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아파트 사는 학교 선배 김선호와
거의 우리 집에 살다시피하는 불알 친구 우도환
이 둘이 번갈아가며 내 마음을 쥐고 마구 흔드는 썰
09
그 날 이후로 도환이를 마주치기가 겁이 났던게 사실이다.
예전에 도환이가 말했던 우리의 관계에 대한 책임, 그것을 내가 감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서였다.
또한 선호 선배에게 느끼는 내 감정이 뭔지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무작정 도환이에게 갈 수만은 없었다.
주말 내내 연락도 안하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면서 제대로 씻지도 않은 것 같아 일단 좀 씻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머리에 샴푸치을 하자마자 수도가 끊긴거다.
"갑자기 수도가 끊겨가지구, ...그 저희 집이 제일 윗층이라 그런지 가끔 그러거든요 갑자기 이럴 줄 몰랐는데 이게..."
"알겠으니까 변명 그만하고 들어와서 머리부터 감아."
이렇게 계속 있을 수는 없음에 쪽팔림을 무릅쓰고 선호 선배에게 연락을 하기는 했는데 이게 막상 들어가려니 되게 민망하더라.
머리는 샴푸칠 가득한 상태 그대로 수건을 둘러 감고 왔는데, 내 모습이 얼마나 추했을까.
"다 씻었어?"
"아는 사람이 가까이 있으니까 좋은 점이 많네요. 고마워요 선배. 저 이제 가볼게요."
"그, ...밥은 먹었어? 나 밥 먹으려고 했는데... 괜찮으면 먹고 가."
이틀 내내 집에만 있었더니 솔직히 심심하기도 했고,
그저께도 도환이 일 때문에 그렇게 먼저 갔는데 거절하기도 미안함에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만 감고 나올테니 먹고싶은거 생각하고 있으라는 말에 가만히 바닥에 쪼그려앉아 그의 집을 잠시 둘러보는데 무슨 집이 여자인 나보다 깨끗한게 선배의 성격이 묻어나는 것 같아 웃음이 나오다가
문득 눈에 들어오는 사진 한 장에 액자를 집어들고 한참이나 보고 있었나보다.
"뭘 그렇게 봐?"
"아 함부로 만져서 미안해요. 아빠 사진이 있어서..."
"잘 나왔지? 그거 내가 한창 사춘기 때라 안찍겠다고 한참을 실랑이 하다가 겨우 찍은건데, 그 때 안찍어놨으면 진짜 후회했겠다 싶더라.
그거 한장이 전부거든, 아저씨랑 추억."
"그러게, 우리 아빠 되게 좋아보이네요 선배랑 있는 모습."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액자를 제자리에 두고 선배를 올려다보는데,
"뭐 먹을래? 먹고싶은거 있어?"
평소에 자주 보던 세팅된 모습의 선배가 아닌, 젖은 머리의 무방비한 선배의 모습을 보자니 어쩐지 뭐랄까 ...
기분이 묘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니, 선배 먹고 싶은거 먹어요. 배달 시킬까요? 오늘은 제가 살게요 매번 선배한테 얻어먹는데."
"됐네요. 다음에 더 맛있는거 사, 오늘은 우리 집이니까 내가 사야지. 물 마실건데, 너 물 줄까?"
"아뇨 괜찮아요. 그... 치맥 어때요 그럼? 저 술 땡기는데."
"가만 보면 완전 술꾼이라니까 김여주."
"치, 그래서 안먹어요?"
"먹자 먹어. 대신 취하면 난 책임 못진다 너."
"제 몸은 제가 챙기거든요. 술은 선배가 더 잘 못마시면서."
"그래, 내가 더 잘 못먹지. 그래도 맨날 술 먹고 돌아다니면서 사람 걱정시키는 김여주의 안전 귀가를 위해 짠 한 번 하자."
선호 선배는 어쩜 이렇게 상대방을 편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까.
그 상대가 누구든 선호 선배와 함께 있다면 전혀 불편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내가 너무 방심한 탓일까,
"우와, 저 지금 좀 취한거 같아요 선배."
"좀이 아니라, 되게 많이 취한거같은데 너."
또 취한거다 선배 앞에서. 어쩜 이렇게 선배랑 술만 마시면 만취인지 부끄럽기 짝이 없다.
"선배 있잖아요, ...선배는 내가 왜 좋아요? 내가 아빠 딸이라서?"
"어..., 그냥. 처음 봤을 때부터 그냥, 너밖에 안보이던데 난."
"에이 그냥이 어딨어요, 원래 좋아하는데 이유같은거 없는건 맞는데.. 사실 분명 처음에는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구요."
"넌 어떤데?"
"네? 뭐가요?"
"너는, 도환이 어디가 그렇게 좋냐고."
선배의 질문에 나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도환이에게 달려간 그 순간부터, 선배는 내가 도환이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던거다.
그럼에도 늘 내 곁을 묵묵히 지켜줬던 사람이구나.
"아냐, 쓸데없는 말을 했다 내가. 치킨 이제 식어서 맛없지? 뭐 먹을거 있나 찾아볼게. 맥주 더 마실래?"
"선배, 나도 몰라요. 나도 내가 좋아하는게 대체 누군지, 나는 왜 이렇게 매번 쉽게 휘청거리는지. 나도 모른데 선배가 왜 먼저 그렇게 정해버려요."
"뭐래. 취해서 자기가 지금 무슨 말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 말을 끝으로 선배가 부엌에 간 사이에 소파에 기대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남들 다 아는 자기 마음도 하나 모르는게 난 뭐가 좋다고."
"여자 애가 겁도 없이 이런 데서 막 자지를 않나."
"내가 졌다 김여주. 어떡하냐, 이렇게 덜렁대고 다른 사람 좋다는데도 하나도 안밉고 좋기만 한데."
.
눈을 떴을 때 집에 선배는 없었다.
'아침 수업 있어서 먼저 갈게. 밥 차려놨으니까 먹구 집 가.'
다정함 가득한 쪽지를 멍하니 보다가 어제의 일을 잠시 생각했다가, 이내 몸을 일으켰다.
나도 오전 수업 있는데 몇시지 지금, 하는 생각에 문득 휴대폰을 보는데
눈에 들어오는 카톡이 있었다.
[집 앞인데 잠깐 나올래?]
반사적으로 먹던 음식을 대충 치우고 겉옷을 챙겨 나가고 있었다.
집 앞이라니, 나는 집이 아닌데.
"도환아."
"집 아니었어? 아침부터 어디 갔다가."
"아, ...그냥 좀 볼 일이 있어서. 들어가자."
"모른 척 해주고 싶은데, 볼 일 있었다는 사람 치고는 머리가 너무 자다온 사람 아니야?"
거울도 제대로 못보고 나온 탓에 엉망인 머리를 정리해주며 웃는 도환을 잠시 보다가
"아, ...미안. 사실 어제 선배 집 갔다가 잠 들어서...,"
"거기서 잤어?"
"응, 수도가 갑자기 끊기는 바람에 잠시 화장실만 쓰려고 간거였는데 그게,"
"됐어, 뭘 그렇게까지 변명하냐. 너 그런 애 아닌거 다 아는데 내가."
"그래도 혹시나 오해할까봐 그렇지. 근데 아침부터 왜?"
"우리 그 날 이후로 해야 할 얘기가 있는 것 같은데, 누가 내 연락 일부러 피하는거 같길래. 답답한 놈이 움직여야지 뭐."
풀어야 할 부분은 풀고, 해야 할 일은 해야하는 그의 성격이었다.
어차피 마냥 피할수도 도망갈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평소와 같이 다시 돌아가든, 여태 빙빙 맴돌기만 했던 것들을 받아들이든 이제는 결정해야했다.
"내 마음은 하도 도망쳐와서 이제 더 물러날 곳이 없어."
"이제 죄책감 없이, 미안한 마음 없이 내가 너 안을 수 있게 해주라."
"친구같은거 이제 그만 하자 우리."
"평생 네 옆에 있을게 내가."
.
여러분 아마도 다음주가 마지막 화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ㅜㅜ..
두가지 결말을 달라는 독자님들의 의견을 생각해보고는 있는데, 전개상 가능할지 고민중이랍니다 ..
차기작도 생각한게 있기도 하구 ,
일단 다음화는 마지막 화로 좋은 소식 들고 와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