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했던 것 보다 괜찮은 거 같아.
단지 그것 뿐이야? 제 말이 다시 소란 속에 묻힌다. 순영 역시도 그 말에는 대답을 할 이유가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간다. 닫힌 문을 쳐다보다 주먹을 꽉 쥐었어. 손바닥에 손톱으로 눌려서 아파도, 지금 제 심장보다 더 아프지 않다고 생각 해, 겉옷을 입고 가방을 챙겼어. 내가 옷을 챙기는 소란에도 나오지 않던 순영은 제가 현관으로 나서자 문을 열고 말해.
" 야 김여주 가냐? "
" 응. "
" 늦었는데, 조심해서 가라."
순영의 말에 눈물이 나올 거 같아 신발을 신고 대답 없이 나왔어. 제가 나오자 불이 꺼지는 방에 고개를 푹 숙이고 울었어, 나 보고 조심해서 가라고 하기 전에, 자고 가라고 했어야지, 그게 아니면 데려다 줘야지. 그렇게 방에 들어가서 자면 안 되는 거잖아. 난 니 여자친구인데... 입술을 꽉 깨물었어. 안에서 자고 있는 네게, 내 소리가 들릴까봐 입을 막고 너희 집 문 앞에서 비를 맞고 한참을 서 있었어.
장대비를 뚫고 집까지 걸어서 가니, 집에 들어 오자마자 그나마 버티고 있던 힘이 다 빠져버려서 현관에 주저앉았어. 제 앞에 있는 붙어 있는 너와 나의 슬리퍼를 보고 또 눈물이 울컥 나왔어, 세상은 빠르게 돌아가고, 나 혼자 추억에 갇혀 너를 힘들게 했을까, 다 내 탓이겠지. 너가 변했다는 답이 나왔으니, 내가 문제겠지. 답을 바꿀 수 없다면, 문제를 포기하면 되니까... 눈물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나 너의 신발을 쓰레기통으로 던졌어.
나도 이제 추억과 너를 정리 해보려고 해.
따듯한 물로 샤워하고 침대에 누워도 찬바람이 제 주위에만 있는 듯, 쌀쌀한 기운에 이불에 더 파고들었어. 오늘따라 제 침대가 왜 이렇게 커 보이는지, 같이 누웠을 땐, 좁아서 서로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던 침대인데, 오늘은 너무 크다. 지잉 하고 울리는 핸드폰에 순영일까, 바로 확인을 했지만. 스팸 문자였어. 문자를 삭제하고 뜨는 우리의 커플 사진에 배경 화면을 바꿨어. 천천히 나는 이별을 준비했어, 변한 너를 위해. 아프지 않을 나를 위해
" 여주씨! "
" 어? 이 팀장님? 오늘은 출근 차로 안 하시네요? "
" 그냥, 회사도 가깝고 기름이 워낙 비싸야죠. 와, 근데 여주씨가 이 동네에 살 줄 몰랐네요. "
" 저도 이 팀장님이 여기서 사는지 몰랐어요. 어디 사세요? "
" 왜요? 어디 사는지 아시면 놀러 오실 거에요? "
" 예? 예... 뭐, 가죠. 뭐."
저를 다정하게 쳐다보는 석민에 괜히 어색하게 웃어 보이곤 고개를 돌려 버스가 오는지 안 오는지 확인하다 다시 석민을 쳐다보니 여전히 싱글벙글 웃고 있다. 하하. 저에게 다정한 석민의 태도에, 솔직히 안 흔들린다면 거짓이다. 하지만 정확한 것도 아니고, 그냥 자주 마주치는 것일 뿐이고, 석민이 친절한 거라고 생각했다. 버스가 오고 아침이라 사람이 많았어. 사람들 틈을 뚫고 지나가기가 힘들어 비틀거리자 제 팔을 잡는 단단한 손에 고개를 드니 석민이였어. 자리를 잡고 제 뒤에 서서 꽉 잡아주는 석민에 덕분에 흔들리지 않고 내렸어. 내리자마자 석민에게 감사하다고 90도로 인사를 했고 석민은 짓궂게 웃으며 말했어.
" 고마우면 김여주 씨가 오늘 저녁 사시면 되겠네요. "
" 당연히 사드려야죠. "
" 어? 진짜요? 그럼 저 비싼 거 먹습니다. "
" 그런 뜻은 아닌데. "
" 그럼 퇴근하고 같이 나가요. 여주 씨가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
라며 웃으며 먼저 자리로 가는 석민을 보고 오랜만에 웃음이 실실 나와, 어깨를 으쓱이곤 사무실로 들어가는데, 언니가 뭔 일 있냐고 물었어. 왜요? 제 말에 눈이 많이 부었다고 울었냐고 물어보는 말에 그냥 미소만 보였어, 티 나요? 응. 엄청! 오늘 그냥 쉬지, 아니에요. 간단한 대화를 끝내고 자리로 앉아 컴퓨터를 켜니 제일 먼저 보이는 카톡 잠금 화면이었어, 그러고보니 폰을 한번도 안 봤네. 비번을 치고 들어가자 제일 먼저 보이는 너의 카톡이었다.
아. 새벽 1시 30분이라... 안 잤으면 나 나갈 때 잡았어야지. 로그아웃 버튼을 누르고 일에 집중하기로 해. 괜찮아. 내가 나를 애써 위로하며 시선을 카톡에서 아예 거두고 폰 전원을 껐어. 드륵 드륵, 프린터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어, 종이를 먹었나? 싶어서 아무리 툭툭 치고 안을 열어봐도 안 되는 프린터에 오늘따라 되는 일이 없는 느낌에 화가 나 프린터를 발로 찼어. 어허. 회사 물건인데 그렇게 차면 안 되죠. 라는 말에 놀라서 쳐다보니 석민이 커피를 들고 서 있었어. 아, 이 팀장님... 저에게 커피를 양손에 넘겨 준 석민은 프린터를 이리저리 만져보다 종이를 빼내자 빨간 불이 꺼졌어.
" 프린터가 종이를 먹었네요, 그렇다고 그렇게 때리고 그러면 안돼요. "
" 체해서 제가 두드려준 건데요 뭐. "
" 하하. 진짜 여주 씨는 너무 귀여워요. "
" 예? 놀리지 마세요. "
" 알겠어요, 커피 하나는 여주 씨 거예요. "
" 우와! 감사합니다. "
" 감사하면, 저 오늘 밥 비싼 거 먹을 겁니다! "
마실려던 커피를 석민에게 다시 주니, 장난이라며 웃으며 제 손을 맞잡곤 커피를 넘겨줬어. 따듯하고 큰 그 손이 제 손을 덮을 때 그 잠시 동안 저는 순영과 첫 손 잡았을 때, 그 느낌처럼 찌릿한 느낌에 석민을 쳐다 볼 수가 없어 인사를 하고 자리로 갔다. 아, 오랜만에 설렘이라 적응 안 되네. 아 맞다! 복사한다는 걸, 그냥 두고 나왔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제 어깨를 잡고 누르는 손길에 쳐다보니 웃으며 제 자리에 프린터를 두고 가는 석민이였다. 제게서 석민의 자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 수고했어요, 모두. 수고하셨어요. "
" 여주씨 수고했어요. "
" 네! 부장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
6시. 아직 이 팀장님은 일이 남아서 책상을 톡톡 치니 피곤한 눈으로 고개를 들곤 환하게 웃는다. 밑에서 기다릴게요 라고 말하니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이팀장님에게 웃어 보이곤 사무실을 나왔다. 하, 어제 퇴근 시간은 기분이 별로였는데, 오늘은 기분이 좋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니 떡 하니 앞에 서 있는 권순영에게 놀랐어. 뭐야? 여기 어떻게 들어 왔어? 왜 그렇게 놀래. 무심하게 말하던 너는 나에게 립스틱을 보여줬어.
" 등신아. 립스틱 가져가라고 했잖아. 내가 카톡 했는데 안보냐? "
" …. 바빴어. "
" 그러냐? 저녁에 뭐하냐. 온 김에 밥 먹자. "
" 너 오늘은 일 없어? "
" 갑자기 왜 내 일을 니가 찾아. 오늘은 없어. "
" .... "
" 뭘 째려봐 못생긴 게, 가자. "
" 너 어제는 뭐 했는데? "
" 어제? 친구 생일이라서 바빴어. "
친구 생일? 너 나랑 보낸 7년 동안 친구 생일 같은 거 없었잖아. 뻔뻔하게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너가 미워서 제 손을 잡는 너의 손을 쳐냈어. 약속 있어. 제 말에 취소하라며 심드렁하게 말하는 너에게 이제 진짜 나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 느낌에 남은 거 하나도 없지만, 마지막 작은 자존심으로 싫다고 말했어. 무슨 일 있냐? 라는 권순영의 말은 또 다정해서 그냥 니가 밉다고, 거짓말하는 네가 싫다고 말하고 싶었어. 다른 손이 제 손을 잡기 전까지는,
" 여주씨 누구에요? "
" 그 쪽은 누구신데요? 아. 아, 김여주. 애인? "
" 그런거 아닙니다. 여주씨 가죠. "
" 미안한데, 그런 거 아니면 좀 비켜줄래요? 저는 얘 애인이라. "
" 애인이면 이렇게 막무가내로 데리고 가면 안되죠. "
" 애인이라서 이렇게 데리고 가는 겁니다. "
" 야! 권순영 그만해! "
제 말에 화난 듯, 나를 쳐다보는 권순영의 시선에 고개를 푹 숙이고 권순영 손에 쥔 립스틱을 뺐어 들고 이석민에게 허리를 숙였어. 죄송합니다. 오늘은,
석민이 제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제 손에 든 가방을 들었어. 그리곤 빈 제 손을 꽉 잡는 석민의 행동에 쳐다보니 짐짓 단호한 얼굴로 말했어.
" 안됩니다. 저 여주씨와 먼저 약속했고, 오늘 꼭 밥 먹을겁니다. "
그러곤 저를 데리고 그대로 밖으로 나왔어. 멍하게 따라오던 너는 놀라 석민의 손을 빼려고 했지만 석민이 더 꽉 잡고 놓아 주지 않았어, 결국 회사 앞, 음식점으로 들어갔고 너는 제 앞에 있는 석민의 눈치만 봤어. 이 팀장님, 많이 화났나? 손장난을 치며 석민을 또 힐끔 쳐다봤어. 한숨을 푹 쉰 석민은 말했지
" 봤어요, 어제. "
" 네? 뭘 요? "
" 약속 있다면서, 왜 버스 정류장에 가만히 앉아 있었어요? "
" 아…. "
" 그런 남자한테 상처 받고 울 필요 없어요. "
지잉 하고 울리는 핸드폰에 화면에 띄어진 건 너의 이름 세 글자였다. 손을 뻗어 받으려는데, 제 손을 잡는 석민을 봐
" 안돼요. 지금은 나랑 있잖아요. "
너는 점점 내게 멀어졌고, 석민은 내게 점점 커져갔다.
" 시발! 진짜. 전화는 왜 안 받아. 김여주. "
(+)
석민이와 순영이 사이 흔들리는 여주와 그런 여주가 불안한 순영이.
순영이는 점차 후회의 늪으로 빠지고 있어요.
아마도 이거 마지막편인 다음편에서 누구와 이어질지 나올 거 같아요.
독자님의 선택은?
석민 vs 순영!
참고로 번외편으로 순영의 입장에서의 편도 나올 거 같아요
이번 편은 수위가 없어서 낮은 포인트로 할게요
그래도 포인트 아까우니 포인트 다시 받아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