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븐라희 12
– Blue Sun In Water -
♬ Moon In Water – The Poles (더 폴스)
짝짝짝. 박수소리가 어제까지 지겹도록 들은 메트로놈 소리 같았다. 이상으로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여주는 꾸벅, 인사했다. 저 뒤에서 지수가 양손을 흔들며 한껏 웃고 있었다. 교수님께 미리 양해를 구하고 시작한 피피티에는 지수와 여주의 이름만이 적혀 있었고, 웃을 수 있는 사람도 지수와 여주뿐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참석하지 않았던 볼드모트 두 명이 혹시나 찾아와 입을 털까, 둘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강의실을 부리나케 빠져나왔다.
“종강이다!”
“아, 개더워.”
“더워? 바다 갈래?”
“아, 나 연습.”
“맞다 너 다시 밴드 한댔지.”
지수가 못내 아쉬운 듯 쳐다봤다. 그러면서도 곧장 엘리베이터로 여주를 밀어 넣었다. 저는 광안리를 함께 할 사람을 과방에서 추려 갈 테니 얼른 가라면서. 여주는 닫히는 문 사이로 보이는 지수를 벙 찐 얼굴로 봤다.
종강 직전, 체인락과 헤븐라희 사이의 갈등을 모두 말하자 지수는 남준과 비슷하면서도 같은 말을 했다. 무슨 상관이야, 네가 기타치고 싶으면 치는 거지 거기가 어디든. 여주는 당사자가 아닌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확신이라 여기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광안리 버스킹에 끌고 갔을 때부터 지수는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여주 속의 어떤 본심을. 지수가 쩔쩔 맬 땐 여주가 대범하고, 여주가 쩔쩔 맬 땐 지수가 대범한 게, 왜 3년간 붙어 있을 수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여주.”
“어, 깜짝이야.”
1층 버튼을 누르고 헤븐라희 단톡방에 들어가 현재 누가 있는지 보고 있을 쯤이었다.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오더니 여주를 불렀다. 여주는 익숙한 파랑머리에 눈을 크게 떴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볼 사람 있어서 왔다가, 너 시험 이때 끝난다고 했던 거 같아서.”
여주가 엘리베이터 층수를 봤다. 4층이었다.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닫힘 버튼을 누르는 태형의 손이 더 빨랐다. 여주가 다시 태형을 봤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누가 오려던 것 같았는데 못 들은 건가. 여주가 눈을 깜빡였다.
“시험은 잘 끝냈어?”
“네. 마지막 시험이 발표라서. 오늘 종강했어요.”
“아 그때 말했던 그거?”
“네.”
“그렇구나. 나 연습실 가는 길인데. 너도 바로 갈 거지?”
여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아직 공식적으로는 수업시간이라 그런지 로비는 한산했다. 시험과 종강과 방학 계획, 그리고 공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얼떨결에 주차장에 도착해버렸다. 여주는 기시감을 느끼며 조수석에 올라탔다. 시동을 끈 지 얼마 안 됐는지, 차 안은 아직 시원했다. 게다가 앞좌석 컵홀더에는 아메리카노 두 잔이 놓여 있었다. 지독히도 세팅된 듯한 느낌은 기시감을 지워버리기까지 했다. 여주가 고개를 갸웃할 동안 태형이 커피 잔을 건넸다.
“아메리카노 좋아한댔지?”
“와, 감사합니다.”
공짜는 마다하는 게 아니다. 차도 덥썩 얻어 탄 마당에 무슨 예의를 더 차리겠는가. 여주는 덥썩 잔을 받아들었다. 태형이 웃으며 시동을 켰다. 여주는 시럽이 하나도 안 들어간 아메리카노를 쭉 들이켰다. 밖은 여름의 소리가 왕왕댔고, 여주는 종강의 기분을 만끽하며 다시 기시감에 대해 생각했다.
“오빤 종강 하셨어요?”
“오늘 했지.”
“그럼 학교에서 시험 치고 여기까지 온 거예요?”
“응. 만날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라서.”
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기시감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헤븐라희에 공식적으로 들어가기 전, 말동무가 되어주겠다던 민트머리. 에스컬레이터에 저보다 한 칸 위에 서서 햇빛을 오롯이 맞은 모습. 이거 너무 재밌으니까 계속 하고 싶어요, 하는 것 같아. 아니야? 재미없어? 묻던 목소리 같은 것들.
김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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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했어요 그동안 너무 바빠서 과제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는데 이름을 뺄 줄 몰랐어요 충분히 이해하고 어쩌고 저쩌고 구구절절 장문의 사과문
황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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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신경 많이 쓰신 것 같아서 미안해서 줄게요 내가 학번이 높다보니까 이것저것 할 게 많은 바람에 어쩌고 적당한 이유를 빙자한 변명과 핑계 와랄라
여주는 그 물음을 다시, 돌려줘보기로 했다.
“재미있어요?”
“응?”
조금 변형해서 말이다.
“비꼬는 건 아니고요.”
“응.”
“김진우, 황인성 선배한테 잘 말한다고 한 게 이건가 싶어서요.”
“아아, 걔네한테 연락 왔어?”
차가 부드럽게 우회전했다. 강변을 달리면서 태형이 말했다.
“별 말은 안 했고. 잘못한 건 너네니까 사과 똑바로 하라고 했어.”
“…….”
“혹여나 우리 멤버한테 손해되는 얘기 돌면 알아서 하라는…… 협박도 조금?”
“완전 별 말인데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여주는 조금 웃었다.
“그리고 재밌냐는 질문에는.”
“…….”
“나는 너 처음 봤을 때부터 재밌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응, 조금 재밌네.”
신호가 걸리고, 태형이 아메리카노를 한 입 마셨다. 잔뜩 인상을 쓴 얼굴이 개구져 보였다.
“이런 것도 내가 마셔보고 말이야.”
여주는 언젠가 이 장면이 다시 한 번 재생되며 기시감을 느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공연이 또다시 코앞으로 다가왔다. 다 낡은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보다 드럼 소리, 앰프의 전기 연결선이 더 안정적으로 들릴 때쯤 남준이 스틱을 내던지고 항복을 선언했다. 도저히 더워서 드럼을 못 치겠다는 것이었다. 에어컨은 소파 아래, 드럼과 가장 먼 곳에 위치한 까닭이었다.
“아이스크림 사러 갈 사람?”
“가위바위보 해.”
“인간적으로 저는 빼주세요.”
“여주랑 지민이한테 사오라고 하자.”
정국, 윤기, 남준이 작당을 하자 태형이 베이스를 내려놓고 말했다.
“왜 일하고 오는 애들한테 또 일을 시켜요.”
“더워서 나가기 싫단 말이야.”
“제가 다녀올게요.”
“지민이가 이미 알았다고 답장 왔는데?”
태형이 인상을 찌푸렸다. 햇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서늘한 반지하에, 에어컨까지 돌렸는데도 어쩐지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흠집 난 악보 비닐이 태형의 손에 휙 휙 넘어갔다. 격정적인 베이스 연주를 한 것도 아닌데. 너무 오래 연습한 탓일까. 얼얼한 손가락이 미간을 쓸었다. 뭔가 걸리는데, 뭐가 걸리는지 알 수 없을 때 태형이 하는 행동이었다.
아무도 몰랐고, 아무도 모르고, 아무도 모르게 되겠지만 태형은 교외 봉사동아리 부원이다. 대외활동이랍시고 가입했지만 출석 한 지 몇 년은 되어 유령회원으로 남은 곳이었다. 태형은 여주의 조별과제를 괴롭히는 이름에서 익숙한 출처를 떠올렸었다. 수십 개 쌓여 있는 단톡방 중 귀찮아서 나가지 않은 곳을 들어가 대화자 목록을 훑고는, 황인성을 찾아냈다. 그리고 또 건너 건너들은 이름을 건너 건너 연락처를 알아내고는. 여주에게 읊은 대로 별 말을 했다. 무려 직접 만나서 말이다. 꽤나 유명한 밴드의 베이스가 직접 찾아온 데서 온 의문이 일말의 공포로 변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다. 갑자기 찾아와서는, 그 얼굴로, 커피 한 잔 사주고선, 여주 잘 부탁드려요, 대신 끝까지 학점 욕심은 내지 맙시다, 양심이 있으면. 라고 하면 우리나라에 겁먹지 않을 김진우와 황인성이 있을까.
“오늘은 저녁 먹고 헤어지자.”
“나 오늘 저녁 약속 있는데?”
“그럼 넌 빠져.”
“뭐지, 좀 서운하네.”
“맨날 여친 있다고 빠지잖아. 그리고 너 목 아껴야 돼. 관리하고 있는 거 맞지?”
“아~ 잔소리~”
윤기와 정국의 말씨름을 배경음악 삼아, 태형은 회상을 시작했다.
우연히 여주와 엘리베이터에 같이 탔을 때. 연락하려던 휴대폰을 집어넣고 여주. 하고 불렀을 때. 놀란 얼굴이 저를 봤을 때. 미리 준비한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들이켰을 때. 아, 그때 진짜 너무 너무 재밌었는데. 평화롭게 맞은 종강과 달리 뭔가 해결되지 않은 기분은 순식간에 치고 올라왔다.
“저희 왔어요~”
그러다가도 순식간에 사라지는 무언가가 웃겼다.
“비비빅 없어, 비비빅?”
“아무거나 먹어.”
“형은 어떻게 내 취향을 알면서도 맨날 이런 것만 사와요?”
“붕어싸만코는 나한테 있어.”
“진짜. 최여주보다 내 취향을 모르면 어떡해 형은?”
“작작 해라.”
지민이 정국에게 꿀밤 때리는 시늉을 하자 정국이 히히 웃었다. 여주는 남은 아이스크림을 냉동실에 넣었다. 그러고서는 휴지를 둘둘 말아 지민에게 내밀었다. 하드 하나를 물고 소파에 녹아 있던 지민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휴지를 받아들었다. 여주의 눈이 지민의 팔로 향했고, 지민은 손가락부터 팔꿈치까지 자국을 남긴 것들을 그제야 닦아냈다. 태형이 그 일련의 모습들을 눈으로 좇았다.
“다 먹었으면 이제 연습할까?”
윤기의 말에 다들 제자리에 가 악보를 펼쳤다. 최-여-주-의-악-보-집. 태형의 맞은편에 있어 보면대에 가려진 악보집이 잘 보였다. 내가 아직 저 앞에 수식어를 안 붙여줬구나. 이어지지 않는 글자들을 속으로 읊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음정과 박자에 맞게, 때로는 엇갈리게, 때로는 멈췄다가, 때로는 스치는 베이스와 기타 줄을 눈으로 쟀다. 재밌네. 재밌어. 뭔진 몰라도 하나만은 확실했다.
“여주야, 너 정말 천재구나.”
“네?”
“음원이랑 거의 똑같이 땄는데?”
“오빠가 코드 잡아줘서 겨우 한 거예요.”
“그래도 이렇게 실현해내는 건……. 나 체인락한테 좀 죄책감 든다. 너무 엄청난 인재를 빼왔어.”
“체인락 언금이에요.”
“미안하다.”
태형에게 여주는 재미 그 이상의 존재가 됐다는 것.
“다시 뺏기고 싶지 않으면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요.”
“…….”
익살맞게 말하는 목소리가 그렇게 노래하는 것도 같아서. 태형은 합주 내내 여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 했다.
물속에 비친 너는
흐리게도 선명하다
손에 물을 가득 담아
너를 한껏 비추어 본다
Moon in water
Wave in water
Moon in water
Wave in water
물속에 미친 너는
여전히 빛이 나고
손에 물을 가득 담아
너를 한껏 비추어 본다
Moon in water
그래 이대로 내 손에 잠겨있어 줘요
Wave in water
하늘 위로 헤엄쳐 갈 수 있으면 해
Moon in water
그래 이대로 항상 내 곁에 있어줘요
4층에서 뛰어오다 엘베 못 잡은 사람: 황인성
그거 황인성인 거 알고 닫힘 버튼 누른 사람: 김태형
종강기념으로 일찍 데려왔습니다
인티에서는 카톡 레이아웃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진짜 모르겠어요 왼 오 이렇게 나누고 싶긴 한데 피씨로 보는 분들이 보기엔 이상할 것 같아서 ㅠ.ㅠ
그리고 지난 글 댓글에 배경음악이 둥탕둥탕 밴드음악이라 좋다고 하시는 분이 계시더라고요! 일부러 밴드 음악으로만 가져오는 거였는데 후후 뿌듯합니다
다들... 밴드음악을 들으세요... 다들... 밴드 하자..!!
그리고 이거 러브라인 있습니다
독자님들: ??? ?? ?????
그럼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