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성] 적당한 해석 完
w.규닝
16. 더 나은 공식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니었다. 특히, 녀석과 같은 공간에서 함께하고 있는 이상. 그래서 아마 허무함을 느낄 틈도 없이 디데이를 맞이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기했던 건, 예상했던 것보다 나는 훨씬 실전에서 덤덤했다. 서운하지 않느냐고 묻는 원장 선생님의 말에 더할나위없이 아쉬운 목소리로 자주 들르겠다고 말은 했지만 내심 마음이 가벼워져 시큰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대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워 적응하기도 힘들었던 곳에서 나는 마침내 걸음을 뗐다. 박 선생님은 마지막날 내게 제안했다. 회식은 못했지만, 언제 술은 한 번 마셔야죠. 박 선생님은 이번주 일요일이라는 디테일한 날짜까지 잡고 나서야 내 발목을 놓아주었다. 예의상의 말인 줄 알았더니, 그 쪽에서는 꽤나 진심이었던 모양이었다. 불편한 사람과의 술자리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흔쾌히 그러겠노라는 답을 돌려주었다. 생각해보면, 3개월 정도를 같이 근무해놓고 그런 자리조차 없이 관계를 파한다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기분이 별로였을테니까. 박 선생님과 약속한 주말도 가까워지고, 그와 동시에 개강날짜도 가까워져만 갔다. 그것은 우리 둘 모두의 이야기였다. 나 뿐만 아니라, 같은 자릴 밟고 있는 남우현에게도.
"네 어머님."
베개 위로 비스듬히 올려놓고 있던 머리를 번쩍 들어 전화를 받았다. 침대의 반동 때문에 덩달아 흔들린 남우현도 엎드려 있던 고개를 틀어 내 쪽을 쳐다보았다. 좀 더 자세를 똑바로 앉기 위해 완전히 몸을 일으키자 남우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아예 몸을 돌린 채 내 쪽을 향했다. 말을 하지 않아도, 녀석의 눈빛은 내게 무슨 전화냐며 묻고 있기에 그 심통난 눈을 일부러 손바닥으로 가리면서 전화를 받쳐 들었다. 지금 바쁘신 거 아니죠? 어수선한 이쪽의 분위기를 느꼈는지, 잠시 후에는 그런 물음이 돌아왔다. 남우현은 제 눈 앞을 가린 내 손을 잡아 내렸다. 그에 두 손으로 핸드폰을 받쳐 들어 허리를 꼿꼿이 폈다.
"네, 전혀 안 바빠요. 말씀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우리 애 일정에 변동이 좀 있어서요. 저번에는 화수목이 될 것 같다고 말씀드렸는데 월수금으로 바꿔야 할 것 같은데. 시간 괜찮아요?
네? 영양가없는 리액션으로 천천히 입을 벌렸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무린가요? 하며 전혀 거리낌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아니라는 대답과 함께 잠시만요,하는 말미를 벌었다. 잠시 휴대폰을 귀에서 떼 스피커를 틀어막으며 넋을 놓았다. 남우현의 입모양이 뭔데,하며 재촉하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 동안에 머릿속으로는 개강 후의 타이트한 일정과 함께 이중으로 잡아 놓았던 편의점 아르바이트가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대답을 머뭇거리고 있을 때 즈음에는 전화기 저편의 참을성없는 목소리가 선생님?하며 내 반응을 독촉했다.
"아…네."
-무리예요? 힘드시면, 저희 쪽에서는 다른 분으로 한 번 구해볼거구요.
"아뇨. 월수금이라고 하셨어요?"
-네.
"그…마침, 시간이 비어서."
괜찮아요. 월수금도. 그렇게 말하며 속으로는 엉엉 울고싶은 마음을 꾹 누르다가 입술을 물었다. 한 순간 뱉은 말로 사실은 월요일과 금요일에 잡아 두었던 편의점 알바가 날개 돋친 듯 날아갔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은 내 목소리를 곧이 곧대로 믿은 학부모는 다행이네요. 그럼 다음주부터 뵈요,하는 말과 함께 칼같이도 전화를 끊었다. 잠시동안 멍해진 머릿속에서는 한껏 어긋난 2학기의 생활 리듬과 뚜,뚜,뚜 울리는 수화음이 맞물리듯 뒤섞였다. 남우현은 멍하니 앉아있는 내 손에서 휴대폰을 앗아갔다. 곧이어 전화가 끊긴 것을 확인한 남우현은 베개 옆으로 그것을 아무렇게나 던져내고 내 팔을 잡아당겼다. 덕분에 아무런 생각 없이 얼을 빼고 있던 내가 녀석의 품으로 기력없이 떨어졌다.
"무슨 전환데. 이번에 구했다던 과외?"
"남우현."
"응."
"대체 왜들 이렇게… 이기적인지 모르겠어."
내 말에, 자연스럽게도 내 목을 끌어안던 남우현이 고개를 들었다.
"왜그래?"
"이번에도 그 쪽에서 멋대로 시간 바꿨어. 지금까지 두 번 구했던 과외들처럼."
짜증나. 어쩐지 절로 한숨이 나올 것 같아 내 목을 감고있는 팔을 거둬낸 후에 뒤돌아 남우현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남우현은 턱 바로 아래 닿은 내 머리통 위에 머리를 기댔다.
"을 사정 같은 건 중요하지도 않나봐. 갑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안 한다고 하면 됐잖아."
"더 이상은 다른 과외 구하기도 힘들어. 그냥…한 번 지고 말지."
내 말에 남우현이 조금 웃었다. 제 딴에는 들키지 않으려 했던 모양인지 슬쩍 웃고있던 입꼬리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아닌 척 내려갔다. 웃냐? 어쩐지 내 투정을 가볍게 여기는 것 같아 빈정이 상해 고개를 확 떼어내며 녀석의 허리에 둘렀던 팔을 뺐다. 남우현은 급하게 내 팔을 다시 잡아 제 허리에 두르게 했다. 그런 거 아냐. 비웃는 거 아니야. 제 뜻을 거듭 강조해 말한 남우현이 이미 제게서 꿈틀거리며 뒤로 물러나고 있는 내 어깨를 고정했다.
"나한테는 좋은 일이잖아. 너 그래서 편의점 알바는 안 하게 된 거 아냐?"
"그건 그래."
"천만다행이네."
그냥 과외 알바만 해. 쓸데없이 위험한 거 하려 들지 말고. 한 팔로 어깨를 감은 남우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편의점 야간알바 얘기를 꺼냈을 때부터 길길이 화내며 극구 말리던 남우현에게는, 생각해보면 좋은 뉴스이긴 한 모양이었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아니었지만. 이러나 저러나 학부모 쪽이든 남우현 쪽이든 얄미운 것은 피차일반이었다. 나는 억지로 녀석의 허리에 둘러졌던 팔을 거둬 반대편으로 한 바퀴 굴러갔다. 덕분에 녀석과 나의 사이에 공간이 생겼고 눈 앞에 보이는 베개를 집어다가 경계선에 떡하니 박았다. 불룩 튀어나온 베개를 손으로 잡아 내린 남우현은 왜 달아나냐며 입을 비죽였다. 너, 그거 치우기만 해봐. 베개를 짚으며 으름장을 놓았다. 나 지금 짜증났으니까 건들지 마. 그거 치우지도 마. 야!
"치우지 말랬잖아!"
"아 왜. 우리가 무슨 남북이냐? 이게 뻑하면 베개를 놔둬."
"거기 있어. 너도 내가 아니라 그 학부모 편이잖아. 가까이 오지 마."
"근데 김성규. 솔직히 말해."
"뭘?"
"이번에 맡은 여자애 이쁘지?"
내 억지에, 겨우 베개를 도로 가운데에 올려 둔 남우현의 표정이 짐짓 진지하게 굳었다. 의중을 모르겠는 녀석의 질문에 방금까지 치켜떴던 두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게 무슨 뜻인데?"
"이번에 맡은 여자애, 이쁘니까 니가 편의점 알바까지 관둔다는 거 아냐. 맞지?"
"내가 너냐?"
"뭐?"
"내가 너야? 학생이랑 원조교제같은거나 하게."
그러자 이번에는 눈 높이까지 불룩 올라왔던 베개가 신경질적으로 눌러졌다. 누가 원조교젠데. 제 딴엔 무척 억울해뵈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요즘은 친척동생이랑 만나기만 해도 원조교제냐? 그 말에 나는 입을 비죽이며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실 홧김에 뱉은 투정이었기에 그 말에 따로 반박할 꺼리는 없었으니까. 남우현은 앞으로 한 번만 더 원조교제 얘기같은 걸 꺼내면 더이상 도시락도 챙겨주지 않겠다며 협박을 시작했다. 시작은, 지가 먼저 했으면서. 나는 일부러 과장되게 귀를 틀어막으며 다른 베개 위로 머리를 뉘였다.
"너부터 아까 했던 말 취소해. 여자애가 이뻐서 내가 과외를 한다느니, 뭐니 하는 저질같은 말."
"그건 나도 그냥 떠본 소리지."
"그리고 여자애 아니라 남자애야. 병신."
알고나 말해. 나는 베개에 푹 묻고 있던 얼굴을 번떡 들어 중간 지점에 놓은 베개를 녀석의 얼굴로 냅다 던졌다. 무언가를 말하려던 남우현이 던져진 베개에 입이 막혀 잠시 넋을 놓은 사이 몸을 일으켰다. 어쨌든 일어나. 너 오후수업이잖아. 흐트러진 옷가지를 대충 정리하고 침대 밖으로 빠져나오자 나를 따라 상체를 일으킨 남우현이 마찬가지로 절반 정도는 올라가 있는 티셔츠를 내리며 정리했다. 남우현보다 먼저 거실로 나오자 얼마 되지 않아 녀석도 내 뒤를 졸졸 좇았다.
올 때마다 느꼈던거지만, 남우현의 집에는 먹을 게 하나도 없었다. 여전히. 무의식중에 열었던 냉장고 문을 허탈하게 닫고 나서는 금방 소파에 몸을 뉘이는 남우현을 한심하게 쳐다보자 나와 눈이 마주친 녀석이 어깨를 으쓱한다.
"먹을 것 좀 사다 먹으랬지?"
"말했잖아. 미미씨가 요리 안해주면 안 먹을건데."
"평생 그렇게 굶고 살겠다는 소리야?"
"아니. 얼른 밥 해달라는 소리야."
남우현은 소파의 날개에 제 턱을 올려놓고 헤실헤실 웃었다. 하여튼 남이 하는 걱정은 귓등으로도 안 듣지. 점점 뭐씹은 얼굴이 되어가는 내 표정은 신경쓰이지도 않는지 태연자약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바짝바짝 약이 오르는 것 같았다. 제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전까지는 일부러 반대로만 행동하는 청개구리같은 면모와 가면 갈수록 어린애처럼 들러붙기 좋아하는 녀석의 투정에 나까지도 습관이 되어버릴 것 같아 얼른 고개를 돌렸다. 텅텅 빈 냉장고 문을 궁시렁거리며 발로 까자 남우현은 누워있던 곳에서 발라당 몸을 뒤집었다. 나는 설거지거리 하나 없이 말끔한 싱크대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남우현. 혹시 나랑 같이 학원 할 때도 매일 밥 안먹고 출근했던 거였어?"
"챙겨먹기 귀찮아."
"귀찮다는 놈이 매일같이 내 점심은 챙겨 물었고?"
남우현은 내 말에 대답이 없었다. 늘어지듯 누워 천장만 멀뚱히 올려다보고 있는 머리꼭지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내가 말했지. 나 누가 신경쓰이게 하는 거 되게 싫어해."
"……."
"내가 널 얼마나 빨리 찰 수 있는지 내기할래?"
그러자 남우현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뭐? 내키는대로 웃고 있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내 쪽으로 홱 고개를 돌린 남우현이 기가 찬다는 표정을 하고 있다.
"웃기고 있네. 내기?"
"응. 너 좋아하는 거."
김성규! 급기야는 소파 바닥에 짚고 있던 팔꿈치를 떼어 상체를 벌떡 일으킨 남우현이 본격적인 싫은소리를 시작하려고 할 때였다. 어젯밤 식탁 옆에 아무렇게나 놓아두었던 가방을 휙 낚아채 현관으로 걸어갔다. 내기라는 얘기를 꺼낸 것에 대해 뭐라고 폭풍같은 잔소리를 뱉으려던 남우현은 현관 앞에 주저앉아 신발을 구겨 신는 나에 잠시 얼빵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신발을 다 신고 일어서고나서야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오후수업이나 늦지 않게 들어가. 자꾸 지각해서 에프나 처 맞지 말고."
"와, 남의 속 긁어놓고 이렇게 먼저 도망가는 거 봐."
"내가 긁었어? 말 안 듣는 건 너야."
"미,"
"그리고 이제 미미씨라는 말 한번만 더 꺼내면."
너죽고 나사는거야. 그 말을 끝으로 현관문은 투박한 쇳소리와 함께 거칠게 닫혔다. 곧바로 녀석이 따라나올까 일부러 엘리베이터보다는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부러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길 몇 분째. 중간 정도 내려왔을 때 손에 든 핸드폰이 진동음을 내며 울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나는 전원버튼을 길게 눌렀다. 그렇게 씩씩거리며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을 때 못이긴 척 켠 핸드폰에는 바로 몇 분 전 도착한 문자가 제일 먼저 액정을 메웠다. 한껏 자존심을 굽힌 티가 뚝뚝 떨어지는 문자였다.
「미미씨라고 말하려던 거 아니야.」
「미안하다고. 김성규야.」
하지만 장담한다. 녀석은 분명 미안하다는 말을 제 손가락으로 눌러서 쳤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정확히 뭐를 미안해야할지 모르고 있을 게 분명하다는 것을.
* * * * *
어젯밤엔 일부러 전화도 받지 않았다.
이제 저 밥 잘 챙겨 먹는다며 밥 숟가락을 들고 있는 인증샷까지 보내온 녀석의 사진에 한바탕 배를 잡고 웃었던 건 사실이지만 너무 쉽게 기분을 풀었다가는 변덕이 심한 걸로 낙인이 찍힐까 일부러 시간을 끌기 위해서였다. 한시간 전, 녀석에게서부터 도착한 아침밥상 사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콩나물도 있네. 어제까진 없었으면서. 볼펜을 쥐고 있는 손으로 턱을 괴었다. 본인이 만들었을 리는 없고…. 반찬가게에서 사왔나. 무언가 그득그득 들어찬 밥상 사진을 확대시켜보았다가 돌려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과외 시간이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펜을 들었다.
교수님께는 죄송하지만, 짬나는 시간이 지금밖에 없어서. 이제야 겨우 3분에 1정도 찬 편지지와 한시간 반째 열강중인 교수를 번갈아보다가 편지지에 코를 박았다.
"쓸 말 되게 없네."
구석에서 한참 머리나 처박고 있을 장동우에게. 대충 휘갈겨 쓴 글씨로 시작한 머릿말 밑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얘기로 편지의 시작을 열고 있었다. 그렇게 할 말을 쥐어 짜내며 떠올려보다가, 글씨를 끄적인지 얼마 되지 않아 잠깐씩 고개를 까딱이며 졸아도 보다가. 그렇게 겨우 완성한 편지는 기껏해야 열두줄 안팎이었다. 뭐하냐며 흘깃대는 동기녀석의 물음에, 가릴것도 없이 너절히 풀어놓은 글씨를 녀석에게 보여주려고 했을 때 즈음에는 강의가 끝났다. 여기저기서 시끄럽게 의자 끄는 소리가 들림과 함께 얼마 쓰지도 못한 편지지를 들어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나머지는, 이따 과외 들어가기 전에 또 짬내서 써야지. 오늘도 허락없이 내 목에 제 팔을 둘러오는 동기에, 큰 동작으로 머리를 숙여 그 팔에서 벗어났다.
[구석에서 한참 머리나 처박고 있을 장동우에게.
내가 무슨 여친도 아니고, 군대 간 놈한테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되니까 오글거려 죽겠다. 그러니까 남들 갈 때 진작 가지 이게 뭐야. 팔자에도 없는 편지나 쓰게 만들고. 그래도 편지 써달라고 훈련소 주소까지 가르쳐줬으니까 쓰고는 있지만 이게 처음이고 마지막일거야.
자대 배치 받고나면 너 이제 인생 끝난거임. 그러니까 그 전에 학과 소식은 다 알려줄게. 일단 지금은 강의중이고…전공 교수진은 그대로야. 하나도 안 바꼈어. 외부 강사가 몇명 들어오긴 했는데 별로야. 차라리 강진권 교수가 더 나을 판이거든. 안 믿기지? 나도 안 믿겨. 그리고 가을축제때는 걔네 온대. 니가 좋아한다던 걸그룹. 이름은 까먹었어 어쨌든 걔네. 부럽지? 그래도 탈영은 하지 마. 사진은 찍어둘테니까 나중에 휴가 나와서 보던지.
너희 동아리 신입생중에 회장은 주원이가 맡았어. 잘 할거 같아. 그리고 권 조교님이 너 죽여버린대더라. 인사도 없이 갔다고. 2년 후에도 조교하고 있을거니까 너 복학하면 두고보라는데. 근데 내 생각에는 너 복학까지 갈 필요도 없어. 휴가 나오면 일단 술독에 빠져 살아야할거같다. 물론 안 구해줌. 아, 맞다 그리고…]
*
아무런 말소리도 없는 방에서는 유난히 시간이 더 느리게 가는 법이다.
정확히 말해 30초째 이마를 짚고 있는 것이었지만 체감상 그 침묵은 30분을 족히 넘기고 있었다. 겉잡을수 없이 밀려드는 참담함에 황망해진 머리를 가라앉혀보려 입을 다물자 내 앞에 앉은 녀석도 나를 따라 침묵을 유지했다. 물론, 예의를 차리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니라 나와의 대화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 삐딱선을 타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예 한쪽 다리까지 달달 떨며 벽면에 걸린 시계를 힐끔이다가 딴청을 피우는 녀석을 관찰했다. 방금 마악 야자를 마치고 돌아왔다는 놈 치고는 옷매무새가 너무 흐트러져 있는데다가 담배 냄새를 가리려 있는대로 뿌린 향수 냄새 때문에 코가 시큰했다. 아예 배째라는 식으로 손톱을 매만지기 시작하는 녀석의 책 위로 손을 짚었다. 이호원이라고 적힌 명찰이 녀석의 가슴께에서 달랑거렸다.
"너. 언제까지 부모님 눈을 속일 수 있을거라 생각했어?"
"예? 무슨 말이세요, 그게."
"아닌 척 하는거 하나도 소용없고, 앞으로의 너한테도 득될 거 없으니까 거짓말 칠 생각 하지마. 너 지금까지 부모님한테 가져다 드렸던 성적표 전부 가짜잖아."
내 말에 거짓으로 발끈하는 표정이 티나게 일그러졌다.
"그런 거 아니거든요?"
"그런 게 아니야? 그러면 니 머리통이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거야?"
첫 미팅. 녀석의 수준을 검사하기 위해 미리 쳤던ㅡ 빗금이 쫙쫙 내린 시험지를 녀석의 면전 앞에 내던졌다. 얼떨결에 종이를 떠안은 녀석이 눈썹을 치켜떴다.
"아, 왜 사람 얼굴에 던지고 그래요!"
"너 수열 기본기부터 하나도 모르잖아."
"……."
"수열까지 갈 것도 없다. 너 방정식은 뭔줄은 아냐?"
이호원은 제 점수가 보이지 않는 뒷면으로 소리나게 종이를 뒤집어 놓으면서 한쪽 팔로 책상을 짚었다.
"내가 호구예요? 당연히 알지. 수학 기호잖아."
"……."
"A 나오고, B 나오는 거."
"야."
"왜요."
"A 나오고 B 나오는 게 영어지, 방정식이야?"
외국어 영역이랑 헷갈리셨나보네. 그래도 첫 미팅이라고, 부푼 마음에 이것 저것 테스트 할 것을 챙겨왔던 나는 책상 위에 어지럽게 늘어놓았던 참고서며 시험 종이를 가방 안에 구겨넣었다. 이호원의 눈동자가 바쁘게 이 쪽으로 굴러가는 것을 느끼며 일부러 거칠게 짐을 챙겼다. 핸드폰까지 완벽히 가방 안으로 던져놓고 나서야 몸을 일으키자 자연스레 나를 따라 고개를 올린 녀석이 물었다. 뭐하는거예요?
"땡까는 거예요? 선생님이?"
"애초에 제자를 둔 적이 없는데, 내가 선생이야?"
얼떨결에 들고 일어섰던 시험지를 녀석의 머리 위로 떨어트렸다. 팔랑거리며 가뿐히도 떨어진 종이가 녀석의 이마에 맞고 떨어져나갔다. 허탈하게 나를 올려다보는 눈이 구겨져있다. 이게, 어이없어야 할 게 누군데 지가.
"나 너 안가르쳐."
"이미 돈 다 받아놓고요?"
"돈 아직 안 받았어. 그리고 안 받을거야. 내가 당장 아르바이트는 급해도,"
나 스트레스 받아가면서까지 불가능한 곳에 시간쓰고 싶지 않아. 끔찍히도 최악인 녀석의 앞에서 벗어나, 한치의 고민도 없이 방 문고리를 잡았을 때였다. 이호원의 의외로 다급한 손길이 내 발목을 붙들었다. 아, 진짜 성질 급하시네! 나만큼이나 높은 목소리로 빽 소리를 지른 녀석이 짜증난다는 듯이 고개를 들고 나를 쏘아보았다.
"그래서 지금 가실려고요? 밖에? 엄마 아빠 다 있는데?"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다 계셔도 나갈거야. 못 가르친다고 말할거고."
"쌤은 불쌍한 학생 하나 맞아 죽는 거 눈앞에서 보고싶어요?"
뭐? 내리깐 눈에 힘을 주어 되묻자 이호원이 내 발목을 더욱 세게 붙들었다.
"아, 잘못했어요!"
"……."
"잘못했다고! 뻥까 쳤던 거, 문제 다 틀린 거. 이제 공부 한다고요. 썅."
"……."
"아. 썅이 아니라."
어쨌든. 잘못했다고요. 녀석의 마지막 말은 거의 기어들어가는 수준이었다. 희번득거리는 눈으로 사과같지도 않은 사과와 각오까지 내비친 녀석의 얼굴을 덩달아 쏘아보다가 문고리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제서야 바닥으로 푹 숙여진 고개는, 쪽팔림을 이기지 못하고 있는 모양인지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다리를 붙든 팔에는 힘이 빠지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그대로 방 문을 나가버릴까 불안한 모양인지 다리를 감은 팔은 똬리처럼 더 센 힘으로 발목 언저리를 죄었다. 나는 발을 한 발자국 비켜 서며 녀석의 동그란 정수리를 내려다봤다.
"놀고있네. 니가 지금부터 공부 하겠다고 해서, 그렇게 하면 니 다짐대로 점수가 팍 올라줄 것 같아?"
"……."
"머릿속에는 담배밖에 안 든 놈이."
"…언제 봤어요?"
"본 게 아니고, 안 봐도 뻔한거야."
나는 녀석이 붙든 다리를 팍 하고 쳐냈다. 순간 화들짝 놀란 이호원이 방바닥을 손으로 짚었다. 나는 어깨 옆으로 아무렇게나 맸던 가방에서 아무 시험지나 집히는대로 골라 바닥으로 던졌다. 아직 완전히 가르쳐보겠다는 건 아니지만,
"그거 풀어놔."
"……."
"학교에서 짝꿍한테 물어보면서 하는 한이 있더라도 니가 풀어. 셔틀 한두명쯤 있게 생긴 것 같으니까 미리 경고하는데 다른 애 시키기만 해. 그런 거 눈에 다 보이니까 어물쩡 넘어가지 말란 소리야. 적어도 너 가르치는 사람 눈은 속인다고 속여지는 거 아니니까 앞으로도 명심하고."
"알았어요."
"부모님한테는, 미팅이라서 가볍게 숙제만 내줬다고 말할테니까."
나는 그제서야 문고리를 잡아 열었다.
"니가 했던 말 지켜."
"안 지키면요?"
마지막까지 쓸데없는 객기로 녀석이 입을 비죽였다. 나라고 질 건 없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몇주 전, 화이트보드 위의 낙서 때문에 하마터면 웃어버릴뻔한 것을 꾹 참으며 대답했다. 그러면 아마, 남쌤이 너 조져버릴걸.
그리고는 녀석의 표정 변화를 살필 새도 없이 방 문을 닫았다. 그러나 문이 닫히자마자 무언가를 뻥뻥 걷어차는 것 같은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녀석은 녀석대로 성이 나 있을 거라는 걸. 하지만 본인이 화가 나면 어쩔건데, 나도 녀석만큼 만만하지는 않을거라고 자부한다. 초조한 얼굴로 거실에 앉아 내 반응만을 살피고 있던 부모에게 대충 고개를 까딱이며 숙제를 내줬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차마 표정관리까지는 할 재간이 없어 불편한 표정만큼은 여지없이 드러내고 말았다. 전화로 그렇게까지나 이기적으로 굴던 그 페이스는 순식간에 어디로 싹 꺼졌는지 불안해 뵈는 얼굴은 그래요?하며 묻는 말과 함께 내 안색을 떠보고 있었다. 나는 그저 짧게 목례를 하고 집을 나왔다. 하여튼 여러가지로 마음에 안 드는 집이다. 그러니까 속된말로, 제대로 지뢰 밟았다.
그렇게 지끈거리는 머리를 떠안고 터덜터덜 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드문드문 켜진 가로등이 가야할 곳을 정확하게도 비추고 있었고, 빛이 자아내는 동선만 따라서 열없이 걸었다. 학원을 관둔 이후로는 무슨 일이 됐든 재수가 옴 붙은 것처럼 안 풀리고 있었으니 요즘따라 내 어깨는 무거워져만 갔기 때문에. 벌써 늦은 밤. 겨우 마지막 지하철에 몸을 싣고 차마 감기지도 않는 눈으로 종착역까지 멀뚱멀뚱히 앉아 온갖 잡생각을 다 하고 난 직후였다.
"스토커냐, 진짜…."
인적이 드문 집 앞. 나의 종착역. 그 곳에서 만난 스토커는 나만큼이나 지루한 얼굴로 계단에 앉아 음료수를 들이키다가 반색하며 몸을 일으켰다. 김성규! 잔뜩 화증을 억눌렀던 목소리가 터졌다. 그 바람에 옆에 놓아둔 다 먹은 빈 캔이 텅텅거리는 소리를 내며 계단을 굴렀다. 그렇게 몇 계단씩이나 굴러 내려온 알루미늄 캔이 내가 선 곳까지 떨어지고나서야 멈추었다. 남우현은 골이 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고, 나는 재차 중얼거렸다. 스토커냐고. 진짜.
녀석은 대뜸 스토커냐며 뱉은 내 잔소리에 발끈했다.
"안 만나주는 걸 그럼 어떡해? 멍청히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
"…남우현."
"그리고 너는 무슨 학원이고 과외고 전부 다 밤이냐. 짜증나게."
그 자리에 뚝 멈춰 선 내게 빠른 걸음으로 걸어온 남우현이 있는대로 표정을 구겼다. 그에 나는 다이나믹한 녀석의 표정변화를 관찰하다가 픽 웃었다.
시간은 열시 반. 오늘은 친구들 만나서 놀다가 레포트 하러 갈 거래서 그런 줄로만 알았더니 뜻밖의 장소에서 나를 기다렸다는 게 웃겨 슬금슬금 입꼬리를 올리자 남우현의 표정은 더욱 눈에 띄게 굳어갔다. 내가 녀석의 옆을 지나쳤다.
"니가 짜증이 왜 나?"
"너 어제 그랬지. 누가 신경쓰이게 하는 거 싫어한다고."
"……."
"나는 뭐 좋을 거 같냐? 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할 거 없어."
완 전 짜증나. 남우현은 내가 뭐라고 대꾸를 하기도 전에 우뚝 선 내 어깨를 잡아 끌었다. 순간 휘청이며 계단을 헛밟을 뻔한 것을 고쳐 서며, 짜증을 내려고 했을 때에는 나보다 진지한 녀석의 옆모습에 불평을 뱉으려던 입을 다물었다.
*
[…술 얘기 나와서 하는 말인데 사실 너 없는 술자리에서는 좀 술이 안 들어가. 니가 그렇게 좋다는 건 아니고, 그냥…습관인가봐. 원래도 좀 불편하기도 했고. 그래서 일부러 이번 학기는 개강총회도 안 갔어. 재미없을 것 같아서. 어차피 매번 똑같은 술자리잖아. 부어라 마셔라, 그러다가 필름 끊기면 자칫하다가 과 생활 끝나는거고. 좋을 거 없을 것 같아서 이제 좀 금주 해보려고. 그리고 너 저번처럼 나 술자리. 아니 이 얘기를 하려던 건 아니지만 뭐가 갑자기 생각났는데.
너 그 때….]
*
그리고 남 밥 안 먹는 것 때문에 화내는 사람이 어디있어. 애초에 나를 만나면 하고 싶었던 말이었는지, 역을 벗어나 아파트 단지로 걸어가는 길 내내 남우현의 투정어린 화는 끊길줄을 몰랐다. 그리고 폰 꺼놓는 짓 좀 하지마. 일단 대화라도 해야 뭘 풀지. 사람 답답하게 그게 뭐하는 짓이야. 꼭 붙은 어깨가 어색해서 은근슬쩍 몸을 떼어놓으려고 했을 때에는, 억척스러운 지청구와 함께 남우현은 더욱 세게 어깨를 끌어당겼다. 덕분에 내 입은 꼼짝없이 풀칠이 된 상황이었다. 원래같으면 녀석의 장단에 맞추어 피곤하니까 그만하라는 말과 함께 목소리를 높였어야 하는 일이었지만 더할나위 없이 가까이 붙은 어깨에 민망함이 가득 몰려오는 탓이었다. 아마 녀석은 노렸을 게 분명하다.
얼마 전부터 나는, 티가 나도록 녀석과의 스킨십에 예민한 모습을 보여줬기에 이런 것에 약하다는 것쯤은 눈치 채고 있을 터였다. 남우현은 나를 티나게 힐끔대다가 더욱 어깨를 당겨 안았다. 불편하게 가까워졌는데도 나는 당황스러운 시선을 녀석의 등 뒤로 보내며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녀석과의 기싸움에서 패배한 발걸음은 아까보다 한층 더 힘이 없어졌다. 녀석은 그제서야 내게 왜 이리 피곤해하냐고 물었다. 그냥. 지뢰 하나 제대로 밟았어. 남우현은 아까까지 불평만 그득히 늘어놓던 입을 다물고 고개를 갸웃했다.
"지뢰?"
"어. 그것도 엄청 골치 아픈 지뢰."
"말 안 들어? 학생이."
딱히 말을 안 듣는다기보다는….
공부를 못해. 하지만 그 뒷말은 입 안으로 삼켰다. 대놓고 저리 말하기에는 뭔가 너무한 것 같기도 싶었으니까. 나는 녀석의 물음에 잠시동안 생각해보다가 딱히 다른 이유를 댈 것도 없어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우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태연자약하게 내 기분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매번 말하는 거지만 그럼 나한테 일러. 혼내주러 갈거니까."
거의 녀석의 입버릇인 말이었다.
그렇잖아도 아까 전에 생각났던 말이었다. 나는 대답 대신에 녀석의 허리께를 툭 쳤다. 병신, 학원도 아니고. 학원에서는 그 말이 먹혔을지 몰라도 쌩판 모르는 남이 와서 혼내면 걔도 참 좋아라 하겠다. 남우현은 내 비아냥거림에도 그럴수도있지, 하며 입을 비죽였다.
십여분 후에는 집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어 섰다.
내가 전화를 받지 않아, 정말로 충동적으로 역 앞에 달려와 기다렸다는 남우현은 목적지에 도달하자 정지선이 일정한 기관차처럼 딱 잘라 멈췄다. 이제 돌아가. 하지만 한두번쯤은 튕겨주는 게 예의인 모양인지 남우현은 시덥잖게 말대꾸를 했다. 뭐라도 약속이라도 받고 가고 싶은데. 그 말에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녀석을 노려보았다.
"알았으니까 가. 핸드폰 켜 놓을거니까."
"그리고?"
"니가 밥만 잘 챙겨 먹고 다니면, 화도 풀거야."
"또."
"신경쓰이게 안 할거야."
"……."
"됐지. 가."
결국은 저 말이 듣고 싶었나보다. 마지막 대목에서야 만족한 듯 웃은 남우현은 가라며 어깨를 떠미는 내 손에도 살짝 밀려났을 뿐 지독히도 웃으며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있었다. 이번에는 나도 지지 않고 서서 팔짱을 꼈다. 도대체 뭘 더 바라는건지 녀석의 흥미로워 뵈는 눈은 능청스럽게도 내 얼굴을 훑고 있었다. 누가 이기는지 보자는 심산으로 가만히만 서 있자 남우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 라면 안먹여? 라면 먹고 가란 말 안해줘?"
"너 지하철 곧 끊겨. 이렇게 밤 늦게 돌아다니면 장기 팔린다."
"…말하는 것좀 봐."
"난 사지 멀쩡한 사람이 좋아."
집에나 가. 금세 눈꼬리를 내리며 불쌍한 척 매달려오는 녀석의 어깨를 조금 더 힘주어 밀었다. 남우현은 한 발짝 뒤로 밀려 서며 울상을 지었다.
남우현의 등 뒤로 수위실에 불이 켜졌다. 데자뷰처럼, 저번에도 있었던 상황이라는 걸 느꼈다. 나는 이번에도 같은 생각을 했다. 다행이네, 돌아갈 길이 밝아서. 나는 녀석의 등 뒤로 수위실을 툭툭 가리켰고, 남우현의 고개는 뒤쪽으로 휙 돌아갔다. 불이 켜진 수위실을 확인하고 두어번 고개를 끄덕인 녀석이 미련을 꺾지 못하고 다시 내 쪽으로 눈을 돌렸다. 남우현은 과장된 동작으로 제 배를 움켜쥐었다. 미미씨. 나 배고픈데. 뜬금없이 저의 허기짐을 고백한 녀석에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남우현은 일부러 죽상인 얼굴로 툴툴대기 시작했다.
"나 배고픈데. 집에 가기 싫어, 지금은."
"어차피 집에 가도 라면 없는 거 알잖아. 뭘 먹고싶다는 건데?"
조금은 귀찮은 내색과 함께 묻자 오버스럽게 죽상을 하고 있떤 남우현의 입꼬리가 자연스레 올라갔다. 녀석은 제 멀쩡한 배를 열심히 문지르다가 그 손길을 뚝 멈추고 눈을 접어 웃었다.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내 눈을 바라보며 헤실헤실 웃는 모양을 보고 나서야 그 의도를 깨달았다.
"나 간다."
서둘러 몸을 돌리자 나만큼이나 바쁜 손이 내 팔을 잡아챘다. 아! 잠깐만! 호들갑스럽게 내 팔을 붙잡은 녀석이 억척스러운 힘으로 내 몸을 돌려 세웠다. 집에나 가라니까,하는 지청구가 그 순간에는 턱 막혔다. 오랜만에 입술이 닿자 순간적으로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과 함께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버린 것도 잠시. 지레 빠르게 입을 뗀 남우현이 가까운 거리에서 생글거리며 웃었다. 됐다. 이거면 돼.
"나 욕심 안 내."
"……."
"어차피 내꺼니까. 오늘은 진짜 이거면 돼."
남우현은 그제서야 당황하며 굳은 내 눈 앞에 제 손을 왔다갔다 하며 저었다. 이제 들어가. 퍽이나 배려스러운 말과 함께 내 앞머리에 손을 올린 남우현은 능청스러웠다. 그러나 반 박자 느린 형광등처럼, 나는 조금 후에서야 뒷걸음질을 쳤다. 또 멋대로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입술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내가 진짜…
"아마 일곱번째 말하는거지만, 남우현 너 변태 맞아."
내 말에 남우현은 늘 그랬듯이 태연하게 웃었다.
"나도 일곱번째 인정하는거지만, 나 변태 맞아."
피곤함의 끝을 달리던 오늘의 피날레는, 벌써 일곱 번째로 접어드는 녀석의 유치한 만행이었다.
녀석의 등 뒤로 환하게 불이 올랐던 수위실은 잠시동안 꺼졌다가 다시 켜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가로등의 부스스한 불빛따라 녀석의 머리 위로 어스름하게 떨어진 빛에 멍한 시선을 고정했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마침내는 남우현처럼 웃어버렸다. 아마 그 날의 진짜로 마지막 순간에는, 나는 녀석에게 가보라는 손짓과 함께 또다시 수위실을 콕콕 가리켰던 걸로 기억한다. 수위 아저씨 순찰 나가면 다시 어두워지니까 지금 빨리 가. 이미 목적을 달성한 남우현은 별다른 대꾸 없이 오케이 사인을 해 보였다. 가는 길에 문자한다는 녀석만의 제스처가, 뒤를 돌아 아파트단지의 정문을 벗어나는 순간까지도 계속되었다. 그 자리에 빤히 서서 코너를 돌아 사라지는 녀석의 뒷모습만을 지켜보다가 나는 고개를 저으며 녀석처럼 웃었다. 오늘도,
뭣같이 안 풀리던 하루가 녀석으로 인해 시원스럽게도 풀려나감을 느꼈다. 여름의 시간을 조종하는 힘과, 어떠한 문제든지 손쉽게 풀어버리는 남우현의 마법은 매일같이 내 곁에 머무르고 있었다. 어려웠던 문제를 단번에 풀어버릴 줄 아는 녀석은 잔뜩 꼬인 나의 매듭도 별 거 아니라는 듯이 풀어줄 수 있는 위인이었다.
그래서 결국엔 인정한다. 나는 남우현에게 가장 쉬운 문제가 되었다는 것을.
* * * * *
호프집에서 술 마셨던 날. 씹새끼한테 연락했던 거 너 맞지? 설마 그 때 너희 둘이 친구 먹었냐? 나 몰래. 남우현이 요즘은 꽤 자주 니 얘길 꺼내. 너 자대 배치 받고 나면 면회도 갈 거라고 하던데. 그정도까지 친해졌을 줄은 상상도 못했네. 걔 첫인상 완전 안좋은데 어떻게 친해졌어? 하긴, 첫인상은 안좋아도 씹새끼가 붙임성이 워낙 좋아야지. 이미 둘이 완전 친해졌겠다. 안봐도 뻔하네, 저번에 우리 집 주소까지 알려줬을 정도면. 어쨌든 장동우 너는 여러모로 배신이야. 선임한테 갈굼당해서 매일같이 머리나 박아라.
…그래도 걔랑 너무 친하게 지내진 마. 보기랑은 다르게 엄청 나쁜 놈이야. 아니, 나쁜 건 아니고 그냥 좀 재수없어. 얘랑 친구하면 너만 손해라니까. 그러니까 면회도 오지 말라고 해. 얘랑 친해서 좋을 거 하나도 없어. 근데. 그래서. 친하면 안 된다고 내 말은….
뭐라는거야. 내가 뭐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그냥…친하게 지내지 마. 얘 만나지 마. 남우현 만나지 말면 안돼? 그러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장동우 너라서 솔직히 말하는건데.
질투나. 조금 많이. 아직은 불안해서 그런가봐. 아니 정말로 솔직하게 말하자면 바람날거같아서 그래. 워낙 장난기가 많은 놈이라서, 믿음부터 준다기보다는 장난이 먼저인 놈이라서 조금 불안해. 그러니까 나만…만나보고 싶어. 조금만 더 만나보고 착한 애 같다 싶으면 너랑도 친구하라고 말할게. 어? 그러니까 지금은 만나지 마. 나만 만날거야. 편지 다 끝나간다. 알았지? 장동우.
남우현, 나만 만날거야 만나지 마.
-fin
♡ 니니그대가 주셨던 작가이미지!
FIN |
저의 여섯번째 완결을 자축드려요. 규닝님 수고했어요~ 300kb가 넘음 히헿 아니 근데.. 完으로 뒷통수를 치려고했는데 왜때문에 신알신 울려버림ㅠㅠ 김샜따 번외로 찾아올게요~_~ p.s 지난편에 일일이 답글은 못달아드리지만, 암호닉 신청하셨던 분들 모두 오케이에요!^_T 답글 못드려서 미안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