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걔를 무서워하기 보다는 꺼려하는 것처럼 보였다. 걔가 아무런 의도없이 단순히 다음 시간은 뭐냐고 물었을 때도, 아이들은 의도가 있다고 느꼈는지 아무도 그 짧은 물음에 대답을 자신있게 하지 못했다. 막상 걔가 면전에 대고 크게 소리를 지르거나, 욕을 한다거나 했던 적은 한번도 없었는데도. 걔는 그러면 답이 맘에 들든 들지 않든, 다시 책상 위로 엎어졌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쩌면 아이들은 더러워서 피했다기보다 걔가 정말 무서웠나보다.
내가 봤던 걔는, 학교에 정말 가끔씩 왔던 걔는, 잘생겼었다. 사실 얼굴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콧대가 정말 곧고 예쁘게 뻗어있었다. 얼굴도 작았고, 눈빛도 또렷했다. 그외엔… 교복을 나름 잘 갖추어 입었었고, 가방도 늘 묵직해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공부에 관심있는 스타일은 전혀 아니었다. 또, 그렇다고 노는 걸 좋아하지도 않았다. 말은 무척 적었고 친구도 없었다. 아니다, 친구는 많았다. 친구의 의미가 걔 주위에서 딸랑딸랑하는 하인같은 남자애들까지 포함한다면.
고등학교 삼학년의 봄은 어느 때보다 쌀쌀했다. 공부에 정신이 팔려 벚꽃이 핀 줄도 몰랐다. 당장 학교가는 길에 피어있는 꽃도 전혀 뵈질 않는데 걔가 눈에 들어왔을리가. 나는 걔한테 관심이 하나도 없었다. 그냥 매일 조례시간을 조금씩 잡아먹는 애였다. 담임선생님은 늘 걔가 왔는지 안왔는지를 엄청나게 신경썼으니까. 그럴 때면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인문계까지 와서 저럴 거면 학교를 왜 꾸역꾸역 다니느냐고. 시간이 아깝다고. 내가 걔에 대해 생각했던 건 그게 끝이다. 당시로는.
나는 유복했다. 부모님은 교수와 교사였고, 늘 화목했다. 부모님의 모토가 '젊게 살자'였기 때문에, 늘 나를 친구처럼 대해주었다. 성적에 대해 부담 준 적은 한번도 없었다. 사실 공부가 아닌 다른 모든 면에서도, 스트레스를 심어주긴 커녕 내게 항상 칭찬만 잔뜩 해주었다. 정말이지 누구보다 순하고 다정한 분들이었다. 그런데 그 사이에서 나온 나는 참 별종이었다. 나는 자존심과 경쟁심이 엄청났다. 무엇이든 무조건 일등을 원했다. 이 악물고 수석을 차지해도, 그 정도로 만족하지 못했다. 더 크고 화려한 타이틀이 탐났다. 예컨대 수능 만점, 최연소 PSAT 합격같은 것.
걔가 공부에 관심이 없다고 맨날 노는 게 아니듯이, 나도 친구 하나 없이 공부만 아는 범생이 타입은 아니었다. 진심으로 모든 걸 털어놓고 기댈 수 있는 '진짜' 친구들도 다섯은 됐고, 꾸준히 연락하고 가끔씩 만나는 친한 친구들도 몇명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시기에, 내가 정말 최적의 환경에 놓여있다고 생각했다. 올해 말까지 이렇게만 지내면 서울대는 따 놓은 당상이었으니까.
아.
그래서 나는 그때 거기에 간 것을 후회한다.
어느 날 갑자기
prologue
3월 모의고사가 끝난 날, 집에 할머니가 오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석 달정도 됐을 때였다. 엄마는 이제 우리집에서 같이 살기로 하셨다고 했다.
나는 누구보다 인자하신 할머니를 무척 사랑했다. 다만 할머니는 귀가 잘 들리지 않으셨다. 몇백만원 주고 맞춘 보청기는 외출할 때만 끼셨다. 여든 넘은 할머니의 유일한 취미는 티비 시청이었다. 할머니는 티비의 볼륨을 제일 크게 트셨다. 그것때문에 짜증이나 화가 나진 않았지만 벽을 타고 진동하는 소리에 공부에 집중하기가 힘들어졌다. 독서실이나 카페에서 공부하기가 썩 내키진 않았는데, 할머니의 소소한 행복을 뺏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그냥 이튿날 방과후부터 학교 도서관에 갔다. 야자를 신청할 수도 있었지만 공부 시간과 쉬는 시간이 딱딱 정해진 건 싫었다. 다들 독서실 구조의 야자실을 이용해서 그런지 도서관은 당직 도서부원 이외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도서관과 서점을 좋아했다. 책 읽는 걸 참 좋아했으니까. 책은 장르를 불문하고 재밌다 싶으면 그 자리에서 끝까지 읽었다. 그 날도 그랬다. 유독 가방에서 교과서랑 노트를 꺼내기가 싫은 날이었다. 머릿속이 산만하니 단편 소설 딱 하나만 읽고 시작하자 생각했다. 여지껏 학교 공부에만 치중하느라 문학을 멀리 했으니.
스무 개의 책꽂이에는 옆면마다 서적 분야가 크게 적혀 붙어있었다. 국내문학과 세계문학 중에 고민을 했다. 세계문학이라면 이번엔 프랑스 작가의 소설이 끌렸다. 나는 그래, 모파상이나 생텍쥐페리같은 작가를 찾아보자고, 아니면 릴케같은 시인의 시집도 좋을 거라고 하면서, 발을 두어발짝 더 옮겼다.
내가 그 다음 순간, 거기서 책꽂이에 기대어 앉아 바닥에서 책을 읽고 있는 걔를 보았을 때, 놀라지 않았다하면 그건 필시 거짓말이다. 첫째로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었고, 둘째로 하필이면 걔가 있을 줄도 몰랐었고, 셋째로 걔가 책에 관심이 있는지 알 겨를도 없었고, 마지막으로는 걔가 책 읽는 모습이 그렇게 잘생겼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걔가 나를 쳐다보았을 때에 이상하게 나는 쥐구멍에 숨고 싶은 감정이었다. 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에 스쳐지나갔던, 걔에 관한 수많은 생각들을 들킬까봐서. 나는 걔의 눈길에 떳떳히 응하지 못했다. 걔가 들고 있는 책만 쳐다봤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그 아홉 자에 내가 잊고 지내 저 밑바닥까지 파묻혔던 어떤 감정이 치솟았다.
그게 무어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마 사랑이라 하겠지.
걔는 평소처럼 아무 말도 않고선 다시 책 위로 눈을 돌렸다. 나는 순간 모욕감과 수치심 비슷한 것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당시 나르시즘과 선민의식에 심히 빠져있었으니까. 그 기분은 평생을 잊지 못할 역함이었다. 심장박동이 내 몸 전체에 울리는 듯 했다. 나는 자리에 도로 돌아와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리고 제일 친한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어떡하느냐고, 수능 망칠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