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븐라희 6
– 네가 떠나고 남은 시간은 점멸. -
♬ Puzzle - Smiles of a Summer Night
공연까지 남은 시간 2주. 그동안 두 곡을 거의 마스터한 멤버들은 합주에 힘을 쏟았다. 여주도 마찬가지였다. 비는 시간마다 뻔질나게 헤븐라희를 드나들었다. 평일에는 멤버들이 모두 모일 수 있는 시간에 들렀고, 주말에는 알바가 끝나면 지민(가끔 태형도)과 함께 연습하다 멤버들이 모일 때 합주를 했다. 방학의 반 이상을 체인락과, 반의 반의 반을 헤븐라희와 보낸 셈이었다.
연습으로 꽉 채운 방학은 금방 개강을 가져왔다. 오랜만에 과잠을 걸친 여주가 기타를 멘 채 버스에 올랐다. 환승 전 연습실에 들러 기타를 두고 올 참이었다.
“어라.”
그리고 항상 열려 있던 연습실은 굳게 잠겨 있었다. 몇 번 더 힘을 줬지만 덜컹거리기만 했다. 어차피 여기까지 들어오는 사람도 없고, 지하라 문 앞에 기타를 두고 가면 나중에 보는 사람이 넣어주겠지만, 비싼 만큼 아끼는 물건이니 확실한 게 좋았다. 여주는 단톡방을 뒤적거리다 태형에게 보이스톡을 걸었다.
-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자요?”
- 어응……방금 일어났어. 왜?
태형의 잠긴 목소리가 지하를 울렸다.
“학교 가기 전에 기타 좀 두고 가려고 들렀는데. 연습실 문이 잠겨 있어서요.”
- 아, 내 열쇠 남준이형한테 있을 텐데…….
연습실 열쇠는 여주를 제외한 멤버들이 모두 가지고 있었다. 와중에 남준이 열쇠를 잃어버렸고, 임시로 태형의 것을 쓰고 있던 차였다. 그럼 다시 전정국한테 전화를 걸어야 하나. 고민하는 여주에게 태형이 물었다.
- 나한테 맡겨놓고 갈래?
“오빠 집에요?”
- 그래도 되고, 학교 많이 늦었어?
“지금 버스 타러 가면 늦진 않아요.”
- 내가 데려다줄게. 10분만 기다릴래?
“어떻게 데려다줄 건데요?”
- 10분 후에 알려줄게.
그렇게 끊긴 통화에 여주는 지상으로 올라왔다. 기타보관과 등교를 같이 책임질 수 있는 수단이 뭐가 있지. 여주는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그리고 정확히 7분이 지나고, 태형이 나타났다.
“왜……”
“응?”
“왜 차가 있는 거죠?”
차를 끌고.
“음……면허가 있어서?”
“내가 모르는 사이에 면허 있는 사람은 차도 있어야 하는 법이 생겼군요.”
돈지랄도 돈이 있어야 하는 거다. 태형이 기타를 싣는 동안 여주는 다시 생각했다. 내가 하는 게 (돈)지랄이고 이 사람은 그냥 돈이 많은 거구나.
기타를 뒷좌석에 가로로 싣는 바람에 여주는 자동으로 조수석에 타야 했다. 벨트를 매면서도 7분 만에 맞닥뜨린 이 상황에 눈을 굴렸다. 괜히 자는 사람 깨워 차까지 끌고 오게 만든 기분이었다.
“근데 연화예대랑 저희 학교랑 먼데…….”
“나 오늘 공강이라 괜찮아.”
그럼 더 안 괜찮은데요……. 여주는 괜히 벨트를 손에 꽉 쥐었다. 맞게 맸는데도 조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역을 지나고, 백화점을 지나면서 도로로 빠져나가자 속이 트였다. 정차벨소리와 정류장 안내 소리, 카드 찍는 소리가 안 나는 등굣길. 구간마다 정차하지 않고 은근한 자리싸움과 눈치싸움을 않는 등굣길. 눈물 나게 좋았다.
“윤기형이 강선재한테 열쇠 받았댔으니까 그거 받어.”
“아, 넵.”
“기타는 내가 나중에 연습실에 가져다놓을게. 오늘 몇 시에 마쳐?”
“오늘…… 4시 반이요.”
“도착하면 5시 반쯤 되려나?”
“네.”
태형은 자연스럽게 저녁메뉴를 읊었다. 윤기를 꼬셔 새로 생긴 덮밥집에서 시켜먹자는 걸로 결론이 날 때쯤 학교 정문이 보였다. 조금 돌아가는 버스 노선보다 훨씬 빨리 도착했다. 여주는 감격스러운 마음을 고이 접어 인사했다. 강의실에 도착하면 출석을 부르는 동안 새로 생긴 덮밥집 메뉴를 둘러볼 생각에 들뜨기까지 했다.
“나중에 보자.”
“살펴가십쇼!”
태형이 큭큭거리며 차를 돌렸고, 여주의 가벼운 발걸음이 학교로 향했다. 날씨가 좋았다. 태형과 역으로 향하던 날만큼.
“헤븐라희 베이스……?”
그리고 맑은 날씨 아래에서 그 모습을 본 현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화이트데이 기념 공연 D-9
이현준
[ 체인락 개총 하는데 ]
[ 올래? ] 오후 12:30
[ 애들이 다 너 보고 싶어 해 ]
[ 송별회도 안 했잖아 ] 오후 3:14
여주는 마지막에 뜬 메시지만 읽고도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체인락 회장도 아니고 현준이 직접 연락한 이유를 가늠하느라 미간이 좁아졌다. 회장은 탈퇴가 아니라 활동 중단으로 인적사항을 변경해줬다는 내용을 끝으로 연락이 끊겼고, 현준에게는 원래부터 예정돼 있던 일이니 네 탓이 아니라는 답장을 끝으로 연락이 없었다. 다른 카톡들도 대충 학교에서 보면 인사하자, 지나가다 들려라, 이런 내용으로 마무리했는데. 끊임없이 뻗치는 손길들에 여주도 더 이상 매몰차지기 어려웠다. 애초에 매몰찰 이유도 없거니와, 이마저도 거절하면 그간의 시간을 부정하는 것만 같았기에.
[ 그래 갈게 ]
[ 몇 시에 어디로 가면 돼? ] 오후 6:13
이미 개총은 시작돼 있었다. 가게 이름과 위치를 받은 여주가 걸음을 바삐 했다. 헤븐라희 연습이 있어 오래 있지는 못하니, 얼굴만 비추고 적당히 빠질 셈이었다. 여주는 잠시 헤븐라희에서 연습하는 걸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말을 하든 말든 골치 아픈 문제였다. 어느 쪽이든 체인락을 그만두고 헤븐라희에 들어갔다는 것 자체가 저쪽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을 것이다.
“여주야, 여기!”
결론을 짓지도 못한 채 가게 앞에 도착해버렸고, 손은 이미 문을 열고 있었다. 회장이 떨어질 것처럼 팔을 흔들어댔다. 미리 비워놓은 자리에 가 앉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죄책감이 느껴졌다.
“얘들아, 여주 왔다!”
“언니!”
“야아, 오랜만이다!”
“안녕하세요……. 안녕…….”
여주가 정신없이 인사하며 가방을 끌어안았다. 그와 동시에 여주 앞에 잔과 젓가락이 세팅됐다. 입장주를 따르겠다며 회장이 일어섰다. 덩달아 일어나다 가방을 떨어뜨리고, 잔을 받고. 정신이 없었다.
“선배, 저 오래는 못 있어요. 저녁에 일이 있어서 금방 가 봐야 돼요.”
“애들이랑 건배만 하고 가. 기깔나는 건배사 알지?”
“저 그런 거 못하는 거 알면서.”
“그런 거 못하는 거!”
“알면서!”
회장이 여주의 말을 그대로 선창하자 나머지가 이어 받았다. 부딪치는 잔소리가 경쾌했다.
“여주언니~ 언니 없으니까 뭔가 허전해요!”
“맞아. 올해 신입생 모집은 또 어떻게 하냐. 너 없이.”
“하하…….”
“이번 학기만 하고 가지…….”
“자자, 여주 약속 있는데 너네가 하도 애걸복걸해서 얼굴 비추러 온 거야. 가 봐야 한댔지? 건배 했으니까 봐준다. 가 봐.”
다행히 회장이 떨어진 가방을 주워주며 자리를 정리했다. 아쉬운 목소리가 뚝뚝 떨어졌지만 할 수 없었다. 여주가 나가자 현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현준을 제외하고도 몇몇이 일어섰지만 회장이 현준만 내보냈다. 후배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것도 모르고 회장은 술을 따르며 중얼거렸다.
“쟤도 참…… 정성이다.”
“왜요?”
“현준이가 여주 좋아하잖아.”
“헉!”
“그러니까 가만히 앉아 있어. 쟤 혼자 배웅하게.”
그 말에 다들 엉덩이를 붙였다. 안에서 본 밖은 여주와 현준의 대화가 한창이었다.
“아직 추운데 겉옷 입지.”
“지금 더워서 괜찮아.”
“그래, 잘 가.”
“어어. 너도 많이 마시지 말……고.”
여주가 형식적으로 인사하다 현준에게 여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말끝을 늘어뜨렸다.
“잠깐만, 여주야.”
“어?”
“그. 있잖아.”
그리고 이번에는 현준이 말끝을 흐렸다. 불러놓고 한참동안 이어지지 않는 목소리에 여주가 가려던 몸을 틀었다. 위에서는 가로등이 깜빡거렸다.
“너…… 남자친구 있었어?”
“응? 아니?”
“아……그럼 혹시 헤븐라희 베이스랑 아는 사이야?”
“……왜?”
깜빡, 깜빡. 여주의 대답이 애매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되물음. 현준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네가 그 사람 차에서 내리는 거 봤어.”
“아아. 어쩌다가 만나서.”
“어쩌다가?”
“……왜 자꾸 물어?”
곧바로 말해주지 않는 것도.
현준은 아차하면서도 마음이 썼다. 여주의 마음과 제 마음이 같을 거라는 생각으로 고백한 건 아니었지만, 고백과 탈퇴가 연달아 이어지던 차에 태형의 차에서 내리는 여주를 목격한 순간. 저는 여주에게 같은 동아리 멤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는 게 실감나서.
“아니…… 그냥, 오랜만에 만나서 그러지.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나 헤븐라희에 들어갔어.”
“……어?”
“완전히 들어간 건 아니고. 기타 한 명을 급하게 구한대서, 다음 공연만 해주기로 했어.”
“그럼 다음 주 공연에 너도 와?”
“그런 셈이지. 아직 체인락에서는 아무도 몰라. 네가 공연하는 애들한테 잘 좀 말해줘. 놀라지 않게.”
“…….”
“왜? 좀, 배신감 드나?”
“아니. 오늘이 마지막으로 보는 게 아니니까. 기뻐서.”
“……현준아.”
“애들한테는 내가 잘 말할게. 회장 형한테도. 신경 쓰지 마. 완전히 들어가는 거 아니니까 괜찮을 거야.”
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갈게. 응, 잘 가. 다시 한 번 형식적인 인사가 오가고 여주는 완전히 자리를 떴다. 여주가 사라질 때까지 남아있던 현준 위로 가로등이 점멸했다.
네가 떠나고 남은 시간은
고스란히 한없이 여백으로 남아
아무것도 난 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있네
화이트데이 기념 공연 D-8
당부의 말씀: 현준이 남주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