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븐라희 7
– 정 주나요 안 정 주나요 -
발신인: 010-XXXX-XXXX
[ 여주야. 얘기 좀 하자 ]
[ 정말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
여주가 콧방귀를 뀌고 메시지 창을 닫았다. 저장은 안 돼 있지만 누구인지 잘 알았다. 매번 번호를 바꾸고 차단해버리는 엄마에 노선을 여주로 바꾼 것이 분명했다. 이혼하면 끝 아닌가? 왜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구는 거지? 눈썹을 팔자로 지어도 쉽게 결론나지 않았다. 다만 그 사이에 제가 끼지 않길 간절히 바랐는데, 전처럼 새우등 터지는 건 시간문제 같았다. 엄마에게 말할까 고민하다가도 고개를 저었다. 차단이라는 좋은 기능 두고 괜히 걱정을 안겨드리고 싶지 않았다.
“뭐해? 가자.”
“아, 응.”
여주가 남준의 뒤를 따르며 고민 없이 차단 버튼을 눌렀다. 공연이 코앞이었다. 엄마에게도 저에게도, 걱정 따위는 없어야 하는 시기였다.
화이트데이 기념 공연 D-3
♬ 0308 - 보수동쿨러
지민이 손을 찢을 듯이 쫙 펴고 오므리고를 반복하다 다시 기타를 잡았다. 평소 연주하던 일렉이 아닌 통기타였다. 통기타로 입문했지만 일렉보다 쉽지는 않았다. 대부분 통기타로 진행되는 버스킹에서는 선재도 여주도 없을 테니 손을 풀고 있던 차였다.
“어, 못 보던 기타네요.”
여주가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요즘 연습실에 가장 일찍, 그리고 가장 늦게까지 남아 있는 멤버 둘이었다. 지민은 여주의 실력에 단지 재능만 있는 게 아님을 느꼈다. 언제 한 번 여주의 벨소리를 들었을 때 느꼈다. 공연곡을 벨소리와 알람으로 맞추는 사람은 처음 봤다. 전화신호음도 공연곡으로 맞춘 것 아니냐는 말에 여주는 그 정도로 과몰입하지는 않는다 답했지만, 지민의 눈에 그건 과몰입이 아니라 열정이었다.
“이번 공연 끝나면 곧 버스킹이거든.”
“아아, 버스킹도 한댔죠. 재밌겠다.”
여주가 소파에 드러눕듯 앉았다. 지민은 조금 전보다 삑사리를 많이 내며 여주를 쳐다봤다.
“이게 자꾸 이러네.”
여주가 벌떡 일어나 의자를 끌어왔다.
“내가 손이 작고 통통해서 코드 잡기가 조금 힘들어.”
“음……확실히 손가락 마디 살이 다른 곳에 닿네요.”
말 한 마디의 힘은 컸다. 잘 하고 있다는 응원 한 마디를 바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된다.’, ‘어렵다면 계속 꾸준히 하면 된다.’, 이 말을 듣지 못해 지민은 정말로 저가 실력이 없나 싶었다. 선재가 실력을 내세워 일삼는 무시를 알고는 있어도, 말 그대로 실력 차가 있는 건 사실이었으니.
그런데 여주의 그 한 마디가 지민의 손가락을 움직이게 했다.
“이런 손은 기타 칠 때 불리하긴 해요. 특히나 통기타는 넥(neck)이 크고 넓어서 더 그렇고요. 저도 손가락이 긴 편은 아니라 자주 겪었던 건데, 이런 건 최대한 손끝으로 승부 보는 수밖에 없더라고요.”
“손끝?”
여주가 바짝 당겨 앉아 지민의 손 모양을 다잡아줬다.
“손톱이 조금만 길어도 쓰는 손끝 범위가 달라져서 줄에 닿거든요, 이렇게.”
“아아.”
“그래서 손톱을 바짝 깎고, 줄은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닿는다는 느낌으로 해야 해요.”
여주가 지민의 손끝을 제 손끝으로 가리켰다. 그 부분을 응시하며 지민이 코드를 다시 잡았다. 전보다 나은 소리가 났다. 여주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어~ 기타 강좌 중이야?”
지민이 몇 번 뚱땅거리고 있자 남준과 윤기, 태형이 연달아 들어왔다. 바로 앞에서 만난 모양이었다. 바깥 공기를 몰고 온 셋이 자리를 잡자 환기가 되는 듯했다. 여주는 의자를 끌어 제자리에 앉았다.
“그럼 이제 합주해보자, 합주. 오늘 정국이 온댔나?”
“저기 오네요.”
“어이 전정국이~ 너도 양반은 아니구나.”
“뭐야. 왜 내 욕해요.”
“안 했어, 인마. 마이크나 켜.”
왁자지껄 속에 정국이 들어왔다. 윤기에게 입을 삐쭉이던 정국이 마이크를 켜고, 처음부터 함께 치고 들어가야 하는 여주가 남준을 응시했다. 숨 돌릴 새도 없이 드럼스틱 치는 소리가 날아왔다.
연달아 두 곡을 맞춰본 헤븐라희 연습실에는 잠깐 정적이 일었다. 정국이 마이크에 대고 한 마디 하기 전까지는.
“우리 개잘하는데요?”
“아까 윤기형이랑 화음도 쩔었어요.”
윤기가 웃으며 손을 끄떡였다. 다들 어제보다 나아진 합주에 기분이 들떴다. 그 덕에 컨디션 조절이라는 명목으로 일찍 끝낼 수 있었다. 남준이 가져온 모자의 모양을 다잡으며 공지했다.
“공연장에 드럼이랑 앰프, 이팩터는 있는데 이팩터는 우리 게 더 좋으니까 챙겨가자. 리허설 때 보고 괜찮으면 거기 거 쓰고.”
“네엡.”
지민과 여주가 동시에 대답했다.
“드럼스틱이랑 피크 같은 거 잘 챙겨. 특히 김남준. 또 어디서 잊어먹어서 다른 팀한테 빌리지 말고.”
“아이, 이제 안 그래요 형.”
“안 그러긴 인마. 너 때문에 내가 공연할 때마다 스틱 챙겨 다녀. 알아?”
“알, 알아요.”
윤기가 눈을 가늘게 뜨자 남준이 모자를 황급히 썼다. 남준이 무언가를 잃어버린 전적 중 가장 화려한 전적이렸다. 여주를 제외한 모두가 그때를 떠올리며 웃었다.
“여주야. 너 체인락에 말은 해놨어? 그때 되면 볼 텐데.”
“체인락 나온대요?”
“라인업에 있던데?”
태형이 윤기에게 묻는 동안 여주는 불현듯 현준이 떠올랐다. 대답하면서도 말허리가 길게 늘어졌다. 공연에서 볼 거라고 했으니, 현준이 보컬로 나오는 건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체인락에서 노래 제일 잘하는 사람이 누구냐 물으면 모두 입을 모아 현준을 말했으니. 여주와 함께 꾸려지는 최고의 팀에 현준은 빠지지 않았다. 게다가 밸런타인데이 공연과는 다르게 화이트데이 공연은 적은 액수지만 상금이 있었다.
여주가 현란한 기타솔로를 하지 않는 이상 우승은 헤븐라희 차지였다. 헤븐라희가 본격적으로 활동에 시동을 걸면서 상금을 싹쓸이했지만, 체인락에서 여주가 나오면 결과가 비등비등했다는 뜻이다. 공연은 대부분 두세 곡이 할당된다. 체인락은 동아리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기회를 분배해야 한다. 때문에 여주가 있는 한 팀과 다른 팀 n팀이 곡을 나눠 가지만 헤븐라희는 아니었다. 게다가 세션 실력들이 전반적으로 좋아 연달아 공연해도 호응이 괜찮았고, 이것의 이유에는 무대매너가 있었다. 잘생긴 얼굴을 가장 잘 쓰는 사람, 정국 덕에.
“내일 흰이 온대?”
“당연하죠. 강선재도 없는데.”
정국은 그러면서 여주를 봤다.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다가 마주친 눈에 여주가 머쓱하게 눈썹을 긁었다. 나도 곧 나갈 사람인데…….
공연이 다가온다는 것은 여주가 헤븐라희를 떠날 날도 머지않았다는 것. 여주는 연결선을 정리하다가도 다시 이 악기들을 뺄 생각에 조금 허무해졌다.
“우리 버스킹은 언제 해요?”
“아직 화공(화이트데이 공연)도 안 끝났다, 태형아.”
“지민이 통기타 잘 치는데.”
“……갑자기 나는 왜?”
뜬금없이 언급된 지민이 태형을 쳐다봤다. 등 뒤로 가방이 자꾸만 흘러내렸다. 태형의 시선을 따라간 지민이 여주에게 닿았다. 지민은 태형이 무슨 생각인지 알 것 같았다.
“버스킹 꼭 와, 여주야.”
“네. 시간 나면 갈게요.”
태형은 섭섭한 것이다. 여주가 곧 갈 사람이라는 게.
“시간 나면 오는 게 아니라, 시간 내서 와.”
“저 보내고 싶어요? 왜 갑자기 작별인사 하듯 말해요.”
여주가 툭 치면서 웃었다. 대화는 웃으며 무마됐지만 여주는 조금 복잡해졌다.
“자, 이제 가자!”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그렇듯, 사람을 센치하게 만드니까.
“야, 빨랑빨랑 안 다니지. 어?”
“웃기고 있네.”
대문부터 환하게 켜진 불이 여주를 맞았다. 오랜만에 본가에 온 예주가 언니랍시고 잔소리했다. 통금을 밥 먹듯이 어기고 외박을 일삼던 예주의 올챙이 적 시절은 여주만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왜 이렇게 늦어? 혼자 심심해 죽는 줄 알았잖아.”
“혼자 살잖아. 혼자 사는 법 좀 배워.”
“집에까지 와서 그래야 되냐? 오늘 김남준도 없던데.”
“아, 밴드 연습 때문에.”
예주는 여주의 4살 터울 언니로, 남준과 동갑이었다. 아직 본가살이를 하고 있는 남준과는 다르게 일찌감치 독립한 예주도, 원래는 그 일원이었다. 때문에 여주는 씻는 내내 예주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읊어야 했다. 거실이 아니라 동생 침대에서 자겠다는 언니에 버럭 화를 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오, 안 그래도 침대 좁은데.”
“그런 맛에 자는 거 아니겠니. 그래도 내가 바깥에서 자잖아.”
“아 예. 고오맙네요.”
여주가 눈을 흘기면서도 침대에 엎드렸다. 아침이면 바닥에 굴러 떨어져 있을 예주 모습이 훤했다.
“이러니까 옛날 생각난다.”
“그땐 바닥이라서 넓기라도 했지.”
“나 살 안 쪘다?”
“누가 쪘대? 좀 옆으로 가라고!”
“어어, 언니 떨어진다아!”
좁은 침대에 두 성인 여성이 투닥거리며 구겨져 누웠다. 구깃구깃. 이불이 오그라들고 이리저리 쓸렸지만 무드등 효과인지 뭔지, 아득하게 느껴졌다. 나란히 누워 이불 싸움을 하던 차에 여주가 퍼뜩, 일전에 받은 메시지를 떠올렸다. 엄마는 아니라도 언니에게는 나눌 수 있는 이야기. 언니. 왜. 입을 달싹이다 결국 운을 뗐다.
“혹시 아빠한테 연락 안 와?”
“뭐?”
예주가 벌떡 일어났다.
“아, 살살 움직이라고! 이불 다 떨어지잖아!”
“너한테 연락 왔어?”
“응.”
“미친. 번호 어떻게 알았지?”
“내 말이. 언니한텐 안 온 거지?”
“안 왔어. 오면 지랄할 거 아니까 너한테 했나보다. 차단해 빨리.”
“진작 했지.”
“잘했어.”
“……집까지 찾아오진 않겠지?”
“찾아오면 말해. 경찰 부르게.”
“경찰씩이나.”
여주가 주섬주섬 이불을 끌어당겼다.
“마음 약해지지 말랬지. 피 섞였다고 정 주는 거 아니야.”
단호한 예주의 말이 귀에 박혔다. 언젠가부터 예주가 미는 유행어였다. 말이 유행어지, 복잡한 가정사를 파고드는 가장 예민한 말이었다. 그래, 한 번 떠나기로 마음먹은 사람에게는 정을 주지 않는 게 맞다. 이제는 하도 들은 말이라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근데 자꾸 마음 약해지면 어쩌지.”
“돌았냐, 너?”
“아니. 아빠 말고.”
“뭐. 남자 생겼어?”
“그런 거 아니라고. 좀 진지하게 들어 봐.”
그래서 딱지 위로 미끄러진 말이 다른 곳으로 튀었다. 연습실에서부터 복잡했던 심경에 뭔가 활활 타올랐다. 피붙이에 정 안 주는 연습까지 했는데. 이 악기가, 이 모임이, 손을 떼기가 어려웠다. 앰프에 붙은 스티커처럼 끈적하게, 마음을 옭아맸다.
“남자 얘기면 진지한 거지.”
“하…….”
“알겠어, 말해 봐.”
“됐거든요. 디비 자.”
귓전에 조금 전까지 연습했던 곡이 맴도는 듯했다.
화이트데이 기념 공연 D-2
메리 추석 해피 추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