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소식 축하해요."
네, 네? 아침 회진 준비를 끝내고 라운딩 준비를 하는 내게 교수님이 뜬금없이 말을 건네셨어. 당황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교수님을 쳐다봤지.
"변백현 선생이 난리가 났습니다, 산과 레지 붙잡고 난리에요. 난리."
교수님이 말하는 그 '난리'가 대충 어떤 것인지 나는 예상이 갔기 때문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속으로 욕을 내뱉었지.
"힘들면 회진 다른 선생 시켜도 됩니다. 김선생이 워낙 꼼꼼해서 아쉽긴 하지만, 어쩌겠어요."
하하, 아니에요. 손을 내젓는 내게 교수님은 무리하지말라는 말씀을 남겨놓으시고 병동을 떠나셨어. 아오, 변백현. 잠시 눈을 감았다 뜬 후 산과에 내려갔다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목에 걸고 있던 카드를 벗어 자리에 내려놓았지.
"어어어, 어딜!"
스테이션 코너를 홱 도는 순간 나타난 백현이의 모습에 다시 숨고 싶은 심정이었어. 처음 진료받으러 가는 날에도 같이 가야된다고 난리를 쳐서 같이 갔더니 좀처럼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에 내가 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이었거든. 이번에도 눈에 훤한 드라마을 머리속에 떠올리면서 머리를 짚었어.
"머리!? 머리 왜!"
"아니,"
"머리 아파? 어? 어디? 앞쪽? 뒤쪽?"
"머리 터질 것 같아."
"터, 터질.. 뭐?"
"터질 것 같다고. 조용히 좀 해."
"그러니까, 머리가 아파? 나 불안해. 돌려 말하지마, 응?"
아니라고. 내 단호한 말에 백현이는 입을 꼭 다물고 내 손을 잡았어. 평소같았으면 병원에서 뭐하는 짓이냐며 질색을 했을테지만,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고 백현이도 그걸 노린 듯 했어. 내가 머리 터지겠다고 한 말에 복도 끝으로 갈 때까지 입을 열지않은 백현이였지.
"백현아,"
병동을 내려가자마자 보이는 환자복에 나는 살짝 손을 놓았고 백현이도 빠르게 뒷짐을 졌어. 그렇게 정말 평범한 의사와 간호사처럼 걸어서 진료실 앞에 도착한 우리는 대기의자에 앉았어.
"자기야, 나 여기 만져봐."
"어디 봐."
"심장이 엄청 빨리 뛰어."
"부정맥인가봐."
"빈맥, 서맥?"
"빈맥."
"우리 자기 똑똑하기까지 해."
빈맥 서맥은 학생들도 아는 거야, 내가 눈을 흘기자 백현이는 다 좋다는 듯 허허 웃어. 뭐가 그리 좋을까 싶어 나도 같이 따라 웃었지. 긴장했는지 백현이의 습관 중 하나인 질문던지기까지 나왔어. 항상 종인이한테 습관처럼 질문을 던지곤 했는데, 그 질문을 내가 받을 줄이야.
곧이어 진료실로 들어가라는 말에 백현이는 내 손을 꼬옥 붙들고 진료실로 당당히 입장했어.
"으음,"
초음파 검사를 하고 옷을 대충 정리한 뒤 의자에 앉았는데 담당의사의 표정이 첫 진료만큼 밝지 않았어. 불안함에 백현이를 쳐다봤더니 백현이도 긴장한 듯 표정이 굳어있었어.
"많이 심각한 건 아닌데.."
그러면서 백현이가 볼 수 있게 모니터를 돌려 보여주었어.
"일반외과시면, 대충 보이시죠?"
"어..아기집이 조금.."
"조금 작아요."
백현이가 손가락으로 짚은 곳은 맞는 지 담당의사는 고개를 끄덕였고 백현이 표정은 점점 더 굳어갔어.
"아시겠지만 임신 초기에 많이 나타나는 증상이구요,"
담당의사가 다시 모니터를 돌리며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어.
"태아가 크면서 아기집도 자연스레 커집니다. 태아 성장속도랑 아기집이 커지는 속도가 많이 차이 날 경우에 문제가 되는거고요."
으음, 나는 대수롭지 않게 듣고 있었지만 백현이는 그게 아닌 듯 했어. 희귀 질환 환자를 받은 것 마냥 미간은 있는대로 좁힌 채 화면을 들여다보기 바빴지. 사실 아기집이 작은 산모는 정말 병원에 허다하게 많았고, 산모들이 제일 많이 듣는 말이자 임신 초기에 나타날 수 있는 가장 흔한 증상이었거든.
그렇게 진료실을 빠져나오고, 백현이는 내 손을 붙든 채 제 머리를 마구잡이로 휘저었어. 아직도 잔뜩 구겨져 있는 미간이 마음에 들지 않아 백현이 가운 주머니에 꽂혀있는 안경을 꺼내들었어.
"안경 써, 눈 힘주지 말고."
"안 보여서 그러는 거 아니야."
알아, 일단 써. 내 말에 백현이는 익숙하게 안경을 얼굴에 걸쳤어. 안경을 써도 풀리지 않는 미간에 붙들린 손을 놓고 두 손을 뻗어 백현이의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했어.
"병동 가봐. 오늘 내일하면서 누워있는 환자가 몇인데."
"그거랑 다르잖아."
"이렇게 심각할 필요는 없다는 거야."
"그래도.."
"봐. 여기에 어떻게 아기집이 클 수가 있어?"
내가 배를 통통 두드리며 백현이 손을 끌어다 올렸더니 그제야 백현이가 희미하게 웃었어.
"얼른 가자. 종인이 꼭 너 없을 때 사고치더라."
ㅡ
"인턴 쌤!!"
아니나 다를까, 백현이가 자리를 잠시 비운 사이 종인이는 자신의 존재감을 아주 당당하게 뽐내고 있었어. 짜증 가득한 간호사쌤의 목소리가 들리고 병실 안에는 미안한 듯 뒷머리를 긁적이는 종인이가 서있었지.
"무슨 일이에요?"
"아니, 연세가 칠십이 넘는 환자한테 카테터를, 네? 말이 돼요, 쌤?"
"카테터요?"
"이건 네다섯살 아이들이나 쓰는 카테터에요! 그러니까 베드에 이 난리가 났지!"
간호사쌤이 가르킨 베드에는 도뇨관이 잘못되었던 건지 축축하게 젖은 이불이 돌돌 말려있었어. 카테터 크기 처방을 잘못내린거구나,하고 다시 이마를 짚었지.
"김종인, 가 있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백현이가 손짓을 했고 종인이는 고개를 두어번 꾸벅인 채 병실을 나갔어.
"죄송해요. 아직 인턴이라 실수가 잦네요, 더 주의 시킬게요."
"..뭐, 괜찮아요. 오더 잘못된 것도 모른 우리 신규 잘못도 있죠."
백현이의 말에 간호사쌤은 바로 목소리를 누그러뜨린 후 아까 소리 친 게 미안한 듯 웃어보였어. 인턴시절부터 병동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백현이는 큰 사고도 치지 않았고, 덕분에 조그만 실수가 있더라도 대부분 눈 감아주고 넘어가는 일이 많았거든. 그런데 이번 일은 백현이도 아니고 종인이가 잘못한 일인데 백현이가 나서서 고개를 떨구니 간호사쌤도 미안했던거지.
"아, 쌤. 오늘 실습 학생들.."
난장판이 된 속에서 카테터를 챙겨들고 나오던 간호사쌤이 내게 실습학생이라는 단어를 꺼냈어. 그제야 아차,하고 눈을 번뜩 떴지. 오늘부터 실습하러 오는 학생들이 병동에 온다고 했는데 깜빡하고 있었던 거야. 자고로 실습학생들은 병동의 폭탄이라고 지칭될 정도로 제어하기 힘들고, 여기저기 치이기 일쑤고..신경써야 할 것도 많아지는 아이들이니까.
"이번 학생들 어때요?"
"남학생들이 많이 왔어요."
"오, 해마다 많아지나봐요. 남학생들은."
이제 간호계도 남자의 세계가 되는 것 아니냐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스테이션에 도착하니 이제 막 첫 실습을 나온 것 같은 학생들이 서있었어. 내가 학교다닐 때 입었던 분홍색 실습복을 입은 모습이 귀엽기 그지 없었지.
"김쌤-, 라운딩 전에 학생들 정맥주사 실습 좀 시켜줘요."
실습학생들이 오면 반드시 하는 일 중 하나였는데, 정맥주사 실습이었어. 정맥주사는 다른 주사에 비해 위험하니까 학교 실습실에서는 택도 없고 모형으로만 연습하기 일쑤거든. 그래서 시스템 다 갖추어진 병원에서 실습할 때 마다 정기적으로 서로의 정맥을 들쑤시는 것, 정말 팔을 피멍으로 도배하는 아이들도 있는 그런 실습이지.
"두 명씩 짝지어볼까? 학교에서 IV 실습은 다 해봤죠? 여기 키트 준비되어 있는 거 있으니까 두명씩 나와서 저랑 직접 해볼거예요. 혹시 질문 있는 사람?"
최대한 밝게 이야기 해 준답시고 말했지만 학생들은 잔뜩 굳어서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어.
"하하, 학교에서 완벽하게 배우고 왔나보네요. 어려운 거 있으면 도와줄테니 긴장하지말고..여기 두명부터 나와볼까?"
내 말에 맨 앞의 학생 두명이 쭈뼛쭈뼛 앞으로 나와서 의자에 앉았어.
"소독하고, 셀라인 준비하고.."
"어, 다 했어요."
"이제 혈관 찾아봐요."
제일 어려운 질문일 법한 내 말에 학생은 열심히 혈관을 찾아댔어. 그리고 대충 감을 잡은 건지 눈을 반짝이며 나를 올려다봤고 정확한 손가락의 위치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
"넣어요?"
"네, 넣어요."
"으아..아.."
"그 쪽 맞아요. 주사기 똑바로 잡고. 아니, 반대로 잡아야지요."
"이렇게요?"
"네. 각도 잘 맞춰서.."
내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의지하곤 손을 덜덜 떠는 모습이 내 첫 정맥주사 실습이 떠올라 귀엽게 느껴졌어. 입가에 떠오르는 웃음을 꾹꾹 눌러참으며 한명한명 실습을 해나갔지.
총 다섯 팀이 테이블에 앉아 성공적인 정맥주사를 이루어냈고 뿌듯함에 마지막 팀을 쳐다보며 고개를 들었지.
"쌤, 저희 홀수라 짝이 없어요."
"그래? 그럼 다른 친구가 파트너 좀 해줄까?"
내 말에 두번은 못하겠다는 듯 모두가 내 눈을 피했고 나는 난감함에 입술을 잘근 씹었어. 그 때,
"자기, 아니. 쌤."
처치실 문을 활짝 열고 들어온 백현이가 무의식적으로 자기,라는 말을 꺼냈다가 학생들을 보고 당황한 듯 호칭을 바꾸었어.
"학생들 실습이에요? 아, IV실습.."
"어, 저기 쌤."
"하하. 열심히 하세.."
"선생님."
"제가 오늘 팔이 좀.."
"여기 앉으시겠어요?"
정맥주사 실습인 것을 보자마자 백현이는 몸을 돌려 처치실 문을 쥐어잡았고 나는 끈질기게 백현이를 불러댔지. 나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앉지도 못하는 백현이는 내 눈을 쳐다보며 하하 웃었어.
"그럼 우리 남학생은 여기 레지던트 선생님한테 해볼까요?"
그제야 백현이는 포기한 듯 자리를 잡고 앉아 팔을 내밀었어. 남학생은 열의가 넘쳐보였고 백현이는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주먹을 쥐었다 폈다, 혈관을 만들어주었어.
"우와, 혈관 진짜 잘 보여요."
"이십대 남성 혈관이 제일 잘 보여요, 원래."
"쌤 여기 맞아요?"
"네. 맞아요."
"저 찔러도 돼요?"
"네. 각도 잘 맞춰서.."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학생은 백현이의 팔뚝을 푹 찔렀고,
"..아,"
백현이는 아픈 듯 짧은 신음을 내뱉었어.
"아니! 아니, 아니!"
"네!?"
"아니, 빼! 빼!"
내 말에 당황한 남학생이 백현이의 팔에서 바늘을 쑥 뽑았는데. 그랬는데..
"..이거, 진짜 아프네요."
바늘을 위로 쑥 뽑아버린 탓에 백현이 피부가 그대로 쭈욱 일어나 피가 맺히기 시작했어.
"어떡해, 괜찮아?"
"아니, 아파요."
백현이가 익숙하게 소독솜을 집어들고 바늘이 튕겨나간 자리를 꾹 눌렀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어보였어. 바늘을 찌른 남학생은 그대로 경직되어 주사기를 손에 든 채 아무 말도 못했고 뒤에서 지켜보던 학생들도 마찬가지였지.
"괜찮아요. 학교 다닐 때 이것보다 더 아픈 것도 많이 했어요."
"죄송해요.."
"아이고, 괜찮아요. 학생한테 팔 대주면서 이 정도 각오 안 했을까."
"저, 피 많이 나시는데.."
"하하. 그러게요. 요 간호사 선생님한테 밥이라도 얻어먹어야겠어요."
남학생이 미안한 듯 눈을 바닥으로 떨구고 백현이에게 사과를 건네자 백현이는 여느 때와 같이 웃으며 능글맞게 넘겼지. 그 사이에도 백현이 팔에서 주르륵 흘러내리는 핏방울을 보고 나는 백현이 팔을 빌린 나를 자책했어. 앞에 학생들이 잘 해서 당연히 마지막 학생도 잘 할 줄 알았는데. 폭탄이었을지 누가 알았겠어. 그렇게 그 폭탄 남학생의 본격적인 실습이 시작되었지.
ㅡ
아이고 또 수능시점에 돌아오는게 인지상정 아니겠습니까! 폭탄같은 과제를 하나 남겨두고 빠르게 메모장을 켜서 우다다 쓰고 왔어요. 그래서 그런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그렇지만..수능 잘 보라는 말 꼭 하고싶어서..결국 늦긴 했지만..
아마 오늘 수능 치신 분들은 수능 끝나고 나서야 요 글을 확인하시겠지만! 결과가 어떻든 자유를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수능 끝나고부터 대학 입학 전 그 사이 시기처럼 아무생각없이 놀 수 있는 날은 평생에 없을거예요. 그렇대요..그렇다더라구요 사람들이..근데 확실히 대학생활에는 아무생각없이 놀 수 있는 시기가..있긴 있음..방학때..뭐 1학년 방학 때이긴 하지만..그래도 정말 수능 끝나고 노는 것만큼 눈치안보고 놀 수 있는 시기는 없어요. 정말로. 장담함!
저는 막 매일 영화보고. 귀 뚫고 밤새서 술먹고..하고싶은 거 다 했던 것 같아요 물론 알바는 안했음ㅎㅎ 용돈 받으며 노는 불효녀였지만
시험 잘 본 분들은 축하드리궁, 혹여나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너무 낙심하지마세요. 인생이 수능으로 판가름 난다면 수능 잘본사람들은 다 성공했게요? 저도 고3때는 수능이 전부같고..수능 못보면 출발 지점부터가 남들과 다른 것 같고..그랬는데 수능은 정말 정말 작은 관문이에요. 지나고 나면 다들 느끼실거예요. 그러니 너무 낙심하지말고!! 놉시다!!! 다들 수고 많았고 축하합니다! 수능 끝난 건 축하해야 마땅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