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로 읽으시는 걸 추천합니다.
: 초면부터 이미지 이렇게 안 좋기 쉽지 않은데.
-1시 반까지는 꼭 갈게요.
"네, 1시 30분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전화를 끊자 마자 발 아래서부터 끌어올린 한숨을 내뱉곤 신경질적으로 가방 안에 휴대전화를 던져넣었다. 항상 이런 식이지. 첫 작 부터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이 남자작가는 항상 정해진 시간보다 30분을 늦었다. 대놓고 화를 낼 수 없게 사람 좋은 목소리로 말을 해 싫은소리 한 번을 제대로 할 수가 없는 건 옵션. 물론 아직도 문화평론부 내에서 막내딱지를 떼지 못 한 내가 무어라 떠든들 들어줄리도 만무하지만.
운동화를 신고 나오길 잘했다 생각하며 평일 낮이라 사람이 없는 시내를 둘러봤다. 뭘 먹을까 싶어도 점심시간의 식당은 시장통같아 싫어 마냥 걷다 하늘을 뚫을 듯한 건물들 사이에 끼인 듯한 작은 가게가 눈에 띄였다. 유리 안으로 보이는 대충 쌓여져 있는 책들의 모습에 망했나 싶어 발길을 돌리려다 -열려 있어요.- 하는 문구에 혹시 바로 뒤에 놓인 책이 밀리진 않을까 문을 당겨 열었다.
안쪽을 대충 눈으로 훑다 가게 주인장의 놀라울 정도로 일관성있는 취향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여기 있는 모든 종류가 소설이라서. 이렇게 한 종류만 싹 모아놓으니 커다란 서점에 밀리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책의 표지를 열어 끄트머리에 박힌 작가 프로필부터 읽는다.
- 김종현. 1990년 4월 8일생. 첫 작 '줄리엣'이 올해의 작품상 후보에 오른 후 발표하는 작품마다 특유의 해석이 가능한 글로 고정 팬들까지 확보하고 있는.. -
몇 글자로 피로해진 눈을 주름이 질 정도로 세게 감았다 뜨곤 책을 덮었다. 이 작가의 작품은 몇 번이나 읽었다. 아마 시중에 나온 책을 다 읽었으리라 생각하기에 자리에 다시 가져다둘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요."
카운터에 없던 직원이 여기 있나.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무너질 듯 쌓여있는 책 사이에서 독서를 했던 듯 책을 쥐고 있는 남자가 이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이곤 정확히 내가 빼낸 자리만 비어있는 곳에 다시 책을 꽂았다.
"그거, 진짜 재미 없어요."
"그렇지는 않은데요."
칼같은 대답에 남자보단 내가 더 놀랐다. 김종현의 작품이 대단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꽤나 훌륭하다고 생각해왔다. 그 작가의 작품처럼 스스로 해석을 하게 하는 작품은 요즘 나오는 책들, 특히 소설중엔 드무니까. 남자는 뭐가 재밌는지 얕게 소리를 내어 웃더니 들고 있던 책도 내려두곤 다가왔다. 인쇄물 냄새만 가득한 곳에서 남자의 향수인듯한 향이 훅 끼친다.
"어디가 재밌는데요?"
"... 솔직히 재밌지는 않은데,"
"않은데?"
"흔하진 않거든요. 내 마음대로 해석해도 되는 책."
내 마음대로 해석하면 또다른 얘기가 생기는 그런 책. 일부러 몇 번이나 추천 도서 목록에 적으면서도 이 작가의 글에 대한 비평도 줄거리도 적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내가 처음 그의 책을 읽으며 느꼈던 즐거움을 알려주고 싶어서. 입사 후 한동안 지은 적 없었던 삐딱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책을 빼 남자쪽으로 내밀었다.
"딱 보니까 책 읽으면서 생각하는 거 싫어하시는 것 같은데."
"예?"
"생각하면서 읽어봐요."
스스로 재해석도 좀 해보고.
남자의 손을 잡아끌어 책을 올려놨다. 전화가 온 듯 가방 안에서 반복된 진동이 울리는 게 느껴졌다. 벌써 30분이 되었나.
…
"그래서 내가 그 때 뭐라고 했냐면요-"
집에 가면 꼭 귀를 파야지 생각했다. 글 쓰는 사람들은 다 말이 많은가. 아니면 컴컴한 방에 박혀 없는 사랑 얘길 지어내느라 진짜 사람이 고팠는지도 모른다. 카페 안에 들어서기 전부터 거울을 보며 점검했던 미소가 이젠 한계라고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을 즈음이 되어서야 슬슬 일어나자며 그 쓸데 없이 큼지막한 가방을 뒤적인다. 대충 예상이 가는 내용물을 생각하며 딱 봐도 텅 빈 백팩을 한참을 뒤적이다 나온 건 그저께 새로 나왔다는 신작. 이 사람은 참 예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기자님이 저랑 잘 통하는 것 같아서, 선물."
어련하시겠어요.
싸인까지 슥슥 하고 노트북 앞에 내려놓고서야 먼저 들어가겠다며 일어나는 것에 가볍게 미소만 짓고는 작가가 나간 후에야 겨우 표정에 힘을 풀었다. 부들부들 떨던 입꼬리가 아래로 툭 떨어진다. 사무실로 돌아가려 가방 안에 노트북을 집어넣곤 두고 갈까 생각하다 집어들어 가방의 빈 공간에 쑤셔넣었다.
오랜 시간 창가에 놓여 있어 밍밍해진 레몬에이드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하교할 시간이 되어 텅 비었던 거리가 꽤나 시끄러워져 있었다. 시험이라도 쳤는지 문학은 어땠느니 생물은 어땠느니 하는 소리도, 끝나면 어딜 가자느니 하는 희망 가득한 말소리를 듣다 나까지 어딘지 모르게 들떠 차를 주차해둔 백화점으로 걷던 방향을 돌렸다. 버스를 타고 조금 돌아간다고 문제가 되진 않겠지.
…
"막내 왔어?"
가방을 내려두자마자 의자 채로 옆으로 와 어땠냐 묻는 희연씨의 말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럼 그렇지 하고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 작성하던 한글의 제목엔 "이 달의 공연" 이라 쓰여있다. 놀라울 정도로 편한 분야만 골라 해 주변에선 얄밉게 보는 것도 같았지만 본인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것 같은 사람이다. 녹음기를 꺼내곤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 USB를 꽂았지만 뭔가를 쓸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아무 생각 없이 마우스만 딸깍이다 겨우 제목을 작성하곤 다시 키보드에서 손을 떼 턱을 괴었다. 책상만 툭툭 치며 멍하니 있다 시계의 뒷자리가 00으로 바뀌자 마자 메신저가 울린다.
「집에 안 가?????」
흘깃 옆을 바라보니 내 대답보다 먼저 짐을 챙기는 게 보여, 나도 미련 없이 창을 끄곤 USB를 뽑아 주머니에 넣곤 내려놓은지 몇 분 되지도 않은 가방을 다시 집어들었다. 들어온지 몇 분이나 지났다고 꽤나 하늘이 어두워졌다. 희연씨와도 인사를 하고는 익숙하게 차 키를 꺼내 버튼을 눌렀다.
"어?"
몇 번을 눌러도 들리지 않는 차소리에 당황해 회사 주변을 빙빙 돌다 버스가 눈 앞을 쌩하니 지나간 후에야 내가 뭘 타고 여기까지 왔는지가 생각이 나 짧은 탄식을 내뱉곤 한참을 걸어 다시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퇴근 시간을 한참 지나 8시를 향해 가는 시침을 보다 귀에 이어폰을 끼우곤 아까도 이렇게 오래 걸었었나 생각하며 빈 버스에 올라타 창 밖을 바라봤다.
…
교복에서 사복으로, 사람이 훨씬 많아진 거리를 지나치다 문득 점심에 들렀던 서점이 떠올랐다.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또 직장인으로 넘어가면서 한동안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소설으로 가득한 책장에 아무 감흥이 없던 게 이젠 진짜 직업이 아니면 글을 읽지 않는구나 싶어 씁슬할 때쯤 보인 남자. 꽤나 예의없는 행동에 당황한 건 남자보다 나였을지도 모른다. 평소답지 않게 당당히 책을 꺼내들어 읽어보라며 쥐어준 나도 그걸 또 받아들어 알았으니 표정 풀라며 웃던 남자도. 어이가 없지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뭐 이제 볼 사람 아니니까.
백화점의 주차장에 도착해서도 한참을 헤메다 겨우 차에 올라타 벨트를 메곤 옆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퇴근시간도 한참 지나 꽤 빠른 속도로 다니는 차들 사이에 끼어 비슷한 속도로 밟았다. 사람이 회사를 다니면 거칠어진다고, 면허딴 지 몇 년이나 지났다고 아빠 차를 막 타고 다닌다고 우스갯소리로 말 하던 엄마가 생각나 피식 웃었다.
자리를 다 뺏겨 차로 가득한 아파트 주차장을 빙빙 돌다 꽤 멀리 떨어진 동에 차를 대곤 밖으로 나와 주차 상태를 확인했다. 어째 주차실력은 면허 딸 때보다 나빠진 것 같다. 옆 차를 아슬하게 비껴 주차된 차를 보곤 미련 없이 뒤로 돌아섰다. 알아서 잘 빼겠지 뭐. 뻐근한 목을 한 바퀴 돌리며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가는데 누군가 손목을 잡아돌리곤 고개를 푹 숙인다. 헉헉거리는 듯 거칠게 오르내리는 어깨를 보다 이어폰의 노랫소리에 뭍혀 작게 들리는 말소리가 뭐라 말 하는 지 알아들을 수 없어 고개를 갸우뚱하니 귀에 꽂힌 이어폰을 잡아 뽑는다.
"원래 이렇게 노래를 크게 들어요?"
주차 똑바로 하라고 경고하는 경비원이라도 될 줄 알았던 짜증섞인 목소리로 말 하는 사람은 오후의 서점 속, 그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