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O/김종인X너징] 구남친 김종인과 다시 찍는 우결 (부제: 달콤쌉싸름한 재회)
딸칵. 딸칵. 딸칵.
스케줄 없는 나른한 오후. 좋게 말하면 그 정도겠지만, 어쨌든 굉장히 잉여로운 오후다. 이 쯤 되면 내가 연예인인지, 백수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이다. 그래도 최근에 흥행에 성공한 영화에 주연으로 발탁되어 열연을 펼친 뒤로 꽤나 형편이 나아진 것이 이 정도였다. 일약 대박스타가 되는 것을 꿈꾸던 나이는 지나도 한참 지났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뭐 나름대로 신인 배우로 이름을 알렸으니 이 정도로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촬영이 없는 한산한 날은... 적당히 여유롭고, 또 적당히 게으른 시간들을 즐기기에 적합했다.
할 짓 없는 잉여가 두드리는 자판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백수의 표본을 보여주마 하며 초록창 실시간 검색어 순위를 하나 하나 눌러보는데... 뭐야. 이 익숙한 이름은... 음..? 검색어 순위 7위까지 내려갔을 때 나는 그 곳에서 굉장히 뜬급 없게도, 내 이름을 보고 말았다. 그리고 그 아래로 이어지는 일련의 검색어들은... '우결' '우리 결혼했어요' 'ㅇㅇㅇ 우결' ...저기요? 황급히 기사 사진을 클릭했다. 내 스케줄을 기사를 통해 확인하게 되는 이 머저리 같은 상황에서도, 본능에 충실한 나의 심장은 '결혼' 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프로그램 명에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 헐. 나 우결 찍는 거야? 톱스타들만 찍는다는 그 우결!? 흐흐... 상대 남자는 누구지? 아. 잘생긴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아냐, 아냐. 매너남. 매너남. 음... 강동원? 소지섭? 으헤헤헤. 만면에 미소를 띠운 채 기사들을 내리는데, '떠오르는 신예 배우 ㅇㅇㅇ, 우결 촬영? 상대 배우는...' 뭐 이리 감질맛 나게 기사 제목을 써놨다냐.. 상대 남자, 그러니까 나의 가상 남편이 될 사람의 이름을 찾기 위해 한참을 스크롤을 내렸을 때, 나는 불과 1분 전의 설렘이 와장창 하고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정말이다. 똑똑히 들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엄습해오는 것은... 어마어마한 충격과 공포.
당장 전화기를 꺼내 들어 매니저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오빠 진짜!!!!"
"뭐, 뭐. 또 뭐야."
"아나!!!! 이런 걸 할거면 진즉에 말을 좀 하라고!!!! 말을!!!!"
"뭐. 뭐 말하는 거야. 우결?"
"그래!!! 우결인가 뭔가!!!"
"왜. 나는 너 좋다고 난리칠 줄 알았는데? 상대 남자 봤어? 김종인이야 김종인. 요즘 핫한 바로 그 아이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요!!!"
"니 주제에 그 정도면 충분하지... ㅇㅇ야. 이건 내가 인생 선배로서 충고해주는 건데 사람이 만족할 줄도 알아야돼..."
"아우. 됐어! 끊어!"
찌밤.. 누가 그걸 모르냐고요.. 평소 같았으면 당연히 좋아라하며 덥썩 물었겠지. 잘생겼어, 기럭치 훤칠해, 춤추는 거 장난 없어, 몸매 죽여, 섹시하기까지 해. 그런데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의 특수성은 그런 모든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나로 하여금 치를 떨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니까. 문제는... 김종인은 내 엑스 보이프렌드. 그래, 그거. 구남친이란 말이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그리고 촬영 당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겨 집 대문에서 무사히 셋트장까지 도착한 데에는 아마 나의 엄청난 현실 부정 능력과 쥐꼬리만큼 남아 있던 안일한 기대가 가장 큰 몫을 하지 않았나 싶었다. ...괜찮을거야. 그래. 뭐, 티만 안 내면 되는 거 아닌가? 그냥 연기라고 생각하고... 너 지금 업으로 하는 일이 연기면서, 고작 그 정도 연기를 못해서 이렇게 쩔쩔매고 있는 거냐. 그냥 공적인 관계인거야 우리는. 그래... 나는 존나 프로페셔널하니까. 직업 정신 투철한 사람이니까... 시부럴 뭐라는 거야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무튼 어찌 저찌 도착한 셋트장에는 이미 김종인이 도착해 있었다. 힐끔, 고개를 돌려 바라본 그는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다만 더욱 벌어진 어깨와, 굵어진 선들, 도드라진 손 위의 힘줄... 그런 것들이 그가 더 이상 어린 소년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여전히 멋있고 난리.. 나는 괜히 바보 같이 일렁이는 마음을 혼자 진정시켜야 했다. 잠깐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데, 그새 나를 돌아본 건지 눈이 마주쳤다. 허공에서 맞닿은 시선 두 자락. 어색하게 눈인사를 건네는 나와 달리, 김종인은 나를 발견하고는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잘 지냈어?"
"..어어? 어.. 아.. 응.."
그의 첫 마디가 너무 아무렇지도 않아 나는 뒷말을 생각하느라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뭔가 조금은... 어색하고, 껄끄러운 재회를 상상했는데. 예사했던 것과 전혀 달리 너무도 자연스럽게 나를 대하는 그 모습은 구여친을 대하는 모습보다는, 오히려 바로 어제 밤까지도 웃고 떠들었던 친한 여사친을 대하는 태도에 가까웠다. 나만 긴장하고 있었던 건가... 멍청하게 대답을 뱉은 나 자신을 자책하고 있는데, 피디님이 우리 둘을 불렀다.
"자, 둘이 프로그램에서 부부로 출연하게 된 건 알고 있죠? 오늘은 카페에서 첫 만남이에요. 서로 인사 나누고, 소개 받고 그런 거니까 그냥 자연스럽게. 오케이?"
첫 만남은 개뿔.. 자연스럽게는 개뿔. 벌써부터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은 게, 멀미가 날 것 같았다. 내가 데뷔 하기 전, 김종인이 연습생이던 시절, 친구의 소개로 만났던 우리는 신기하게도 모든 면에서 잘 통하던 서로에게 호감을 느꼈고, 그 이후 몇 번 더 반복된 우연적인 만남들에... 결국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아주 아슬한 연애를. 우리 둘이 처해있던 상황 상 결코 우리에게 달콤한 데이트나, 연애의 로망같은 것들은 용납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함께였던 순간들이 마냥 반짝였던 것은 아마도, 서로가 서로의 연인이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가 데뷔를 하고, 순식간에 유명세를 얻어 '대세 아이돌'이 되면서. 길거리를 지나다니면서 그의 이름을 한 번 쯤 듣는 것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어지면서.. 나 또한 배우로서 정식 작품을 하기 시작하면서. 첫 만남부터 빤히 보였던 연애의 끝은 점점 그 핑크빛 그림자를 걷어내며, 우리에게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만남이 점점 어려워졌고. 우리는 같은 나라에 살면서도 (심지어 같은 동네였다.) 마치 바다 건너 지구 반대편에 있는 연인과 하는 롱디.. 뭐, 그와 비슷한 연애를 하게 되었다. 차츰 그런 연애가 지루해질 무렵. 그러니까, 주변에서 꽁냥대며 데이트를 하는 친구들이 꼴 보기 싫어질 무렵. 우리는 그냥, 서로를 놓아 보내주기로 암묵적인 동의를 했던 것이다.
그와의 직종 차이가 그만큼 고마웠던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덕분에 굉장히 잘 피해다니고 있었는데 가상 결혼 프로그램에서의 재회라니. 이런 기괴한 관계는 세상에 아마 우리 말고는 없지, 싶다. 나중에 배우 활동 끝내고 돈이 궁해지면 서프라이즈에 사연이라도 보내 봐야겠다. 김종인도 나만큼 괴상한 기분일까. 이따 얘기라도 해봐야 되는 건가? 서로 말이라도 맞추고, 처음 보는 사람인 척 하자고 약속이라도 하면 마음이 조금편해질까. 별별 생각들을 하고 있는 와중에, 카메라가 모두 세팅되었고, 피디님의 지시가 내려졌다.
"자. ㅇㅇ씨! 저 쪽에서 걸어오시면 됩니다. 여기 종인 씨가 앉아 있을 거니까 그 뒤로 천천히 다가오세요!"
"피디님. 그런데 그림 너무 밋밋한 거 아닌가요? 백허그로 가죠."
피디님의 말에 슬슬 울렁거리기 시작한 속에 버터 범벅을 들이 부어버린 말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김종인이었다. 뜨억, 하는 표정으로 김종인을 바라보고 있자 김종인은 그런 내 표정을 보더니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는 듯 피식 하고 웃는다. 저.. 저 시키가..
"오, 좋은데요? 그럼 그렇게 합시다. 허그로. 백허그. 알았죠?"
알긴 뭘 알아 이 사람아.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오. 내 처절한 외침에도 촬영은 재개되었고, 나는 마침내 저 멀리 김종인의 등짝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 등짝에 한 걸음씩 다가가는 것은 마치 교수형을 집행받기 위한 의자로 걸어가는 것 만큼이다 긴장되었다. 마침내 코 앞에 다가온 김종인의 넓디 넓은 등짝. 그게 또 갑자기 듬직해보여, 결국 눈을 딱 감고 김종인의 어깨 위로 팔을 둘렀다.
"왜 이렇게 굳어 있어? 안 잡아 먹으니까 긴장 좀 풀어."
달큰하게 귓가에 내려앉은 목소리. 저 멀리서 들려오는 감독님의 컷! 하는 싸인. 뺨에 부드럽게 와 감기는 따스한 봄의 햇살. 그리고, 그런 것들과 이리 저리 뒤섞인 김종인의 체취가 콧 속으로 밀려들어온다. 이상해...
김종인의 말 이후로 내 머리 속에서 제 멋대로 춤을 춰대는 미친 탭댄서 때문에 나는 촬영 내내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울릉도에서 독도 가는 배 (라 쓰고 난파선이라 읽는다.)에서 갑판 부여잡았을 때 이후로 최악의 멀미야, 이건. 그렇게 폭풍 같은 허그씬이 끝나고 다음 장소로 향하기 위해 밴에 올라탔다. 벌써부터 녹초가 된 기분이었다. 이대로 다음 촬영은 어떻게 하나.
"ㅇㅇ! 수고했어. 종인 씨 어때? 괜찮지?"
"어? 아.. 어."
"야 근데 ㅇㅇㅇ. 종인 씨가 너 마음에 들었나봐. 너 고마워 해야겠더라?"
"...?"
"종인 씨가 파트너 너로 해달라고 피디님께 부탁드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