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쓰레기통에 펜을 던져버렸다. 두 손으로 마른 세수를 연거푸했다. 나 미쳤나. 진짜 미쳤나봐. 혼잣말도 중얼거렸다. 책상 앞에서 멍하니 있기를 이틀째였다.
거실에 켜진 티비 속 예능 프로그램의 그 깔깔대는 웃음 소리가 방문은 넘었어도, 내 두 귀를 타고 들어오진 못했다. 공부를 종일 해도 이렇게 머리가 꽉 찬 적은 없었는데. 나는 그대로 침대 위에 뻗었다. 도무지 도서관에 갈 용기가 나질 않았다. 설령 도서관이 아닐지라도 또다시 걔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영혼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그 느낌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와 보니 영혼은 어찌어찌 지켰어도 다른 게 도둑 맞은 것 같다. 뭐가 사라졌기에 이렇게 사람이 싱숭생숭해졌는지. 그러면 아무래도 내 모든 곳 중 가장 큰 부위였겠지. 몇 번의 간단한 사고를 거치니 인정해야만 하는 순간이 왔다. 나는 걔한테 이미 마음을 송두리째 주었다고.
그 날 이후 주말동안 쓸데없는 생각만 늘었다. 처음으로 학교에 가기 싫어 꾀병을 부리고 싶어졌다. 다음에 걔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할지부터 시작해서 걔가 날 어떻게 생각했을지까지 고민했다. 학교로 가는 내내 차에서 우두커니 창밖만 보고 있으니 눈치를 챈 엄마가 물었다. 고민이라도 있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엄마와 내 사이에 참 유치한 비밀이 생긴 걸 보니 사춘기가 늦게도 왔다.
교실 분위기는 평소와 같았다. 다들 다음 모의고사 얘기를 하고, 사소한 가십거리를 떠들었다. 나만 다른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자리에 앉아 가방에서 책들을 꺼내자마자 금요일에 내 문자를 받은 민지가 뒷문에서 부리나케 달려왔다.
"너 문자 뭐야? 무슨 일 있어? 연락도 안 받고. 엄청 걱정했잖아."
나는 미안하다고, 아무 일도 아니라고 하면서 살짝 웃었다. 그래야 내 말을 믿어줄 것 같았다.
"진짜야?"
역시나 민지는 단번에 믿지 않았다. 도리어 의심하는 눈초리로 계속해서 물었다. 그러니 입이 근질댔다. 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것 같다고, 어떡하냐고 다 털어놓고 싶었다. 그러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했다.
"야, 나 사실……"
나는 말 끝을 흐리는 걸 싫어한다. 소심하고 자신감 없어보이니까. 내가 잘못한 상황에서도 그렇게 말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나는 뒷 말을 잇지 못했다. 걔가 앞문으로 조용히 들어왔으니까.
"뭔데?"
내 눈이 무의식적으로 걔의 뒤를 졸졸 쫓았다. 검파란 마이에,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에, 검파란 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당최 모르겠는 표정. 눈치 빠른 민지는 수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내 눈을 따라가더니만 나와 동시에 걔를 쳐다보며 물었다.
"왜 그래?"
"아냐. 미안. 나중에 말해줄게."
민지는 그 한 마디에 가버릴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결국 민지는 내게 가까이 붙더니만 조용히 물었다.
"설마 쟤가 너한테 무슨 짓 했어?"
그래, 무슨 짓 하긴 했지.
나는 속으로만 생각하며 손사레를 쳤다. 어이없는 척 헛웃음을 억지로 뱉었다.
"야, 뭐야. 그게. 진짜 나중에 말해줄게. 종 치겠다."
"알았어. 꼭 말해줘야 돼. 알았지?"
민지는 신신당부 후 한번 더 걔를 흘긋 보더니만 들어왔던 뒷문으로 유유히 나갔다.
나도 걔를 봤다. 책상에 가만히 앉은 걔의 뒷모습을 봤다. 그리고 속으로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혹시 너도 나처럼 내 생각을 하진 않느냐고. 그랬으면 좋겠는데.
어느 날 갑자기
01
쟁쟁한 아이들 사이에서도 수석을 하려면 타고난 유전자로는 모자라다. 끊임없는 충동 억제와 감정 컨트롤이 필요하다. 엘리트가 가식적이고 공감 능력이 결여된 모습으로 매체에 그려지는 것도 어쩌면 그 이유에서일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부터 이성만 키워왔으니까.
나도 분명 그렇게 컸다. 하고 싶은 게, 보고 싶은 게 있어도 참았다. 미래에 받을 보상이 몇배, 몇십배는 더 커서였다. 학원에 눈길이 가는 남자애는 있었어도 돌아서면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런지. 진짜 정상이 아니다. 당최 계산이 되질 않는다. 걔에 대한 마음과, 내 모든 야망 중 어느 게 더 큰지를.
판서가 한창인 영어선생님의 뒷모습을 본다. 40대 중후반의 남자 선생님이다. 나는 영어가 약해서 다른 과목보다 영어에 시간을 더 투자했다. 집중도 영어시간에는 최고조였다. 나는 정신을 차리려 기를 썼다. 다시는 걔를 보지 않으려 교재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펜을 잡았다.
나는 머뭇대다 석 자를 조그맣게 써본다. 검은 글씨로 하얀 종이 위에 무언가가 적힌다.
이제훈.
이게 무슨 큰 일이라고 심장이 유난법석이다. 누가 볼세라 그 위를 냅다 찍찍 그어버렸다. 이대로 정말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나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로 눈동자만 천천히 옮겨본다. 일 분도 채 되기도 전에 다시는 보지 않겠다 했던 걔에게로.
나는 그를 보며 이제는 검게 칠해져버린 그 이름 밑에 덧붙여 쓴다.
좋아해.
며칠이 지나고 담임선생님이 점심시간에 교무실로 불렀다. 모의고사 때문이었다. 교무실에는 이미 나처럼 불려온 각 반의 아이들이 몇명 있었다. 선생님은 가채점 점수를 알려달라고 하셨다. 나는 영어에서 두 문제 틀렸다고 했다. 옆 반 선생님과 그 옆에 서있던 아이가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다른 거는 다 백점인 거야?"
"네."
"와, 정말? 전체에서 두 개?"
선생님이 환히 웃으셨다. 대단하다는 칭찬도 잊지 않으셨다. 3학년 학년부장 선생님이 그 소리에 짧게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우리 학교는 수도권이긴 했지만 평범했다. 그 사이에서 나는 단연 성적으로 기대를 받는 학생이었다. 1학년 때부터 늘 그랬다. 그래도 부담스럽진 않았다. 점수가 떨어지는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으니까. 매년 담임선생님은 나를 자랑스러워하셨고, 나는 항상 의기양양했다.
근데 지금은 왜 이러지.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 나는 애써 기쁜 척하며 감사하다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끝까지 밝은 미소를 짓고 계셨다. 나는 짧게 인사를 드리고선 발을 돌렸다.
교무실 문 밖으로 인기척이 있었다. 민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민지겠거니 했다. 내가 손잡이를 잡기도 전에 먼저 문이 열렸다. 또 걔였다.
당황스러웠다. 걔가 나를 잠시 쳐다봤다. 나는 조급하게 눈을 피했다. 걔가 암말없이 몸을 틀어 길을 터줬다. 내 온몸에 잔뜩 긴장이 들어갔다. 문틈을 지나가면서 걔와 가까워졌다. 그 몇 초가 다분히도 길었다.
그에게서는 어떤 향이 났다. 그게 나를 정신도 못 차리게 했다. 나는 그의 등에 대고 용기를 내어 말했다. 고마워. 선생님께 드렸던 감사 인사와는 무척이나 달랐다. 걔는 내 목소리에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냥 알겠다는 듯이 고개만 살짝 까딱였다.
그 찰나가 나를 또다시 며칠 붙잡아두고, 나는 그 기억으로 여기저기를 헤맨다.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민지가 성큼 다가오더니 물었다. 모의고사 점수때문에 부르신 거지? 역시.
"응, 다른 반 선생님들도 다 부르셨더라."
"근데 방금 들어간 걔, 이름 이제훈 맞아?"
나는 머뭇대다 대답했다. 그럴 걸?
"걔도 공부 잘해? 걔는 왜 부르셨지?"
글쎄….
나는 방금의 순간을 다시 떠올렸다. 그게 대체 무슨 향이었는지를.
"아, 미안해. 생각해보니까 나 선생님한테 말씀드릴 거 있다. 너 먼저 가."
"뭐? 점심시간 얼마 안 남았는데."
"미안, 미안."
"뭘 미안해. 알았어, 나 먼저 갈게."
순 거짓말이었다. 나는 민지에게 손을 흔들고선 그대로 벽에 기대었다. 괜시리 가디건 단추나 채우고 있었다. 무슨 계획이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냥 걔한테 말을 걸어보고 싶었다. 긴장감으로 몸에 전율이 일었다.
다른 반 애들이 하나둘씩 교무실에서 나왔다. 아는 얼굴도 있어 짧게 인사도 했다. 시간을 확인하니 점심시간이 십 분 남아있었다. 걔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왔다. 왼 손에는 접혀진 종이 하나를 가볍게 쥐고 있었다.
내가 저한테 용건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겠지. 아니, 어쩌면 눈치 챘을지도 모른다. 나는 벽에 기대어 있던 몸을 세웠다. 모든 긴장을 뒤로한 채 온갖 애를 쓰며 걔를 똑바로 봤다. 걔도 나를 보고 있었다. 짙은 눈썹에, 반듯하고 시원히 뻗은 콧날이 보였다.
그래서, 결국 내가 거기에 대고 한 말이 뭐였냐면,
"교실 같이 갈래?"
국어 수학은 알았어도 남자는 잘 몰랐다. 내 물음 후에는 싸늘한 적막만이 있었다. 걔의 표정은 미동도 없었다. 그래도 나는 그 얼굴에서 조금은 읽어냈다. 너 뭐냐, 용건이 뭐냐, 그런 메세지.
그걸 보니 오기가 불었다. 정신줄이 탁하고 끊기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냅다 질렀다.
"너 기다린 거 맞아."
걔가 그제서야 웃었다.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복도에 예비종이 울려퍼졌다. 나는 걔 옆에 섰다. 발이 얼마나 가벼운지 구름 위를 걷는 것만 같았다.
이 찰나가 나를 또다시 며칠 붙잡아두고, 나는 이 기억으로 여기저기를 헤맬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