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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니/이진기] 1931 : 경성, 그 길 | 인스티즈

 

 

 

 

 

 

 

2

 

 

언젠가를 기억했다. 곤충 울던 소리가 만연하던 문지방 너머로 어렴풋이 들려오던 부모님의 말소리. 손 끝을 휘어감던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 감긴 눈꺼풀 사이를 어른거리던 불빛. 모든 것이 찬연하게만 느껴지던 당시엔 차마 느낄 수 없던 것들이 새삼스럽게도 그제서야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반쯤 뜨이던 눈을 도로 뉘이고, 몸을 뒤척이며 오지 않는 잠을 쫓았다. 손 끝에 닿을 듯 했던 허망이 사라진 건 아마 그 당시부터였을테다.

나라가 혼란스러웠다. 언젠가부터 시작되었을지 모를 것들이 스멀스멀 땅 밑 깊숙한 데서부터 기어올라와 저들을 옭아매는 듯 했다. 그들은 갑작스레 나타난 것 같기도 했고, 어찌보면 아주 오래 전부터 저들을 노려왔던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곳곳에 비명이 흘러넘쳤다. 혹자는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했고 또 누군가는 집안의 살림살이 따위를 모두 빼앗긴 뒤로 이 집 저 집을 전전하며 살림살이 따위를 돌보아주기도 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몰랐다. 그 때문인지 저들은 도로 그 때로 되돌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모두 입을 꾹 다문 채로 몸을 사렸고, 칼을 찬 교사들 아래 학생들은 연필을 들었다. 겉으로 보여지는 사회가 그랬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 저는 그 보여지는 모습만을 믿고 있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 쉿, 깨겠어요.

 

줄곧 일본어로만 들려오던 말소리가 끊기고 주변의 소음이 사그라들었다. 밤바람을 따라 흩날리던 흙먼지 따위도, 산 너머 깊숙한 데에 둥지를 튼 채 입술을 벌리던 새도 모두 움직임을 멈춘 듯 고요하기만 한 밤이었다. 어머니의 말을 시작으로 잠시 멈칫했던 듯 보이던 그들은 저마다의 부산스러운 움직임을 보이며 짐을 싸기 시작했다. 문지방을 등진 채로 벽을 보고 누워있던 저는 밤길에 밝혀진 촛불을 따라 문 틈새로 흘러드는 그들의 모습을 꼼짝없이 지켜보아야만 했다.

결국 뜬 눈으로 밤을 지세운 저는 반쯤 초라해진 눈으로 물 웅덩이에 비춰진 제 모습을 멍하니 내려다볼 수 밖에 없었다. 곱게 땋아내렸던 머리가 반쯤 흘러내려 어깨 밑을 적시고, 얼어붙은 발바닥을 따듯하게 데우는 방바닥에 눈가가 아려왔다. 그제야 알게 된 것이다. 왜 저는 그 동안 단 한번도 이상하다 생각한 적이 없었을까.

분명 저들은 함께 살던 이들이었는데. 왜 우리는 이토록이나 달라졌나.

 

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부와 명예를 얻는 대신 나라를 팔아 살아오던 집이 먼 이야기가 아님을. 가끔씩 먼 둘레를 돌아 저잣거리 따위를 스칠 때마다 저를 향하던 사람들의 눈길을. 부끄러워짐을 숨길 수 없었다. 추위에 발갛게 언 손 끝을 들어올려 흐트러진 머리를 다듬으며 끊임없이 숨을 몰아쉬었다. 저는 무엇을 해야 할까. 언젠가 거리를 돌며 스치듯 지나가던 사람들의 말들이 제 머릿 속을 비집고 들어와 저를 갉아먹는 것만 같았다.

살이 에이고, 심장이 베이는 느낌에 이를 악문 채로 울음을 삼켰다. 언젠가 어미에 대한 견고한 믿음이 한 순간에 무너져내리던 날이었다.

 

 

 

 

 

 

 

 

 

 

 

 

3

 

[샤이니/이진기] 1931 : 경성, 그 길 | 인스티즈

 

 

 

자욱히 연기가 차오른 길을 따라 걸으며 홀깃홀깃 제 옆에 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기차에 막 몸을 싣기 전의 느슨한 옷차림과는 달리 목 끝까지 채워올린 단추와 깊게 눌러쓴 군모가 인상적이었다. 남자의 구둣발이 바닥에 부딪힐 때마다 따박, 따박 소리가 들려왔다. 중절모를 머리 위에 얹고, 커다란 물통 따위를 들어올린 채 저마다 갈 길을 찾아가는 사람 중 어느 하나 믿고 따라갈 만한 이가 없어 그의 뒤를 따라가고 있던 차였다.

반쯤 군중에 떠밀리다시피 걸어왔는데도 어느 새 제법 거리를 번 것인지, 웅성이는 사람들의 말소리 사이로 어깨 너머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여러 소음이 섞여 얼룩진 말은 무어라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곧이어 소리를 내며 힘차게 바퀴를 굴리는 기차 탓에 곧 기차가 떠날 것임을 알리는 고함임을 알 수 있었다.

제 등짝만한 가방을 동여맨 채 휘청거리며 기차에서 내린 영감 역시도 그런 저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군중 사이를 헤집고 사라져버리는 남자의 모습에 얼이 빠져있었다. 콩나물 마냥 빈틈없이 꽉꽉 메워진 인파 탓에 촘촘히 늘어선 사람들 사이로 차마 들어설 생각은 못하고 영감을 뒤로 한채 그의 끄트머리를 따라 발을 디딘다.

 

" …. "

 

줄곧 남자의 허리께를 향하던 고개를 들어 슬쩍 제 위를 올려다보았다. 바람을 따라 하얀 치마가 팔락이는 탓에 제가 따라오고 있음을 알고 있을 것이 분명한데도 남자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경성까지 와서 곧바로 갈라지자고 하길래, 이렇게 가는 길이 같기만 해도 치를 떨어보이리라, 어림잡고 있었는데. 무심코 남자의 뒷모습을 좇던 탓에 제 앞을 신경쓰지 못했나보다. 군중들 사이로 가려져있던 바닥의 장애물들이 차차 제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발 끝에 채일 듯 놉게 솟아올라있던 검다란 것들을 피해 마저 남은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비단 제 움직임 뿐만 아니라 제 주변을 둘러싼 채 길을 걷던 사람들 역시도 이런 상황이 달갑지 않다는 듯 인상을 굳힌 채 바닥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울퉁불퉁하던 길이 모습을 감추고 어느 정도 단정하게 정돈된 길이 드리우자마자 급속도로 갈라지기 시작한 사람들 사이로 그의 모습이 드러났다. 곳곳에 자리잡고 있는 헌병들의 인사에 가볍게 고개를 까닥이는 모습을 들여다보니 새삼 그의 위치가 실감나는 듯 했다. 저는 막 계단을 향해 방향을 트는 뒷모습을 확인한 뒤 고개를 돌려 제 뒤에 있을 영감을 찾아 바쁘게 사람들 사이를 훑기 시작했다.

기차에서 내린지 제법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움직이지 않았는지 좀 전과 같이 우뚝 높게 솟아오른 지형 아래로 익숙한 뒷통수가 시야에 박혔다. 일행을 찾는 것인지 두리번 거리며 주변을 살피는 얼굴에 미련과 걱정이 섞여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제 정말로 남자를 놓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돌리던 저는 꼼짝없이 마주한 두 눈동자에 놀라 입술을 벌릴 수 밖에 없었다.

 

" 어이! "

 

나는 멍하니 눈을 꿈벅이다 영감의 부름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들어 응대해주어야 마땅한 것이려니 하고 여겼지만, 이 곳은 제 고향도 아닌 연 하나 없는 타지인데다 주변에 사람이 많은 탓에 차마 손을 드는 것조차도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저를 스치고 지나는 사람들을 피해 조심스레 계단 끄트머리로 자리를 옮긴 나는 계단 손잡이를 쥔 채로 조금 상체를 굽혀 맞은 편에 선 영감을 향해 손짓했다.

 

 

 

 

 

 

 

 

 인파 속을 빠져나온지 얼마나 되었을까. 쭈욱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걸으며 한참이나 주변을 둘러보았던 것 같다. 어느 정도 햇볕이 가라앉고 붉다란 천막이 드리워진 하늘은 아득히 먼 곳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제가 살던 지역에서는 좀처럼 접할 수 없었던 높다란 건물들은 물론, 산골 깊숙한 데에선 감히 구경도 할 수 없던 전차들이 줄지어 늘어선 거리가 새삼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은은하게 거리를 지키는 매캐한 연기에 몇 번이나 헛기침을 뱉었다. 가슴 가득히 들어찬 듯 숨통이 막혀왔다. 해가 지기 시작하더니 어느샌가 몸이 으슬으슬 떨려오는 것이 느껴져 오는 길에 간신히 쟁여두었던 겉옷을 꺼내 어깨 위로 둘러맨다.

비뚤게 늘어선 상점들을 따라 걷다보니 산을 깎아 만들어낸 듯 비스듬한 오르막길이 나타났다. 사람들이 다니기에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어느 정도 계단과 비슷하도록 형체를 갖추어낸 층계들이 줄지어있었으나 서투른 솜씨에 입가를 비집고 웃음이 흘러나왔다. 옷고름을 도로 단단히 동여매며 혹여나 느슨하게 묶이지는 않았는지 확인 차 옷가짐을 갈무리한 저는 새장 따위가 매달린 거리 사이로 몸을 틀어내는 일행을 향해 마저 걸음을 옮겼다.

이른 시간에 기차를 나서 줄곧 거리를 전전하다보니 곳곳을 오가며 금새 물집이 생겨난 발가락이 생채기에 치여 아파오는 듯 했다. 새장 따위에 길게 늘어진 층계참들을 건너며 조심스레 눈살을 찌푸렸다.

 

 

 

 

 

-

 

 

 

 

[샤이니/이진기] 1931 : 경성, 그 길 | 인스티즈

 

 

물가의 흐름이 잔잔했다. 살갗을 스치고 지나는 찬 바람에 옷을 한껏 당겨 웅크려낸 나는 의자에 반쯤 걸쳐진 채로 앉아 맞은 편의 낡은 건물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적하기에 그지 없는 새벽. 별들이 쪽잠을 자고 갔던 간밤 졸음이 쏟아질 만하면 저를 붙잡고 놔주질 않던 추위에 슬슬 콧김이 세어지고 있던 참이었다. 허리를 숙인 채 청순한 목덜미를 드러낸 낚시대들이 바람결을 따라 얕게 흔들렸다. 반쯤 정신이 흐릿해진 채로 멍하니 물가를 바라보던 나는 새삼 남몰래 뒷덜미를 움켜진 힘이 강해짐을 느끼며 두 눈을 치켜떠야했다. 그들을 삼킨 뒤로 절대 입을 열지 않을 듯 굳게 다물려 있던 문이 열린 것이다.

해가 미처 깨어나지 못한 듯 자욱히 깔린 옅은 새벽빛 아래로 드러난 남자는 망설임없이 나를 향해 손을 들어 두어번 흔들고는 뒷편의 영감을 바라다보았다. 어째 일전보다 짐이 더 늘어난 것인지 한 가득 짐을 들고서 뒤뚱뒤뚱 걸어나오는 모습이 나이에 맞지 않게 제법 앙증맞았다. 좁다란 문을 부술 듯 막대한 크기를 자랑하던 짐들이 빠져나가고 물가 뒷편을 향해 쏘옥 제 몸을 빼낸 영감은 제 앞에 선 남자와 제법 나이를 먹은 듯 보이는 외출복 차림의 남자를 흐뭇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여차하면 가차없이 물가로 떨어트려버리겠다는 듯 뒷덜미며 옷깃을 쥔 손의 악력이 한층 더 거세졌다고 느껴졌을 즈음, 그들이 서 있는 곳보다 상대적으로 조금 위쪽에 위치한 쪽문이 열리더니 그 사이로 낮은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만 풀어주게. "

 

그 말이 무엇인지 깨닫자마자 목덜미를 쥐었던 손이 풀리며 반쯤 막혀져 있던 호흡이 터져나오는 것 같았다. 거의 반나절이 넘다시피 하던 시간 동안 바깥에 붙잡혀 있던 나로서는 지금의 상황이 조금 얼떨떨하고, 또 당황스러웠다. 미처 내보내지 못했던 숨을 뱉어내느라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기침을 하고 있는 동안, 어느 새 자욱히 피어오른 안개 사이를 가르며 피어난 호롱불이 바람을 따라 흔들렸다. 건너편에서부터 배를 타고 물가를 건너오는 듯, 어두운 시야에 예민해진 귓가로 노를 저으며 낡은 배의 겉면이 물가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 정말 지금까지 여기 있을 줄은 몰랐는데. "

 

마침내 배가 와닿고, 담뿍 물기가 차오른 안개 사이를 헤치고 나온 남자는 나를 빤히 응시하며 인상을 반쯤 찌푸렸다. 그 눈길이 차마 갈 곳이 없어 나아가지도 돌아가지도 못한 저를 핍박하는 듯해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제법 바깥에 있었다고 어느 새 제법 눅눅해진 옷깃을 당겨내 그 사이로 얼굴을 파묻은 나는 그저 고개만 조아릴 뿐이었다. 남자가 나오기만을 막연히 기다리고 있었는데, 막상 이렇게 바깥으로 나온 남자와 얼굴을 맞대니 그동안 생각해두었던 사소한 말 하나 조차도 쉽사리 입 밖으로 뱉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한 발짝 뒤로 물러난 채 세 사람을 관망하던 남자가 물가에 깊이 박아두었던 낚시대를 도로 뽑아내 정갈하게 정리하는 동안, 말없이 서로를 응시하던 우리는 마침내 다가와 목덜미를 주무르는 살가운 영감의 손길에 한껏 조여졌던 분위기가 풀어짐을 느끼며 도로 길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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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저 저번에 댓글 달았던 독자입니다! 오랜만에 글잡에 왔는데 작가님이 딱 계셔서 놀랐어요ㅎㅎ 오늘도 분위기가 짱이네요. 문체도 너무 좋아요!!
여주는 만나서 어떻게 될까요ㅠㅠ다음 편이 궁금해용

9년 전
글쓴이
보잘 것 없는 글이지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잡은 자주 왔다갔다 하는데 글을 올리는 속도는 자꾸만 일이 생겨서 더뎌지는 것 같네요ㅠ 문체라고 할 것도 없는데..ㅠ 감사합니다ㅠ 감동이에요 ^▽^
9년 전
독자2
문체도 분위기도 너무너무좋아요....
9년 전
독자3
저혹시 그런데 브금이 뭔지 알수 있을까요..?
9년 전
글쓴이
브금은 Moon Lovers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9년 전
독자4
문체가 너무 예뻐요!! 잘 읽고 갑니다ㅠㅠ...!
9년 전
글쓴이
문체라고 부르기에도 부끄러울 정도로 두서없는 글인데..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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