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다시 마주하는 상상은 수도 없이 했었다. 근데 그게 이렇게 일 줄은 몰랐다.
하고 싶은 말도, 해주고 싶은 말도 너무 많았는데, 네 앞의 나는 또 다시 마음에 없는 말들만 늘어 놓는다.
“도영아. 5년이나 지났어. 5년은 감정을 정리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야.”
“그게 너한테는 그렇게 쉬운 일이었어?”
“우리같이 보낸 시간이 겨우 몇 달이었어. 몇 년도 아니고, 그냥 한 계절 같이 보낸 기억으로 아직까지 힘들지는 않아.”
“그냥 한 계절… 하… 너한테는 우리가 그 정도였구나.”
“……………”
“………허탈하네, 나는 꽤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거든 설렘도, 슬픔도, 미움도, 아련함도, 니가 준 감정이니까. 꽉 움켜쥐고 있었어. 없어질까 봐.”
“…………도영아. 나는”
“그래서 아직도 니가 생생해 나한테는.... 그래 니 말대로 25년 인생에 겨우 몇 개월이었어. 그 몇 개월에서 벗어나는데 나는 내 5년 다 썼어.”
“…………”
“너도 나만큼 힘들었으면 했어... 너도 어딘가에서 똑같이 힘들어하고 있겠지 생각했어.... 못된 마음인데, 이제라도 니가 나만큼 힘들었으면 좋겠어."
아직도 내가 밉다는 말도, 우리의 감정들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는 말도, 그래서 나도 똑같이 힘들어 했으면 좋겠다는 말에도
나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 지 몰랐다.
생각하면, 밉다가도 아련하고, 그러다가 또 그리운 사람.
너무 복합적인 감정들이라서 어떻게 한 사람한테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도영이의 눈빛은 그 감정들을 꾹꾹 눌러담고 있었다.
바보같이 아무말도 못하고 있는 나를 너는 지긋이 바라보기만 한다.
아무런 준비없이 듣게 된 너의 말들은 내 마음에 생채기를 낸다.
우린 똑같은 5년을 보냈겠구나, 너도 나처럼 똑같이 보냈겠구나.
그때의 우리를 “그냥 한 계절”, “겨우 몇 달”로 정의하기에는 너무 컸다. 내 감정을 드러내기 싫어서 던진 말이 네 마음이 걸렸나 보다.
그래 그때 우리가 얼마나 예뻤었는데,
나를 보는 눈이 얼마나 다정했는데,
나를 부르던 네 목소리가 아직도 선명하게 들리는데,
앞으로 누구를 만난다고 해도 우리가 보낸 시간이 별거 아닌 일로 치부 될 일은 없는데 말이다.
남겨진 "그때의 우리"라는 기억이 아직까지 너에게 아픈 기억이라 다행이다.
나 혼자 붙잡고 있는 줄 알았는데, 너는 다 잊었는데 나만 힘들어하고 있다 믿었는데,
그건 아니었구나.
그 타이밍에 전화를 받으러 나가셨던 작가님이 돌아오셨고, 우리 둘 다 약속이라도 한 듯 합죽이 합이었다.
문을 여는 순간 분위기가 나갈 때랑은 사뭇 다르게 정적 - 그자체 여서 작가님이 "이야기 잘 하셨어요?" 라고 애써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하신다.
"한감독님이랑 작업 기대되네요."
"맞다, 도영씨가 회사에 먼저 추천 드렸다면서요? 한감독님이랑 일해보고 싶다고"
"네, 한감독님 필모 보는데, 너무 마음에 들어서요. 제가 추천 드렸어요."
"아,, 그랬어요?"
"네, 한번은 꼭 뵙고 싶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