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기다리고 응원하고 있어요-:)
Ep 15. 참 예뻐요 by 찬열 + 백현
BGM) 참 예뻐요:홍광호(뮤지컬 빨래 ost)
"변백현 씨, 자요?"
"...형."
"졸리면 들어가서 자요."
"...형이라고 한 번만 불러봐."
"싫다고 몇 번을 말해요."
'키도 쪼끄만 사람이...'하는 혼잣말 아닌 혼잣말에 결국 발끈한 백현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씩씩대며 나름 무서운 표정을 지어보이는데, 앞에 앉은 찬열은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래봤자 낑낑대는 멍멍이 같아서 무섭기는커녕 귀여워 죽겠다.
"내가 형이니까 형이라고 불러달라는데 이렇게 사정을 해야되냐?!"
빽 소리를 지르는데도 결국 웃음이 터진 찬열이 푸하하 박장대소하자 백현의 입이 금세 부루퉁해진다.
시장에서 처음으로 함께 시간을 보낸 후, 둘은 제법 자주 만났다.
다음날 백현이 '이번엔 삼청동 가보고 싶어.'라는 문자를 보내왔을 땐 방 안에서 방방 뛰어다니다가 다 큰 놈이 천장 뚫으려고 환장했냐며
어머니에게 욕을 들어먹었다.
그래도 좋았다.
허름한 수제비 집에서 시원하고 개운한 수제비와 매콤한 쭈꾸미 볶음까지 배불리 먹고 삼청동 길을 거닐다가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커피도 마셨다.
'엄청 맛있다! ...근데 준면이네 가게 커피가 더 맛있어.'하고 중얼거리는 백현의 모습에, 이 사람이 진짜 김준면 씨 때문에 펑펑 울던 그 사람이 맞나
좀 빈정상하기는 했다.
그래도, 커피를 잘 안마시는 찬열이 커피 대신 주문한 허브티 앞에서 '한입만- 한입만-', 그렇게 낑낑대며 사정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봐줬다.
다음은 걷기만 해도 사람들에게 어깨가 치일만큼 북적대는 홍대 거리,
그 다음에는 아무 것도 알아보지 않은 채 이태원 골목골목을 헤매고 다니며 맛집을 찾기도 했다.
맛있는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입 안에 잔뜩 우겨넣고 오물거리며 행복해하는 백현의 모습에 찬열도 덩달아 기분이 날아갈 듯 했다.
그 미소 하나를 다시 볼 마음에, 먹으려고 태어난 사람들처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보니 한 걸음 뗄 때마다 송글송글 땀이 맺히던 계절도 지나가고
어느새 가을이 돌아왔다.
개강을 하고 나니 이전처럼 거리낌 없이 놀러다니기는 힘들어졌다.
빡센 전공과목들도 많아졌고, 특히 첫날부터 레포트 과제를 수두룩하게 던지고 사라지신 백발 교수님의 수업은 괜히 레전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열이 아무 불만없이 이번 학기를 견뎌낼 수 있는 이유는, 그것들을 핑계로 아예 백현의 집에 눌러앉다시피 했기 때문이었다.
과제 때문에 바빠졌다며 툴툴대는 찬열에게 백현이 '이제 너 없어서 심심하겠다.'하고 시무룩해한 것이 시초였다.
때를 놓치지 않은 찬열은 그 때부터 백현의 집에 두꺼운 전공서적을 몇 권씩 싸들고 드나들기 시작했다.
백현의 거실 테이블 한 쪽에서는 찬열이 노트북과 전공책을 들여다보며 씨름을 했고,
반대쪽에서는 백현이 갖가지 점자책들을 수북하게 쌓아두고 일에 몰두했다.
준면이 바빠지면서 텅 비어있던 집 안에 이렇게 다시 사람의 온기가 도는 것이 좋다며, 백현도 찬열의 방문을 은근히 반기는 눈치였다.
한참을 각자 일에 집중하다가 먼저 지친 찬열이 방바닥에 드러누워 딩굴거리면 백현이 슬그머니 일어나 주방에서 과일이니 과자니
이것저것 간식거리들을 챙겨들고 나오곤 했다.
이런 하루하루가 일상이 되다보니 나중에는 할 일이 없어도 뜬금없이 백현의 집에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그런 날이면 둘이 나란히 거실에 앉아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해설 방송을 같이 보기도 했다.
화면해설 내용과는 영 엉뚱한 방향으로 장면을 해석해주는 찬열의 뜬금없는 소리에 발을 구르며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는 백현이 참 좋았다.
가끔은 아직 점자책이나 오디오북으로 나오지 않은 새 책들을 읽어주기도 했다.
평소에 책이라곤 즐겨보지 않던 찬열이 그 때부터 서점을 드나들고 인터넷의 책 리뷰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책 읽어줄 때 니 목소리 너무 좋아.'라는 한마디에 이렇게 변한 자신이 제 스스로도 어색했다.
그렇게 책을 읽어줄 때는 귀를 쫑긋 세우고 조용히 몰두하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이 나오면 몇 번이고 다시 읽어달라 조르기도 한다.
가끔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응시하듯 가만히 어딘가 시선을 두기도 했다.
그 순간 까맣게 빛나는 눈동자에는 온 세상의 모든 다정하고 포근한 것들이 다 담겨있는 것 같아서,
그 안에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다는 사실조차 잊게 만들었다.
종종 찬열의 무릎을 베고 누운 채 발을 까딱이는 모습은 언제나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그는 타고난 천성이 사람을 따르고 좋아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순수한 호의를 가지고 다가오는 사람을, 누구인들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늘 이렇게 평화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둘 사이에 하루가 멀다하고 꼭 오고가는 다툼이 바로 백현의 형 타령이었다.
어느 날인가, '너 왜 나보고 형이라고 안 불러?'로 시작된 백현의 형 타령은 매일매일 지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물론 그 한 마디를 안 불러주겠다 끝까지 고집 부리는 찬열도 만만치 않았다.
찬열의 입장에서는 사실 백현을 형이라고 부르는 것이 영 탐탁치 않았다.
백현이 그럴 때마다 '저보다 작아서 부르기 싫어요.', '저보다 어려보여서 부르기 싫어요.'하는 말로 핑계를 대기는 했지만,
사실 그보다는 그 한 마디가 백현과의 사이를 순식간에 멀어지게 하는 것 같아 싫었다.
난 항상 형밖에 없어서 꼭 누군가 날 형이라고 불러줬으면 좋겠다- 하며 백현이 애원하다시피 졸라댔지만, 찬열도 물러설 수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의 학번을 듣고 놀라던 그 모습을 떠올리면 분명 찬열 자신은 그에 비해 한참을 어린 것이 맞다.
그는 어쩌면 자신을, 심심할 때 같이 지내는 여느 동생처럼 보는 것일지 모른다.
그러니 백현에게 형 소리를 하지 않는 것은 제 의지도 아닌데 5년이나 늦게 태어난 찬열 자신에 대한 마지막 배려였다.
결국 팽팽하게 맞서다 오늘처럼 백현이 매달리고 사정하고 마지막에 버럭 화를 내면 찬열이 그 모습이 우습다며 웃어댄다.
그럼 백현도 '나쁜 자식, 건방진 자식-'하고 툴툴대다 결국 따라 웃어버리고...
둘 사이의 작은 싸움은 늘 그렇게 싱겁게 끝이 났다.
이렇게 무르게 반응하니 더더욱 찬열이 말을 들을 리 없었다.
오늘도 그렇게 한가한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모처럼 수업이 휴강되어 오늘 하루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는 찬열은 누나가 얼마 전 새로 샀다는 책을 한 권 몰래 훔쳐들고 백현의 집으로 향했다.
또 어딜 나가냐는 엄마의 말에는 과제하러 도서관에 간다고 대충 둘러댔다.
백현의 집에서 대부분의 과제나 공부들을 하고 있으니 그렇게 거짓말은 아니다.
막 씻은 듯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며 문을 열어준 백현은 찬열보다 찬열이 가져왔다는 책에 더 신이 난 것 같았다.
'변백현 씨는 나를 무슨 녹음기로 아시지.' 하고 궁시렁대자 어쩐 일로 형으로 불러라 타령도 하지 않고 그냥 베시시 웃는다.
'에이- 찬열이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그런다니까.'라며 금방 또 '밥 먹었어?'하고 화제를 돌리는 모습은 미워할 수도 없어서-
결국 이래서 먼저 반한 사람이 지는거다.
"책 읽어줄테니까 이리 와요."
그 말에 냉큼 쫓아와 더듬더듬 찬열의 무릎을 찾아 베고 눕는다.
촉촉하게 젖은 서늘한 머리칼이 편하게 입은 반바지 밑 다리에 흩어졌다.
사실 찬열은 이 순간을 가장 즐겼다.
심장 전체를 감싸는 간지러운 느낌 때문에 오소소 소름이 돋으면서도 마냥 행복해졌다.
물씬 피어오르는 상쾌한 샴푸 내음이 찬열에게도 번지는 듯 했다.
인터넷 서점이나 블로그에 평이 거창해서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책 내용은 지루하고 조금 졸렸다.
이래서 누나가 몇 장 보지도 않고 던져놨구나.
백현도 잠이 오는 듯, 눈이 가물가물해지는 것 같아 졸리면 자랬더니 느닷없이 또 그놈의 형 타령이다.
늘 그렇듯 싫다고 하자 몇 번 매달리다 또 키 발언에 발끈하고...
항상 같은 패턴이지만 이런 투닥거림이 질리지도 않고 항상 즐거운 걸 보면 나도 제정신은 아니지 싶었다.
"좀 쉬었다 읽을까요?"
"응... 졸리다..."
결국 오늘도 그 형 소리를 듣지 못한 백현이 이내 포기한 듯 맨바닥에 냅다 엎드렸다.
덜 마른 머리칼이 감싼 흰 목덜미며 가벼운 티셔츠 밑으로 윤곽이 드러나는 곧은 등줄기를 무심코 바라보던 찬열이 얼른 시선을 피했다.
별 뜻 없이 눈에 스쳤을 뿐이지만 그래도 왠지 잘못한 것 같은 기분이다.
평일 한낮의 오후는 한적하고 고요했다.
침묵이란 가끔 생각지도 못한 평온을 가져다주었다.
그 평화로운 순간에 함께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동적인 일일까.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나른한 행복에 빠져있으려니 찬열도 어느새 가물가물 눈이 감겨왔다.
열린 창문을 타고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에 기분좋게 잠에 빠져들 무렵,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는 백현 때문에 깜짝 놀란 찬열이 눈을 꿈뻑였다.
"...비온다."
"네?"
"찬열아, 비와!"
그제서야 내다본 바깥에는 언제부터인지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침부터 하늘이 온통 하얗게 흐리긴 했지만 이렇게 비가 올 줄은 몰랐다.
'우산도 안 가져왔는데 이따가 하나 빌려가야 하나... 아... 집에 가기 싫다....'
찬열이 잠이 덜 깬 눈으로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후다닥 일어난 백현은 신이 나서 창가로 다가섰다.
문가를 더듬어 방충망까지 열더니만 손을 내밀어 허공을 마구 저어대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하얀 손끝으로 톡톡 떨어진 빗방울들이 튀어올랐다.
그러고보니 두번째 만났을 때였던가.
준면이 백현더러 비만 오면 정신 못차리는 똥강아지라고 구박하던 그 날이...
처음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었던 그 날.
'찬열아-'라는 그 한 마디에 가슴이 벅차 눈을 감았다 떴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예전과 달라져있었다.
"나가자!"
"...에?"
"나가자구-"
...비도 오는데 어딜 나가자는 거야, 이 사람이.
내가 제대로 들은건가 싶어 멍하게 보고 있자니 잔뜩 들뜬 열굴의 백현이 그대로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향했다.
익숙하게 신발장을 더듬어 운동화를 꺼내신더니만 신발장 위에 놓여진 지팡이도, 우산도 없이 그대로 현관문을 열고 나가버린다.
그 모습에 정신이 번쩍 든 찬열이 벌떡 일어나 우산 챙길 새도 없이 백현의 뒤를 따랐다.
백현은 이미 집 앞 마당을 지나 대문까지 열고 골목길로 나서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랫동안 지내온 제 집이라서 그런지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거침없다.
힐끗 올려다본 하늘은 아까보다 훨씬 뿌옇게 흐려있어서 비가 잠깐 내리고 그칠 것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잠깐 사이에 빗줄기가 더 굵어져서 드러난 찬열의 맨팔을 세차게 때렸다.
"어디 가요- 감기걸려요!"
뒤따라 오는 찬열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지, 백현은 신이 나서 대문 앞 골목을 마구 돌아다녔다.
비만 오면 정신 못차리는 똥강아지가 무슨 말인지 단번에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어느 정도 말라가던 보들보들한 머리도, 보송보송하던 반팔 티셔츠도, 백현의 흰 컨버스화도 금세 세찬 비에 젖어들어갔다.
저러다 진짜 감기걸리거나 어디 부딪혀서 넘어지겠다- 싶으면서도 말리지 못한 것은, 빗속을 걷는 백현의 얼굴이 너무 행복해보였기 때문이었다.
그저 초가을에 내리는 선선한 소나기일 뿐이지만 온 세상을 다 가진 듯 즐거워하는 그의 모습은 가슴이 시릴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쏴아아아-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던 빗줄기가 어느새 온 몸을 흠뻑 적실만큼 거세어졌다.
혹여나 다치기라도 할까, 노심초사 눈을 떼지 못하는 찬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찰박찰박 고인 물웅덩이를 밟기도 하고 손바닥에 고스란히 떨어지는 빗방울을 받아모으며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던 백현은
어느 순간부터 가만히 선 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빗물이 눈가를 스쳐 가끔 눈을 깜빡이면서도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없는 그 아득한 시선은 움직이지 않았다.
빈 눈동자에 담긴 하늘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었다.
마치 여느 사람들이 끝을 알 수 없는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듯, 백현도 그렇게 온 몸으로 거센 비를 맞으며 하늘을 마주하고 있었다.
하얗고 반듯한 이마 위로 빗물에 잔뜩 젖은 머리칼이 흐트러져있었다.
가만히 미소를 머금은 채 수채화의 한 풍경처럼 빗 속에 녹아든 백현의 모습은 아플만큼 아름답고도 처연할만큼 슬퍼보였다.
"...좋아해요."
쏴아아-
이렇게나 많은 비는 어디서 쏟아져 내리는걸까.
순식간에 주변을 채운 거센 빗소리 외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무심결에 입에서 흘러나온 찬열의 마음도 그렇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타고 사라졌다.
너무 자연스럽게 내뱉은 제 말에 당황스런 마음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 순간에 꼭 해야 하는 것처럼 당연해보였다.
"뭐-?"
하얗게 미소띈 얼굴 그대로 해맑게 돌아보는 백현의 모습에 찬열의 시선이 말없이 꽂혀들었다.
아슬아슬하게 콧망울 끝에 맺혀있던 빗방울이 또르륵 떨어지자 잔잔하던 마음에도 물결이 일었다.
좋아해요.
내가 당신을, 좋아합니다.
"...조심하라구요."
눈이 마주치지는 못했지만, 세찬 소나기 너머 맑은 눈동자에 비친 제 모습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찬열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에게 바라는 것은 그 이상 아무 것도 없다.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해주길 바라는 것도,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길 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 곳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는 찬열의 전부를 채워주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욕심내지 않을거예요.
예상치 못했던 만남으로 시작된 이 마음은 잔잔한 물결일지라도, 혹은 거센 파도가 된다고 할지라도 영원히 제 마음 속에 간직하고 싶을만큼 벅차고 행복했다.
그것만으로도 평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할만큼.
한참을 이 쪽을 향해있다 베시시 웃는 백현의 모습을 바라보며 찬열도 그렇게 함께 웃었다.
.
.
.
토독- 토도독-
결국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쫄딱 젖어버린 백현이 따뜻한 물에 다시 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는 한참을 멈출 줄 모르던 비가 잦아들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 여운이 남은 듯, 창 밖 난간으로 떨어지는 작은 소리들이 경쾌하게 이어졌다.
보송보송 잘 마른 새 수건으로 기분 좋게 머리를 말리며 소파 위에 털썩 널부러진 백현의 손이 이내 천천히 멈춰섰다.
"...좋아한다고 그랬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이 온통 암흑에 빠져드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다른 감각이 날카로울만큼 예리해졌다.
사람들의 숨겨진 능력이란 종종 놀라울만큼 뛰어나게 다른 상처들을 치유해준다.
덕분에 백현 역시 눈이 보이지 않는 대신 다른 감각들은 남들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그리고 그것은 백현이 세상과 마주할 때 가장 큰 능력을 발휘했다.
백현이 비가 오는 날을 좋아하는 이유는 손 끝에 닿아오는 당연하면서도 예상치 못한 그 느낌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늘 낯선 무언가에 닿으면 놀라고 멈춰서야 하는 생활에 지칠 무렵, 이렇게 한 번씩 찾아오는 소나기는 당연한 듯 온 몸을 감싸면서도
언제 어디를 스칠지 알 수 없을만큼 한꺼번에 쏟아져서- 아무 생각 없이 그 촉감들을 즐기다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거센 빗 속을 거닐고 있으면 보이지 않아도 한없이 자유로웠다.
그게 좋아서 빗 속을 돌아다니다가 크게 앓은 적도 몇 번 있었지만, 그래도 이 독특한 취미는 포기할 수 없는 백현만의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백현은 빗소리에 예민했고 비가 오기 전 공기 중을 떠도는 물내음에 익숙했다.
'좋아해요.'
...그래.
분명 그렇게 말했다.
처음 들었을 때부터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그 다정하고 낮은 목소리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소리에 예민하고 그에 담긴 느낌에 민감한 백현은 목소리의 주인이 얼마나 착하고 좋은 사람인지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볼 수 없게 된 대신 신이 선물한 백현의 소중한 능력은 그럴 때마다 틀림없이 발휘되었으니까.
거세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들려온 찬열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 담긴 조심스럽고도 진중한 감정 또한 알아채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백현은 그 순간 담담히 웃었던 제 모습을 떠올렸다.
당황하지도, 놀라지도 않는 스스로의 모습이 오히려 신기할 따름이었다.
딱히 말로 정의할 수 없는 느낌이었지만, 싫지 않았다.
서늘할만큼 시원하게 온 몸을 때리던 빗줄기가 순간 따스한 어느 봄날처럼 느껴질만큼 온기가 번졌다.
"...조심하긴 뭘 조심해, 멍청한 자식."
생각해보면 진짜 멍청하고, 그래서 귀엽고 순진한 녀석이다.
아무리 거센 빗속이라고 해도 그렇게 대놓고 제 마음을 불쑥 꺼내놓았으면서, 시치미 뚝 떼고 말을 돌리면 정말 모를 거라고 생각한걸까.
그 어리숙한 모습에 툴툴대면서도, 결국 간지럽게 달아오르는 뺨을 쓱쓱 문지르는 백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서렸다.
지이잉-
그렇게 쑥쓰럽고 달달한 공기에 자꾸만 볼을 쓰다듬고 있을 무렵,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오랜만에 아들 목소리가 듣고 싶어 전화하셨다는 어머니였다.
처음 지방에 내려가셨을 때는 하루가 멀다하고 백현을 찾아오셨지만, 이제는 가끔씩이나 이렇게 전화를 주고받을 정도로 독립해서 생활하는 일에 익숙해졌다.
물론 한 번 전화를 하시면 한참 동안 우리 아들, 우리 애기 타령을 하시며 전화를 끊을 줄 모르시지만.
아버지까지 함께 계실 때 전화가 오면 몇 시간이고 두 분이 번갈아가며 통화를 하시곤 했다.
-아들, 아픈 데는 없이 잘 지내? 거기 비 많이 왔다던데 괜찮니?
"응, 지금은 많이 그쳤어. 잘 지내요-"
-너.. 또 비맞고 돌아다녀서 준면이 걱정시킨 거 아니지?
역시.. 엄마는 괜히 엄마가 아니다.
하지만 이번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아냐, 준면이 요즘 바빠. ...엄마."
-응?
"준면이, 결혼한대. 지은씨랑."
-...어?
멍하게 되묻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웃음이 날 정도로 백현은 담담했다.
이렇게 무덤덤하게 말을 꺼낸 스스로가 오히려 놀라울 정도로 자신은 괜찮았다.
생각하면 마음이 아플 것 같아서 억지로 잊고 지내고자 했었는데, 어느새 그 사실 자체도 잊은 채 시간이 흘러갔나보다.
이제는 그저 아무렇지 않게 떠올릴 수 있는 지나간 어느 날이다.
사랑이란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만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 색이 바래고 희미해졌다고 할지라도 황량하기만한 과거로 잊혀지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더 차분해졌고, 떠올리면 흔들리던 마음이 점차 잔잔해졌다.
-...아들. ...괜찮지?
수화기 너머 조심스럽게 묻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오히려 웃음이 났다.
준면과 백현 사이를 누구보다 오랫동안 보아온 어머니의 걱정스런 물음이 어떤 의미를 띄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응. 엄마, 나 괜찮아요."
정말로, 괜찮아졌어요.
나도 놀랄만큼.
한참을 이런저런 걱정만 계속 하시던 어머니와의 통화가 끝나고 달아오른 핸드폰을 내려놓는 백현의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번졌다.
긴 통화가 이어지면서 깨달았다.
이젠 아무렇지 않은 제 모습에 놀라고, 기특하고, 대견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고맙다, 박찬열."
녀석에게 고마웠다.
자신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다그치지도 않은 채 그저 옆에 있어주었을 뿐이지만,
백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녀석은 그렇게 백현의 어깨에 놓인 무거운 감정들을 나누어 들어주고 있었다.
가끔 어린아이들처럼 유치하게 티격태격하기도 하지만, 늘 말없이 자신을 배려해주는 녀석.
"...고마워."
마음에 담겨있다가 내뱉어진 말은 그 순간 더 선명한 사실이 되어 다가왔다.
비록 찬열의 모습은 떠올릴 수 없지만, 손 끝에 닿았던 그 떨리던 속눈썹과 몰래 꺼낸 마음을 감추던 따스한 목소리만은 누구보다 확실하게 기억할 수 있다.
그렇게 녀석은 조심스럽고, 다정한 사람이다.
쑥쓰러운 마음에 괜히 젖은 수건 위로 얼굴을 마구 부벼대는 백현의 귓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토독토독, 창가를 두드리는 빗소리마저 간지러운 어느 날의 오후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
.
.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는,
이것 말고는 당신을 대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저리주저리
으아아아아악-
지난 화 답글도 한 줄 안 쓰던 사람이 어째 갑자기 뿅 나타난게야!!! 하신다면 입 꾹 다물고 할 말이 없습니다ㅠㅠㅠ
14화 올려놓고 또 마구마구 바빠주시다보니 인티에 거의 못 들어와봤거든요ㅠㅠ
그래도 모티로 올려주신 댓글들 하나하나 정말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ㅠㅠㅠㅠㅠ
폰이 진짜 답이 없는 녀석이라 차마 모티로는 못 달고 날 잡아서 한꺼번에 다 인사드리겠어!!! 하고 마음 먹었는데
그 이후로 계속 인티에도 잘 못 들어오다가 결국 15화 먼저 이렇게 들고 나타났습니다;;ㅠㅠㅠㅠㅠ
먼저 이거 올려두고 뒤늦은 인사 드리러 떠나겠습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오늘 말고 내일요ㅠㅠㅠ 흑흐긓긓ㄱ 이제 15화 올려두었으니 밤샘하면서 해야할 일이 또 기다립니다...흑흑흑흑..ㅠㅠㅠ
아이고ㅠㅠㅠ 완전 앞뒤가 바뀐 느낌이네요ㅠㅠㅠㅠㅠㅠ 아이고오오오ㅠㅠㅠㅠㅠㅠㅠ 그래도 늘, 늘 제가 사랑하는거, 아시죠?ㅠㅠㅠㅠㅠㅠㅠ
이번 이야기 마지막 구절은 영화 패치 아담스에서 주인공 헌터 아담스가 죽은 연인의 장례식 때 읽어주었던 파블로 네루다의 시 한 구절입니다.
원래는 스페인어 시인데 영어로 번역한 내용이 많이 쓰이는데요, 실제로 제가 쓴 부분도 인터넷 상이나 영화 자막에서의 해석과는 조금 다르지만,
이번 편을 쓰면서 제 나름대로 이런 의미로 받아들여지더라구요.
아아.. 영화에서 이 장면을 보면서 폭풍오열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로빈 윌리암스 주연의 영화들은 다 좋아하지만 '패치 아담스'와 '천국보다 아름다운'은
대사를 다 외우도록 돌려봐도 질리질 않네요..ㅠ 볼 때마다 한 번씩 꼭 울게 되는 진짜 명화들입니다ㅠㅠ
타인을 사랑한다는 건 너무나도 간단한 감정이지만, 동시에 너무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저는 사람에 대해 공부하는 사람이지만, 사랑이라는 감정 그 하나만으로도 세상은 이렇게나 넓고 다양해서 가끔은 엄두가 안날 지경이네요-
믿었던 사람에 의해 사랑을 잃고도 결국은 또 사람들을 끝없이 사랑하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늘 그렇게 끝없는 사랑이 넘쳐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진짜 행복한 삶이 아닐까요.
꼭 돈이 많고, 잘생기고 예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꼭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갑자기 또 이상한 쪽으로 감성폭발입니다;
이번 편은 쓰고나니 참 애매- 합니다-? 그래서 백현이는, 과연 찬열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걸까요-?
이 부분은, 저희 다음 편에서 생각하도록 해요:)
제가 아직 거기까지는 백현이 감정을 따라가지 못했다고는 얘기하지 않겠어요. ...으하하;;
지난 화 주저리에서 잠깐 언급했던 혜민스님의 책 중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당신이 저를 순수하고 선하다고 느끼는 까닭은, 바로 당신이 순수하고 선하기 때문입니다."
소소하지만 항상 착한 사람들의 일상 이야기를 추구하는 사과를 읽으시면서 네 녀석의 이야기 속 따뜻함과 달달함, 순수함을 찾아내시는 여러분은
모두 여러분 스스로가 그런 분들이시기 때문이에요.
여러분의 그런 에너지를 받을 수 있어서 늘 감사드리고 또 영광입니다:)
이렇게 순수한 여러분을 항상 응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기억하시고 어떤 순간이든 힘내세요-:)
아.. 왜 이노무 감성은 글 쓸 때는 안 올라오고 꼭 주저리 쓰다가 올라오나요.
덕분에 저와 여러분의 손발은 지금 이 순간 오그리토그리....ㅋㅋㅋ;;;
이번 편 BGM은 꼭 한 번 써보고 싶었던 곡이에요- 제가 정말정말정말정말 좋아해서 8번을 가서 본 뮤지컬 수록곡 중 하나입니다ㅠ
처음에는 선배들이랑 무심코 봤는데, 그 이후로 부모님, 동생, 친구, 후배..
가까이에 힘들어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꼭 한 번씩 데려가서 보여주는 제 나름대로의 위로방법이었달까요..
가끔은 오글거리는 말이 안나와서 그런 방법으로 누군가에게 위로를 건네는 것도 좋은 편법인 것 같습니다.
...물론 돈이 엄청 들죠;; 으하하;;;;
지난 화 독자2번님이 추천해주신 곡!! 들어봤어요!! 세상에 좋은 노래들은 어떻게 이렇게 많은건가요ㅠㅠㅠ
꼭 어딘가에 써보고 싶은 곡인데, 앞으로 두고두고 생각해보겠습니다- 너무 감사해요ㅠㅠ
자꾸 본업이 바빠지다보니 처음 다짐했던 것만큼 글에 많이 신경을 쓰진 못하게 되네요..ㅠㅠ
조금만 더 안정이 되고 사과가 마지막으로 접어들면 지금까지 나왔던 이전 이야기들 전부 살짝살짝 수정보거나 고쳐서 텍파로 나중에 싹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요렇게 자꾸 핑계만 늘면 안되는데 말이에요ㅠㅠㅠ
달아주시는 댓글 하나하나를 읽으면서 저 스스로도 제가 쓴 글을 다시 돌아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아, 내가 쓴 글이 이렇게 받아들여지는구나- 어떤 땐 저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생각하게 되기도 하구요-^^:;
수정된 텍파에는 읽어주신 분들의 의견 하나하나도 그렇게 들어가지 않을까요- 결국 사과는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이 함께 써주시는 글이 될 것 같아서
마음이 든든합니다:)
오늘은 비도 오고 해서 주저리가 길었네요- 그러고보니 사과는 뭐 이렇게 맨날 비가 많이 오나요;;ㅋㅋㅋ
어딘가 허접했던 이번 편은 이렇게 마무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 편에서 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