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
"아니 시발,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가 안 되는데, 내가 들은게 맞는건가?"
"아마도 김성규 씨가 들은 그대로가 맞을 거야. 다시 한번 내 육성으로 확인사살 당하고 나면 기분이 더 나빠질텐데, 그걸 꼭 다시 들어야 하나?"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아메리카노가 담긴 잔에 입을 대고 이호원은 고개를 느리게 끄덕거렸다. 저건 니 청력 의심할 일 전혀 없을 거다 라는 뜻이다. 아, 존나 어이가 없네. 손에 잡히는 대로 던지고 싶은 걸 겨우 참고 후-. 호흡을 가다듬었다. 알겠어요. 그러니까.
"대표님 말씀은, 그 시나리오가, 후, 시발. 그래요. 그러니까, 그 시나리오가 이미 남의 손을 탔었다? 그것도 필모도 좆도 없는 나부랭이 새끼한테 때가 탄 상태로 나한테 넘어왔다는거죠? 내가 퍼스트가 아니고?"
아메리카노가 많이 썼는지 책상 한 켠에 있는 1kg 백설탕 봉지에서 설탕을 덜어낸 이호원이 다시금 고개를 끄덕거린다. 저 새끼는 쓴거 입에도 못 대는 새끼가 돈도 많으면서 굳이 맨날 아메리카노만 테이크 아웃 해오고 지랄이야. 그럼 애초부터 시럽 좀 많이 펌핑해오라고 하면 그건 대외적으로 모냥이 빠져서 그렇게는 못하겠단다. 샷을 세 번 넣은 아메리카노는 제 하루의 시작이나 다름 없죠. 얼마 전, 포털 사이트 메인을 장식했던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연예 기획사 사장의 인터뷰에서 돈호원 새끼는 그렇게 말했다. 1kg 백설탕을 항상 쟁여놓는 자신의 싸구려 입맛을 숨긴 채로. 여튼, 돈호원이 당뇨병을 나중에 지병으로 앓게 되던, 세 번의 인슐린 샷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되던 그건 내 알 바 아니다. 왜냐, 나는 지금 심기가 존나게 불편하기 때문이다.
"말이 되요? 내 복귀작이 걸린 문제인데, 다른 감독도 아니고 이중엽 감독님이신데 캐스팅 0순위가 내가 아니라는게. 말이 되냐고, 시발. 내 필모에 날개를 더 해야 할 때라구요. 이렇게 중요한 시기인데. 존나 자존심 상하게"
"성규 씨, 진정 좀 하자. 커피라도 좀 마실래? 마음의 진정이 될거야."
"진정이 되기는 개뿔. 대표님이 주는 커피 마시면 당 분해 하느라고 몸이 존나 바빠요. 가뜩이나 머리도 바빠 죽겠는데, 몸뚱아리까지 쉼 없이 바쁘라고?"
이호원은 이미 정체성을 잃어버린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난감한 듯 눈썹을 찡그린다. 그래, 난감하시겠지. 자존심에 죽고 못사는 김성규에게 그 잘난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니.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대한민국 대표 남배우의 위엄이 송두리째 무너져버렸다. 김성규의 아성은 2년 전에 이미 끝, 디 엔드였던 것인가? 아닌데, 내 몸값은 지금 이 순간도 더 높게 매겨지고 있는데. 존나 천정부지로 치솟다 못해 CF 몸값의 최고점을 나날이 갈아치우고 있다. 그 뿐이 아니다. 모든 언론이 내가 복귀작으로 어떤 작품을 하게 될지 제일 먼저 특종을 잡기 위해 혈안이었다. 하루에도 기획사에 걸려오는 전화가 수백통이다. 수많은 종이더미 속에서 더 볼 것도 없이 자신있게 집어든 시나리오였다. 흥행성과 작품성, 영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이 두가지가 흠잡을 것도 없이 완벽한 스토리라인이었다. 게다가 존경하는 이 감독님의 야심작. 마음 속에서 이미 여러 번 낙점지었다. 감독님과 최종 1:1 미팅까지 하고 온게 어제였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이거다 싶었는데, 근본도 없는 시퍼런 후배놈이 발로 찬 배역을 덥썩 무는 길이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가 바득바득 갈렸고 절로 쌍욕이 씹혀나왔다. 이 바닥의 소문은 마하의 속도로 돌았기 때문에 평소에 나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는 이성종이 어떻게 나를 씹어댈지 눈에 뻔했다. 좆 같기 그지 없네. 참 그지 없어. 어쩐지 너무 일이 잘 풀린다고 했다.
"그래도 성규 씨, 미팅 때 나갈 거 누구보다 잘 알아. 이중엽 감독님 작품이라면 항상 1순위였잖아?"
"감독님이 이제 내가 1순위가 아닌 것 같은데 이 쪽에서도 그래야 하나? 손바닥도 짝이 맞아야 소리가 나죠. 손바닥 하나만 존나게 치고 있는데 콩고물이라도 떨어지겠어요? 내가, 시발, 연기 할 맛이 나야 몸뚱이를 움직이든지 하지."
"입 조심해. 요즘 욕 많이 줄었다 싶었는데 아직도 입에 걸레를 물고 있네?"
"걸레가 빨아봤자 걸레지. 그래서 그 새끼 이름이 뭐라고요? 봐,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이라 벌써부터 기억 안나는거 봐요. 아, 완전 담배 말리네"
주머니에서 바로 담배를 꺼냈다. 야, 김성규. 화재 경보기 울려. 미친놈아! 온갖 지랄 지랄을 하는 돈호원을 무시하고 불을 붙이려 하자, 벌떡 일어나서 존나 스피디하게 다가와 내 손안의 친구를 뺏어간다. 시발, 얘라도 있어야지. 마음이 릴렉스가 되는데 말이야. 언제 어디서든 마인드 컨트롤이 중요하다고 말했던건 돈호원 넌데 병신아. 근데 지금은 머리부터 발 끝까지 빡쳐서 자의로 조절이 어렵다고, 후.
"남우현. 남우현이잖아. 걔 이름."
"남우현, 남우현이라. 그래, 남우현. 시발"
"표정 풀어라. 그러다가 가서 협박하고 고나리도 깔 것 같아 무섭다. 증권가 찌라시에 군 복무를 마친 톱배우가 후배 앞에서 깽판 친다고 뜨기 싫으면 가만히 있어."
아나, 이 새끼는 누굴 뭘로 보고.
"나 별 생각 없었는데. 내가 무슨 깡패에요? 깽판은 왜 쳐. 누가 들으면 나 성격파탄자인 줄 알겠어요. 하하, 누가 들을까 무섭네. 사장님도 입 관리 좀 하셔야겠어요. 소속 연예인 이미지 다 깎아내리는거 바로 댁이라구요."
"내가 김성규 씨랑 하루 이틀 일해봐? 딱 보면 견적 나오지. 만나면 반갑다고 고나리질 하고 선배랍시고 훈계하고 들면서 은근히 기분 나쁘게 시비 털게 뻔하잖아.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나?"
솔직히 찔렸다. 그것도 격렬하게. 저 새끼는 돈 나오는 구멍만 볼 줄 아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나를 너무 잘 알아서 탈이야. 여기서 생 난리를 피워봤자 달라질 건 없다. 나는 어차피 이중엽 감독의 대본 리딩 날에 참여를 하게 될거고, 더 이상 저 능구렁이 같은 놈이랑 영양가 없이 에너지 소비나 해대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곧 있으면 슬슬 통장을 배 불리러 떠나야 할 참이었다. 오늘꺼가 뭐였지? 하우젠에서 새로 나오는 세탁기였던가?
"대표님 말이 맞아요. 이렇게 지랄 지랄을 떨어도 출연 무를 일은 없어요. 쪽 안서는 건 둘 째 치고 이 역할 배우로써 정말 욕심 나니까요. 그것도 존나 꽂혔으니까. 이왕 이렇게 된거 그 새끼가 땅을 치고 울 만큼 번지르르하게 잘 소화해주죠, 뭐."
"하하하, 예나 지금이나 쿨한 척 하는 것도 여전하고 가만 보면 성규씨는 하루게 다르게 변하는 연예계에서 유일하게 한결같은 존재야, 응? 참 멋있어. 이래야 내 배우지."
뭐 시발. 가만히 있는 사람 배알 꼴리게 하는 저 말이 칭찬인지 욕인지 구분하려는 마음은 이미 가져다 버린지 오래였다. 갑자기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이 눈까지 접고 웃는 돈호원 새끼와 수입을 누이 좋고 매부 좋게 나누며 일을 한다는게 과연 잘하는 짓거리인가 싶어 재계약 날짜를 곱씹어보았지만 헛수고였음을 단번에 깨달았다. 군입대 5개월 전에 계약서에 손수 사인을 해댔던 내 자신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저 새끼 머릿 속에서는 이미 손익분기점에 어림 계산되고 있을 것이 눈에 빤히 보였다. 저런 돈에 미친 새끼와 일을 계속 해야 한다니. 2년 6개월 전의 나는 똑똑한 척만 할 줄 알던 헛똑똑이었던걸까? 참으로 존나게 통탄을 금할 수가 없다.
"대표님도 저를 살살 긁으시는건 여전하시니까 굳이 입 아프게 한결 같다니 뭐니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네요. 여튼, 지금으로서는 확정된 배우들이 누군데요?"
이호원이 하나하나 이름을 호명하기 시작했다. 일단 '금지구역' 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성규 씨, 뭐, 이건 알테고. 지금 장난하세요? 말장난 하나에 히히덕거릴 시간 없는거 뻔히 아시면서 그러시네. 나 곧 있으면 촬영 가야한다고. 덜떨어진 간호사 역은 누군데요? 다소 히스테리컬하게 들릴 수 있는 내 말투에도 이호원은 끄떡없다. 성규 씨도 몇 번 면식은 있을거야. 유지애 씨. 아-, 고개를 아래위로 주억거렸다. VIP 시사회에서나, 시상식에서나 눈인사를 나눈 적 있던 여배우였다. 특유의 청순하고 고아한 이미지로 모 화장품 브랜드의 장수 모델로 활약하고 있고, 요즘에는 톱스타들만 찍는다는 아파트 광고까지 땄다고 들었다. 연기력은 그 정도면 작품에 해가 되지 않을 정도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맡아왔던 역들이랑 비슷비슷하니까 뭐, 중간 이상은 하겠지 싶었다. 원래부터 나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으니 더 이상 관심 두지 않았다. 어두운 분위기의 영화 '금지구역'을 조금이나마 밝혀줄 수 있는 홍일점인 여배우의 존재보다도 사실, 더 궁금했던 역할은 따로 있었다. 내 적수로 나올, 나와 분량이 비등비등할게 분명한, 그리고 상당한 연기력을 필요로 할 또 다른 남자 주인공은 과연 누가 될지 그게 참 미지수였다. 이미지상으로는 준기 형도 어울릴 것 같긴 한데 그 형은 이번에 사극 촬영 들어간다고 했으니까, 흠. 아, 시발. 이성종은 아니겠지? 연기력만 보고 따진다면 이만한 인물은 없지만 그 새끼가 들어온다면 링겔을 꽂고 다녀야 할 게 분명하다.
"그래서 누구에요?"
"음?"
이 정도 눈치를 줬으면 말할 법도 한데 이호원은 예의 기분 나쁜 웃음기를 전혀 지우지 않은 채 아메리카노를 홀짝일 뿐이었다. 하여튼, 여러모로 쓰잘데기 없이 음침한 놈이다.
"또 시작이시네. 능구렁이 깔고 다니지 말라고 했죠? 대표님도 아시잖아요. 내가 지금 제일 궁금해하는거. 다른 주인공 누구냐고. 빨리 말하라고."
"어휴, 무서워라. 오늘의 하이라이트니까 뜸 좀 들여봤지. 하하, 그 새를 못참고 또 날 세운거 봐라. 뜸 한번만 더 들였다가는 여기서 시체 한 구 실려나가겠다."
그 시체가 바로 니 새끼가 될거라는 말은 일단 고이고이 접어두고도, 주인이 막을 틈도 없이 찌푸려지는 미간은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가면 갈수록 화려하게 능글맞아지는 녀석의 수법에 위약금을 물고서라도 계약을 파기하고 싶었지만 그 충동은 마음만으로 담아두기로 했다. 그거 한번 내면 난 복귀작이 아니라 파산 신청에 대한 기사부터 내야할 게 분명하니까 쪽박을 차며 지지리궁상으로 살고픈 생각은 티끌 만큼도 없었으니 사리 판별 정확하고 똑똑한 내가 한 발 물러서서 참기로 했다. 그리고 이 곳 만큼 언론 플레이도 티 안나게 살살 잘하고 충무로 인맥도 화려한 곳은 없으니까, 응, 그럼그럼, 거대 기획사의 횡포에서 (라고 썼지만 사실은 이호원 개인의 자사 소속 연기자 놀려먹기였지만) 살아남으려면 참아야 하느리라. 왼쪽 가슴에 참을 인 자를 기어코 세 번을 채워서 새기고는 다시 능구렁이 새끼와 마주했다. 저 뱀보다도 더 뱀 같은 놈도 내 잘 만들어진 표정을 보고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아니면 더 이상 거들먹거리면 제 신상에 해를 끼칠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는지 내가 원하는 말을 꺼내놓았다.
"남우현 씨가 '강진우' 역을 맡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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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조팝나무입니다. 오랜만이에요. 다시 글을 쓰게 된게 거의 3년 만이라 저를 기억하시는 분들은 거의 없다고 생각해요 ㅠㅠ..
개인 사정에 사정이 겹쳐서 계속 연중쟁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게 되었는뎈ㅋㅋㅋㅋㅋ...
제가 배 아파 낳은 아이 생김은 3년째 연중 꼬리를 붙인 채 떠다니게 되었군요...
사실 이 친구의 모든 자료가 날아가고 난 뒤에 덮친 의욕상실은 정말 말로 표현 할 수가 없을 정도였어요.
그만큼 애착을 가진 소설이었으니까.. 더 그랬죠 ㅠㅠ.. 그래서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그동안 절필을 하게 되었어요.
오랜만에 키보드를 잡으니 내가 원래 글을 쓴 적이 있었나? 낯선 기분이 듭니다.
생김 친구는 제 감이 돌아오고, 또 제 마음이 가다듬어지는대로 준비를 다시 시작하고 싶어요.
지금은.. 아니겠죠? 오랜만에 글을 읽으니 제 글이 제가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더라구요.
이제 연재하게 된 너 죽고 나 사는 로맨스라는 소설은 배틀호모 현성 소설입니다.
아직 또 다른 남주인공인 우현이가 나오지 않았네요.
이번 편은 프롤로그라서 1인칭 주인공 시점의 당사자 성규의 성격을 주로 나타낸 것 같아요.
다음 편, 즉 1편부터는 본격적인 연재가 시작됩니다.
나이가 들어버려서 현실 순응도가 매우 높아요.. 그래서 좀 느릴 수도 있습니다 ㅠㅠ
여튼, 부족한 제 소설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굿밤 하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