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야/동우]우산 “동우야...내가 다 잘못했어..."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어스름한 새벽. 호원은 악몽을 꿨는지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깬다. 다른사람의 온기라고는 전혀 남아있지 않은 침대와 푸른 빛으로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는 방안. 그리고 소리라고는 창문 밖에서 들리는 빗소리와 호원의 숨소리, 그리고 유난히 크게 들리는 시계의 초침소리.
“하아..."
며칠간 보지못했던, 아니 이젠 볼수 없을지도 모르는 동우가 유난히도 보고싶어지는 호원이다. 물론 그 당시 어쩔수 없었다는걸 누구보다도 잘 알던 호원이었기에 죄책감에서라도 차갑게 동우를 잘라낼수밖에 없었다-라는 핑계로 자기합리화를 하던 호원은 어느새 후회로 물들어간다.
“...지금...혼자 떨고 있을텐데..."
유난히도 비를 싫어하던 동우였기에 새삼 걱정이 머리를 지배한다. 그럼에도 그를 찾아갈수 없는건, 상처를 줘버린 행동에 대한 호원의 죄책감이 아닐까.
“하아..."
호원은 한숨을 쉬고는 그대로 편한 캐쥬얼의 옷 위에 코트를 걸쳐입는다. 그리고 항상 신던 운동화 속에 발을 구겨넣고 비가 올때면 항상 같이 쓰던 검은 우산을 뽑아 든다.
“아...이젠, 없지..."
혼자서 자꾸만 중얼거리며 말하던 호원은 힘없이 피식 웃으며 우산을 잡았던 손을 놓으려다 다시 집어들고는 나간다.
“...동우야...나 진짜 어이없다, 그지...? 그렇게 모질게 대할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이렇게 힘들어하고 있네.."
무심코 손을 넣은 코트의 주머니에는 매끈한 촉감의 케이스. 반지가 끼워져있는 손가락 사이로 불현듯 스며드는 기억이다.
***
“여보세요? 동우야"
“응?" “어디야?" “나? 잠깐 산책하러 공원나왔는데" “아 그럼 내가 거기로 갈게" “아냐, 내가 나갈게" 주머니 속에 곱게 잠들어있는 반지를 다시금 손에 꼭 쥐며 행복하게 웃을 동우의 생각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호원이다. 그리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뛰다, 걷다를 반복한다.
“호야!"
“피식-" 곧 꽤나 먼 거리임에도 확실히 티가나는 동우가 보인다. 그리고 호원은 부푼 마음에 횡단보도를 그저 뛰어 건넌다. 평소 차가 많이 다니지 않던 도로였기때문에 그리 판단했던 것일까. 그리고 뛰어든 순간 들리는 동우의 목소리.
“이호원!"
항상 드라마를 보며 “저런일은 실제로 잘 안일어나. 다 극적인 효과 연출이잖아"라며 코웃음치던 호원이었지만 막상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을 보니 발이 땅에 붙어버린다. 아플줄 알았는데 아무 느낌이 없고 대신 몸이 한쪽으로 밀린다. 정신을 차리고 바라본 옆쪽에는 바닥에 쓰러진 동우가 있다. 진짜 이런 장면은 막장 드라마에서나 일어날줄 알았는데.
“하..."
“...괜..찮아?" “미쳤냐?" 금세 상황파악을 끝낸 호원은 핸드폰을 꺼내들고 119로 전화를 한다. 그리고 동우를 친 차량은 그 사이에 검은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 . . “동우야, 내가 다 미안해..." “..." “조심했었어야했는데..." “...호원군." “...네" “동우보몀 죄책감 들죠?" “..." “그럼 좀 놔줘요. 본다고 좋을 일은 없을것같으니까." 진짜 이게 무슨 드라마 속의 상황인가 싶은 호원이다. 항상 드라마 속에서는 남주인공을 반대하는 어머니. 그리고 그 상황에서도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는 두사람의 사랑. 한가지 다른것이 있다면, 동우를 쉽게 떠나고 말았다는것.
“호야"
“뭐야" “왜그래? 기분나쁜 일 있어?" “신경꺼. 아무사이도 아니잖아" “...뭐..라는거야...호야" “이 지긋지긋한 놀이는 이제 그만하자고" ***
“..."
그렇게 나선 거리는 회색빛 하늘의 영향인지 왠지 생기없어보인다. 검은 우산을 펴고 한발짝씩 내딛으며 장동우를 떠올린다. 둘이서 쓰기에는 비좁았던, 차가운 세상 속에서 둘만의 섬같았던 그 우산이 지금은 너무 커서 어색하다. 항상 젖어있던 왼쪽 어깨가 말라있으니 기분이 묘해지는 호원.
“..."
우산 바깥으로 손을 내밀어 손바닥을 하늘을 향해 편다. 한방울, 두방울 떨어지는 빗물이 손바닥을 적셔가고 잠시 걸음을 멈춘다. 호원을 짓누르고 있는 기억의 무게가 너무 컸던 탓일까,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어느새 풀려있는 운동화끈.
“잠시나마, 우산을 들어줄...사람..."
없다. 호원의 곁에는 그저 스쳐지나가는.사람들과 그를 휘감다 어느새 아무렇지 않은듯 떠나버리는 비와 바람, 그 뿐이다.
***
이런날이면 항상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호원이다. 하늘은 먹구름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노을로 붉게 물들어있었고 여느때처럼 초점이 없는 시선으로 멍하니 땅을 바라보며 집으로 걸어오던 호원은 집 앞의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했다.
“..."
하고싶은 말은 많지만, 그 한마디를 꺼내는 순간 돌이킬수 없음을 알기에 그저 들키지 않도록 조용히 뒤돌아선다. 좋은건지는 쉽사리 판단할 수 없지만 어느새 어둠이 내린 하늘덕에 얼굴과 표정이 쉽게 구분가지 않는다. 그리고 뒤돌아 한두발씩 내딛다 점점 걸음이 빨라지고 꽤나 멀어졌을때쯤 새벽부터 내린 비로 생긴 웅덩이를 밟고 찰박-하는 소리를 낸다.
“하아..."
거친 숨을 몰아 내쉬는 호원. 오랜만에 나서보는 서울의 밤. 곳곳에 하늘의 빗방울로 인해 원형물결을 그리며 퍼져나가는 웅덩이들이 가득하다. 멍하니 물웅덩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니 왠지 낯설어 보이는 호원이다.
“왜이렇게...아프냐"
호원은 더이상 발을 뗄 만큼의 힘이 남아있지 않은듯 그대로 옆의 벤치에 주저앉는다. 이미 아침부터 쏟아진 비에 젖어있는 벤치였지만 옷이 젖는것따위는 신경쓰지 않는다는듯 그대로 우산마저 접어버린다. 한두방울씩 떨어지는 하늘의 눈물방울들이 호원을 감싸고 호원의 눈가도 어느샌가 붉어져있다. 그렇게 얼마나 비를 맞으며 앉아 있었을까 호원은 다시 비틀거리며 일어선다.
“풋...나 왠지 진짜 한쪽 다리가 짧은..그런 의자 같잖아"
마치 한쪽다리가 없어서 휘청거리는, 그런 위태로운 의자처럼 호원도 동우의 빈자리에 점점더 위태로워진다. 자신도 그것을 느꼈는지 힘이빠진 웃음을 짓는다. 별을 가린 구름 사이로 유난히 밝아보이는 보름달이 떠 있다. 호원은 특유의 은색 달빛으로 비추는 거리를 따라 걷는다. 늦은시간 그저 조용한 골목길에 그의 발소리만이 외롭게 들리지만 환청인지 반대편에서도 메아리처럼 발소리가 들려온다. 가슴을 졸이고 걷던 호원의 시야에 비친 그를 꼭 닮은 그림자.
“...장동우."
서로를 볼수 없던 그 시간속에 밝은 달빛으로 인해 너무나도 눈에띄는 서로를 티안나게 눈에 담기 바쁜 두사람이다. 생각없이 동우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려던 호원은 정신을 차리고 입을 굳게 닫는다.
“호야..."
“..." 점점더 가까워지는 두사람이지만 호원은 시선을 그대로 앞으로 고정한채 아무렇지않게 걷는다. 물론 그모습이 위태로워보였지만. 동우는 호원을 발견하고 멈춰서지만 호원은 항상 그랬듯 자신을 숨기고 입술을 깨문다. 한발짝, 두발짝 점점 멀어지는 두사람. 주머니 속으로 깊게 찔러넣은 두 손에서는 반지의 케이스가 만져지지만 더이상 생각하기도 싫은지 금세 손을 빼버린다.
***
그렇게 동우를 스쳐지난것도 벌써 며칠전이다. 먼저 담담한척 지나간것은.호원이었지만 아니나다를까 기억속에 묻혀가는 동우의 모습을 애써 떠올리고 그려가며 상상하는 호원. 그덕에 잠을 설치는건 일상다반사다.
“하아...하아...장동우..."
항상 함께 쓰던 그 검은 우산과 함께 동우의 생각에 깊이 잠을 들지 못한다. 지금 호원의 곁에 동우가 없기에, 창 밖에서 싫어하던 비오는날에 우산을 쓰고 자신을 기다리던 동우가 자꾸 떠오른다.
“...아무리 생각해도, 진짜...혼자서는 안될거같다..."
이 세상이 나를 적시는 차가운 비라면 너, 장동우는 내 머리위에 우산이었으니까. 니가 비오는날 나를 찾듯이, 나도 그게 습관이 되버려서 너 없이는 안될것같으니까.
“내 곁에 니가 없다면, 그건 그저 반쪽의 세상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호원은 그자리에 그대로 멈춰있다. 그의 눈에는 너무 크기만 했던 장동우라는 우산이, 너무나 사랑하지만 그만큼 미안해서 놓아줄수밖에 없었던 동우였기에, 이미 찢겨져 쓸모가 없어져버린 우산처럼 이미 찢어진 두사람이었기에. 다시 돌아봐도 없다는것을 알고있었기에 그대로 멈춰서서 눈물만 흘릴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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