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텅 비어 있었다. 눈이 내렸고 발자국은 없었다. 불 꺼진 고요한 방안에서 지훈은 한 곳을 응시했다. 폴라로이드가 일렬로 엉성하게 붙은 벽이었다. 성격이 삐뚤어 정렬 맞춤은 글렀다던 누군가의 작품이었다. 창밖으로 혹독한 바람이 불었다. 마지막 사진은 끝내 시간을 이기지 못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마지막은 내 맘이야. 피날레는 가장 예쁜 걸로.
지훈은 얼굴을 감싸 짧게 신음했다.
가장 예쁜 건 너니까.
결국 흐느낀다. 마르지 못한 뺨 위로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지쳐 잠에 들면 꿈에서도 잡지 못한 뒷모습이 멍울졌다.
모든 게 엉망이었다. 들이쉬는 숨부터 떨어지는 눈물까지 성하지 못했다. 죽음의 기로에 서 있던 지훈을 구한 그녀는 정작 모든 불행을 끌어안고 혼자 갔다. 사랑이 떠날까 무서웠고 혼자 버려질까 두려웠으며 목적 없이 사는 공허함을 이기지 못한 선택이었다. 그녀는 지훈의 사랑을 동정과 연민으로 치부하고 지훈과의 모든 시간을 지웠다. 하지만 지훈은 그녀를 잘 알았다. 동정과 연민 따위로 덮은 지훈의 사랑을 그녀는 여전히 원하고 있었으며, 이쯤에서 헤어지자던 아픈 말에는 지훈을 아직도 사랑한다는 진심이 숨어있었음을. 하지만 그녀의 결심은 견고했고 지훈은 그저 보낼 수밖에 없었다.
지훈의 사랑은 눈을 감아야만 볼 수 있었다. 꿈을 꾸고 나면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이별은 다 그런 거라 했다. 반쪽이 떨어져 나가면 나머지 반으로 살아가면 된다고 케이블 채널 이별 클리닉 전문의는 동그랗게 모인 청중 가운데서 말했다.
사랑한 만큼 미워하세요. 이별을 당했다면 먼저 이별을 고했다고 생각하세요. 당신에게 매몰찼던 사람을 아낌없이 지우세요. 어둠 속 흐릿한 파장이 지훈의 얼룩진 뺨에 닿았다. 미워하세요. 먼저 이별을 고했다고 생각하세요. 아낌없이 지우세요. 지훈은 날이 밝을 때까지 혼잣말로 되뇌었다.
사랑한 만큼 미워하세요.
새벽에 눈을 뜨면 지훈은 제일 먼저 그녀를 미워했다. 혼자 생각하고, 혼자 판단하고, 혼자 떠난 사람의 맑은 눈동자, 부드러운 뺨, 따뜻한 체온, 묻혀 죽고 싶은 목소리를 미워하며 까만 천장에 모습을 지웠다. 가끔 기저 속 사랑이 불쑥 치고 올라오면 현관 앞에서 승관이 악을 쓰건 말건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 이불을 뒤집어썼다.
밖에서 정한의 목소리가 들리면 지훈은 이불을 더욱 움켜잡았다. 잔뜩 상기한 승관은 정한이 연 문을 비집고 들어가 이불을 거세게 잡아당겼다. 작은 뒤통수가 옅게 숨을 토했다. 미워하는 일을 끝내지 못해 숙제처럼 남은 지훈은 손등으로 젖은 눈가를 문질렀다. 승관은 지훈의 양 손목을 빠르게 살피고 침대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제때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승관은 오늘처럼 지랄 발광을 했다. 그럴 때마다 지훈은 승관을 떼인 돈 받으러 온 채권자 같다고 말했다.
눈물 자국만 지저분하게 남은 침대에서 지훈이 몸을 일으켰다. 승관의 어깨가 처졌다. 그 밑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지훈은 부러 무방비한 상태였다. 차라리 얻어맞는 게 낫지 싶었다. 그 끝에는 사랑한다는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죽도록 미워하는 일은 이미 실패한 것 같았다. 승관은 주먹 대신 지훈을 끌어안았다. 정한은 소파에 주저앉았다.
차라리 저번처럼 매일 꽃이나 사서 집 앞에나 쪼그려 있어라. 동상 걸린다고 안 팰게. 경비원 오면 내가 다 막아 줄게. 제발 부탁이니까 집에 혼자 있지 마, 어? 문 걸어 잠그고 소리까지 없으면 나 미쳐 돌아버릴 것 같다고! 꼭 돌아온다고 했어. 안 그래도 느려 터진 애가 돌아온다고 했으니까 우리 생각보다 오래 기다려야 돼. 걔가 나한테 한 부탁도 살아서 부지런하게 지켜야 하거든? 그때까지 우리 둘 다 저승사자 와도 못 본 척해야 돼. 정한이 형 믿고 까불면 뒤진다. 아무리 마이다스 손이라도 저 형도 인간인데 너 못 살리면 난 누구한테 가야 되냐. 차라리 올 때까지 미워해. 미워하면서 살아라.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
미워하는 것부터 낙담한 지훈은 실소했다. 미워하는 것도 마음을 쓰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사랑한 만큼이라면 크기조차 가늠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왕창 깨졌다. 첫판부터 망한 것이다. 지훈은 실성한 사람처럼 웃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오늘 밤 걸어 잠근 문 안에서 소리 내지 않을 것만 같았다. 지훈은 창백한 얼굴을 묻었다.
이별을 당했다면 먼저 이별을 고했다고 생각하세요.
최악이야.
지훈은 상상의 이별을 먼저 고한다 한들 그녀의 손을 절대 먼저 놓지 못했다. 미워하는 일부터 신뢰가 깨진 이별 클리닉 전문의는 사랑 한 번 해보지 않은 괴짜였다. 덕분에 헤어지던 순간이 매 순간 찾아와 지훈을 괴롭혔다. 바닥에 옹송그려 앉아 머리를 감쌌다. 고통을 버티지 못한 지훈은 다음날 정한이 발견할 때까지 죽은 숨을 쉬고 있었다.
정한이 지훈을 병원에 데려간 건 그 시기였다. 예전부터 먹던 수면제의 강도를 올리고 항우울제까지 복용하기 시작한 뒤로 지훈은 부쩍 말이 줄었다. 원래도 적은 말수가 바닥을 기었다. 이 사실을 알아차린 지훈의 모가 정한의 집까지 찾아와 억지로 데려가려 했으나, 지훈은 그곳에 없었다. 미리 수를 읽은 정한이 지훈을 몰래 입원실로 옮긴 뒤였다.
형은 왜 아직도 살아. 형도 다 잃어서 없잖아.
약 기운에 눌려 잠들기 직전 자신의 머리맡을 지키는 정한에게 물었다. 지훈은 정한의 허망한 뒷모습을 기억했다. 일방적인 반대로 사랑을 떠나보내고 재력으로 얽힌 아무개와 연을 맺은 정한은, 어쩌면 자신보다 잃을 것 없는 밑바닥 같았다. 지훈의 눈꺼풀이 반쯤 감겼다. 정한이 지훈의 머리를 차분히 쓸어 넘겼다.
기적처럼 돌아오려 떠난 사람도 있지. 난 거기에 운명을 거는 중이고. 네가 생각하는 그 애도 그러려고 잠깐 떠난 거야. 널 많이 생각하고 많이 좋아해. 그건 네가 더 잘 알잖아. 나중에 돌아왔을 땐 떨어진 시간만큼 사랑해줘. 이별 전문의 토크쇼 같은 건 그만 보고. 나보다 더 돌팔이니까.
의식이 감기는 순간에도 지훈은 운명을 걸고 싶은 누군가를 떠올렸다. 평생 미워할 수도, 손을 놓을 수도 없는 그 누군가를. 오랜 여행 끝에 돌아올 프리지아를 기다리며 지훈은 깊은 잠을 잤다. 그녀가 떠난 이후 처음이었다.
지훈은 학교로 돌아갔다. 그는 전보다 학업에만 매진했고 과제에 마감에 야작까지 하고 나면 꿈을 꿀 시간조차 없었다. 해가 갈수록 사람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 지훈은 웃음을 잃었다. 승관과 석민을 만나 술을 기울여도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다만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길은 늘 질펀했다. 공모전 대상 수상자 명에 뒤에는 그리움에 지쳐 쓰러지는 눈물이 있었다. 계절과 무관한 그 비는 지훈의 뺨과 갈피 없는 발등에만 내렸다.
기약 없는 기다림은 괴로운 익숙함을 수반한다. A대 졸업식 당일 본관 계단에 앉아 학사모를 내려놓은 지훈은 넓은 캠퍼스가 잠잠해질 때까지 누군가를 기다렸다. 새하얀 눈밭 위로 또 눈이 내렸다. 그는 체념했다.
졸업 후 취업에만 몰두했다. 그해 K건설 5차 면접 합격자는 지훈이 유일했으며 사람들은 괴물이라 불렀다. 냉정했고 드러나는 감정이 없었다. 사내에 자신을 향한 고백이 돌아도 지훈은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잡지사의 러브콜 또한 내치다 못해 차단한 상태였다. 지훈은 끊지 못한 수면제와 약물을 한 번에 삼키며 얼굴을 찌푸렸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그는 사무실 소파에 몸을 기댔다. 꺼지지 않는 서울의 밤, 그는 억지로 눈을 붙였다.
― ‘날 기다리지 않는 거.’
……
― ‘그래야 우리가 살아.’
당신에게 매몰찼던 사람을 아낌없이 지우세요.
아낌없이 지우세요.
― “……돌팔이 맞네.”
건물 유리창 안으로 별빛이 쏟아졌다.
그것은 힘겹게 얼굴을 감싼 손등과 반지를 비췄다.
지훈은 7년째 애인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