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망초 下
새벽이었다.
은밀히 종인을 안채로 부른 여자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온몸을 비취로 휘어감은 후처의 분칠이 가득한 얼굴을 종인이 무심히 바라보았다. 독하디 독한 사향 냄새가 났다. 노리개에서 난 그것과 같은 향이었다. 박찬열은 이따위 것 안 해도 충분히 부드러웠는데. 오랫만에 마주하는 젊은 얼굴이 퍽 달가웠던 듯 여자가 먼저 종인에게 말을 걸었다. 수심이 가득한 척 연기하는 가식이 우스워 종인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 처를 잃어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어.
" 죽지 않았다면 찾는 것이 지아비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
그렇게 종인은 여태껏 저가 산촌을 돌아다닌 것을 구실삼아 태연스럽게 거짓말을 뱉었다. 여자의 두 눈가가 가늘어지는 것을 종인이 유심히 주시했다. 금새 날이 선 두 눈에 종인은 방금의 가식들이 완전하게 벗겨진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종인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무섭게 따라붙는 시선의 여자는 입술이 시뻘갰다. 빗대어 표현하자면, 희대의 요귀인 달기에도 견줄 만했다.
" 허나 아무리 산촌을 뒤져도 단서 하나 나오지 않으니.. "
허나 그도 어차피 귀신인 만큼, 요귀 하나를 현혹시키는 것 쯤은 쉽지 않겠는가?
종인이 난색을 표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 청년을 표방하는 젊은 눈빛에 현혹된 어리석은 여자가 종인에게 손을 뻗었다. 제 얼굴을 매만지는 손길이 역겨워 잠깐 동안 인상을 찌푸릴 뻔 했지만 종인이 놀란 표정으로 화답했다.
- 피부가 많이 상했네, 상처도 많이 생기고.
" 아내를 찾는 지아비로서는 당연한 일입니다. "
- 상심이 클 테니, 위로해 줄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나?
" … 마님? "
내 혼자 보내는 밤을 심심치 않게 해줄 자신은 있는데.
천박하게도 웃던 여자가 종인을 제 금침으로 끌어당겼다.
종인은 문득 안채 밖에서 사그락거리는 발자국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찬열일 것이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종인이 애써 표정을 숨기고 여자의 옷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찬열과 살을 섞던 것과는 정반대로 관계는 추했고 남는 것은 더러움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끝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 종인은 멀찍이서 저를 바라보는 눈물 젖은 제 정인의 두 눈과 마주쳤다.
마주치자마자 원망섞인 시선이 저를 향한다.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한 발자국 내딛자 마자 저를 피해 도망가는 찬열을 마지막으로, 둘의 만남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찬열은 종인을 찾지 않았고, 종인 역시 찬열에게 해명할 마음을 갖지 않았다. 가끔 가다 마주하는 시선에는 배신감과 상처가 적나라하게 묻어나는 그것이었다.
두 번째로 몸을 섞은 날 밤, 종인은 여자가 잠든 사이 옆의 장롱을 뒤졌다. 여자가 혼에 빠져 있을 적 자신이 더욱 강한 것을 썼던 탓에, 여자는 이미 깊은 잠에 빠진 지 오래였다.
온갖 장신구와 옷감들로 가득 찬 두 번째 서랍을 지나 세 번째 서랍을 열자 알 수 없는 두루마리들이 있었다. 그것들을 살피다 한 장을 손에 쥐었다. 필체가 전부 같은 것들이었다. 모두 치우자 둥글게 말린 종이 두 장이 종인의 앞에 자리했다. 역시나 앞전의 것과 같은 필체였다. 그 안에서 찬열을 무참하게 스러지게 만든 과거의 일화들을 조금이나마 찾을 수가 있었다. 종이를 쥔 종인의 손이 떨려오고 표정이 빳빳하게 굳는다. 종이 맨 끝에는 인감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찬열을 겁간하고 죽여라.
저가 보름 전 때려 없앴던 도적에게 내렸던 명령이었다.
세 번째로 몸을 섞던 때에, 여자의 손아귀가 두 번째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종인의 앞에 내밀어졌다.
비취 허리띠였다. 영롱한 초록빛의 그것을 받는 종인을 보는 그녀의 눈길이 웃음기로 물들었다. 종인을 제 손아귀에 넣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곧 이것을 증거로 제출하여 저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을 미래는 생각도 하지 못한 듯 했다. 골빈 여자의 비위를 맞추는 일은 이제 이골이 날 대로 났지만, 제 아무리 그렇다 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좀처럼 사치를 즐기지 않는 종인은 내밀어진 허리띠에는 일체의 관심도 없었지만, 억지로라도 있는 척을 해야 하는 것은 고역이었다. 등을 돌린 종인이 제 탄탄한 등판을 쓸어내리는 여자에게 고개를 돌려 능청스럽게 말을 건넸다.
" 비취군요. "
- 마음에 들지 않으냐?
" 아닙니다. 마님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서. "
찬열은 딱히 치장이 없어도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딱히 화려한 기색은 아니었다. 흰 편인 얼굴과 장밋빛 뺨이 적당히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찬열은 수수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아름다웠다. 종인아. 같이 오솔길을 거닐던 때의 일화와, 제 이름을 불러주던 아름다운 목소리와 가만히 웃어주는 얼굴.
결국, 지금 이 앞의 천박한 여자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차이라는 것이다.
종인은 다시 침묵했다. 여자는 그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 싶었다. 곧, 종인이 능청스러운 기색으로 결정타를 던졌다.
" 읍내에서, 아름다운 노리개를 보았습니다. "
- ……!
" 칠보가 박힌 비취가 제법 쓸만하더군요. "
필요하십니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제안하는 종인의 앞에 흙빛으로 물든 여자의 얼굴이 있다. 아, 아닐세. 노리개라면 차고 넘치니. 아, 얼마나 멍청한가. 당황감을 숨기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라니! 종인은 속내로 조소했다. 여자는 아직까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 말이 의도적이었다는 것조차.
종인은 허리띠에서 물씬 풍기는 사향의 향내를 맡고서 다시 비릿하게 조소했다. 허점은 많았고, 그것은 종인이 증험을 잡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결정적으로 죽은 아내가 갖고 있던 비취 가락지를 그대로 보관해둔 것이 결정타였다. 약간 깨진 그것에서도 특유의 사향 내음이 짙게 풍겼다. 어찌하여 결정적인 증거물이 되냐 하면, 그것은 혼인날 종인과 함께 맞췄던 쌍가락지였던 탓이다.
모든 증험을 잡았으니 이제 마지막만 남았다. 실행에 옮겨야 하는데 자신이 상처입힌 사람의 눈길은 영락없는 아픔이어서, 종인에게도 아픔으로 되돌아왔다.
보름 간의 일탈 아닌 일탈 이후 진전이란 없었다.
찬열의 얼굴과 몸에 다시 상처가 하나 둘 늘어갔다. 웃지도 않았다. 그저 멀건 눈으로 허공을 쳐다보면서 지낼 뿐이다. 종인이 기꺼이 구호의 손길을 뻗었으나 마주칠 때마다 그것을 싸늘한 눈길로 쳐내기 일쑤였다. 찬열은 자신을 볼 때마다 고통과 상처에 얼룩진 눈길을 보내고는 했다. 그러고는 다시 도망가버린다. 차갑게 제 손을 뿌리치는 흰 얼굴에 언뜻 슬픔이 깃들었다. 찬열이 아팠기 때문에, 종인도 같이 아팠다. 청춘의 열병은 생각보다 지독하고 괴로운 것이었다.
종인은 되찾고 싶었다.
제 곁에서 엉엉 우는 얼굴을 다시 한번 보고 싶다. 허벅지를 베고 누우면 아무 미동도 없이 웃어주는 얼굴이 예뻤다. 탈진할 정도로 밀어붙이던 정사에도 반항 한 번 하지 않았다. 단지 고백을 하지 않았을 뿐이었는데도, 무작정 말 한 마디만 남긴 채 그대로 실행에 옮겨버린 종인의 잘못이 컸다. 그러나 쉽지가 않다. 찬열과의 애정사는 언제나 난관이었다. 종인은 더 없이 조급해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오년 전처럼 찬열을 잃을 것만 같아서, 겁이 났다. 종인은 날이 갈수록 짙어져만 가는 상처의 눈빛을 그대로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결국 발걸음은 산 중턱의 느티나무로 이끌어졌다. 찬열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종인이 산 중턱을 넘어 근처에 다가서자 무언가가 타는 소리가 났다. 느티나무 앞이었다. 걸어가자 어느 누군가가 수많은 종이들에 불을 놓아 태우고 있었다. 등을 돌린 뒷모습이 누군지는, 그 누구도 아닌 종인이 제일 잘 알았다. 어줍잖게 불을 놓아 발로 몇 번 휘저으니 금새 불이 꺼졌다. 팔을 잡아 끌어당기자 저를 바라보는 얼굴에서 경련이 일어난다. 보름만에 마주친 정인은 많이 말라있었다. 애써 제 시선을 피하는 찬열의 표정이 애처롭다.
" 이게 무슨 짓이야. "
" 부탁이니까, 이것 좀 놔. "
" 지금 도대체 왜 이러는지나 말해. "
" 싫어. "
눈물로 그렁그렁한 두 눈이 종인을 쏘아보고 있다. 상처와 아픔에 잠식된 그것을 목격하자 종인은 사뭇 괴로워졌다. 자신도 화가 났다. 창백하게 질린 찬열의 뺨을 쓸어내리며 입을 맞췄다. 거세게 반항하는 몸짓이 필사적이다. 주먹을 쥐어 종인의 등을 마구 때렸지만 크게 아프지는 않았다. 종인은 화가 났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데 겁이 나는 저 자신에게 화가 났고, 믿어달라고 했는데도 끝내 등을 돌려버린 찬열에게 화가 났다. 입안을 정신없이 휘젓는 데 제 정신을 쏟아부으면서도 속내에서는 이런 저런 감정이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입술을 떼자, 곧바로 찬열이 제 뺨을 때렸다. 이번 것은, 꽤나 매서웠다.
" 뺨도 때릴 줄 아네. "
" 나쁜 새끼.. "
" 내 앞에서 욕도 하고. "
초점이 뚜렷한 찬열의 두 눈과 종인의 눈이 서로 맞부딪혔다. 찬열의 눈에 고인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 제 치졸함에 화가 났다. 그러나, 뒤늦게 손을 뻗으려던 중 타다 남은 종이 쪼가리들에 적혀있는 수많은 글을 보고서 할 말이 없어졌다. 하, 하지 마! 손을 뻗자 그러지 못하게 하려는 찬열의 반항이 이어졌지만 결국 종이는 종인의 손에 쥐어졌다.
[1940年 7月 12日]
그것은, 저가 수없이 보냈던 편지들이었다.
보관하고 있었던 주제에 모든 편지들을 묶어 태우려 한 찬열에게 화가 났다. 종인이 분노에 떨리는 채로 일갈했다.
" 이걸 태운 저의가 뭐야. "
" … 싫어서, 싫어서 그랬어. "
" ……. "
심장이 아프게 찢겼다. 종인은 이 순간에도 한순간의 치졸함에 정신을 뺏긴 저 자신에 끊임없이 화를 냈다. 그러나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찬열은 언제나 제자리였다. 한 걸음 물러서도 제자리, 한 걸음 걸어가서도 제자리. 종인도 찬열만큼이나 상처받았다. 모호한 애정만을 기대하고 바라는 헛짓은 이제 그만두어야 했다. 찬열을 보는 눈길에 상처가 적나라하게 묻어나는 것조차, 찬열은 그저 회피하기만 하는 지금에서야 그것을 깨달았다.
" 그렇게 내가 미웠어? "
" ……. "
" 나도, 나도 그런데. "
너무 사랑해서 겁이 나.
뒷말을 끝내 잊지 못했다. 찬열의 어깨를 잡은 종인의 두 손이 부들거리며 떨렸다. 찬열은 종인의 눈을 피해버린다. 그래, 너는 그랬다. 실컷 기대하게 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서 홀로 남게 만든다. 종인은 아직까지 찬열이 제 앞에서 누이를 행복하게 해 달라 말했을 적의 참담함을 잊지 않았다. 그러니까, 박찬열. 너는, 너는.
" 똑같아, 예전처럼. "
항상 기대하게만 만들잖아 나를
찬열의 원망 서린 두 눈을 무시했다. 종인은 찬열의 의복을 찢어내듯 벗겼다. 악악대며 반항하는 목을 짓누르고 맨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언뜻, 찬열의 얼굴을 보았던 것 같다. 환멸감에 잠긴 상대의 두 눈을 마지막으로 종인이 이성을 놓았다.
" 이건 네 죄야. "
내 죄가 아니라.
두 눈이 검게 물들었다. 종인이 그를 면죄부 삼아 찬열의 다리를 우악스레 벌렸다.
정신없이 탐했다. 죄악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종인은 옆에 힘없이 널부러진 채로 흐느끼는 찬열을 보고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챘다. 하지, 하지 마. 하지 마 김종인. 목이 잔뜩 쉬어 엉엉 울던 찬열의 얼굴에서부터 단편적으로 서서히 기억이 수면으로 떠올랐다. 종인은 제 손으로 이룩한 지금의 지옥에 크게 자조했다. 결국에는 스스로가 파멸시킨 관계였다.
저를 본 찬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서는 멀어져 갔다. 일어서는 데에도 시간이 한참 걸렸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천천히 한 걸음 두 걸음 절뚝거리면서 멀어지는 것을, 종인은 잡지도 못했다. 뒤틀리고 망가진 관계가 드디어 마침표를 찍나보다 했다. 이제 종인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황무지가 되어버린 세계에 남은 것이 없어서 종인이 그저 피식거리며 웃기만 했다. 비탄에 빠져 타다 남은 종이조각을 헤집었다. 제 청춘의 마지막이 겨우 이런 식으로 끝날 줄은 몰랐다, 라 생각하며.
그러나, 손에 잡히는 게 있었다.
다 타고 잿더미가 묻어 엉망인 것들 중 그나마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반절이 탄 편지지는 자신이 보낸 것이 아니었다. 종인은 그것이 불에 탄 줄도 잊어버렸다. 그저 편지에만 시선이 가 있었다. 저가 무언지도 잊어버렸다. 거의 전부가 타고 글씨를 알아볼 수 없었지만 제 글씨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좋아해]
반듯하게 써져있는 그것은, 저가 그토록 기다리던 찬열의 답장이었다.
종인은 말하는 것도 잊어버렸다. 속내에서, 실나락같은 희망이 돋기 시작했다.
느티나무 가지에 종이를 매달았다.
마지막 희망이었다. 다 찢어지고 해진 마음에서 우러나온 마지막 기대였다. 자신이 상처입힌 찬열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상처입힌 찬열에게서 진실을 들을 수 있기를 기대했다. 종인은 과거의 회귀를 바라지 않았다. 단지 더 이상 이 의미없는 제자리걸음이 필요치 않기를 바랬을 뿐이다.
[내일 새벽 축시¹에 나와줘]
¹ 새벽 1~3시
외진 느티나무 근처로 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종인이 매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인기척이 보였다. 찬열이었다. 주저하다 결국엔 종이를 뜯는 것을 보고서야 종인이 뒤를 돌아 사라졌다. 해가 지고 있었다.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거짓말쟁이,
찬열은 이번에도 속았다는 마음에 입술을 피가 나도록 꾹 깨물었다. 축시가 다 되어 가도록 김종인은 오지 않는다. 그는 천하의 파렴치한이다. 저 자신에게 다시 없을 악한이다. 제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 자신의 잘못이라더니 심장께를 한꺼번에 헤집는 악행이 너무나도 얄궂다. 항상 그랬다. 다가오는 척 하면서 먼저 등을 돌리는 건 종인이었다. 오년 전의 어느 날 찬열은 그런 식으로 상처를 입었다. 결국 아무 것도 모르면서. 그러면서, 모든 책임을 나에게 전가하는 건 자기면서.
- 나는 사랑할 수 없어.
나쁜 자식,
후덥지근한 늦여름의 공기가 찬열을 질식하도록 만든다. 입술을 깨물었는데도 눈물은 흘러나온다. 저를 두고 좋아한다 말해주기에 달라진 줄 알았다. 헛수고였다. 저를 이렇게 만든 종인이다. 폐부부터 심장까지 마구잡이로 찢어놓은 장본인은 종인인데도 종말이 자신의 탓이라 말한다. 더 없이 밉고 싫어 죽겠는데, 다 알면서도 계모에게 몸을 준 것도 미워서 죽을 것만 같은데.
- 믿어줘.
- 믿도 끝도 없겠지만, 그냥 믿어.
나쁜 자식.
끝내 단념하지 못하게 해서, 눈물이 났다.
종인은 제게 무자비하다. 편지를 하지 못했던 이유는 겁이 나서였다. 찬열은 관념상 사랑하는 누이의 남편인 종인과의 애정을 차마 지속해나갈 자신이 없었다. 편지를 쓰면서도 보내지 못했다. 계모는 누이와 자신을 무자비하게 괴롭혔고 제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누이의 시신을 폭포수에 밀어넣던 계모를 보면서 결국 찬열은 미쳐버렸다.
맨 처음 그를 퉁명스레 얕본 것도, 실은 관심이 생겨서였다. 누이의 남편이 될 꼬마는 열넷인데도 열넷답게 보이지가 않았다. 저보다 키가 작은데도 동년배처럼 보이는 얼굴에 내심 설레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열여섯에 수면 아래로 떠오른 애정이라는 샘물은, 생각보다 크고 깊은 것이었다.
- 이건 네 죄야.
끝없이 샘솟는 애정은 결국 스스로를 파괴했다.
그것이 찬열과 종인의 애정이었다.
숨죽여 울던 찬열이 느티나무를 바라보았다. 이제 축시가 거의 다 되어간다. 맨 마지막의 희망을 종인이 무너뜨린다면 찬열은 그대로 돌아갈 생각이다. 함께 있던 모든 시간들이 전부 제자리가 된다. 김종인과 박찬열의 형체가 남김없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울음을 삼켰다. 새벽의 암흑은 점점 더 찬열을 고립시킨다. 찬열은 맨 마지막으로, 저가 말했어도 믿지 않았던 전설대로 백을 세기 시작했다. 이것만 끝나면 종인을 잊을 참이다.
하나, 둘.
- 왜 답장 안했어.
일곱, 여덟.
- 화도 안 나냐?
- …….
- 당하고만 있으니 좋았어?
서른하나, 서른 둘.
- 좋아해.
찬열의 눈가가 미약하게 떨렸다.
일흔 셋, 일흔 넷.
- 그렇게 내가 미웠어?
- 나도, 나도 그런데.
찬열은 결국 소리없이 울기 시작했다. 종인이 야속하다.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서는 훌쩍 저만 살겠다고 사라진 그가 야속하다. 세면서도 심장을 퍽퍽 쳤다. 비린 피가 제 혀끝으로 다가왔지만 그럼에도 세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 순간마저 종인을 생각하는 저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여든 다섯, 여든 여섯.
- 행복하게 못 해줘.
- 인아…
-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야.
잊을 수, 잊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흔 일곱, 아흔 여덟..
- 믿어줘.
- 밑도 끝도 없지만, 그냥 믿어.
…어떡해, 못 잊겠어.
아흔 아홉.
찬열은 결국 말하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차마 그 다음 숫자를 생각하면서도 말하기가 힘들었다. 이 다음 숫자면 종인을 잊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지도 못할 것 같아 제 자신이 비참하다. 한없이 비참해진 제 신세가 허탈해진다. 손 안에 쥐어진 노끈을 만지작댄다. 오지 않는다면 죽으려 했던 작정이 현실이 되는가 싶었다. 결국엔 저를 버릴 종인인데도, 나는, 나는…. 개자식이라고 비난하면서도 결국 입술을 떼어 뱉으려 하던 찰나였다.
그런데,
" 백. "
종인아.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에 눈물이 터졌다.
종인이 몸을 일으켜 세워 펑펑 쏟아지는 찬열의 눈물을 닦았다. 팔에 들린 몇 개의 두루마리들과 보자기에 싼 무언가를 내려놓고 울음소리도 못 내는 찬열의 눈물 젖은 볼을 쓸어 주었다. 소리 없는 울음이 한동안 이어졌다. 줄곧 끌어안고만 있었다. 그럼에도 슬프지 않았다. 가슴 안에서 사랑이 샘솟고 있었다.
" 나도, 나도 겁이 났어… "
" 흐,아,아어,으어.. "
" 너무 사랑해서 없어질까 겁이 났어, 나만 상처받을까봐 겁이 났어. "
너무 늦었지, 미안해.
제 귓가에 다정하게 속삭이는 종인의 목소리에 눈물이 났다. 싹트고 말라갔던 애정이 드디어 결실을 피웠다. 박찬열, 찬열아. 귓가에 들려오는 다정한 목소리에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종인아, 종인아.
" 도망가자. 우리, 이 마을에서 도망치자. "
" 흐윽.. "
" 언제나 호강시켜주겠다는 약조는 할 수 없어. 하지만…. "
적어도 행복하게 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 네 옆에 항상 있어줄게.
볼에 닿는 입술이 흐르는 눈물을 감쌌다. 경성으로 가자, 같이 가서 함께 있자. 속삭이는 종인의 목소리가 꿈결 같았다. 찬열이 제 허리를 감싼 종인의 몸을 마주 안았다. 지금 이 상황이 꿈결 같다. 종인아, 종인아. 응.
" 조, 좋아. "
나, 좋아.
달빛 아래 비친 환하게 웃는 얼굴이 마냥 아름다웠다. 종인이 찬열에게 그대로 입맞추었다. 입맞추는 두 사람의 모습을 달빛이 아름답게 비추었다.
경성에 가면.
으응…?
혼례를 올리자.
조, 종인아!
사랑해.
…….
대답, 듣고 싶어.
… 나,나도..
사랑해.
꼭 잡은 두 손이 서로를 놓지 않았다.
終
이 팬픽은 모 홈 이벤트 축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