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마뱀 술집 – 비터스윗 필즈
“여보세요?”
- 아들, 잘 지내?
“응, 난 잘 있죠. 엄마는?”
햇빛이 따가워 눈을 뜬 태형은 때마침 울린 벨소리에 잠에서 완전히 깼다. 커튼 치는 것을 깜빡해 정오의 해가 한가득 들어찼다.
- 엄마도 잘 있지. 요즘 집에 통 안 와서 전화해봤어.
“요즘 연습하느라 바빠.”
태형은 이부자리에서 벗어나 터덜터덜 부엌으로 향했다. 원룸이었지만 있을 건 다 있었다. 실은 있을 건 다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인테리어부터 창문 난 방향이나 역세권이라는 위치까지. 호화로운 수준의 원룸이었다. 하지만 태형이 이 집을 고른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 공연이 또 있어?
“화이트데이에도 공연해.”
연습실이 가까워서.
- 우리 아들 바쁘네~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애초에 본가가 연습실과 멀다는 이유로 자취방을 잡은 것부터 말이 안 됐다. 지금은 역까지 걸어가기 귀찮은 멤버들의 화장실이 되었지만, 태형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가진 자의 여유였다.
“무리 안 해요. 재밌어서 하는 건데 뭘.”
- 재밌어?
“고럼, 아들 요즘 완전 재밌어.”
태형이 커피캡슐을 집어 들고 말했다. 확실히 그때 그 장면은 재밌었다.
“엄청 재밌는 애를 만났거든.”
뭔 놈의 사람이 그렇게 겁이 없는지. 선재가 입에 걸레를 물어도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그를 몰아냈다. 선재를 화나게 하는 건 덤. 그 덕에 몸부림이 더 격렬해져 저도 손을 보태야했지만, 그건 확실히 재밌는 장면이었다.
- 언제 한 번 집에 들려. 너 좋아하는 딸기 엄청 사뒀어.
“다음 주 중으로 갈게요.”
전화가 끊기는 것에 맞춰 커피가 다 내려졌다. 태형은 아일랜드 식탁 앞에 앉아 간밤에 쏟아진 카톡을 확인했다. 대부분이 헤븐라희였다.
[ Heavenli喜 6 ]
남준이형: 연습실인 사람~~
윤기형: 나 지금 문 앞
윤기형: 아무도 없네
지민이: 저 알바요
남준이형: 오 어디서 해?
지민이: 백화점 옆에 히트카페에서 하게 됐어요
지민이: 여주랑 같이 해요 1시까지
남준이형: 헐 대박
남준이형: 니가 합격했다는 데가 거기구나
윤기형: 여주 오늘 연습 와?
지민이: 제가 물어볼게요
지민이: 점심 먹고 간대요
윤기형: 초밥 먹고 싶으면 연습실 와
윤기형: 나 초밥 시킬 거임
윤기형: 1시에.
지민이: 맛있겠다!
지민이: 꼭 갈게요!
지민이: 라고 전해달래요ㅎㅎ
윤기형: 근데
윤기형: 지민이 일 안 하니?
지민이: 하고 있거든요ㅡㅡ
히트카페? 태형이 눈을 반짝였다. 욕실로 가는 발걸음이 꽤나 급했다. 정오의 햇살을 받으며 이미 내린 커피가 차게 식어갔다.
헤븐라희 5
– 그들의 재미 -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백화점 근처라 주말 오전에도 사람이 붐볐다. 그나마 테이크아웃 손님이 많아 매장은 한가했지만 지민과 여주는 몰아치는 주문에 눈코 뜰 새 없었다. 매니저가 지민을 뽑은 이유가 이거였다. 바쁜 시간에 무경력자를 뽑았다가는 과포화 상태가 될 터였다. 지민은 저번 알바를 관둔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일을 능숙하게 해냈고, 덕분에 여주는 재료 위치와 레시피 조금을 알려주고 제 할 일을 할 수 있었다.
“와, 지금 몇 시예요?”
“열두 시 반.”
“이제 바쁜 거 끝나긴 했는데. 퇴근 시간이네요.”
둘은 카운터 뒤 의자에 앉았다. 오랜만에 앉는 것이라 다리에 피곤이 덕지덕지 붙었다. 여주가 앉은 자리에서 커피를 내리고 얼음을 퍼 아메리카노 두 잔을 만들었다.
“이렇게 한 잔씩 마셔도 돼요. 알바생의 특권이랄까.”
“나 전에 일하던 데서는 이런 거 안 됐는데.”
“어디서 일했었어요?”
“전포 쪽에서.”
“카페거리?”
지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서 버스킹도 자주 했어.”
지민이 헤븐라희를 알게 된 것은 한 달에 한두 번꼴로 오는 라이브 버스킹 때문이었다. 라이브 카페였던 그곳은 주로 여덟 시부터 라이브를 시작했다. 평일에 약속이 없을 때면 지민과 같이 일하던 알바생 한 명이 노래를 부르곤 했다. 통기타를 조금 만질 줄 알았던 지민이 한 번, 딱 한 번 기타 반주를 쳐준 적 있는데 그게 정국의 눈에 띄었다. 마침 기타가 한 명 더 필요했던 차에 별다른 면접 없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버스킹도 하는 줄은 몰랐는데.”
“너희는 주로 바다 쪽에서 하고, 우리는 주로 서면 쪽에서 해서 몰랐을 거야.”
여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는 체인락, ‘우리’는 헤븐라희. 이제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게 묘했다.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헤븐라희에 몸담고 있으니. 애매하고도 묘한 상황. 그리고 여주는 다시금 걱정이 떠올랐다. 만약 공연에서 체인락을 만나면 어쩌지.
“윤기형이 연습실에서 초밥 시켜먹을 거라는데. 먹고 싶으면 오래.”
“헐, 맛있겠다! 꼭 갈게요!”
“그대로 전해줄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휴대폰도 만지작거리고, 한산한 매장을 둘러보며 혹시나 손님이 들어오지 않을까 입구를 쳐다보고. 여주는 퇴근이 얼마 안 남은 알바생답게 지나가는 사람보고 오지마라는 주문도 외웠다. 슬슬 다음 타임 알바가 올 때쯤에 그 주문이 들어맞지 않았지만.
“어서 오세요, 히트 커피입니다. 주문하시겠……어?”
“안녕?”
익숙한 얼굴에 말꼬리를 잘라먹었다. 일어나자마자 내린 커피를 마다하고 달려온 태형이었다. 여주는 이름이 기억 안 나 어색하게 인사했다.
“김태형?”
그래, 김태형. 지민의 부름에 여주가 속으로 이름을 되뇌었다.
“너네 여기 있다길래. 기다렸다 같이 가려고. 커피도 마시고.”
“아. 주문하시겠어요?”
“바닐라라떼 휘핑 많이요.”
“사이즈는 레귤러로 하시겠어요?”
여주가 주문을 받는 동안 다음 타임 알바가 들어왔다. 태형이 진동벨을 받고 저쪽에 앉자 지민이 만들던 음료는 다음 알바에게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태형은 주방과 스태프룸을 오가는 지민과 여주를 눈으로 좇았다. 그러면서도 선재를 몰아내던 게 떠올라 비식비식 웃었다.
“왜 그렇게 웃어?”
“그냥. 재밌는 게 생각나서.”
지민이 나오고, 진동벨이 울리고. 라떼를 받아오자 여주가 나왔다. 태형은 지민과 여주 손에 나란히 들린 아메리카노를 보다 걸음을 옮겼다. 아메리카노는 써서 싫은데. 다음에는 시럽을 왕창 넣어서라도 시켜야겠다 생각하며.
선재가 한 바탕 한 이후 처음으로 오는 연습실. 이제 제법 익숙한 걸음이 기타 자리로 섰다. 선재의 기타가 사라진 자리에 여주의 기타가 세워졌다. 여자문제로 나갔다고 했던가. 여주는 이제껏 궁금하지 않던 게 궁금해졌다. 그래서 이를 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어차피 한 달이니 많은 것을 궁금해 할 자격은 없었지만, 저도 체인락을 비슷한 맥락으로 나온 전적이 있으니 조심해서 나쁠 것도 없었다. 다만 밥 먹을 때 물으면 체할 것 같으니 나중에 따로 남준에게 묻는 게 나았다. 여주는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아 다른 것을 물었다.
“근데 보컬은요?”
“정국이 3시에 온대.”
“연어초밥 하나는 누구 거야?”
“그거 정국이 거.”
배달 온 초밥을 뜯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밥 먹을 때만 조용해지는 헤븐라희 연습실에는 여주도 고요히 스며들어 있었다. 중간 중간 섞이는 대화에 이질감이란 없었다.
“여기 화장실 어디예요?”
“이 건물에는 없고. 우리 집 가야 돼.”
“오빠 집이요? 근처 살아요?”
“응. 길 건너 저쪽에.”
“다른 데는 없어요?”
“아, 역으로 가면 돼.”
너무 자연스러워서 태형은 하마터면 자신의 집 화장실로 가게 할 뻔했다. 여주는 티슈로 입을 닦고 일어섰다.
“같이 가자.”
태형이 마지막 초밥을 입에 욱여넣고 일어섰다. 여주가 태형에게 티슈 하나를 건네고 먼저 연습실을 나섰다.
날씨가 좋았다. 체인락에 여주가 짐을 뺄 때만큼이나. 조금 나른해진 태형이 눈을 가늘게 떴다.
“집이 근처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응, 근처야.”
“근데 왜 굳이…….”
“너 심심할까 봐.”
역은 가까웠지만 그곳을 화장실로 쓰기에는 조금 먼 거리였다. 멀다기보다는 귀찮은 거리. 때문에 헤븐라희 멤버들은 모두 태형의 집을 화장실로 썼다. 태형은 말할 것도 없고. 실로 태형은 역 화장실을 오랜만에 가는 중이었다.
“자취하시는 거예요?”
“응.”
“학교가 이 근처신가…….”
“아니, 학교는 연화예대. 본가가 더 가까워.”
“그런데 왜 자취를……?”
“연습실이 멀잖아.”
여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로는 감탄했다. 학교도 아니고 연습실 때문에 자취를 하다니. 돈지랄도 다방면으로 할 수 있구나.
둘은 남녀화장실 앞에서 갈라졌다. 태형은 온 김에 손을 씻었다. 찬 물에 손을 대니 밀려왔던 잠이 달아나는 듯했다. 여주 말대로 코앞이 집이니 역까지 오지 않아도 되었다. 그럼에도 따라나선 것은, 그리고 이미 내린 커피를 마다하고 히트커피까지 간 것은, 여주를 알고 싶어서였다. 여주가 알고 싶어진 이유는, 재미있어서. 태형은 이런 감정을 ‘친해지고 싶다’고 표현하곤 했다.
그날 태형은 온갖 말을 들었다. 선재의 입에서 나오는 욕 중에 그나마 정상적인 말은 이것이었다. ‘굴러 들어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 하지만 틀린 말이었다. 선재는 이미 빠진 돌이었고, 그 자리에 여주가 안착한 것뿐.
헤븐라희는 몇 번 공연하고 해체되는 이벤트성 팀이 아니었다. 남준과 윤기를 중심으로 모인, 연습실까지 빌리고 장비를 차곡차곡 채워 넣어 구색을 갖춘, 취미라기에는 본격적이고 아티스트라기에는 취미에 가까운 그런 팀이었다. 태형은 마음과 뜻이 맞는 사람끼리 만나는 자리가 좋았다. 연습실 때문에 자취방을 얻을 만큼 헤븐라희에 대한 애정이 꽤나 깊었다. 그래서 지민이 들어오고서부터 조금씩 거만해지며 알게 모르게 지민을 무시하는 선재가 신경 쓰였다. 정국의 여자친구를 건드리는 것 또한.
팀워크라는 명목 하에 눈감아준 사건이 몇 개인가. 하나둘 늘어갈수록 명백해지는 사실이 있었다. 선재는 헤븐라희 멤버 모두의 마음속에서 서서히 빠지고 있던 돌이라는 것.
그래서 태형은 여주가 재미있었다. 지민이 카톡을 보내자마자 집에서 달려온 것도 재미있었고 최선을 다해 지민을 가르치는 것도 재미있었다. 다 빠진 돌을 뻥 차버리는 것은 속이 시원하다 못해 개운했다. 따지고 보면 여주는 헤븐라희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든 이상한 길로 돌을 굴리든, 한 달만 연습하다 갈 계약직이었다. 여주가 받은 돈에 선재를 쳐내는 깽값이 포함된 것도 아닌데 굳이 가만있어도 굴러갈 돌을 으랏차차 홈런 친 이유가 궁금했다.
“있잖아.”
“네?”
여주는 단지 배가 고팠을 뿐인데…….
“아메리카노 좋아해?”
여주가 덜 마른 손을 탈탈 털며 태형을 올려다봤다. 태형은 이 흥미로움을 조금 더 간직하고 싶었다. 돈 받고 낙하산으로 꽂힌 실력 있는 인재, 이런 거 말고 다른 수식어를 악보집에다 적어주고 싶었다.
“네? 네.”
“바닐라라떼는?”
“달아서 별로 안 좋아해요.”
“그럼 아메리카노에 시럽도 안 뿌려먹겠네.”
“네. 왜요?”
“대단해서. 난 쓴 거 못 먹거든.”
둘은 에스컬레이터로 올라가는 와중에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대부분 영양가 없이 금방 증발해버릴 듯한 내용이었지만 말동무가 되어주겠다는 태형의 의도에는 적합한 셈이었다.
“학교 다닐 때는 본가에서 다녀요?”
“연습 없을 때는 그렇지?”
“와. 그만큼 애정이 깊나 봐요. 헤븐라희에.”
“응. 재밌잖아. 다 같이 뚱땅거리는 거. 너도 밴드 꽤 오래 했다던데.”
“중학생 때부터 했으니까, 오래하긴 했죠.”
“그럼 너도 재밌어서 하는 거겠네.”
태형이 웃으며 말했다. 에스컬레이터가 천천히 움직였다. 여주는 한 계단 올라가 있는 태형을 올려다봤다. 파랗게 한 염색에 물이 빠진 건지 뭔지, 은은한 민트색 머리칼은 제 기타를 떠올리게 했다. 남준에게 들은 바로 선재가 관객을 운운하며 나갔다고 하던데, 선재가 없어도 혼자 관객을 모을 상이었다.
“어떤…… 지금 연습하는 거요?”
“돈 때문에 한다고 한 거 아니지.”
“맞는데요.”
“아닌 것 같은데.”
“왜요?”
“너 말하는 게 그래.”
“제가 말하는 거요?”
“응. 설명하기 조금 힘든데. 이거 너무 재밌으니까 계속 하고 싶어요, 하는 것 같아.”
“…….”
에스컬레이터의 움직임에 따라 점차 햇빛이 들어찼다. 태형이 그 빛을 오롯이 맞으며 여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 그대로였다. 지민을 가르치고 간간이 합주를 해보는 여주의 표정은 꼭 그래보였다.
재미. 재미라. 여주는 빛 받은 태형의 얼굴과 그가 한 말을 에스컬레이터만큼이나 천천히 곱씹었다.
“아니야? 재미없어?”
마침내 지상에 다다랐을 때, 여주는 대답했다.
“재밌어요.”
조금은 돈지랄이라고 생각했던 태형의 자취방은 온전히 밴드, 헤븐라희에 대한 애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Behind.
윤기형: 지민이 일 안 하니?
지민이: 하고 있거든요ㅡㅡ
- 여기까지 읽으셨습니다 -
윤기형: 샵검색 #613 초밥
윤기형: 메뉴 골라놔 미리 시키게
정국이: 합주 ㄱㄴ?
남준이형: 1절까지는 스무스함
정국이: 몇 시에 갈까요
남준이형: 2시
윤기형: 점심 먹을 거면 1시
정국이: 흰이랑 밥 먹어요
정국이: 3시에 갈게요
윤기형: 그럼 왜 물어본 거야
정국이: 나는 연어초밥
윤기형: 아니 밥 먹고 온다며
먹짱 정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