둘 다 이미 합격된 상태라는 것. 미묘한 감정에 읽으라고 가져온 이력서를 허락까지 구하고 읽었다. 지민은 그를 찬찬히 살폈다.
앞으로 한 달, 헤븐라희에서 가장 자주 만나야 할 사람이었다. 매번 여주의 공연을 말로만 듣다가 실제로 보게 됐을 때는 입을 다물지 못했었다. 음원을 그대로 구현해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대회가 아니라 공연이었는데. 학교 동아리에서 나온 공연.
8년 동안 기타를 치면 그렇게 될까. 지민도 기타를 만지고는 있지만 좀처럼 잘 되지 않았다. 혼자 통기타를 만지작대다가 밴드에 합류해 합주하려니 만만치 않았고. 영상을 보며 따라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단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코드도 어려웠다. 분명 짚으라는 대로 짚었는데 소리가 헛 나올 때마다 맥이 빠졌다. 선재에게 물어도 제대로 안 짚었다고만 하고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통 알려주지를 않았다. 남준이 정국과 선재 중 정국을 선택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걔는 이미 우리를 팀으로 생각 안 해. 말할 때부터 그랬어. ‘너네가 잘 굴러갈 것 같아?’라잖아. 그 ‘너네’에 자기는 없는 거지. 기타솔로 있는 곡만 주구장창 고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사실상 정국을 선택했다 하기 보단 선재를 내보낸 것이었다. 지민도 성격 같아서는 한 대 치고 욕을 퍼붓고 싶었으나 팀을 생각해 참아왔었다. 제가 아니라도 매번 정국과 부딪히니 저까지 물의 일으키고 싶지도 않았다. 코드를 짚지 못해 매번 파워 코드로 빠지면서도 선재의 은근한 무시에 이를 갈아야만 했다. 그래서 지민은 궁금했다. 얘는 어떨까.
“카페 경력이 있으시네요?”
“아, 네.”
“6개월 일했고요.”
“네.”
“평일 오후에 일하신 경험이 있는데, 주말 오전으로 지원한 이유가 있나요?”
“주말 오전만 구하던데요.”
“아.”
여주가 짧게 탄식하고 다시 이력서에 고개를 박았다. 지민이 살풋 웃었다.
“사실 제가 면접은 처음이라 어디까지 물어야하는지 모르겠네요.”
“네에.”
“그리고 매니저님께서 지민……님 뽑으라고 하셨거든요.”
“저를요?”
“유일한 경력자시더라고요.”
“그럼 다음 주부터 나오나요?”
“바로 나오실 수 있으세요?”
“네.”
“그럼 나오세요.”
궁금한 거 있으신가요? 여주가 이력서를 내려놓고 물었다.
“어때요?”
“뭐가요?”
“일하는 거요.”
헤븐라희요. 라고 말하려던 걸 가까스로 참았다.
“그냥, 전에 해 보신 거랑 비슷할 거예요.”
“그래요?”
“그럴 걸요.”
“그럼 안 되는데.”
“네?”
강선재랑 비슷한 사람이면 제가 조금 힘들 것 같아서요.
“유니폼은 주시나요?”
“윗옷은 드리고요, 바지는 트레이닝 복이랑 반바지 빼고 다 된다고 규정상 적혀있긴 한데. 그냥 검정 슬랙스 입으란 소리예요. 아시죠?”
그날 여주와 지민의 카톡에는 각각 새로운 채팅방이 하나씩 생겼다.
[ Heavenli喜 6 ]
[ 히트커피 주말근무 조 6 ]
“아, 그리고 편한 대로 부르세요.”
“네?”
“계속 님으로 불리기엔 조금. 그래서.”
“아아, 네 알겠어요. 오빠도 말 편하게 하세요.”
“그래.”
[ 새로운 친구 – 최여주 ]
[ 새로운 친구 - 박지민오빠 ]
헤븐라희와 여주는 그렇게 서로에게 미끼를 던지고, 물고, 다시 던지고 있었다.
박지민 24
해븐라희 세컨드기타
해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재학
김태형 24
헤븐라희 베이스
연화예술대학교 의상디자인과 재학
여주가 선입금으로 받은 돈: 50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