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lyakov Ilya x Blair Williams
나의 사랑 나의 신부
05. 조카 말고, 그 .... 있어요.
왜 대체 시간은 빠르게 가는 건지. 이것은 인류 기원 이래로 죽 이어진 난제가 분명했다.
블레어와 헤어진 게 화요일이었는데, 어째서 주말은 이렇게 금방 오지. 하다못해 몸이라도 아프면 앓아 눕는다는 핑계라도 댈텐데. 하지만 멀쩡한 몸이 갑자기 고장날리도 없었고, 시간이 멈출 일도 없었다. 그러면 그냥 바람을 맞히라는 누군가의 같잖은 충고는 별로 듣고 싶지도 않았다. 어른이 되어서, 어린 애 바람 맞히는 건 뭐하는 짓이야. 그건 안 돼. 양심과 다투던 일리야가 머리를 헝클었다. 진짜 나가야해? 입을 옷도 없고, 뭘 해야할지도 모르겠는데. 차 안의 어색한 침묵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날 그러고 아마 20분을 그러고 왔지, 아마… 일리야는 시끄러운 것 보다, 어색한 것이 백 배는 더 싫었다.
- 오늘 안 잊어버렸죠?
- 어
- 그럼 이따 봐요!
심지어 차로 데리러 가겠다고 저도 모르게 그랬다. 요새 날도 더운데 그 정도 호의야 베풀 수 있지, 하고 호기롭게 뱉어놓고 뒤늦게 떠올렸다. 나는 얘랑 룰루랄라 놀러다니는 게 아니라 떼어내는 게 목적이었지.
그렇지만, 그렇지만.
막상 그 얼굴만 보면 도무지 싫다는 소리를 할 수 없었다. 빛나는 눈을 마주치면 할 말이 없었다. 처음에는 잘만 했던 결혼 엎자는 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다. 가만히 턱을 괴고 밥을 입에 집어넣는 양을 지켜보았다. 잘 먹네. 블레어를 바라보다 한 입, 느릿하게 음식을 씹고 삼키고 물 한 모금. 이 복잡한 심경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일리야는 한참을 고민하고 있었다. 밥 먹으면서 생각 너무 많이 하면 체한댔는데. 어디선가 주워들은 말을 떠올리며 일리야는 반찬을 뒤적거렸다.
" 아저씨, 이거 진짜 맛있어요. "
" 어? "
" 아. "
또 이러네. 가만히 앞에 놓인 반찬과 블레어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게 티가 나는 해맑은 아이. 게다가 애교도 많은. 그래서 그런지 블레어는 참 일리야에게 싹싹하게 굴었다. 지금처럼. 그래도 정을 뗀다거나 하려면 그냥 지금 거절해버리는 게 좋겠지. 됐다고 손을 내저으려 손을 들어올린 순간, 눈이 탁 하고 마주쳤다.
강아지 같은 눈망울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래서-. 싫다고 말하기가 참 뭐했다. 싫다고 거절이라도 한 번 하면 뭔가 울 것 같기도 하고- 순전히 일리야만 그렇게 생각하는 추측이었다- 마음이 약해지는 구석이 있었다. 결국은 오늘도 반찬을 한 입 받아먹었다. 맛있긴 했다. 싫어하는 음식이기는 했지만, 제가 먹었다는 이유 하나로 얼굴이 밝아지는 블레어에게는 그냥 아무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있지도 않은 강아지 귀가 축 처질 것 같았다.
" 맛있네. "
" 그렇죠? "
베시시 웃는 모습은 꽤 보기 좋았다.
학교는 어때? 뭐, 늘 똑같죠. 회사는 어때요? 뭐, 늘 똑같지. 생각없이 주고 받은 대화가 우스워 둘이 한참을 웃어제꼈다. 실없는 대화는 분명한데 둘 다 뭐가 그렇게 신이 났는지. 한참을 웃다가 블레어의 뺨에 붙은 밥풀을 떼어주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딱 봐도 한국인은 아닌 거 같은 남자 둘이 밥을 먹으며 신나게 웃어제끼니 시선이 제법 몰려 일리야는 공연히 헛기침을 했다. 잠깐 정신을 놨었다. 그제서야 신경쓰이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일리야는 블레어부터 차로 보냈다. 먼저 가서 타고 있어. 또 시키는대로 고개를 끄덕이며 포르르 내려가버린다. 귀엽네. 피식 웃으며 지갑을 꺼내들었다.
" 조카에요? "
" 어.... "
" 사촌? 차이 좀 나 보이는데. "
뭐라고 대답해야하지. 사촌은 아니고 그렇다고 조카도 아니다. 일단 친족의 범위에 속하는 사이는 아니지, 그럼. 말을 한참 고르던 일리야는 결국 사실대로 실토했다. 정말 딱히 둘러댈 말이 없었다.
" 조카가 아니구요, 그. "
" 그? "
" ....아마 결혼할... ㅅ... 람.. 일걸요. 아마. "
할 말이 없어 꺼낸 말에 아주 그냥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급하게 싸인을 하는 도중에도 아주머니의 수다가 그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새댁? 이제 결혼하니까 새댁이지 뭐. 새댁이 어린데 답지 않게 싹싹하고 애교 많던데, 잘 지내요. 대체 한국의 정은 어디까지인거지. 넉살좋은 아주머니의 말에 일리야는 대충 대답하며 고개만 숙였다. 네. 네. 도둑놈이네 아주. 능력도 좋아? 잘해줘, 잔뜩 말랐던데. 능글맞은 목소리는 보너스. 영수증을 받아들고 잰걸음으로 주차장으로 도망친 일리야가 코너에 있던 블레어와 마주쳤다. 왁! 순간 우스꽝스럽게 내지른 소리는 보너스.
" 너 여기서 뭐해? 가있으랬더니. "
" 차를 못 찾겠어서요. "
조그만 주차장에 차가 있으면 몇 대나 있다고. 뻔히 보이는 거짓말에 일리야가 실소를 터뜨렸다. 알았다. 가자. 다시 차키를 건네받고 앞장서려는데 블레어가 옆에 붙어왔다. 아저씨, 아저씨. 나 다 들었어요. 나한테 잘해주랬죠? 베시시 웃는 얼굴에 다시 한 번 어이가 없었다. 그건 언제 들었어? 아까 기다리다가. 저 아줌마 목소리 엄청 커서 복도까지 다 들리던걸.
" 나한테 잘해줘야 해요. 그러니까. "
" 당당한 거 봐라. "
" 그럼요, 당연한 거 이야기하는 건데. "
아저씨는 그럼, 나한테 못되게 굴거에요? 심통이나 하는 질문이 귀여워 일리야는 짐짓 고민하는 체를 했다. 좀 그래볼까. 놀려주려고 시작한 말이었는데, 생각한 반응이 돌아오지 않아 뒤를 돌아보았더니 블레어는 실실 웃고 있었다. 못해준다는데 뭐가 그렇게 좋은거지. 이건 또 무슨 반응인가 싶어 그 자리에 멈추어서자 블레어가 다가와 일리야의 입에 사탕 하나를 쏙 집어넣었다. 아까 카운터에서 집어온 모양이었다. 있는 거 못 봤는데. 일단 입에 들어온 것이니 사탕을 입에 굴렸다. 달달했다.
" 거짓말인 거 다 알아요. 잘해줄거면서. "
" 내가 언ㅈ... "
" 나 싫다면서 매번 만나주고 있잖아요. "
그러니까 앞으로도 잘 해줄거라는 거 다 알아요. 여유롭게 콧노래까지 부르며, 차 키를 들고 주차장으로 먼저 사라지는 블레어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졌다. 입에서는 시원한 박하향이 났다. 달달하고, 상큼하고, 시원한 게 둘이 꼭 닮았다고 일리야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