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래서, 저 남자라고?"
"응. 이름 변백현. 나이 24살. S그룹 회장 넷째 아들."
어둠이 짙게 깔린 밤이었다. 돈 꽤나 있으신 자제분들만 모이신다는 파티를 가장한 이 클럽에서, 사람들은 음악소리에 몸을 흔들고, 남녀가 붙어 끈적한 분위기를 형성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 모든 것을 관망하듯이 칵테일을 입에 머금고 한 남자만을 집요히 쫓았다. 그러니까, 저 남자라는 거지. 남자를 비추는 조명은 화려한 클럽조명뿐이었지만, 언뜻 보이는 뽀안 피부와 웃을 떄 한껏 접어지는 눈은 남성보다는 소년같아서, 이곳의 분위기에 참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아깝다."
"뭐? 너 설마 저런 취향이었냐?"
기겁을 하며 날 쳐다보니 동료를 보며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몰랐어? 나 연하 좋아하는 거. 귀엽잖아. 칵테일로 목을 한번 축이고, 동료에게 치아를 보이며 씩 웃어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미친년, 이라고 중얼거렸다. 뭐 어때. 어차피 내 입장에서는 내 취향 유혹하는게 좋잖아.
"해바라기처럼 보이는데. 약혼녀도 있다며. 나한테 걸려들까?"
"그니까 니 역할이 중요한 거지. 이거 꽤 짭짤하다? 변백현 이미지 좋거든. 이거 걸려들면 꽤 자극적인 제목이 되는 거지. 자신 없어?"
"그럴리가. 나 김여주야. 너 사진 제대로 찍어."
나는 그녀를 한껏 비웃으며 머리를 한번 쓸어내렸다. 와, 이번엔 좀 긴장되는데. 나는 팔짱을 풀고 그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하이힐의 울림소리가 몇 번 울리지 않고, 나는 그 앳된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자, 이제, 시작.
"혼자 왔어?"
최대한 관능적으로 보이게, 그러나 경박스러워 보이지 않도록. 변백현은 동그란 눈으로 멀뚱히 날 쳐다보기만 할 뿐, 표정변화는 없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손을 가슴팍에 두고 쓸어내리듯 가볍게 터치했다. 이제 얘가 어떻게 반응하냐에 따라 달라지는 건데. 만약 정색하며 내 손을 내치면 이번에는 아닌 거고, 내 손길을 거부하지 않는다면, 나한테 좋은 거고.
"그러는 그쪽은?"
예스! 변백현은 말없이 내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 잠시 피식 웃고는 내 손을 그대로 어깨로 올려 날 가벼이 끌어당겼다. 워, 보기와 다르게 힘 쎄네? 이거 뭐, 너무 쉽잖아. 다른 남자들하고는 좀 다를 줄 알았더니. 흥미가 급속도로 떨어졌다.
나는 빨리 처리하자는 마음으로 그의 얼굴을 동그랗게 원을 그리듯 톡톡 두드렸다. 남자치고 매끈한 피부에서 나의 손가락이 자유롭게 움직였다. 마지막은, 그의 선홍색 입술을 꾹 누르고, 그 엄지손가락을 내 입술에 갖다대며. 나는 그에게 더 가까이 붙어, 이마를 맞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혼자 왔는데?"
아, 끝이네. 내 행동에 회답하듯이 변백현의 얼굴이 나에게 다가왔고, 순식간에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키스사진 정도면 되겠지. 잘 찍고 있나? 어떻게 다를 게 하나도 없는지. 빨리 끝내고 집에나 가고 싶다. 나는 눈을 감고 그의 키스를 기다렸다.
그러나 입술에 숨결만 닿을 뿐, 말캉한 입술의 감촉은 느껴지지 않아, 나는 살며시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내 앞에서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는듯이 입꼬리를 올리고 날 물끄러미 보는 변백현이 보였다. 초등달처럼 휘어진 눈매에는 우스움이 한껏 묻어나와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이상함을 감지했다.
"보통 클럽에 혼자오는 여자가 이런 걸 들고다니나?"
"......"
"어딜?"
웃음기를 눌러담은 목소리의 변백현이 내미는 물건에 내 표정이 일그러졌다. 시발, 이번 판은 아니야.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나는 그에게서 벗어나려 시도했지만 안타깝게도, 내 허리를 잡고 제 품으로 끌어당기는 변백현 탓에 무산되었다. 시발...! 이 새끼 힘 왜 이렇게 세! 겪어본 적 없는 상황에 머리가 하애지는 순간,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는,
'꺄악!!!!!!'
변백현의 손에 들린 내 무전기를 통해 들리는 동료의 날선 비명소리였다. 허망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고개를 천천히 들자 변백현과 눈이 마주쳤고, 변백현의 입가에 걸려있는 승리의 미소를 보며 이 생각만이 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시발, 좆됐다.
"요즘 질 나쁜 여자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
"거기에 넘어간 남자들이 참 병신같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그 여자를 이렇게 실제로 보니까..."
-넘어갈 만 하네, 변백현은 헛소리를 지껄이며 가까이 다가와 내 얼굴을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후, 침착하자. 일단 이 새끼가 날 경찰에 집어처넣으려는 건 아닌 것 같다. 지금은 날 굉장히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나는 천천히 내 허리에 둘러진 그의 손을 떼어냈다. 그러나 도망갈 생각은 절대 없다는 듯이 살풋 미소 지으며. 변백현은 눈썹을 살짝 꿈틀거렸지만 날 포박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는 거 같았다.
"그래서..."
"......"
"날 감방에 처넣으려고?"
-푸하하하하!!! 변백현의 간드러지는 웃음소리가 허공에 흩날렸다. 시발, 왜 웃고 지랄이야. 너, 진짜 당당하다. 변백현의 웃음소리 사이 간간하게 들린 말이었다. 지는 어떻고. 나는 미간을 좁히며 그를 살짝 쨰려봤다. 변백현은 몇 분동안이나 그렇게 웃다 이마를 내 어깨에 박았다. 곧 이어 들려오는 그의 물음에 웃음기는 전혀 없었다.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
걸려들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환호를 질렀다. 야, 나 이래봬도 너보다 몇 년은 더 살았어. 너한테 휘둘릴 수만은 없잖아. 나는 손을 들어 그의 머리카락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그리 어렵지 않게 헝클어졌다. 나는 여전히 그를 쓰다듬으며 천천히 한 음절씩 끊어 말했다. 이건, 도박이다.
"내 의견이 네 결정에 영향을 미쳐?"
"...응."
왜? 내 말에 변백현은 고개를 들고 날 진득하게 바라보았다. 새까만 눈동자에서 가벼움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어, 나는 잠시 넋을 놓았다. 어린 소년같다고 생각했는데, 마냥 그런 건 아니었나 보다. 충분히 남자같아. 지금 너, 꽤 섹시해.
"...너가, 마음에 드니까..."
이번엔 내 차례였다. 나는 그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변백현이 날 살짝 못마땅하게 흘겨보았지만 어떡해. 아, 됐다, 됐어.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아직은 어리구나. 그래서 이렇게 저돌적인 건가? 순식간에 경직되어 있던 분위기가 유해진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볼에 대고 한번 쓸고,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아직은 웃음기가 서려 있는 목소리로 가장 순수하고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나 그냥 보내줘."
"......"
변백현은 말 없이 날 바라보다 손을 올려 내 뒤통수를 감싸쥐었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에서, 변백현의 벌어진 입술 틈에서 나오는 숨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뺨에서 간질거리는 숨은 내가 느낀 어느 것보다도 뜨겁고도 짙어서, 나는 잠시 당황했다. 그의 입술과 내 입술 끝이 아주 가볍게 닿았다. 변백현은 씩 웃으며 제법 남자다운 말을 했다.
"하던 거, 마저 하면."
그리고, 한 번도 느끼지 못한 황홀한 키스가 시작됐다.
2.
두번째 남자, 박찬열.
"꼬, 꼼짝 마!!!"
"......"
별빛조차 보이지 않는 칠흑같은 밤이었다. 유리로 만들어진 건물 천장, 달빛이 비치자 큰 키의 다부진 체격의 남자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나는 권총을 손에 쥐고 익숙하지 않은 남자에게 겨누었다. 목소리가 사정없이 달달 떨려왔다. 아, 망했다. 남자는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나를 보고 살짝 커진 눈으로 나에게 뚜벅 걸어왔다. 그의 발걸음은 어쩐지 다급함이 얹혀져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계속 소리질렀지만, 그는 들리지 않는 듯이 나에게 다가와 순식간에 내 손목을 움켜잡고 날 제압했다.
"꺄, 까악!!!!!"
권총이 힘없이 떨어져 바닥을 뒹굴었다. 어, 어떡해. 나는 멍하니 바닥만 쳐다봤다. 어렵게 시선을 올리자, 남자의 낮게 내리깔려진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그 새까만 눈동자는 눈을 깜빡일 수록 더 짙어지는 것만 같아, 나는 황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어떡해. 어떡해, 나... 그와 나 사이의 조용한 적막이 내려앉았으나 잠시 후 그의 목소리에 정적이 깨졌다. 아, 이 낮은 목소리. 참 오래간만에 듣는 음성이었다.
"...오랜만이네."
박찬열. 그는 나를 포함한 모든 경찰들의 골칫거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무슨 수를 써도 잡히지 않으니. 그는 박찬열이라는 정갈한 이름 석 자를 갖고 있었으나 우리 팀은 물론이와 모든 경찰들에게 이 한 단어로 통칭됐다.'좀도둑새끼.' 그는 선량한 시민들의 돈이나 물품을 훔치는 도둑은 아니었다. 대상은 주로 보석, 어쩌면 도둑보다는 괴도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릴 남자였다.
어쨌든 그는 이제 범행 전에 예고장까지 손수 보내느 대담함을 보였고, 경찰들이 그를 잡으러 혈안이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 값비싼 목걸이를 훔치겠다고 예고한 그를 잡기 위해 경찰들은 모두 건물 입구에 총집합했고, 나는 혹시 몰라 건물 안으로 들어오다 그를 마주한 것이다.
그와 첫번쨰 만남은 몇 개월 전이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몸놀림으로 경찰을 따돌리는 그의 눈동자와 직면했던 그 순간,
'......'
'......'
나는, 무슨 생각을 했었더라.
"...훔친 목걸이, 도로 내려놔."
"나한테 명령하지 마."
물론 씨알도 안 먹힐 소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 말을 싸그리 씹어먹는 반찬열의 말에 나는 주먹을 꽉 줘었다. 멍청이. 멍청이 김여주. 어쩌자고 혼자 들어와서는... 박찬열은 날 훑어보더니 낮은 조소를 흘렸다. …젠장.
"넌 이제 권총도, 수갑도 없어. 게다가 혼자고. 너 자신을 걱정해야 되는 상황 아닌가?"
"너가 날 해칠 거였으면 진작에 그랬겠지."
"...위험한 상황이라는 건, 그것 뿐만이 아니잖아?"
무슨 소리... 내가 반문할 틈도 없이, 박차열이 내 어깨에 팔을 올리고 순식간에 다가왔다. 나는 기습적인 그의 행동에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뭐야. 지금 나한테...
"지금 뭐하는...!"
"넌 지나칠 정도로 약하고, 어리고, 순진하지."
애석하게도, 나보다는 박찬열이 빨랐다. 한 글자, 한 글자씩 말하는 그의 숨결이 그대로 목덜미와 얼굴에 내려앉았다. 박찬열은 그대로 손으로 내 볼을 쓰다듬었다. 그의 큰 손에 내 볼이 완벽하게 감싸졌다. 이윽고 그는 내 얼굴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서서히 매만졌다. 피부에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소름이 일었다. 마치 얼굴 전테의 애무하듯이, 나는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어쩐지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네 그 지나침은 언제나 날 매료하고..."
"......"
"고작, 고작 두번째인데도 말이야."
그의 손을 뿌리쳐야 하는데. 뺨이라도 때려야 하는데. 미쳤냐고 소리라도 질러야 하는데... 몸이 도저히 움직여지지 않았다. 나는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날 소중하게 대하는 듯한 그의 어루만짐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어쩐지 온몸이 죄다 얼얼한 느낌이었다. 이건 그가 두려워서일까? 아니면... 그의 손길이 내 입술에 닿았고, 앙 다문 입술이 홀린듯이 벌어졌다. 박찬열이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내 눈꺼풀 역시 파르르 내려앉았다.
"이쪽으로!!!"
"저기야!!!!"
"......!"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서둘러 박찬열을 밀어냈다. 박찬열의 표정은 짜증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었다. 그러나 나는, 그제야 제정신이 들어 벌겋게 오른 양 뺨을 쥐었다. 미친, 미친년! 왜 거기서 눈을 감는데...! 제정신이야?
"진짜, 눈치 한번 더럽게 없네."
"......"
"오늘은, 여기까지 밖에 못 하겠네."
나는 어쩐지 박찬열의 얼굴을 마주하기 부끄러워 시선을 내리깔았다. 박찬열은 날 가만히 응시하다 내 턱을 잡고 들어올렸다. 어어, 내가 당황스러워할 새도 없이 그의 검지손가락이 내 입술을 꾹 눌렀다. 박찬열은 아쉬운 미소를 지었다.
"...또 만나."
박찬열은 그 말을 끝으로 달빛을 등지고 홀연히 사라졌다. 그러나 나는 그 자리에서 몇 분동안이나 우두커니 서 그가 사라진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제정신이 든 건 경찰들이 몰려 왔을 때였다.
"김여주? 너 왜 여깄어!"
"좀도둑새끼 어딨어?"
"씨발, 목걸이...!"
"...? 야 너 그 목에 그거 뭐야!"
"...예......?"
팀장님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내 목에 쏠렸다. 나는 미동도 없이 목에 걸려진 것을 보다, 결국 실소를 터뜨렸다. 눈부시게 빛나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우아한 목걸이가, 내 목에서 찬란하게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하...하하..."
귓가에 박찬열의 목소리가 멤돌았다. 또 보자,라니... 다음에 만나면 뭐 하게. 그럼 또 이런 도둑질을 하겠다는 거야?
아아, 박찬열.
너와 나 사이는, 우리만 알고 있는 걸로 하자.
안녕하세요 작가입니당
후하후하 떨려요 후하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