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이 모든건 오르막길 축가 부르는 김도영으로부터 시작됐으면 좋겠어.
결혼식 준비 중에 책 아래로 삐죽 튀어나온 청첩장 보면서 '아..맞다' 생각하는거지. 태일 오빠, 제노, 이동혁, 정재현,....그리고 김도영. 까먹을게 따로 있어. 어쩌다보니 가장 먼저 결혼하게 된 저가 청첩장 식기 전에 얼굴 보고 나눠줬어야 했는게 맞는데. 이것저것 마음대로 되지 않는 준비에 차일피일 미뤄두고 있었다. '태일 오빠. 오랜만이지. 우리 다같이 한번 만날 수 있을까?' 카톡 하나 남겨두고는 다시 생각하게 된다. '너 진짜 이 결혼에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급한 발걸음으로 나가던 나를 붙잡던 정재현. 두 달도 더 된 목소리에게 자꾸 붙잡히는 요즘이다. 그러게 재현아. 사랑의 마침표가 결혼일거라는 사람에게 나는 아직이라고 말을 어떻게 꺼낼 수 있겠어. 부모도 없고, 아이도 못 가지는 내가. 재현아, 나는 그게 최선이었어.
행복한 결혼의 그늘, 메리지 블루. '누나!' 책을 만지던 손을 떼내고선 뒤를 돌아봤다. 동혁이었다. 여기서 다 만나네. 누나, 태일 형이 곧 보자던데. 태일 오빠가 대신 연락을 돌린 것 같았다. 그러길 바라서 연락을 한 것도 맞았지만. 그렇다면 김도영도 분명히. 누나 살이 왜 이렇게 빠졌어. 다이어트라도 하는거야? 장난스러운 투였지만 이동혁은 눈치가 빠르다. 저 질문 속의 저의를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으면서 답했다. 드레스는 입어야지 않겠어. 동혁의 얼굴이 묘하게 굳어졌다. 저 눈을 안다. 정재현도 그랬으니까. 누나, 이 결혼은 진짜야? 동혁아, 결혼에 가짜가 어디있고 진짜가 어디있어. 결핍한 내가 이젠 좀 완벽하게 살고 싶다는데. 누나, 저녁이라도 같이 먹을까? 도영이 형도 근처라는데. 미안 동혁아, 나 선약이 좀. 다음에 다같이 보자.
그리고 나선 내 앞에 앉아있는 그 사람과 테이블에 얹어진 저녁 식사. 그 사람은 다정하고 나긋하게 웃으며 물어온다. 결혼 준비는 잘 되어가는지. 힘든 부분은 없는지. 결혼 준비하면서 미리 집을 합쳤어야 했는데, 혼자서 정말 괜찮은지. '미안해, 나도 최대한 작게 하고 싶었는데. 어머니가 좀 유난이시지.' 나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머님이 잘 보살펴주세요. 괜찮아요. 저녁 식사를 마치고는 슬슬 트리가 준비되고 있는 길을 걸으며 나란히 손을 겹쳐 잡았다. 스쳐지나가는 젊은 커플, 학생들, 중년의 부부. 그들에게도 우리가 연인처럼 보이겠지. 춥지만 잠시 걷자던 그 짧은 길에서 마주치고야 말았다. 누구를. 이동혁을. 그리고,...김도영을. '어, 동혁씨, 도영씨. 여기서 다 뵙네요. 오랜만입니다.' 나보다도 먼저 아는 체를 하며 손을 내미는 그 사람. 여전히 반지를 낀 왼손으로는 나의 오른손을 겹쳐 잡고 있다. 김도영은 나를 한 번 마주 보고는 악수를 받는다. 오랜만이네요. 한창 바쁘실텐데, 잘 지내시죠. 어느샌가 어른이 된 김도영과 몸만 어른인 내가 마주보고 있을 때면, 정말이지 어디론가 숨고 싶어진다. 그 사람은 오랜만에 만나 뭐라도 대접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이동혁이 잽싸게 빠져나간다. 누나랑 데이트 중이신데 저희가 눈치없이 끼일 수는 없죠. 조만간 다같이 모일 때 누나한테 한 턱 쏘라고 할게요. 다시 우리는 제자리로 돌아간다.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을 켠다. '숨 쉬어.' 김도영이다. 짧은 그 찰나에 내가 또 질리도록 숨을 참고 있었구나. 이럴때면 정말이지. 아가미가 제 기능을 못하는 금붕어라도 된 기분.
누나, 여기예요! 제노가 손을 흔든다. 대학 막학기를 다니고 있을 이제노와 이동혁. 직장에서 부리나케 달려올 태일 오빠, 정재현, 그리고 김도영. 그리고, 나. 이게 얼마만이지. '형은 잘 지내시고? 일 많이 바쁠텐데 결혼 준비까지. 너도 고생이다.' 태일 오빠의 말에 다시금 이 자리에 내가 나오게 된 목적을 찾는다. 어제는 집 안에 흩어진 청첩장을 모아 몇 번을 펼쳤다 접었다를 반복했다. 익숙하지가 않아서, 모든게 처음이라서. 그런데 이건 익숙해질 수 없고 연습할 수 없는 것들이라서. 봉투에 이름을 써내려갔다. 문태일, 정재현, 이제노, 이동혁, 그리고. '도영아.' 그 말에 네 개의 눈이 나를 돌아봤다. '그 사람이 이거, 너한테 전해줄 수 있냐고 부탁하셔서.' 김도영은 곧장 뜯어 읽어본다. '이걸 나한테?' 이동혁이 묻는다. '형, 뭔데요?' '어,... 축가를...부탁하셔서.' 정재현이 옅은 실소를 띠고는 그 자리를 빠져나간다. 나를 돌아보는 눈이 더 늘었다. 전화가 온 척 급한 발걸음으로 자리를 피한다. 데자뷰가 일었다. 야. 필시 정재현의 것이다. 나 이 질문 두 달 전에도 한 것 같아서 기시감이 좀 드는데. 너, 진짜 이 결혼 후회 안 해? 아니 재현아. 넌 나한테 그걸 묻고 싶은게 아니잖아. 너 제정신이야? 김도영한테 그걸 부탁해? '정재현. 변함없이 이게 최선이야.' '너 지금 청첩장 나눠주는 것도 충분히 코미딘데. 형이랑 너 결혼, 장르가 코미디야? 그럼 내가 그거 맞춰주고.' 이런 재현에겐 면역이 되질 않는다. 저 봉투 속에 든 게 무엇인지 나도 몰랐으니까. 결혼은 현실이더라 재현아.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내가 결혼에 능숙해질 때까지 기다려주진 않아. 내가 을을 자처한거야. 끝내 투정으로 들릴까 재현에겐 건네지 못한 말이다. 정재현은 담배 하나 피우고 들어가겠다며 나를 먼저 보낸다. 그리고 다시 김도영을 마주한다. '내가 해야지. 형이 부탁하시는거고. 좀,...감회가 새롭긴 하네.' 나는 입술을 감쳐문다.
일부러 신부, 신랑 가족석을 없앤 구조. 그리고 그 사람 아버지의 손을 잡고 들어갈 나. 나를 안아주시는 어머니. 대신 하객을 맞고 부조를 받는 태일 오빠와 제노. 밖은 몹시 추운 겨울이다. '신부님, 지금 10시 20분이고, 식 40분 정도 남으셨어요. 많이 떨리시죠.' 아뇨. 현실은 드라마가 아니잖아요. 제가 여길 도망치고 싶다고 해서, 누가 제 손 잡고 같이 도망쳐줘요. 저는 이게 최선이에요 늘 그랬듯. 태일 오빠와 제노가 들어온다. '잘 살아요, 누나. 난 이제 누나가 좀 그랬음 좋겠어.' 태일 오빠는 날 한 번 안아준다. 생각보다 덤덤하다. 결혼을 영화로만 배운 나는, 이 순간 눈물이라도 날 줄 알았지. 뒤이어 김도영이 들어온다. 나는 묻는다. 재현이랑 동혁이는 어디가고. 태일이 형이랑 제노랑 잠깐 체인지. 그래. 김도영은 내 옆에 앉지 않고 뒤에 가서 선다. 한 쪽 손을 내 어깨에 올리고는 조용히 말한다. '나는,...네가 봄에 결혼하길 바랐어. 따뜻한 날에 좋은 일이 찾아올거라 했잖아.'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답도 없는 실타래를 힘겹게 풀고 있는데 누군가가 와서 매정하게 가위로 잘라버린 기분. 아, 이렇게 허무할 수가. 몇 년도 더 된 일이더라. 취업을 앞두고는 스트레스 받아 하던 나를 이끌고 도대체 용한건지, 싸구려일지 모를 점집에 데려다 앉히고는 다짜고짜 좋은 말 좀 많이 해주세요, 하던 도영아. 그 분이 말씀하셨지. 겨울엔 영 아니야. 매서워서 기를 못 펴. 따뜻해지면 좋은 일이 좀 생기겠네. 뭐 딴 것도 봐줘? '그래도 여기 꽃 있으니까 봄이지 뭐. 좀 웃어.' 끝내 돌아본 김도영이 나를 보고는 웃는다. 김도영. 넌 내가 도망치고 싶다고 하면 어떻게 할래. 너도 드라마처럼, 멋진 차 준비해놨다고, 도망치고 싶으면 네 손 잡으라고 말할래? 아 맞다, 이건 현실이지. 이젠 그럴 일 없지 너랑 나.
결혼행진곡이 울려퍼지는 식장. 새 반지를 나누어 끼는 그 사람과 나. 주례가 없는 식을 대신해 직접 쓰신 편지를 읽어주시는 그 사람의 부모님. 그리고 나서는. '참 따뜻한 날입니다. 축가를 부탁받은 날 오래 고민을 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형도 노래를 잘 부르거든요.' 도영이 살짝 웃는다. 나는 그 사람을 바라봤다. '두 분의 가장 아름다운 날을 함께 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이 순간을 저도 오래 기억하게 되겠네요. 결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도영이 노래한다. 그제서야 나는 운다. 그 사람이 나를 안는다. 김도영이 꼭 눈으로 묻는 것만 같다. 왜 울어. 울고싶은건 난데. 도영아, 이건 다 네 목소리가 눈물같아서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