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Dirty little slut
"Seriously. I swear!"
영국의 하늘은 맑은 날보다 흐린 날이 훨씬 더 많았다.
비가 오기라도 할 듯 우중충한 하늘 밑으로 펼쳐진 고딕 풍의 캠퍼스 건물을 뒤로 한 운동장에는 잔디밭과 농구 코트, 그리고 몇 개의 가로등과 벤치가 적절히 구비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우리 무리가 제일 즐겨 찾는 장소는 커다란 포퓰러 나무의 밑에 넓찍하게 깔린 잔디밭과 흰색으로 엉성하게 페인트 칠이 되어 있는 벤치였는데, 어찌나 그 위를 뻔질나게 앉아왔던지 다른 벤치들과는 다르게 포퓰러 나무 밑의 벤치만 군데군데 흰 페인트 부스러기와 껍데기가 떨어져 나오는 중이었다. 어김없이 그 위에 신발을 신고 조심성이라고는 없는 몸짓으로 올라가 신이 난 듯 떠드는 딜런의 옆 자리엔 그웬이, 그리고 벤치 아래엔 나와 구준회와 김한빈이 빙 둘러앉아 딜런의 영웅담 못지않은 경험담을 들어주는 중이었다.
"8 times? Is that possible?"
"It was viagra. I was super-vigorous yesterday."
정자왕 납셨구만. 구준회가 재밌다는 듯 낄낄거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토끼 눈을 하고 김지원이 딜런의 바지춤을 유심히 살폈다. 딜런이 자랑스럽다는 듯 저질스럽게 허리를 앞 뒤로 흔들자 눈 베렸다는 듯 그웬이 미간을 찡그렸다. 불쾌한 기색이 역력함에도 딜런은 아무렴 어떻냐는 듯 어제 파티에서 만난 두 명의 여자애와 뒹굴며 여덟 번의 사정을 이뤄낸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해주는 중이었다. 비아그라가 어디 거냐며 물어오는 구준회에 친절히도 대답해주며 딜런이 건들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바보 같은 대화를 해대며 킬킬거리는 와중에도 김한빈은 어딘가 불편한 표정으로 연신 뒤쪽을 살피기 바빴다.
"Hey, What's wrong with you?"
"Huh? oh, nothing.. nothing about."
그웬이 묻자 김한빈은 어딘가 덜떨어진 표정으로 주춤거리며 대답했다. 딜런이 두 번째 사정을 어떤 식으로 이루어 냈는지에 대한 얘기를 흥미진진하게 듣던 구준회는 여자애의 가슴이 마치 젖소 같았다는 딜런의 증언에 믿을 수 없다는 듯 킬킬거리다 손가락에 들고 있던 담배까지 잔디밭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딜런이 격앙된 얼굴로 크게 꽥꽥거렸다. 진짜였다니까? 가슴이 얼굴만 했다고! 너네 믿을 수 있어? 존나 쩔었단 말이야! 그러자 바비가 아무래도 의심스럽다는 듯 한쪽 눈을 가늘게 치켜뜨고 반문했다. 혹시 어제 클럽에서 양 옆에 끼고 있던 분홍색 드레스 입었던 애들 말하는 거야?
"Actually they're not your taste at all."
너 어제 너무 약에 쩔어 있어서 잘못 본 것 같은데. 바비가 말하자 딜런이 그럴 리 없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꺼져. 너무 예뻐서 번호랑 이름도 받아 적어놨는걸. 섹스 프렌드까지 약속했다고.
그러자 그웬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오, 딜런. 혹시 그 분홍색 원피스 여자애들 말하는 거면 너 존나 약 때문에 정신 없던거 맞아. 걔네 정말, 정말 별로였어. 왕가슴이 아니라 거진 내 세 배는 되는 몸집이었다고. 딜런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다 말고 허겁지겁 뒷주머니에서 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씨발, 그럴 리가 없어. 존나... 내 인생 최고의 경험이었다고, 친구. 아마 내가 본 예쁜이들이 전부 다 환상이었다면 난 그냥 여기서 혀를 깨물고 자살하고 말거야. 당혹감으로 인해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딜런이 페이스북에 접속하는 모습을 그웬이 빼꼼히 고개를 쳐들고 훔쳐 보다 이내 화면에 서서히 그 정체를 드러내는 여자애의 프로필 사진을 보자마자 깔깔거리며 웃어제꼈다.
"I knew this was gonna happen! Jesus, fuck's sake!"
그웬이 배를 잡고 눈물까지 흘리며 깔깔대는 모습을 슬쩍 웃음을 매달고 가만히 지켜보던 바비가 충격을 받은 듯 인상을 찌푸리는 딜런의 손에서 빠르게 핸드폰을 잡아챈 뒤 화면을 확인했다.
"I think that swings."
이게 결론을 내 주네. 바비가 한 손엔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전혀 멀어 보이는 여자애의 사진이 담긴 휴대폰을, 한 손엔 담배를 들고 코를 장난스럽게 찡긋거리며 말했다. 바비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고쳐들고 깊게 빨아들인 뒤 후, 하고 딜런 쪽으로 연기를 내뿜은 뒤 다시 결론지었다. 딜런 넌 어제 존나 취해있었고, 판타지를 본 거야.
"You know sometimes, people wanna see something so badly, they actually start to imagine they have seen something."
알잖아 가끔은. 사람들은 무언가를 너무 보고싶어 한 나머지 가끔 그것들을 자기가 봤다고 상상하기도 한대. 그러자 구준회가 킬킬 웃음을 터뜨렸다. 딜런은 아무래도 그럴 리 없다는 듯이 현실을 부정하는 중이었다. 아닌데. 존나... 진짜로 왕가슴 쭉빵이었다고. 혹시 잘못 찾아본 건 아닐까? 믿기지 않는다는 듯 딜런이 다시 바비의 손에서 핸드폰을 휙 낚아챈 뒤 충격의 여파로 인해 바들바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낯선 여자애의 프로필 사진을 휙휙 넘겨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오는 사진이라곤 어제 본 쭉쭉빵빵하고 예쁘장한 그녀와는 딴 판인 사진들 뿐이었다. 이내 딜런이 중얼거렸다.
"Fucking hell. I think I was fucking drunk yester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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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낄낄거리다 옆에서 안절부절 못하던 김한빈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며 들고 있던 담배를 건넸다. 눈 앞에서 매캐한 연기를 내며 타들어가는 담배를 멀뚱히 바라보던 김한빈이 절레절레 고개를 젓자 바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안 펴? 응. 안 펴.
"Dunno what I'm supposed to say about your condition."
"Nothing. Never mind."
그러거나 말거나 구준회는 들고 있던 담배를 입꼬리에 대충 걸치고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구준회의 시원하게 뻗은 입매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담배가 가느다랗게 달랑거렸다.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 점심 먹고 나서 심리학 레포트 발표 있잖아. 준비하려면 이제 그만 일어나야 할 걸. 그러자 바비가 칭얼거렸다. 오늘 날씨 죽이는데 그냥 다 같이 천천히 밥 먹고 수업 째면 안 돼? 진짜 존나게 수업 가기 싫은데. 그러자 그웬이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바비, 모든 사람이 너처럼 기분에 따라 수업을 제끼지는 않거든. 그리고 날씨 존나 우중충한거 안보여?
"Alright, angry boots."
까칠하긴. 바비가 아무래도 좋다는 듯 해탈한 표정으로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나 그렇듯 눈 씻고 찾아봐도 바비에게 교과서나 필기구 같은 것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바비에게 오늘도 책 안 들고 온거야? 하고 물었고 바비는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 피식 웃고 어깨를 크게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게 왜 필요한데?
"Oh, here she comes, Jun."
바비가 마지막으로 두 볼이 홀쭉해지도록 깊게 담배를 빨아들이고 나서 절반이 채 남지 않은 꽁초를 잔디밭에 아무렇게나 툭 던진 뒤 교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클로이가 잔뜩 굳은 얼굴을 하고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웬이 잔디밭에 내던져진 채 여전히 연기를 흘려보내고 있는 담배 꽁초를 운동화 뒤축으로 슥슥 비벼 불씨를 꺼뜨리자 바비가 작게 고맙다고 속삭이며 그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짙은 색인 그웬의 머리칼을 커다란 손으로 쓰다듬다 말고 바비가 다시 물었다.
"Oh-oh. What have you done this time? She looks fucking angry, mate."
"Well, I dunno."
구준회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제법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온 클로이의 낯빛이 평소보다 칙칙했다. 다크써클도 제법 짙게 깔려 있는 채였다. 무엇보다 그녀는 꽤나 위협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비가 어느 정도 위험성을 느낀건지 조심스럽게 그웬의 어깨를 붙잡고 구준회의 옆에서 한 두 걸음정도 뒷걸음쳤다.
"What's up, Chloe?"
"Have you got something to tell me?"
나한테 할 말 없어? 구준회가 여유로운 미소로 클로이에게 인사를 건네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클로이가 무섭게 쏘아붙였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구준회가 입을 뻥긋거리자 클로이가 다시 신랄하게 날카로운 말투로 말을 내뱉었다. 그웬과 바비가 서로 눈을 마주보며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어제 같이 환상적인 밤을 보냈던 상대가 저의 기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지나치게 큰 충격을 받은 딜런은 클로이와 구준회를 잠시 흘깃 스쳐보곤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무심하게 툭 중얼거릴 뿐이었다.
"Well, Maybe he screwed other girls again."
다른 여자애들이라도 가지고 놀았나 보지 뭐. 그러자 클로이가 분노로 가득 차 일그러진 표정으로 딜런을 쏘아봤다. 딜런이 깨갱, 하며 나쁜 뜻은 아니었어 친구. 하고 변명했다. 무서운 기세로 구준회의 앞에서 날카로운 말투로 쏘아붙이는 클로이에 김한빈이 엉거주춤하게 몸을 일으켰다. 아까보다 더욱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I was waiting for you tell me, all night long."
"For what?"
"But time's up, you wanker!"
구준회가 정말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살풋 찌푸리며 반문했다. 가방을 챙겨들고 담배를 위태롭게 걸치고 있던 구준회의 얇은 뺨을 조악한 욕지기를 내뱉던 클로이가 철썩 소리가 나도록 내려친 것은 순식간이었다. 바비와 그웬이 깜짝 놀란 듯 입을 쩍 벌리고 둘을 응시했다. 파열음이 크게 허공을 강타했다. 구준회의 입에 아슬하게 매달렸던 담배가 맥없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을 딜런이 본능적으로 붙잡았다가 불씨에 데이기라도 한 건지 씨발, 뜨거워라! 하며 제 손바닥을 움켜쥐고 짧아진 담배를 내던졌다. 그리곤 험악한 분위기에 초를 쳐서 미안하다며 슬쩍 멋쩍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또라이. 그웬이 중얼거렸다.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클로이의 폭력에 되려 내가 뺨을 맞기라도 한 듯 정신이 번쩍 들어 경악스럽게 둘을 쳐다보자 이번엔 클로이가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를 내질렀다.
"You dirty fucker! I never want to see your twatty cock ever again."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구준회가 시선을 끌어올려 클로이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클로이가 씩씩거리며 구준회의 다른 쪽 뺨을 다시 내리치려 하자 바비가 급하게 달려와 클로이의 가느다란 팔목을 움켜쥐고 그녀를 제지했다.
“Hey Chlo, calm down! No matter what he did, beating someone violently is really bad."
구준회가 눈썹을 씰룩이며 입을 뻐끔거렸다.
"Oh. It's too much, Chloe."
구준회가 제 머리를 슥 쓸어넘기며 서슴없이 내뱉은 말이었다. 얻어맞은 뺨이 아프지도 않은 건지 성질을 긁어내리는 말을 겁 없이 내뱉는 구준회에 클로이가 몇 번이나 날이 선 욕지기를 내뱉으며 팔을 허우적댔으나 단단한 바비의 손아귀에 붙잡힌 채였기에 헛수고일 뿐이었다. 구준회가 서서히 부어오르기 시작한 제 뺨을 한 쪽 손으로 슬쩍 부비며 멍하니 앉아 있던 내 팔을 잡고 일으켰다.
"Anyway, we should go to eat lunch, J."
김한빈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주춤거리는 걸 마지막으로 구준회가 성큼성큼 내 팔을 붙잡고 식당 쪽을 향해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뒤에서 클로이의 우린 이제 끝이야! 하는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내가 당황한 목소리로 클로이는? 하고 묻자 구준회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툭 대답했다. 다시 돌아올 거야. 제이 너는 그것보다 오늘 점심 메뉴가 뭔지 고민하는 게 훨씬 효율적일걸.
서서히 식당 쪽으로 자취를 감추어 가는 구준회의 뒤에서 발악을 하듯 팔을 휘저으며 소리를 질러대는 클로이를 애써 힘겹게 붙잡고 진정시키던 바비가 잔뜩 당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I wanna go to the Psychology class now, really."
딜런이 그제서야 제 휴대폰을 뒷주머니에 다시 쑤셔 넣다 말고 어깨를 들먹이며 되받아쳤다.
"Oh. That's graet impressive."
*
급식 메뉴는 형편없었다. 삶은 감자 사이에 고구마와 마카로니, 베이컨이 올려진 샐러드와, 토스트 한 쪽, 그리고 브로콜리 스프와 우유가 전부였다. 점심을 먹을 때도 구준회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굴었다. 평소처럼 샐러드를 곁들여 배식을 받은 구준회는 급식으로 나온 팩 우유에 빨대를 꽂아 넣은 뒤 그걸 쭉쭉 들이키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얌전히 우유를 삼키는 구준회의 매끈한 피붓결에 클로이의 손톱이라도 스친건지 왼쪽 뺨에 약간의 생채기가 나 있었다. 샐러드 쪼가리에 섞여 나온 방울토마토를 입에 넣고 굴리다가 머뭇머뭇 구준회의 얼굴로 손을 뻗자 구준회가 내리깔았던 눈을 치켜뜨고 뭐냐는 듯 고개를 살짝 주억거렸다.
"여기…"
매사에 완벽하고 철저한 구준회의 어딘가에 예상치도 못한 상처가 난 모습은 처음 보는 광경이라 당황한 건지 입 밖으로 한국말이 툭 비어져 나왔다.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운 구준회의 왼쪽 뺨을 한 손으로 감싸고 살짝 긁힌 듯 핏방울이 맺혀 있는 상처를 엄지로 살며시 쓰다듬자 구준회가 따끔한 듯 슬핏 한 쪽 눈을 찡그렸다.
"Does it hurt?"
"A little bit."
구준회가 찡그렸던 얼굴을 피고 별안간 기다란 눈꼬리를 접으며 웃어보였다.
"You always have lovely smell, J."
"What are you saying all of a sudden?"
뜬금없이 무슨 소린가 해서 허둥지둥 옅은 생채기를 매만지던 손을 휙 빼내려고 하자 구준회가 얌전히 포크를 쥐고 있던 손을 홱 뻗어 내 팔목을 콱콱하게 붙잡았다. 당황스러워 하며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는 나를 구준회가 가느다랗게 접은 눈으로 담으며 난데없이 내 손목을 날렵하게 맺힌 코 끝과 입술 새에 가져다 대며 나즉하게 다시 속삭였다. 진짠데. 구준회의 입꼬리가 한 쪽에만 비스듬하게 걸쳐져 있었다. 그 애가 가끔씩 지어보이는, 사람을 어찔하게 만들만큼 매혹적이고 치명적인 미소였다. 구준회의 동양적인 이목구비와는 다르게 묘하게 사람을 홀리는 카키색의 눈동자 덕분에 그 웃음이 더 이국적이고 신비롭게 보이는 걸지도 몰랐다.
"Seriously. I always have been thinking about that.."
버적버적 얼어붙어 바보처럼 어버버, 하는 와중에 맛대가리 없는 감자 샐러드를 산처럼 쌓아 신나게 걸어온 딜런이 내 옆자리에 털썩 앉으며 던지듯 제 급식판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나는 감자의 요정, 언제나 환영받지, 하고 알 수 없는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딜런이 한 스푼 크게 샐러드를 입 안으로 쑤셔넣었다. 딜런의 등장으로 순간 녹아버린 주변의 공기에 나는 주춤주춤 구준회의 차갑고 단단한 손아귀에 붙잡힌 팔목을 비틀어 빼냈다. 구준회의 그 암녹색의 눈동자를 가만히 마주하고 있다 보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 버릴 것만 같은 무한한 탈력감이 들었다. 장담하건대 그 눈에는 정말로 뭐라 말할 수 없는 무엇인가 있었다. 마법처럼 누군가를 홀리기라도 할 듯 오묘한 색의 신비로운 눈이었다. 그 눈 앞서는 발가벗겨지는 듯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급식으로 나온 팩 우유를 한 손에 집어 들어 주머니에 쑤셔 넣은 뒤 허겁지겁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딜런이 의아한 듯 입에 무언가를 잔뜩 쑤셔 넣은 채로 물었다. 벌써 가는 거야? 풀 쪼가리만 몇 개 집어먹은 것 같던데. 너도 거식증이니? 아님 생리해?
"Shut it off."
구준회가 나를 보고 바람 빠지듯 푸스스 웃는 것이 등 뒤로 느껴졌다. 날카로운 대답에 딜런이 아무래도 좋다는 듯 능글맞게 눈썹을 으쓱 움직였다. 나는 도망치듯 급식판에 남아 있던 음식물들을 쓰레기통에 밀어 넣고 입고 있던 후드집업의 지퍼를 쭉 끌어올린 채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구준회가 저런 눈으로, 저런 식으로 웃는 건 반칙이었다. 나는 항상 그 눈과 그 웃음을 보고 있으면 어딘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고, 구준회는 아마 그걸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 푸른 빛이 도는 암녹색과 회청색이 섞여든 그 산란한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자면 포식자 앞의 초식동물이 된 것만 같은 탈진감이 나를 지배하기 마련이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무언가 초조하고 속 깊은 곳이 꿈틀대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정말로, 그 눈을 오래도록 지켜보면 형용할 수 없는 류의 비정상적인 기분이 들어, 몸 속 어딘가가 갉아 먹히고 있다거나 아니면 내 속 깊은 곳의 은밀한 상념들이라던가, 혹은 정신 어딘가가 그 애에게로 흡수라도 되는 듯한 기분이 들기 마련이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 다채로운 색의 눈을 가까이에서 오래간 마주했더니 정말 어딘가 멍한 것이 제정신이 아닌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후드를 깊게 뒤집어 쓴 채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심리학 수업이 시작되기까지는 아직 조금 시간이 남아있었다. 주체할 수 없으리만치 이상한 긴장감에 사로잡혀 쿵쿵 뛰고 있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크게 쉼호흡을 하고 화장실 쪽을 지나치려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화장실 타일에 부딪혀 웅웅 불분명하게 뭉개지는 것이 귓가를 뭉근히 찔러왔다.
"Chloe, please don't tell anyone. Everyone will think..."
"Think what, you tosser?"
맙소사. 흥분한 목소리로 날카롭게 질책하는 목소리. 클로이와 김한빈이었다. 나는 쪼르르 화장실 쪽으로 몸을 붙이고 살며시 벽에 귀를 붙이고 소리를 더 잘 듣기 위해 눈가를 찡그리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That you're a dirty little slut who fucks around with other people's boyfriend?"
"I'm sorry. I don't know what happened. He just... It was nothing."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던 말이 만국에서나 통용되는 말일 줄이야. 클로이는 역시 어제 클럽에서 완전히 잠이 들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다. 김한빈은 죄책감과 당혹감이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마구 어그러진 목소리로 애원했으나 단단히 화가 난 듯한 클로이에게 김한빈의 부탁조의 사정은 화만 더욱 돋굴 뿐이었다. 오, 모두가 너를 남의 남자 후리고 다니는 걸레라고 생각할까봐? 신랄하게 쏘아붙이는 클로이에 김한빈이 머뭇거리다 다시 입을 뗐다.
"Can't we just pretend it didn't happen? Yeah?"
어이가 없다는 듯 클로이가 피식, 웃었다. 그 애의 웃음 끄트머리에 질척하게 달라붙은 울음이 끝내 왈칵 쏟아져 나왔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내 눈 앞에서 꺼져. 울음기에 잡아먹혀 잔뜩 뭉그러지는 발음으로 클로이가 말했다. 김한빈은 오래도록 아무 말도 없이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킬 뿐이었다. 이 순간 어떤 위로도 그녀에게 도움이 되질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듯 해 보였다. 클로이의 울음소리가 텅 빈 화장실을 가득 메우다 못해 건물의 복도로까지 흘러넘치고 있었다.
구준회의 짖궂은 눈매와 웃음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내가 죽기 전에 구준회를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오기는 할까. 의중을 알 수 없는 물음이 눈 앞을 둥둥 떠다녔다.
*
클로이는 심리학 수업이 20분 정도 진행이 된 뒤에서야 신경질적으로 드르륵 뒷문을 연 뒤 교실로 들어왔다. 심리학 담당 선생님인 레이첼이 그녀에게 왜 늦었냐고 물어보려 운을 떼려다 말고 그녀의 눈물에 젖어 번들거리는 얼굴을 보자마자 입을 합 다물었다. 이내 클로이에게 앉으라는 말만 남긴 채 레이첼이 큼큼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Right, everyone. Um... Who's presenting? Robert?"
Robert라는 제 본명이 불리자마자 바비가 질색을 하고 종잇장 구기듯 인상을 찌푸렸다.
"Ray, I told you don't call me Robert."
"Alright, Shut off Robert."
선생님이 아무렴 어떻냐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로버트나 바비가 그게 그거지. 발표는 네 차례란다. 그러자 바비가 입고 있던 제 조던 후드티에 달린 매듭을 만지작거리며 샐쭉 웃어보였다. 알잖아요. 도저히 하기 싫어서 할 수가 없었어요. 어이가 없다는 듯 레이첼이 비식 웃었다. 그리곤 체념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뒤 다시 왼 손에 쥔 출석부로 시선을 내리깔고 검지 손가락으로 명단을 쭉 훑어내려가다 다시 입을 뗐다.
"OK, well, next… Justin."
구준회가 단정하게 놓여진 제 앞의 A4용지 묶음을 한 손에 쥐어들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선생님의 얼굴이 바비를 대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온화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렴풋이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덧붙였다.
"Get on with it."
구준회는 살짝 부어오른 뺨 때문에 발음을 하는 것이 거슬렸는지 미세하게 얼굴을 찡그렸다가 다시 아무렇지 않게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문을 텄다. 유창한 영국식 발음이 구준회의 입에서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정확하고, 명료하고, 반듯하게 툭툭 끊기는 발음이었다. 바비는 교실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지루해 죽겠다는 듯 큰 동작으로 기지개를 펴고 책상에 슬슬 엎드리기 시작하다가 레이첼의 부릅뜬 눈동자를 마주하고는 이내 알겠다는 듯 다시 허리를 펴 자세를 잡았다. 그러나 여전히 바비는 구준회의 으레 그 훌륭한 레포트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다리를 달달 떨기 시작했다. 다부진 손 안에 쥔 아이팟으로 노래라도 듣고 싶은 건지 바비가 손가락 끝으로 제 아이팟의 가장자리를 매만졌다.
"Power is the single most important force in the universe. Money and looks mean nothing except for the power they give us. The second most important is sex. So sex plus power equals fun."
(권력은 이 우주상에서 유일하게 가장 완벽한 존재다. 돈과 명예는 권력을 제공하는 것 말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섹스이다. 그러므로 권력 더하기 섹스는 재미다.)
거기까지 구준회가 입을 떼었을 무렵, 훌쩍이며 고개를 숙이고 있던 클로이가 입술을 꾹 짓씹고 다시 벌떡 일어나 누군가가 말릴 새도 없이 거세고 정확하게 구준회의 오른쪽 뺨을 철썩 후려갈겼다. 바비가 놀란 듯 의자가 와당탕 소리를 내며 나자빠질 만큼 빠르게 일어나 클로이를 붙잡으려 했지만 클로이는 날카롭게 꺼지라 말한 뒤, 아까 제가 들어왔던 교실의 뒷문을 거칠게 열고 발을 구르며 나가버렸다. 바비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레이첼을 바라봤다. 그러나 레이첼도 갑작스럽게 일어난 사태에 놀란 건지 똑같이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구준회와 클로이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를 궁금해 하는 같은 반 애들이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구준회는 정통으로 가격당한 오른쪽 뺨을 붙잡고 허탈한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I must say, she's a fiery one."
진짜 무서운 애다. 딜런이 경외감이 느껴진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나즉하게 중얼거렸다. 그웬은 아무래도 클로이가 걱정이 된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채 구준회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 도대체 무슨 거지같은 짓을 한거야, 준?
"It was all my fault."
느닷없이 묵묵히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김한빈이 다른 모든 소음들을 씹어 먹는 정확한 음절과 발음으로 나즈막히 말했다. 모두의 시선이 일순 김한빈의 작은 등으로 쏠렸다.
"I got off Jun yesterday in the party."
제가 준과 뒹굴었어요. 말소리가 완벽하고 똑똑하게 교실 안에 있던 이들의 귓가로 박혀 들어갔다. 경악에 차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순식간에 교실을 가득 메웠다. 레이첼은 커다란 눈을 더욱 커다랗게 치켜뜨고 당혹스러운 듯 표정을 굳히고 있을 뿐이었다. 오, 하는 탄식이 멍청하게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I just… It was just nothing but… It's true. I kissed him. In my defense, I was a bit drunk…."
다시 교실 안의 소음이 불거졌다. 김한빈이 여전히 굳은 얼굴로 덧붙였다.
"I'm really really sorry for being a slut, OK?"
걸레라서 죄송합니다. 김한빈은 그 말만을 남기고 제 앞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던 가방을 챙겨든 뒤 거침없이 교실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김한빈의 고백을 묵묵히 들으며 놀란 토끼눈을 하고 멀뚱히 서 있던 바비가 다시 얼굴을 굳히고 있다 말고 별안간 잔뜩 분노한 표정을 지은 채 구준회의 앞으로 걸어온 뒤 오른쪽 뺨을 감싸고 있던 그 애의 멱살을 거칠게 붙잡고 흥분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Why do you pull all this fucking shit?"
넌 왜 항상 그런 식인데? 왜 그렇게 끔찍하게 굴어? 클로이는 네 여자 친구이기도 하지만 내 친구고, 김한빈은 특히나 네가 가지고 놀아도 되는 애가 아니야. 격앙된 목소리를 쏟아붓듯 내뱉은 바비가 분을 못 참겠다는 듯 이내 다시 구준회의 왼쪽 뺨을 주먹으로 갈겼다. 폭력은 나쁜 거라며 클로이를 타이른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아무렴. 바비가 김한빈을 특별하게 아끼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었다. 바비는 누군가의 일에 깊게 관여하거나 스며드는 것을 그다지 즐기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구준회가 어떤 거지같고 개새끼 같은 짓을 하든지 하등 상관할 바 아니라는 듯이 굴었지만 김한빈에게 있어서만큼은 인색하게 굴었다. 그만큼 김한빈의 의미가 바비에게는 크단 뜻이었다.
"I hope you're ashamed of yourself."
부끄러운 줄 알아. 바비가 낮게 으르렁거린 뒤 제 뒤로 쓰러진 의자를 발로 쾅 걷어차고 다시 교실 문을 제낀 뒤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바비의 발에 채인 의자가 교실 뒤쪽의 수납장에 부딪혀 와장창 쏟아지는 소리가 교실 안으로 잔뜩 들어찼다. 딜런이 멋지다는 듯 웃음기가 섞인 탄성을 내질렀다. 와우. 순식간에 세 명의 학생이 교실을 뛰쳐나간 놀라운 광경에 연신 입을 닫지 못하고 멍청한 탄식을 흘리던 레이첼이 입에서 침이라도 떨어질까 무서운 듯 입을 합 닫고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Alright. Er... anyone else wanna get something off their chest?"
그래, 음… 누구 또 고백할 거 있는 사람? 그녀의 목소리가 엉망이 된 교실 안을 고요하게 뒤덮었다. 정적 속에서 잠시간 바비에게 얻어맞은 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던 구준회가 순식간에 옅은, 비릿한 느낌이 감도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느릿하게 대답했다.
"Oh, It's not finished yet, teacher."
그 꼴을 다붓히 지켜보던 그웬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속삭였다. 준은 정말 못말리는 개새끼야. 옆에서 한 편의 영화라도 보는 듯 흥미로운 표정으로 교실 안의 참담한 광경을 지켜보던 딜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동의를 표했다. 가끔은 나보다도 더 개새끼 같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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헥헥 드뎌 다 올렸읍니닷 기빨리네요 생각보다ㅜㅜㅜ 며칠간 밤을 새서 그런가 작은 글자들을 막 보고있으려니 정신혼미^^.... 글썽
다음화는 일주일 안으로 오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상해봅니다...@'ㅅ'@
답글 달아주시고 글 같이 읽어쥬시는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너무 큰 힘이 되어요 ♡>▽<♡ 다음편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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