使命
제노 BEHIND
"제노야, 이제부터 너는 아가씨를 지켜드리는 일을 하게 될거야."
아가씨를 꼭, 지켜드려야해.
이 기억은 내가 갖고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이었다. 세네 살 적, 뛸 수 있을 때부터 나는 아가씨를 지켜드려야했다.
"...이제노?"
처음으로 아가씨를 만났던 날, 아가씨는 연분홍빛 드레스를 입고 내게 다가왔다.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의 모습이 마치 벚꽃처럼 흐드러지게 아름다웠다.
"... 안녕하세요, 아가씨."
어린 아이의 입에서 나온 아가씨라는 소리가 우습기 짝이 없었지만, 나는 긴장했었다.
혹시나 아가씨의 기분이 상할까, 아가씨가 기분이 나쁠까.
어린 나이에도 나는 눈치를 봤다.
"응, 안녕."
다행스럽게도 아가씨는 활짝 웃었고, 나는 그 웃음을 본 뒤 다짐했다.
내 평생 아가씨를 지켜드리리라.
아가씨는 늘 나와 함께이고 싶어했다.
밥을 먹을 때면 언제나 내게 옆에 와 앉으라 했고, 나는 아가씨의 말에 못이기는 척 옆자리에 앉아 아가씨의 말동무가 되어드리기도 했다.
"제노야."
"네."
"나는 너가 내 옆에 있다는 게 정말 큰 행운인 것 같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아가씨의 목소리에는 한치의 거짓도 없었다.
"...네."
그냥, 아가씨는 내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걸 내가 알고 있으니까.
열여섯 즈음, 집에 잠시 돌아갔을 때, 나는 아버지께 크게 혼이 났다.
"너는 아가씨를 지켜드리는 역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야."
바닥을 향해 숙인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아가씨께서 선을 넘지 않도록 처신 잘하거라."
고개를 끄덕이고 나를 방으로 돌려보내는 아버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나는 침대에 풀썩, 누워 천장을 쳐다봤다.
천장에는 또 아가씨의 웃는 모습이 어른거렸다.
두 손으로 마른 세수를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가씨의 환한 얼굴이 자꾸 생각났다.
시간이 더 흐를수록 아가씨는 점점 더 단단해진 사람이 되었지만, 나는 아가씨에게만 무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아가씨의 말 한 마디에 웃음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다, 입 안 쪽이 너덜하게 상한 적도 있었다.
"제노야, 너는 성인이 되면 하고 싶은 거 없어?"
19살 끝무렵, 눈이 오던 겨울날. 어른이 되기 직전의 아가씨는 눈을 맞으며 내게 물었었다.
"...글쎄요."
어디 다른 곳에 가지 않고, 여전히 아가씨의 곁을 지키고 있지 않을까요.
"나는 말이야, 성인이 되면."
옅은 바람에 흩날리던 눈이 아가씨의 발간 코 끝에 사뿐히 내려 앉았다.
아가씨는 내리는 눈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어. 공주, 이런 거 말고."
근데 안되겠지?
나를 보며 씁쓸하게 웃는 아가씨의 얼굴은 어느새 많이 자라있었다.
"...그렇죠."
근데, 아가씨.
만약 아가씨가 공주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만날 수 있었을까요.
아가씨의 스무살 첫 생일, 나는 아가씨의 선물을 사기 위해 잠시 외출을 했다.
궁 밖으로 나오니, 막상 갈 곳도 없어 무작정 발길이 닿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러가 문득 눈에 띈 악세사리샵. 그냥, 그 날은 왠지 안에 들어가야할 것만 같았다.
"어서오세요-"
나긋한 직원의 인사를 어정쩡하게 받고, 진열 되어있는 악세사리들을 찬찬히 살펴봤다.
밝은 조명 아래 반짝거리는 악세사리들은 모두 아가씨와 꼭 잘 어울릴 것 같았다.
"혹시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너무 오랜 시간동안 둘러만 봤나, 직원은 내게 다가왔다.
"...그냥 적당히 예쁜 거 없나요?"
"애인분께 선물해드리려고요?"
주머니에 넣은 손으로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무언가가 발끝에서 저릿하게 올라왔다.
"...네."
직원은 나의 말에 잠시 걸음을 옮기더니, 내게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상자를 열어보니, 은색 나비 모양 펜던트가 걸린 목걸이였다.
"이걸로 주세요."
무슨 결심인지, 무슨 생각인지, 아니면 무모한 결정이었을지.
나는 다른 걸 볼 생각도 못하고 덜컥 목걸이를 구매하고 궁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도 계속 목걸이를 힐끔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궁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긴장해서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 두 번 노크를 했다. 나는 종이 가방을 등 뒤로 숨기고 방문을 열었다.
"응, 제노야. 왜?"
그래,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가씨는 목걸이보다 더 좋은 선물들을 차고 넘치게 받을 수 있다는걸.
나는 잡고 있는 종이 가방 손잡이를 더 세게 쥐었다. 안에 쌓여있던 무언가가 와르르 쏟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수업 없으니 편하게 쉬세요."
"고마워."
"그럼 필요한 거 있으면 부르세요."
나는 조심스럽게 방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았다. 문을 닫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괜히 샀나.
"제노야."
벌컥, 열린 문에 깜짝 놀라 종이 가방을 놓쳐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아가씨의 표정에는 장난끼가 가득 담겨 있었다.
"왜 선물 사놓고 안줘?"
"...아."
"섭섭하네."
나는 너가 주는 선물이 제일 좋은데.
밉지 않게 흘겨보는 저 동그란 두 눈에 내가 담길 수 있었구나.
나는 서둘러 떨어진 종이 가방을 주워 아가씨에게 건넸다.
아가씨는 신이 난건지, 상자를 여는 손길이 빨라졌다.
상자를 열자마자 아가씨는 입을 동그랗게 모으며 감탄했다.
"진짜 예쁘다..."
다행이다.
아가씨의 반응에 안심이 되어 스리슬쩍 미소를 지었다.
"나 목걸이 해줘."
내가 거절할 틈도 없이 아가씨는 내게 목걸이를 쥐어주면서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잡아 올렸다.
잔머리가 느릿하게 흘러내렸지만, 아가씨는 아무렴 상관 없다는 듯이 내게 눈짓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아가씨에게 다가가 상체를 숙였다. 미약한 온기가 느껴졌다.
"...고마워, 제노야."
목걸이를 다 걸고 상체를 뒤로 물리려던 순간, 아가씨는 작게 말했다.
"...아니에요. 생일 축하해요."
나비처럼 내게서 멀리 떠나지만 마요.
아가씨는 유독 그 길을 좋아했다.
본궁에서 학습관으로 가다 보면 보이는 꽃길.
아가씨는 그 길을 지나다니면 잡생각들이 없어지는 것 같아서 좋아한다고 했다.
언제 한 번, 아가씨를 학습관에 보내드린 후, 나는 조용히 그 길로 향한 적이 있었다.
조잘대며 내게 말을 건네는 아가씨가 없는 이 길이 이렇게 허전할줄은 생각도 못했다.
"혹시 심고 싶으신 꽃 있나요?"
정원사가 내게 다가와 물었다.
"...해바라기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한 달 뒤부터 해바라기 심기 시작할게요."
"감사합니다."
다분히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학습관 앞에 서있으니, 곧 아가씨가 밖으로 나왔다.
본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피어있는 꽃들을 보며 나는 곧 해바라기가 가득할 길을 생각하며 아가씨의 뒤를 따랐다.
아가씨,
나는 아가씨를 바라보는 해바라기가 될테니, 아가씨는 저의 태양이 되어주세요.
스물 네 살, 우연하게 집행관(執行關)으로 가던 중, 의원들이 하는 얘기를 엿듣게 되었다.
"이제 또 쿠데타가 일어난다는 소문이 있어."
쿠데타?
나는 벽에 바싹 붙어 사람들이 나를 보지 못하는 곳에 몸을 숨겼다.
"아마... 이형설 쪽이라던데..."
"이제 곧 타국도 방문할텐데."
"타국의 행차로 궁이 소란스러워지니, 아마 그걸 노리고 하는···."
뒤의 얘기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 번뜩, 그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가씨를 지켜야한다.
아가씨의 요청으로 함께 배를 탔을 때, 아가씨가 내게 물었었다.
"그동안 나랑 같이 다니면서 제노는 어땠어?"
그 질문에 나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아가씨를 지켜드리면서 어땠더라.
"... 그러게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태어날 때부터 그랬으니까요. 저는 아가씨를 지켜드리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니까.
배가 조금씩 멈추고, 연궁에 앉아있는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이동혁, 이형설 가문의 후계자.
이동혁은 내 앞에 앉아있는 아가씨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어딘가 뒷목에서 찡, 올라오는 감각을 고스란히 느끼며 나는 아가씨를 보았다.
"저기 옆에 이 씨 가문 후계자 이동혁 도련님이에요."
나는 여기까지니까, 이것 밖에 할 수 없으니까.
알 수 없는 패배감을 느끼며 단어를 짓씹었다.
아가씨와 눈이 마주치자 밝게 웃는 이동혁의 얼굴을 보자니 영, 별로였다.
"아가씨, 이제 돌아갈 시간이에요."
나답지 못하게 유치한 말을 했다. 아가씨와 함께 있으면, 나도 모르게 유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제노야, 조금 더 있자."
아가씨의 말에는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 있었다.
"이제 곧 학습관에 갈 시간이에요."
아가씨는 정말 내 맘을 하나도 모른다.
그리고,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
학습관에 가는 길목에는 해바라기가 밝게 피어있었다.
아가씨는 해바라기 곁으로 가 환하게 웃었다.
"이거 누가 심어달라고 한거야?"
나를 돌아보며 묻는 맑은 물음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 저번에 아가씨가 예쁘다고 해서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적 없는데.
거짓말이 티가 날 줄 알았는데, 아가씨는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학습관 앞에 도착해 자세를 취하자, 아가씨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보고 싶을거야."
살짝 미소를 짓는 저 입꼬리에 제 심장이 달려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가씨는 분명 장난일텐데.
그 장난에 놀아나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가씨, 얼른 들어가세요."
나의 말에 아가씨는 투덜거리며 학습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쳐다보다, 문득 웃음이 터져 급히 뒤를 돌았다.
"제노야! 보고 싶을거야!"
아가씨는 다시 한 번 나를 보며 크게 외쳤고,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이거 밖에 없어서, 나는 또 해바라기를 쳐다봤다.
저 자리에 꼿꼿이 서있는 해바라기도 예쁘다며 걸음을 멈춰 미소를 지어보이는데, 태양만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는 웃어줄까.
수업을 마치고 나온 아가씨의 짐을 들어드렸다.
"나 안보고 싶었어?"
나는 고개를 돌려 아가씨를 쳐다봤다. 또, 장난이었다.
"나 안보고 싶었냐구."
엄청, 보고 싶었는데.
장난에 몸을 맡긴 채 이리저리 흔들렸다.
"... 7시부터 식사 시작할테니, 그 전까지 쉬세요."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사무적인 얘기를 꺼냈다. 앞장서서 걷는 아가씨의 뒷모습을 보며 건네지도 못할 말들을 중얼거렸다.
보고 싶었어요, 아가씨. 그것도 많이.
저녁식사를 하기 전, 아가씨의 방문을 두드렸다.
안에서는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나는 순간 이상한 불안감에 숨이 막혀 문을 벌컥 열었다.
막 잠에서 깨어난 듯, 눈을 비비적거리는 아가씨를 보자 힘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오늘 식사는 스테이크였다.
아가씨는 끙끙거리며 스테이크와 싸우다, 결국 울망이는 눈으로 나를 불렀다.
나는 아가씨의 곁으로 다가가 스테이크를 부드럽게 썰어, 아가씨의 앞에 두었다.
"드세요."
여전히 어린아이 같이 서툰 면이 보여, 작게 웃었다.
아가씨를 방에 들여보낸 후, 나도 샤워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다 어릴 적, 머리를 말리지 않아 감기에 걸려 고생한 아가씨가 생각나 방문을 두드렸다.
방문을 열자, 아가씨는 축축한 머리를 하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머리 말리시고 주무세요. 저번처럼 감기 걸리고 고생하지 마시고."
내가 아가씨께 해드릴 수 있는 최대한의 걱정이었다.
"제노야, 나 머리 말려주면 안돼?"
아가씨는 내게 드라이기를 내밀며 물어봤다.
...장난이었으면, 좋겠는데.
"...안됩니다. 말리시고 주무세요."
나는 방문을 닫고 나왔다.
아가씨에게 차갑게 말을 한 것만 같아 머리를 헝클였다.
맘대로 되는게 하나도 없었다.
+) 분량이 생각보다 길어져, 상하편으로 나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