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가끔 첫사랑이 생각날 때가 있었다. 옆에는 사랑하는 부인과, 아이들이 날 향해 웃어줄때 그 순간에도. 첫사랑이란 것은 영영 지울 수 없고 가슴에 평생 품어야 한다는게 맞는 말인 것 같다. 오늘도 어김없이 회사 사무실에 앉아 아픈 눈을 문지르며 반복되는 이 지겨운 하루를 버티고 있을 때였다. 회사는 요 며칠새 소란스러웠고 그 중에 우리 부서는 더더욱이였다. 새로운 부서 팀장이 온다나 뭐라나, 그래봤자 난리나는 것은 여사원들일 것이고 남사원들이야 심드렁한 눈치를 보이며 맞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고, 그러나 그를 보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오늘 꿈은 이상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나자 옆에 덩달아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아내가 걱정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어디 아파? 그 물음에 고개를 흔들며 부정을 표현했다. 그냥, 좀 이상한 꿈이였어. 짧게 덧붙인 그 말에 목소리가 유난히 쉰 것 같아 오히려 더 걱정을 불러 일으킬까봐 미소를 지었다. 그제서야 알겠다며 나를 따라 같이 일어나는 아내였다. 거실이 시끄러워 무슨 일인가 싶었다가 오늘자 달력에 일요일이라는 걸 보고 아이들도 참. 주말에만 일찍 일어난다니까. 하고 중얼거렸다. 아내가 옆에서 웃었다.
“오빠는 오늘도 일 나가는 거야?”
“그렇게 되버렸다. 일이 너무 밀렸어.”
조금 늦게 일어난 편이라 아침밥을 먹을 겨를이 없었다. 회사가서 양치하면 되는거고, …아무튼 아내는 옷장에서 주섬주섬 꺼낸 옷들을 나에게 건내주었고 마지막으로 화이트 배경의 검은색 체크무늬가 일정하게 수놓아진 넥타이를 들고 더듬거리며 매어주었다. 몸 조심하고, 오빠 얼굴보면 말이 아니야. 장난스러운 그 말과 함께 볼에 짧은 뽀뽀가 이어졌다. 응, 오늘은 여섯시쯤까진 올께. 손짓을 하고 현관문에 걸음을 옮겼다. 나가는 그 사이에 거실 소파에 누워 어린이 프로그램에 빠져 있던 아들이 큰 소리로 다녀오세요! 하고 인사했다. 응! 따라 밝게 소리쳤다.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내는 닫힌 문을 뒤로하고 집을 나오자마자 무겁게 당겨지는 기분 나쁜 느낌에 작은 한숨을 쉬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주말에 일하러 나가는 사람은 이 아파트에서 나밖에 없는 건지 올라오는 엘리베이터는 막힘 없이 술술 올라오고 있었다. 띵, 하고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무겁게 깔리는 발자국소리와 함께 탔고 문은 다시 닫혔다. 조용한 엘리베이터 공간 안이 무색하게 너무 빠르게 내려가는 듯한 엘리베이터였다. 십이층이 팔층이 되고, 팔층이 삼층으로… 정신 차리고 보니 벌써 일층이였다. 문이 열리고 탁한 아파트 내부의 공기와는 다르게 살벌하게 내리는 맑은 햇살에 잠시 질색하다 발을 뗐다. 맑은 공기가 저를 적시는 기분이었다.
오셨어요? 하는 여사원의 말이 들렸다. 아, 응. 오늘따라 힘이 없어 보이세… 아 팀장님 오셨어요? 인사하느라 바쁜 듯 했다. 그러다 팀장님이라는 말에 번뜩 고개가 들려 그 쪽으로 쳐다보자 입구 쪽으로 걸어 이쪽으로 손짓하며 오는 팀장이 보였다. 그 얼굴을 보자 속이 불편한게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빠른 걸음으로 제 자리에 가는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앉아 있는 나를 본 건지 잠시 흘깃 내 숙여진 머리통을 보고 있는 듯 했다. 발걸음 소리도 멈췄고, 무언가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 시선의 느낌이 내 정수리에 쏟아지는 게 느껴지는것도 불편했다. 죄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러다가 오늘도 일 밀리면 안되는데… 하고 으으 거리며 고개를 드는데 아직도 안간건지 그가 여전히 서 있는다. 아… 탄성을 뱉자 눈썹을 찡그리며 묻는다.
“인사 안하십니까, 혹시… 어디 아프신건아닙니까.”
“아… 아, 괜찮습니다. 팀장님.”
“…잠깐 이야기 좀 하죠, 준형씨.”
결국 그가 뭐가 못마땅한건지 날 불러재꼈다. 그러나 싫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고분고분 알겠다며 힘없이 말하고 그는 자신의 자리로 가 짐을 차례로 놓고 문을 나섰다. 주위에 앉아 있던 사원들이 잠시 수군거렸다. 네, 금방 갔다 올게요. 하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뒤따라 문을 나섰다. 이런게 정말 싫었다. 정말 싫어서, 일부러 내색하지 않으려 하는데 오늘은 그게 맘대로 되지 않는게… . 사람이 없는 곳으로 그는 서 있었다. 나보다 반 뼘밖에 크지 않은 그지만 무언가 그는 항상 날 내려다 보는 듯 했다. 당신이 그러는 것도 싫어. 하지만 입술을 꾹 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와 나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는 무언가 잔뜩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섣불리 말을 뱉진 않았다. 조금의 정적 후 조금 있다 그제서야 그가 말을 했다.
“내가 말했지. 걱정하게 하지 말라고.”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그냥 조금…”
“우리 둘이 있을 땐 그러지 말라 했잖아. 왜 이렇게 말을 안들어.”
그가 내 어깨를 세게 쥐어 잡았다. 우악스럽게 쥔 그 손아귀의 힘이 장난이 아니었다. 어차피 싫다고 놓아달라 해봤자 더 세게 쥘것이고 아픔은 배로 커질테니까. 난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훑었다. 말하기가 싫다. 만약 오늘 내가 이런게 다 그 꿈때문이고, 그게 당신과 관련되었다고 말하면 어떤 표정을 지으며 말할까. 궁금해졌다. 그가 다시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어디 아프냐고. 좀 더 부드러워지긴 했다. 난 그의 화를 돋구을 생각은 없어 바른대로 말하기로 했다. 기분 나쁜 꿈을 꿨어. 아니, 네 꿈을 꿨어. 그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어깨를 잡은 손에 들어간 힘이 살짝 풀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손을 내쳐내진 않았다.
“네가 고백한 꿈을 꿨어. 그런데 내가 울고 있었어. 싫다고, 안된다고.”
“… ”
“근데 나 그 때는 네가 고백할 때 엄청 웃었잖아. 좋아서. 이게 무슨 꿈일까 싶어서, 기분이 이상해져서.”
“… 다 지웠다며. 생각도 안 난다며.”
두준아, 정말 오랜만에 부르는 이름같았다. 윗입술이 살짝 떨렸다. 그도 힘이 없어보였다. 역시, 기분나쁜꿈이맞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