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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영역에 가을이 발을 들이밀던 계절이었다. 새벽의 찬 공기에 몸을 웅크리고 자던 전정국이 정신없이 울리는 알람에 미간을 찌푸리며 대충 소음을 차단했다. 얇은 이불을 턱 끝까지 올려 다시 잠에 빠지려던 순간 두 번째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듣다보니 첫 번째와는 다른 게, 전화 벨소리였다. 이른 아침부터 매너없이 전화를 걸 사람. 대충 떠오르는 얼굴이 있어 성의없이 스피커 폰 버튼을 눌렀다. …왜. 갈라진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 '안 일어나냐?' 

"…일어…날꺼야." 

 

웅얼웅얼. 

 

'…뭐라는거야.' 궁시렁대는 말투에 제정신도 아닌 전정국이 웃음을 터뜨렸다. 

 

- '오늘 아침 훈련 있잖아. 빨리 일어나라.' 

"…일어날거라니까." 

- '나 이제 옷만 갈아 입고 넘어갈건데, 그때까지 거실에 없으면 올라간다.' 

"아…진짜." 

 

짜증으로 펄럭거리는 이불 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넘어왔다. 건너편으로 보이는 발악에 김여주가 혀를 차며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 

 

끊긴 휴대폰을 들어 울리기 직전인 나머지 알람들을 선수 쳐 종료시킨 전정국이 몸을 일으켜 창 건너로 보이는 방을 말 없이 쳐다보았다. 머리를 대충 아래로 묶고 있는 얼굴과 눈이 마주쳤을까, …무언가 붕붕 뜬다는 느낌이 들더라. 머리 위로 까치집이 지어졌는지 김여주가 삿대질을 하면서 자지러졌다.  

 

"…저게 요즘 왜 저렇게 오버를 떨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 얼굴을 덮은 손 너머의 입꼬리는 실 없는 웃음이 샜다. 

 

 

 

 

 

 

 

 

 

 

 

 

사랑은 고요하게 스며들어서 

매번 한 박자 느린 난, 너의 뒷모습을 볼 때 마다 느꼈던 

심장 박동의 이름을, 그땐 알 수 없었다. 

 

 

 

사랑의 형태, 

 

3화 

: 나침반 

 

 

 

 

 

 

 

 

 

 

 

 

 

 

 

 

"…어우 추워." 

 

…어디다가 벗어뒀더라. 젖은 머리 위로 대충 수건을 얹어 나온 전정국이 욕실과는 달리 한기가 도는 방 안에 작게 몸을 떨었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등 뒤로 떨어지는 물방울에 마음이 급해진 몸이 여러 개의 서랍을 열어 재꼈다. 아 찾았ㄷ, "야." 

 

"…씨 깜짝이야. 노크 안 하냐?"  

 

벌컥 열린 문 뒤로 나타난 김여주에 인상을 찌푸린 전정국이 손에 들고 있던 티셔츠를 펼쳐 마르지도 않는 몸을 구겨 넣었다. 뭐야, 일어났네? 뻔뻔한 그 말에 고개를 저은 전정국이 문 앞에 버티고 있는 그 몸을 밀어내며 1층으로 난 계단을 밟았다. 

 

"훈련 끝나고 애들한테 순대국 먹자 할까?" 

 

"니 머리속엔 무슨 먹을 생각 밖에 없냐." 쫑알거리며 뒤 따라 내려오는 몸에 전정국이 헛웃음을 쳤다. 넌 싫음 말고. 덤덤한 반응에 누가 싫대? 대답할 찰나에 "…어?" 발을 헛디딘 김여주가 반사적으로 전정국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빠르게 어깨에 힘을 주고 쓰러지는 김여주를 받쳐 안은 전정국이 메신저 채팅 창이 켜진 채 손에 들려있는 휴대폰 화면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야. 

 

"너 내가 계단에서 휴대폰 하지 말랬지." 

"…와." 

"저번처럼 굴러 떨어져서 아예 운동 안하고 싶냐?" 

"…와." 

"대체 생각이라는게 있는거야, 없는거야. 너는." 

"…내 반사신경 봤냐?" 

 

…대화가 안되네. 입을 틀어 막은 체 감탄(?)하는 몸을 일으켜 세운 정국이 그 손에 들려있는 휴대폰을 뺏어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너 이거 체육관 갈 때까지 압수야." 

 

딱딱한 정국의 표정에 그제서야 분위기 파악을 한 김여주가 말 없이 신발을 신고 나가는 차가운 뒷 모습을 황급히 따라 나섰다. 

 

 

 

 

 

 

 

 

 

 

 

 

 

 

 

사랑의 형태, 

 

 

 

 

 

 

 

 

 

 

 

 

 

 

 

 

"……" 

 

도복 차림의 김여주가 체육관 한 가운데 말 없이 서 있는 전정국을 향해 쭈뼛거리며 다가갔다. 둘 씩 짝을 지어 이뤄지는 오전 자유 훈련의 전정국의 짝은 당연히 김여주. 김여주의 짝은 당연히 전정국이었다. 김여주는 이럴 때 마다 난감했다. 전정국과 같은 과인걸 후회한 적은 없지만, 둘 사이의 텐션이 좋지 않을때면 그렇게 전과가 마려웠다.  

 

"뭐해. 빨리 안 오고." 

 

멀리서 쭈뼛 거리는 김여주를 보고 전정국이 말했다. …어, 어. 연습하는 아이들 사이로 다가 온 김여주에게 전정국이 자세를 잡으라는듯 턱을 까딱거렸다. 심호흡을 뱉으며 올라오는 여주의 발차기를 막아 낸 전정국이 계속 하라는 듯 끄덕였다. 계속해서 여주를 막아내던 전정국이 어느 사이에 보이는 빈 틈으로 김여주를 넘어뜨렸다. 매트 위에 누워 호흡을 고르던 김여주가 아쉬운 듯 손바닥으로 매트를 쳤다. 

 

"…아-나 이거 윤재 선배한테 배운건데." 

 

아오. 아쉬움에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을 바라만 보던 전정국이 한 마디를 뱉었다. "그러게, 나한테 배우라니까." 

 

"…너 이거 할 줄은 아냐?" 

"……"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건데, 그게 또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전정국의 미간이 잔뜩 상해 있었다. 아, 야. 알았어. 그런 말들과 함께 달래려고 몸을 일으키는 김여주의 허리를 감싸 안은 전정국이 한 번에 그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야, 자세 잡아." …잘 못 건드렸다. 속으로 말을 삼킨 김여주가 울며 겨자먹기로 자세를 잡았다. "씨, 야 잠깐만!" 체급 따위 없는 것처럼 초반부터 몰아치는 정국의 공격에 당황한 김여주가 나름 정국의 공격을 척척 막아내던 중, 작은 빈 틈이 보여 본능적으로 발을 뻗었다. 

 

"……" 

"……" 

 

넘어가는 김여주를 잡아 아프지 않게 쓰러뜨린 전정국이 누워있는 얼굴 옆으로 손을 뻗어 몸을 지탱했다. "…와, 너 이런 식으로 화 푼다 이거냐?" 어이가 없는지 웃음을 터뜨리는 얼굴을 말 없이 바라보던 전정국이 손을 들어 그 이마를 괴롭히는 잔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거 이거, 아주 치사한 새끼네?" 쫑알쫑알. 무슨 말이 그렇게도 많은지. 장난스럽게 눈을 가늘게 뜬 얼굴에서 멀어져 그 옆에 털썩 앉은 전정국이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야. 

 

"어?" 

"너 봐서라도 태권도 하라메." 

"…어?" 

"그런 말을 해놓고, 왜 책임감이 없어. 너는." 

"……" 

"아까 굴러서 다리라도 나갔으면 어쩔 뻔 했는데."  

 

"……" 아무 말 못하고 당황으로 물든 얼굴 옆으로 다시 손을 뻗은 전정국이 상체를 숙여 그 얼굴 위로 속삭였다. …김여주. 

 

"너 그런 말 한 이상." 

"……" 

"더 이상 태권도 혼자 하는거 아니야." 

"……" 

"나 생각해야지." 

"……" 

"너 다쳐서 태권도 못하게 되면." 

 

"나도 안해." 

 

 

 

 

 

 

 

 

 

 

 

 

 

 

 

사랑의 형태, 

 

 

 

 

 

 

 

 

 

 

 

 

 

 

 

"……" 

 

아니 최교수님 진짜 미친 것 같다니까. 작은 식당을 울리는 친구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김여주가 맞은편에 앉아 휴대폰을 하는 전정국을 바라보았다. 옆에 있는 상현의 말에 간간히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도 흘리지 않고 눈에 담았다. "야 여주야, 너는 했냐?" 

 

"어? 여주야." 

"…어?" 

"…뭐야, 왜 이래. 너 최교수님 과제 다 했냐고. 레포트 6장 쓰는거." 

 

…어, 어. 진작 다 했지. 대답과 동시에 차려지는 순대국에 몸을 뒤로 빼라는듯 전정국이 김여주에게 손짓했다. 로봇처럼 삐그덕대는 김여주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현주가 앞에 있던 전정국을 향해 말했다.  

 

"…야 연습을 얼마나 빡세게 시켰으면 얘가 혼이 다 빠졌냐." 

 

그 말에 김여주의 뚝배기에서 빨간 다데기를 가져가던 정국이 픽, 하고 웃었다.  

 

"얜 정신 좀 차려야 돼." 

 

다데기 없는 허연 국물에 새우젓을 퍼 넣은 전정국이 휘저으라는듯 턱을 까딱였다. 마치 제 할 일을 다 했다는듯 그제서야 밥을 먹기 시작하는 정수리를 바라보던 김여주가 국물 위로 둥둥 떠다니는 새우 뭉텅이를 젓가락으로 헤집어 놓았다.  

 

…정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것 같았다. 

 

 

 

 

 

 

 

 

 

 

 

 

 

 

 

 

 

사랑의 형태, 

 

 

 

 

 

 

 

 

 

 

 

 

 

 

 

 

 

- '오늘 안 잊었지?' 

 

떨리는 손으로 전송 버튼을 누른 서윤이 왠지 조금해지는 마음에 다리를 잘게 떨었다. 손목에 걸친 시계를 확인하는 교수의 행동을 보아하니 곧 수업이 끝날 것 같았다. 예상대로 교탁 앞에 선 교수가 전공책을 정리하며 수업을 마치겠다는 말을 뱉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짐을 챙기는 서윤의 손에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 응 

- 나 이미 도착. 

 

발신자 '정국이'. 긴 문장도 아닌 메세지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서윤이 이미 도착해 있다는 내용에 황급히 강의실을 빠져 나갔다. 인문대 건물을 2분 만에 벗어 난 서윤의 뜀박질의 방향은 그 어느 때보다 정확했다. 후문에서 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카페가 보이자 속도를 늦춰 숨을 고르더니 망설임 없이 가게 문을 열었다. 

 

"……" 

 

작은 종소리를 내며 카페 안으로 들어 온 서윤이 구석에 있는 정국을 발견하곤 발걸음을 옮겼다. 근처에 왔음에도 심각한 표정으로 노트북만 쳐다보는 정국에 픽,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그 앞에 태연하게 앉았다. 

 

"뭐야. 언제 왔어?" 

 

놀란 미소를 짓는 정국에 "진짜 둔하다." 웃음을 터뜨린 서윤이 고개를 저으며 짐을 풀기 시작했다. 지난 요일, 같이 카페에서 과제를 하자던 서윤의 제안에 성사된 만남이었다.  

 

"무슨 좋은 일 있었어?" 

"어? …아니?" 

"너 기분 되게 좋아 보여." 

 

…그래? 정국의 말에 어색하게 입꼬리를 내린 서윤이 마른 기침을 하며 노트북을 펼쳤다. 밝게 켜진 화면이 잠금을 풀으라는 창을 띄웠지만, 서윤은 눈 아프게 그 화면을 바라 보기만 하였다. 정국의 말처럼 오늘따라 답지 않게 텐션이 높은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 곳을 올 때 부터. 생각에 잠긴 서윤을 알아 차리지 못한 정국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냄새 안 나냐? 

 

"…어?" 

"너 향수 뿌렸어?" 

"…어, 어." 

 

"왠일이래." 피식, 작은 미소에 얼굴로 불이 확 번지는 기분이 들었다. 팔걸이에 팔을 올려 입술을 매만진 체 집중한 정국을 바라보던 서윤이 쿵쿵 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같은 자세로 앉아 있어서 뻐근 했는지 몸을 쭉 늘린 정국이 노트북과 기싸움을 하는지, 심각한 표정의 서윤에 작은 미소를 지었다. 

 

"냄새 좋네." 

"……" 

"야. 나 화장실 좀."  

 

"……" 방금 본인이 던진 게 말인지 폭탄인지, 아마 둘 중 뭐라 해도 신경 쓰지 않을 전정국은 태연하게 서윤에게서 멀어져 갔다. 돌았는지 미친듯이 쿵쾅대는 심장에 이질감을 느낀 서윤의 몸이 힘이 다 빠진 체 의자만을 의지했다.  

 

"……" 

 

이제는 인정을 할 때가 되었다. 그 날 이후로 하루도 맘 편히 잠 들지 못 한 이유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보는 얼굴을 보면 올라가는 입꼬리의 이유를, 사실은 이 곳을 올 때 부터가 아니라, 너와의 약속을 생각 했을 때 부터 기분이 좋아졌던 이유를, 내가 여기로 달려 온 이유를. 

 

"아- 화장실에 휴지가 없네. 옷 좀 빌린다?" 

 

…나의 뜀박질이 22년, 평생을 봐 온 전정국에게로 향한다는 사실을 인정 해야만 했다. 

 

"…야, 장난인데." 

"……" 

"…화났어?" 

 

너와 내 꼴이 우스워서 웃음이 나왔다. 블라우스에 묻은 물 자국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내 마음은 물보다 농도가 짖었다.  

 

"아 놀랐잖아." 

"…전정국 쫄보네."  

 

그래서 쉽게 증발 되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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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앞으로 셋이 관계가 어케 될지!ㅠㅠ 재밌게 읽구 갑니당!
4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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