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이해가 안가실수도 있습니다..
충동적으로 시작한 연재라서 순서가 조금 뒤죽박죽이네요..
준멘은 은근 무서운 게 잘어울려... 집착준멘 나에게도 그 집착을 주시겠어요?^^
오리행쇼.
'다몬'님 사랑합니다/하트/
무죄
나는 내 이름이 싫다.
01
나는 변백현이 싫다.
*
모처럼만에 나온 바깥은 신기했다. 제가 기억하는 모습의 세상이 아니었다. 오래전에 갔던 아쿠아리움도 없어지고 증권회사들이 자리잡은 후였고, 유일하게 남은 것이라고는 엄마 손을 붙잡고 갔었던 커피숍뿐이었다. 그것도 이미 깔끔한 커피숍으로 바뀐 후였지만, 커피를 파는 건 같으니까 뭐.
“어서오세요-.”
맑은 목소리에 고갤 돌리니 카운터에서 컵을 닦던 한 남자가 저를 보며 웃었다. 가게를 한번 쭉 둘러보자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이곳저곳에 걸려있었고, 온통 남녀가 서로 마주보고 앉아 웃고 얘기하는 그런 지극히도 일상적인 모습들 뿐이였다. 역시 이상하지, 왜 나는 형이랑 저런 걸 하고 있을까. 한참동안이나 멍하게 문앞에 서있던 백현은 발을 움직여 느릿느릿 카운터까지 걸어갔다. 메뉴판이 너무 어렵다. 알 수 없는 말로만 꽉 차있어 미간을 찌푸리자 앞에 서있던 남자가 백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한국말 모르나-? 왜저렇게멍해?
“주문하시겠어요-?”
“아… 뭐가 가장 달아요?”
“네?”
“가장 단거요. 입안 다 녹을정도로 단거.”
“핫초코는 어떠세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백현을 잠시 바라보던 남자는 손가락을 뻗어 옆에 있는 모니터를 꾹꾹 눌러댔다. 백현은 조금 부자연스럽게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 건넸고, 남자는 카드를 받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려 블랙카드. 이 남자는 대체 뭐하는 사람이길래 이걸 가지고 있는거지? 한껏 긴장되었지만 태연하게 감사합니다. 하고 받은 카드를 긁어 건넸다. 마주닿은 손끝이 찌릿하고 퍼졌다. 아-. 하는 남자의 모습에 백현은 한번 웃어보였다. 전기통했나봐요-. 남자가 건넨 이상한 물건을 받아 요리조리 살펴보니 남자는 친절하게 웃으며 다시 말해주었다. 이거 울리면 오셔서 핫초코 받아가시면 되요.
“저기….”
“네-.”
“여기 옆에 꽃집 있었는데 없어졌어요?”
꽃집. 꽃집이라. 백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남자를 바라봤고, 남자는 무언가 생각날 듯 말듯한 표정으로 백현을 바라보았다. 있었다고는 들었는데, 없어진지 꽤 됐거든요…. 기대했던 말이 아니였기에 백현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남은 희망마저 짓밟히고 꺼져가는 기분이 들어 백현은 어깨가 조금 더 축 쳐졌다. 죄송해요… 괜찮으세요? 걱정스럽게 묻는 남자에게 애써 입꼬리를 올려보이고는 구석자리에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비가 오려나보다. 하늘이 꾸물거리기 시작했다.
‘미안해…. 이것밖에 해줄말이 없어서. 미안해 백현아….’
‘…얼른가.’
‘나는…. 백현아….’
‘그냥가. 내가 너 붙잡기전에.’
‘미안해….’
눈을 감았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그 모퉁이가 익숙했다.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않았다. 한순간에 끝나버린 제 첫사랑이 그렇게 끝나버렸었다. 허무했고, 아팠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는 사라졌고, 그가 자주갔던 꽃집도 없어졌다. 영원히 밖을 나오지 않아도 좋으니, 그를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더 보고싶었다. 잘지내는지. 결혼은 했는지. 행복한지. 백현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 모습을 보던 남자도 덩달아 한숨을 쉬었다. 왜저리 슬퍼보이는지. 그는 누구일까.
우웅.하고 진동이 울리자 놀란 백현이 기계를 황급히 집어들었다. 깜빡이는 불빛에 카운터를 보니 그가 웃으며 제게 손짓했다. 다됐어요-. 입모양을 뻐끔거리는 그를 바라보다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그도, 박찬열도 늘 제게 저리 웃으며 입모양으로 사랑한다 뻐끔댔던, 그 추억이 아찔하게 퍼져 머릿속을 점령해나갔다. 그에게서 고맙단 말을 하고 받은 핫초코가 모락모락 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다시 돌아와 앉은 의자는 전보다 따뜻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없는데.
“아…. 달다…”
입안에 가득 머금은 핫초코가 그렇게 달았다. 따뜻했고, 부드러웠다. 마치 박찬열처럼. 이제 울고싶어도 나오지 않는 울음은 저멀리 사라져버렸고, 감정없이 김준면한테 갇혀 인형처럼 그렇게 갇혀사는 변백현밖에 남지않았다. 핫초코를 마시고 있는데, 자꾸 코끝에서는 부드러운 백합향이 맴돌았다. 눈을 감은 백현이 컵을 내려놓고 잠시 그 따뜻함에 숨을 고르게 내쉬었다.
얼마만에 느껴보는 평온함이던가. 늘 김준면이 언제 들어오나. 또 언제 그 약을 제게 먹일까. 불안해하고 초조하던 나날이 백현에겐 일상과도 같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살 수 없었던 제게 한줄기 빛과 같았던 찬열을 만나러 도망쳤었다. 현실은 쓰레기 같았다. 준면의 품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갈곳이 없었다. 백현을 아는 이는 한명도 남아있지 않았고, 마지막으로 기대해본 찬열 역시 없어지고 난 후였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이곳을 떠나서 그는 잘살고있는걸까. 백합향이 멈췄다. 카페에 남아있던 사람들도 한두명씩 없어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름을 느꼈다. 백현은 조금 더 눈을 감고 있기로 했다. 준면이 돌아오기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있었다.
*
“좋아해. 진심이야.”
“…거짓말.”
“정말이야. 좋아해.”
찬열은 제게 뜬금없이 고백을 했었다. 새하얀 백합 꽃다발을 불쑥 내밀던 그 손이 투박하고 다정스러워 보였다. 짙은 꽃내음에 백현은 괜시리 울고싶어졌다. 넉넉한 집안의 박찬열이 무엇이 부족해서 저같은 것을 좋아하는지 이해가 되지도 않았고, 이해따위 하고싶지도 않았다. 학교에서 만났던 박찬열은 공부도 잘하는 착실한 학생이였고, 저는 결석도 자주하는 병약한 왕따였다. 친구라곤 없었다. 사귀는 친구마다 김준면이 훼방을 놓았고, 그다지 제가 친구를 필요로 하는 성격도 아니었으니까.
“찬열아, 너는 내가 왜좋아?”
“백합같아서.”
“…낯간지럽게.”
“깨끗하고, 순수하고 또… 변백현이니까”
그 말을 해준 건 네가 처음이었는데. 찬열아 나 너한테 거짓말 했었어. 눈을 감고 생각하던 백현이 탁해진 눈동자를 옮겨 식어버린 찻잔을 바라보았다. 따뜻한 건 이제 됐다. 충분하다. 김준면에게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와서 제가 없는 걸 보았을 때가 걱정이었다. 제가 밖에 나갔다 오는 날이면 약이 한알씩 더 늘었다. 이유도 몰랐다. 그저 그가 주는 대로 받아먹을 뿐이었다.
“가시게요?”
“핫초코…달았어요. 맛있었어요.”
고개를 꾸벅이고는 남자의 오른쪽 가슴에 달린 이름을 지그시 보았다. 백현의 눈동자에 깊이 박힌 그 이름에 백현은 다시 한번 그에게 고개 숙이고 뒤를 돌아 걸어나갔다. 오세훈. 오세훈이라. 앳된 얼굴에 배려심 많던 그에게 미안한 감정이 솟아올랐다. 왜 미안한걸까. 스스로 생각해도 답은 딱 하나였다. 나한테 잘해줘서. 나같은 거한테 당신이 걱정하게 만들어서. 그냥 미안했다. 누구에게라도 핑계를 대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비가 슬슬 멈추고 있었지만 여전히 흐렸다.
*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집앞에서 머뭇거리던 백현이 열쇠를 꺼내 문을 열려고 했다. 잠금장치가 풀어지는 철컥소리가 나지않았다. 그 말은… 준면은 이미 와있다는 것. 조심스럽게 열어 방안으로 들어가자 난장판이 되어있는 광경에 백현은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오늘 약은 세 개로 늘어날 것 같았다. 문소리를 들었는지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나오는 준면의 손에서 피가 주륵 하고 새어나왔다. 침묵을 유지한 그 공기가 너무도 무거웠다. 보다못한 백현이 준면의 손을 이끌어 소파에 앉혔고, 준면은 여전히 아무말없이 그저 백현이 하는대로 지켜볼 뿐이었다.
두 번째 서랍에서 꺼낸 물티슈로 준면의 손을 조심스럽게 닦아내고 연고를 발라 붕대로 감싸자 그것만 바라보던 준면이 백현의 손을 잡아 멈추게 만들었다. 백현은 손을 멈춘 후에도 준면을 보지도, 무엇을 말하지도 않았다. 그저 숨만 내쉬고 들이킬 뿐이였다. 속이 거북했다. 아까 마셨던 핫초코가 금방이라도 넘어올 것만 같았다. 백현은 다시 손을 움직여 붕대를 마저 감았다.
“어디갔다왔어?”
“밖에 잠깐.”
“어디가지말라그랬잖아.”
“미안.”
“또 그러면 화낸다?”
“응.”
소유욕. 그것은 무엇을 일컫는 말일까. 사람이 사람의 발목을 잡아 쓰러트려 움직이지 못하게 막고 온전히 그를 위해 모든 걸 바쳐야한다는 그런 그로테스크한 이야기들을 사랑하는 준면이 무서웠다. 서재에 가득 찬 검은 표지의 책들 또한 무서웠다. 책상 위에 올려져있는 제 이름이 싫다. 입학서류. 그것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그가 두렵다. 학교에 가고 싶다고 졸라도 보내주지를 않았다. 형은, 왜 나한테 그래? 단순히 물어본 말이 아니었고, 그를 떠보려는 것 또한 아니었다. 나는, 진심을 듣고싶어. 형의 진심 말이야. 나를 왜 여기에 가뒀는지. 왜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게 하는지. 왜 나를 탐했는지.
‘ 재밌잖아. 너 우는 거 좋아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한테 보여주기 싫어. ’
그 말이 무서웠다. 점점 미쳐가는 김준면을 보는 것도 싫었다. 내밀어진 작은 약병하나에 의아한듯이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또 웃는다. 먹어 백현아. 먹어야지. 그래야 이쁨받지. 응? 그 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고있었다. 하루에 두어번씩 내밀어주는 그 알약 하나를 삼키면 정신을 잃게된다. 제가 모르는 사이 대체 무엇을 하는걸까. 반항할 수 없다. 그 사실은 암묵적으로 정해진 것이었고, 제게 선택권한은 단 일퍼센트도 없었다.
백현은 알약하나를 멍하니 바라보다 준면이 건네준 물을 받아들고 단숨에 먹었다. 목안으로 넘어가는 알약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곧이어 눈꺼풀이 닫혀졌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준면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일 때쯤 소름 돋는 목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착하네… 우리 백현이”
나는 내 이름이 싫다.
그가 불러주는 내 이름이 싫다.
*
왜 한알만 주었는지 이해가 가지않았다. 평소보다 덜한 약기운에 백현은 일찍 깨어났다. 제 앞에 앉아 그저 제가 자는 것만을 내려다보던 준면의 얼굴이 부드럽게 미소짓고 있었다. 일어났어? 소름끼치는 목소리로 제게 속삭이던 준면이 백현을 일으켜주었고, 무언가 낌새가 이상한 걸 눈치챘는지 백현의 입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걸 본 준면은 무언의 만족감에 미소가 짙어졌다. 떨지마 백현아. 왜그래.
“백현아.”
“…….”
“우리 그만할까.”
놀라움에 눈이 커다랗게 떠진 백현이 입술을 달싹이며 준면에게 손을 뻗었다. 허공에서 떨리는 그의 손을 준면은 당연하다는 듯이 마주잡고 미소지었다. 무슨 말이야…. 말을 하지 않아서인지 갈라진 목소리가 백현의 입속에서 튀어나왔고, 준면은 떨고있는 백현을 끌어안았다.
“너도 힘들잖아. 안그래…?”
“형….”
“그만하자.”
나는…. 형 없으면 나는…. 혼자가 되는 것이 두려워 약을 주어도 말없이 받아먹었고, 그가 시키는 것이라고는 전부 했었다. 끝내자니. 그만하자니. 이제와서 버리는 게 어디있어. 다급하게 말을 잇던 백현의 입술에 준면의 입이 닿았고, 평소에는 가만히 준면의 입술을 받아들이던 백현이 준면의 목을 거세게 끌어당기고 정신없이 그에게 매달렸다. 나 혼자 두지마… 혼자되는 거 싫어…. 울먹이는 백현의 등을 조금 더 끌어당기고 안아주자 그가 준면의 턱 언저리에 입술을 맞대고 색색거리며 숨을 헐떡였다.
“우리 백현이는….”
“…형.”
“착하니까… 형을 이해해줄거라고 믿어.”
백현을 꼭 끌어안았던 준면의 손가락이 느슨해졌고, 품에서 백현을 떼어내 소파로 내려놓았다. 백현은 다급하게 그의 옷자락을 잡았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형, 무슨일인데… 응? 턱이 달달 떨렸다. 백현아. 이건 죄악이야. 너랑 나랑은… 형제가 아니야. 조금 젖어있는 준면이 목소리가 의외로 단호하게 백현을 떨쳐냈다. 툭.떨어진 백현의 손이 그제서야 그 약이 무엇이었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마지막은 한알이였어 백현아…. 너도 한알. 나도 한알. 눈이 감기는 백현은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쓰러지는 준면의 뒷모습에 눈물이 울컥 솟았다.
“사랑하지말자…. 이제 다시는….”
“…준면이형.”
“사랑하지말자… 너도 나도….”
약 기운이 점점 몸을 타고 퍼져흐르자, 백현의 눈가가 부들거리며 떨렸다. 애써 눈에 힘을 주고 준면을 바라보려 애를 써도 눈이 감겨왔다. 형…준면이형…. 백현의 목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준면의 눈가도 흐릿해졌다. 그래, 백현아 우리 다시는 만나지말자…. 다시는 사랑하지말자…. 아니….
“너는… 날 사랑하긴했어…?”
순간 정신이 번쩍 든 준면이 급하게 뒤를 돌아 백현을 바라보았고, 백현은 이미 입술이 파랗게 물들여져 축 쳐진 후였다. 백현아…! 백현아… 아아… 내가 무슨 짓을 한걸까…. 백현의 숨이 옅게 퍼졌다. 준면은 쓰레기통을 뒤적여 사자마자 버렸던 해독제를 백현의 입에 우겨넣고 물을 떠와 제가 한모금을 머금은 뒤 백현의 입안으로 밀어넣었다. 삼키지 못하고 흘러내리는 물줄기에 준면은 울음이 터져나왔다. 안돼…. 내가 잘못했어…. 백현의 입안으로 계속해서 해독제와 물을 번갈아 넣자 백현이 한모금을 삼켰다. 그제서야 힘이 풀린 준면은 자신도 해독제를 삼킨 뒤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는…. 도저히 널 보낼 수가 없어… 네가 너무 질겨 백현아… 넌 너무 질겨….”
동이 트고, 방안이 밝아졌지만 백현은 일어나지 않았다. 준면은 몇 번이고 그에게 다가가 그가 숨을 쉬는지 안쉬는지 확인했다. 미약하지만 점점 돌아오는 그의 호흡에 준면은 울고, 울었다. 오늘 백현에게 먹인 약은 독약이였다. 그동안에 먹였던 약은 진통제였다. 그것이 때로는 수면제가 될 때도 있었고, 백현이 꼭 먹어야할 약일때도 있었다. 백현은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입양된 동생이었다. 그는 몸이 선천적으로 약했고, 때를 맞춰 약을 주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이었다. 그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사랑했던 제 자신이 끔찍하고 역겨웠다.
나는, 변백현이 동생이라는 게 싫다.
변백현을 사랑하는 내가 싫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변백현이. 싫다.
아니, 싫어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