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十六
품 안의 온기가 흩어질 것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윤기는 이 모든 것이 꿈이자 환영인 것만 같았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이리 무람없이 황후를 안는 것이 얼마만일까. 허나 지금만큼은 이래도 되지 않겠느냐고, 단지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였을 뿐이라고, 다잡지 못한 마음이 말했다. 그는 닳아가는 호흡에 숨이 막혔다. 허나 그 순간마저도 세상에 혼자 남겨진 그날처럼 잔혹한 이 전쟁이 복사꽃 같은 누이를 갉아먹을까 두려웠다. 끝없이 그녀가 많이 울지 않기를, 스스로 자책하지 않기를 바랐다. 윤기는 어쩌면 자신의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다.
“문하시중!”
“여봐라! 어서 오라버니를, 오라버니를 뫼시고 이곳을 빠져나가야….”
덤벼드는 적들의 칼을 막은 군대장 중 하나가 놀라 윤기를 향해 달려왔다. 윤기는 정신이 남아있을 때 겨우 화살을 부러뜨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황후는 당장 부상 입은 윤기를 데리고 이 진창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윤기가 자신을 대신해 화살에 맞았다. 서둘러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위험한 일이었다. 옅어지는 숨소리와 갸날프게 뒷머리를 그러안는 손길이 위태로웠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마마, 제 손을 잡으시옵소서!”
말에 오른 군대장이 다급하게 손을 내밀었다. 황후는 윤기를 부축해 그부터 태우고 따라 올랐다.
“젠장!”
그 순간 성벽 위에 있던 태화는 다시 한 번 화살을 빼들었다. 황후의 심장을 관통하길 바랐던 화살이 애꿎은 자의 등에 박혔다. 그가 갑자기 황후의 앞을 막아 세운 탓이었다. 이번에야 말로 놓치지 않으리라. 황후를 죽이고 나면 똑같이 황제의 목숨도 거둘 작정이었다. 여직 자신을 위해 죽은 상장군의 마지막 모습이 눈에 선했던 태화는, 마지막 복수를 꿈꾸었다. 태화의 손이 다급히 움직였다.
“누이!!”
허나 태형이 그런 태화를 보았다. 대승상의 군을 선두로 베어내며 말을 타고 달려온 태형이 빠르게 날아오는 태화의 화살을 앞에서 쳐냈다. 누이의 이러한 겨냥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태형이 불안하게 입술을 짓씹었다. 그제야 태화의 복수는 반역이 아니라, 황후와 황제의 목숨이었음을 알아챘다.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어. 그가 당장 말에서 내려 성벽 위로 올라왔다. 마음이 답답하고 다급했다. 끝까지 황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던 태화는 제게로 오는 태형을 발견하곤 황급히 몸을 숨겼다. 젠장. 이대로 실패할 수 없었다. 어찌 얻은 기회인데….
“성문을 사수해라! 모든 것은 황궁 밖에서 끝낸다.”
황제의 음성이 진창을 울렸다. 이미 성문 앞은 쑥대밭이 되었다. 대승상은 수많은 군대를 잃었고, 그것은 황제역시 마찬가지였다. 소음과 굉음이 가득 찼다. 선혈이 일어 땅을 적시고 거친 함성과 악에 받친 비명이 들려왔다. 내전이었으나 그 어떤 전쟁보다 치열했다. 또 하나의 목숨을 베어낸 정국이 주위를 살폈다. 이곳에서 싸우다 생을 마감하는 이들은 그래도 전부 황제의 백성이었다. 허나 시간이 갈수록 살생은 짙어졌다. 이들을 모두 죽여야 정녕 끝이 나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단 한 명도 물러나지 마라!”
저 자를 죽여야 끝이 날까. 중후한 나이였지만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싸우는 대승상의 힘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쇠한 티 없이 정정하게 싸우는 그 모습이 국경을 전전하던 예전과 한 치도 다를 바가 없었다. 정국이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대승상, 그는 제 손으로 왕조도 바꾸던 사내였다. 그는 수해 전 하루빨리 태자비였던 제 여식을 황후로 만들고 더 큰일을 도모하기 위해 부황을 독살했다. 대승상은 몰랐겠지만, 정국은 부황이 시해 당하던 그 날 대전에서 모든 것을 목격했다. 부황은 독인 줄 알면서도 대승상이 마지막 상소와 함께 가져온 차를 삼켰다. 그리고 그것을 정국에게 보여주려 했다. 똑똑히 보아. 긴장을 놓치면 죽는다. 황위란 얻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어려운 자리. 그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정국에게 이것을 가르쳤다.
“폐하, 이 모든 것은 태자전하를 위한 일입니다.”
대승상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리 말했다. 때 맞춰 그대가 안온히 죽어야, 태자의 보위가 안전할 것이라. 애초에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무능한 부황은 그 넓은 대전 계단에 쓰러져 피를 토했고, 대승상은 차갑게 식은 부황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만일 소소가 태자비가 되지 않았다면 부황도 죽지 않았을까. 만일이 자신이 소소를 구하지만 않았어도. 정국은 생각했다. 피가 날 정도로 입 안을 깨물고, 숨을 참으며 후회가 침잠하는 그 시각을 똑똑히 기억했다. 이제 그 대승상이 제 눈앞에 있었다. 황후의 아비가 아니라, 역적으로. 그를 죽여도 될 모든 명분과 상황이 황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생은 인과응보라 하였습니다.”
역적의 수장인 대승상이 죽는다면, 그 아래 장졸들을 모두 죽이지 않아도, 다른 목숨을 더 거두지 않아도 전쟁이 끝날 수 있다. 진왕제를 죽여 그 유민들의 더한 희생을 막았던 이전의 전투들처럼.
‘아버님과 오라버니를 살려주세요. 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
이 모든 것은 대의를 위해서고, 무고한 나머지 목숨을 위해서라고. 그렇게 되뇌며 정국은 간절했던 황후의 말을 애써 지워냈다. 그녀는 역모를 솔직히 고하며 제 가족의 목숨을 간청했다. 허나 그럴 수 없다는 것은 그가 가장 잘 알았다. 고민하는 순간마저도 멈추지 않는 주위의 궤멸이 황제의 정신을 상기시켰다. 정국은 거침없이 말을 몰았다. 대승상을 향해서. 묵은 원한과 통분을 씻고, 모든 걸 끝내기 위해. 그런 황제를 발견한 대승상이 잠깐 놀라다 이내 기세등등하게 검을 뻗었다. 한 치의 후회도 없게 모든 힘을 다했다. 정국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시끄러운 전쟁터에서 두 사람의 검이 맞붙는 소리가 이명처럼 크게 들렸다. 옆에서 상황을 파악한 병졸들이 대승상을 지키기 위해 달려들었으나, 황군에 의해 곁으로 가기 전에 죽었다.
“그 동안의 모든 죄악을 목숨으로 속죄하십시오. 대승상.”
정국의 말에 대승상은 작게 웃었다. 그 오랜 시간동안 남긴 후회 한 자락 없는 사람처럼 끝까지 온 힘을 다해 싸웠다. 귀 아픈 소리와 함께 칼날이 몇 번이나 맞붙었다. 그리고 끝내 황제의 검이 대승상의 복부를 생경하게 찔러 넣었다. 그의 선혈이 황제의 얼굴을 뒤덮었다. 털썩-하는 소리와 함께 숨이 멎은 대승상이 제 말에서 떨어졌다. 절대 권력자의 최후치고는 너무도 볼 품 없는 죽음이었다. 정국은 피를 닦으며 천천히 말을 돌렸다. 마치 억겁 같은 시간이었다. 주위 모두가 넋을 놓은 듯 멈춰 그 곳을 보았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대승상이었다. 허나, 대승상은 황제의 손에 지체 없이 숨이 멎었다. 그의 군대는 원수(元帥)의 죽음과 함께 검을 버렸다.
“…….”
“…….”
그리고 정국은 그 가운데서 황후를 보았다. 분명 익위사에 의해 황후전 안에만 있어야 할 황후가, 어찌해서 이곳에 있단 말인가. 그녀가 말에 올라 이 전장 한 가운데에 있었다. 제 아비를 죽이고, 그 피를 뒤집어쓴 황제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그녀의 눈이 놀라 커다랗게 팽창되었다. 바싹 마른 입술이 무어라 달싹이지도 못하고 머뭇대었다. 정국이 느릿하게 숨을 씹었다. 아직 겨우 정신을 붙잡고 옅은 숨을 뱉는 윤기가 죽을힘을 짜내어 황후와 함께 탄 말을 몰았다. 그녀를 감싸 안듯 고삐를 쥐고 황제에게서 돌아섰다.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수 없었다. 날갯죽지가 저리게 아려왔지만 인상을 쓰고 참아 내었다. 황후는 돌아서 달리는 그 순간까지도 정국을 향한 시선을 놓지 못했다.
“…쫓아라.”
잠시 침묵하며 황후를 보던 황제가, 뺨에 묻은 핏자국을 닦으며 명했다. 지금 여기서 문하시중을 그냥 보내면 역모의 싹을 완전히 처단할 수 없게 된다. 또다시 모반의 명분을 줄 수 없었다. 끊임없이 저를 좇는 황후의 시선을 외면한 정국이, 그 뒤를 향해 망설임 없이 말을 몰았다.
“황상!”
정국이 무얼 하려는지 알아챈 황후는 이내 악에 받친 비명을 내질렀다. 허나 황제는 검을 쥔 손을 다잡고, 도망치는 그들의 뒤를 지키는 장졸들을 무참히 베어냈다. 그리고 윤기와 황후가 탄 말을 쫓았다. 수많은 황군들이 그런 황제의 뒤를 따랐다. 무정하게 목숨을 거두는 야차. 적들이 전장에서 황제를 부르는 말에 걸맞게 황제는 잔혹하고 비정했다. 황후는 그런 정국의 모습이 너무도 낯설었다.
“…최대한 몸을 숙여라, 소소. 화살이 날아올지 몰라.”
호흡 때문에 거칠어진 윤기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들려왔다. 윤기는 최대한 황후의 등을 감싸듯 안으며 말을 세게 몰았다. 이대로 죽어선 안 돼. 아직은 황후를 지켜야 했다. 말을 급히 몰자 뒤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그 수많은 것 중 하나는 윤기의 어깨에 꽂히기도 했다. 그럴수록 소소를 지키기 위해 그녀를 제 품에 더 숨겼다. 윤기는 점점 한계가 옴을 느꼈다.
“아버지가…, 황상이 아버지를…, 오라버니….”
황후는 연신 횡설수설했다. 제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잔혹하게 아비를 치던 이가 정국이 맞는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황후는 대승상이 악하다는 걸, 황제에게 있어 더없는 정적이라는 걸 잘 알았다. 헌데도, 방금 보았던 그 장면은 심장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살려만 달라고, 목숨만 살려달라 청했는데 정국은 그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 모든 게 자신 때문이었다. 자신이 정국에게 역모를 고해서, 제 고변 때문에 아비가 죽고 오라비가 다쳤다. 황후는 그렇게 생각했다.
“제 탓입니다. 제가, 제가 황상을 믿어서….”
황후의 쓰라린 말에 윤기는 그녀를 더 깊이 안았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달래듯 그녀의 머리에 입 맞췄다. 아니 제정신이었다면 감히 하지도 못할 짓이었다.
“태형과 진의 유민이 먼저 배반했다. 매복했던 사방의 군대도 그들이 이미 회유해서….”
통증이 일어 윤기가 말을 하다 말고 인상을 찌푸렸다. 황후가 몸을 숙이고 흐느꼈다. 태형의 이름이 가시처럼 귓전에 박혔다. 모든 것이 가혹했다. 황제도, 태형도, 그 모든 자들이. 말에서 떨어지던 대승상의 마지막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다정하지 않았던 아비였는데, 어머니를 아프게 하고, 저를 한 없이 이용만 하던 아비였는데. 그럼에도 폐부가 시렸다. 가슴이 아팠다.
“이제 그만 멈추시지요. 문하시중.”
황후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나눠진 황군이 먼저 와 윤기와 황후가 탄 말을 막아 세웠다. 그 선두에 선 태부의 오른팔, 내사령이 기세등등하게 웃었다. 젠장. 윤기가 탁한 숨과 함께 욕지기를 뱉었다. 뒤를 보자 정국의 말도 목전에서 천천히 멈추었다. 황후는 마지막 변명이라도 듣고 싶어 정국을 바라봤다. 그런 그녀를 야멸차게 외면한 황제가 입을 열었다.
“문하시중, 그만 대의를 위해 죽어라.”
무정한 말이 가차 없이 날아들었다. 윤기의 울대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이미 견디는 데에도 한계가 와서 죽음은 두렵지 않았다. 허나 혼자 남을 누이가 마음에 걸렸다. 그녀를 안은 품에 힘이 들어갔다. 눈앞이 캄캄했다.
“한 번 역적이 되면 끝까지 그 굴레를 벗어날 수 없어. 차라리 모반에 성공하지 그랬느냐. 허면 공신이 되었을 텐데.”
그 모반을 막은 당사자 치고는 더없이 태연하고 뻔뻔한 말이었다.
“대승상의 군대, 아니 무고한 남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그대가 죽어라.”
“…….”
“…….”
“…허면 황후께선 어찌 됩니까.”
숨 막히는 침묵이었다. 한참 만에 어렵게 나온 윤기의 질문에 정국의 입매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동요를 티내지 않으려 정국은 애써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 그제야 마주한 황후의 눈빛을 보았다. 허망하고, 허망하여라. 생기 하나 없는 그녀의 눈이 정국의 숨도 앗아갔다.
“문하시중이 데리고 도망치지만 않았어도 이 역모와는 상관없을 수 있었겠지.”
“…….”
“그러니, 지금이라도 그대가 황후를 놓아.”
황후가 괴롭게 얼굴을 찡그렸다. 윤기가 고삐를 쥔 손을 놓았다. 황제의 말을 들을 작정이었다. 황후가 다급히 그런 오라비를 불렀다. 이대로 윤기를 죽게 할 수 없었다. 그가 아무리 가시 돋친 말을 해도, 그 깊은 마음을 황후는 알았다. 황후에게 윤기는 소중한 하나뿐인 가족이었다. 윤기를 잃는다면 황후 자신이 살 수 없을 터였다. 그녀는 윤기가 이미 많이 다쳤고, 끝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먼저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처음으로 똑똑히 말했다.
“폐하.”
평소엔 생각도 않던 극진한 호칭이었다. 정국은 속이 타 입술을 축였다. 황후가 손을 모으고 그 앞에서 흙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귀한 의복이 일순간 더럽혀졌다. 허나 아랑곳하지 않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 음성이 곧 흩어질 연기처럼 희미하게 퍼졌다. 모든 이들이 침묵했다.
“신첩의 아비가 감히 폐하를 능멸하고 모반을 꾀하였으니, 신첩을 폐위하여 주시옵소서. 역적의 여식이 어찌 폐하의 황후 될 자격이 있겠습니까.”
“…….”
“신첩의 오라비도 관직을 거두시고 만국의 땅으로 유배 보내세요. 그리하면, 안 됩니까.”
죽는 것보다 두려워하던 폐위 소리를 제 입으로 말했다. 윤기를 살리기 위해. 지금 황제가 문하시중을 죽이지 않고 살린다면 태부를 비롯한 대신들의 반발이 심할 것이다. 어찌 역적을 완전히 처단하지 않고 분란의 불씨를 남겨두느냐고, 도성 안 민심도 술렁일 것이다. 황제에게 이 선택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하고 불가피했다. 그래서 황후는 하나를 얻는 대신 모든 것을 버리려 했다. 자신이 황후 자리를 내놓는 조건이 붙는다면 오라비를 살릴 수는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러니 오라비의 목숨 대신 자신을 쳐내라고. 마지막으로 정국에게 간곡히 청했다. 참으로 마지막 남은 일말의 신의였다.
“…고개를 들어라, 황후.”
한참 만에 정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따라 황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짙은 정복자의 눈이 그녀를 담았다. 순간 울음이 나오려 했다. 참으로 연모했던,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던 저 정인이 끝내 제 손으로 그녀를 나락 끝에 내밀었다. 손끝에서 모든 것이 흩어졌다. 서럽고 매정했다. 황후는 이 상황이 버거웠다.
“그대는 주나라 변방을 떠돌고 있는 유민이 얼마나 될 것이라 생각하느냐?”
방금 한 청의 대답이 아니라 다른 물음이 들려왔다. 변방의 사정을 알 리 없는 황후는 그의 의도도, 답도 알지 못해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섣불리 입이 떨어지지도 않았다.
“서에 촉(觸), 북에 진(眞)과 오(汚), 남에 연(延)과 주제국 이들을 합해 수백만이 넘는다. 그들은 언제나 제 나라의 복위를 꿈꾸며 도성의 위기를 엿보고 있을 테지.”
“…….”
“이번에는 진나라 유민들이 황궁과 손을 잡았으나, 다시 한 번 이런 시도가 없을까? 유배라. 만약 이대로 문하시중을 변방으로 유배 보낸다면 그저 가만히 죽은 듯이 살겠느냐?”
“…….”
“다시 새로운 세력을 낳을 것이다. 이 땅 곳곳에 대승상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도사리고, 변방 유민까지 가세하는 한 오늘 같은 일은 또다시 일어날 것이다. 문하시중이 의도하던 의도하지 않던. 그 때가 되어 오늘 저 자를 살린 일을 후회한다 해도 소용없을 테지.”
차분하게 잇는 황제의 말이 황후를 천천히 벼랑 끝에 내몰았다. 정국이 하는 말은 명분을 얻기 위함일까, 아니면 제게 변명하기 위함일까. 어느 쪽이든 끝내 오라비를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 황제가 야속했다. 절망스러웠다. 그래도, 살리면 아니 되겠느냐고. 대의가, 역모가, 그 무엇이 어찌 되었건 내 오라비인 것만으로 살리는 것은 아니 되겠느냐고, 악에 받쳐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어느새 눈물이 뺨을 타고 뚝뚝 흘렀다. 원망하는 눈으로 황제를 올려다보며 황후는 제 입술을 피가 나게 짓씹었다.
“그런 위험을 남기고 짐이 왜 문하시중을 살려야 하지?”
아비의 역모를 애초에 황제에게 고하는 게 아니었다. 윤기의 말처럼 정국은 언제든 제 가문을 칠 준비를 하고 있었어. 미련하고 미욱했다. 제 마음에 눈이 멀어 결국 제 손으로 가문을 망친 것이었다. 그렇게 믿은 황후가 괴롭게 가슴팍을 들썩였다. 윤기는 가만히 그녀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는 자신이 끝까지 대승상을 거스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설령 오랜 시간 동안 제 마음이 새카맣게 타들어갔다 해도 그녀에게 오라비로만 남을 수 있었으니까. 부러 정을 떼면 거둬질 거라 생각한 자신이 미련했고, 그럼에도 잘 인내하였다고 다독였다.
“소소.”
“…….”
“말했잖아. 네 탓이 아니라고.”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어 그녀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건네었다. 자신의 말이 그녀의 죄책감을 덜어줄 수만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생각했다. 어차피 그녀로 인해 연명하던 목숨이었다.
“그러니 제발, 죽지 말고 살아.”
뒤에서 윤기의 목소리가 느릿하게 들려왔다. 예전처럼 사무치게 다정한 말에 황후는 차마 그를 보지 못하고 몸을 웅크려 울었다. 윤기는 눈을 감았다. 전쟁에서 부모를 모두 잃은 그 날부터, 대승상을 위해 살려 애를 썼다. 그게 마지막 남은 숙명이었으니까. 허나 어느 새인가부터 그의 생은 황후를 위해 흘렀다. 복사꽃처럼 새하얗던 누이를 볼 때마다 눈이 시렸다. 그래서 지금처럼 눈을 감아버렸다. 끝내 모든 것을 놓은 윤기와 우는 황후를 바라보던 정국이 발을 뗐다.
“난 그대의 부군이기 이전에 황제다.”
“…….”
“…그대의 눈물보다 내 백성의 무고한 피가 더 무겁고 중한 황제.”
나직하게 말하며 허리를 살짝 굽힌 정국이 황후의 눈물 젖은 뺨을 손가락으로 닦았다. 온갖 감정이 점철된 얼굴로 황후는 제 앞의 정국을 보았다. 잠시 눈을 맞추고, 그가 천천히 일어났다. 다시 검을 손에 들고 황후를 지나쳐 갔다. 마치 그 시간이 수억 초는 되는 것처럼 황후의 심장을 짓눌렀다. 황후가 떨리는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무것도 보고 싶지도, 듣고 싶지 않았다. 턱턱 막히는 울음만 고달프게 흘러나왔다.
‘눈 감고, 일백만 세고 있어. 금만 돌아올 거야.’
대승상을 따라 전쟁에 나갈 때마다 윤기는 저를 놓아주지 않는 황후를 이리 달랬다. 그때와 같았다. 오라비의 마지막은 그리 무겁지 않았다. 무정한 칼날이 스치는 소리가 들리고,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한 황후는 그 자리에서 정신을 놓았다.
二十七
윤기의 아비는 가난한 농인이었다. 매년 조세걱정에 허리가 휘지만, 처자식을 굶기지 않고 입에 풀칠하는 것만도 다행스럽게 여기는 평범한 사내. 그의 가족이 있는 치악산(値齷山) 북방마을은 추웠고 전란마저 빈번했던 탓에 마을이라 해봤자 열 가구도 채 되지 않았다. 허나 윤기의 부친은 적은 이웃끼리도 나눌 줄 알고, 베풀 줄 아는 이였다. 그런 아비를 보고 자라 윤기 역시 비슷한 성정을 가졌다. 다만 그저 농사일이 아니라 문文을 익히고 무武를 배워 출세를 꿈꿨다. 타고난 배포가 그러했다.
“아가, 너는 햇빛 아래 그리 오래있는데 어찌 타지도 않니?”
몇 리가 되는 길을 걸어 일감을 받아온 윤기의 어미가 다정하게 물었다. 투박한 목검을 휘두르던 윤기는 땀을 닦으며 작게 웃었다. 부모의 고된 일을 도우면서도, 고생 한 번 안한 것처럼 귀해만 보였던 윤기는 고작 열 넷이었다. 어미는 그런 윤기가 기특하면서도, 계속되는 전란에 혹여 이 아이가 징집되기라도 할까 염려했다. 아이가 연습하는 저 무예가 제 목숨을 살리길 바랐지, 나라를 지키길 바라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리 이기적인 마음을 나라님이 알고 뭐라 하신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한(漢)나라가 연신 국경을 넘나드니 얼마 안 가 또 전쟁이 일어날 거라 난리우.”
“젠장. 두 해 전 초가삼간 날려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한 때는 국경이 흉흉했다. 한(漢)과 인접한 북방이라, 마을 사람들은 앞으로 터질 전쟁을 걱정했다. 아낙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은 윤기의 어미는 걱정을 떠안고, 변변찮은 대문을 걸어 잠갔다.
“윤기야. 당분간 바깥에 나가지 마라. 검을 잡는 연습도 그치고.”
괜히 무예하는 모습을 보였다가 장졸들 눈에 띄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주나라 백성에게 군역은 필수였지만, 북방의 백성은 웬만큼 위급한 전시상황이 아닌 이상 잘 동원되지 않았다. 평소 이 나라 백성으로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던 것이 군역에서만큼은 다행이었다. 허나, 지금처럼 국경이 흉흉할 때면 변방의 백성들도 언제든 화살받이가 되러 끌려갈 수도 있었다. 어미는 윤기를 사지로 내몰 수 없었다. 마음이 불안해 농사일 나가는 아비의 걸음도 막아 세웠다.
윤기는 그런 어미의 마음을 이해했으나, 내심 전쟁에 나가기를 바랐다. 어쩌면 그게 입신양명의 지름길이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전쟁에서 공만 잘 세운다면 권세를 얻는 일도 쉬울 것이고, 이 열악한 북방에서 모친과 부친을 고생시키지 않아도 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열넷의 윤기는 아직 죽음의 두려움을 몰랐다.
“아이고, 나으리!! 그 아이는 안 됩니다!”
그러다 별안간 어미의 울부짖음이 차가운 공기를 울렸다. 기어코 장졸들이 들이닥치고, 윤기와 그 아비가 징집되어 끌려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마을 사람 중 하나가 윤기가 검을 쓸 줄 안다고 속오군에 슬쩍 언질 했다고 했다. 윤기의 어미는 속이 터져 제 가슴을 쳤다. 평소 원망 받을 짓은 추어도 없이 그저 베풀고만 살았다. 헌데도 되돌아오는 것은 가장 가깝다 생각한 사람들의 밀고였다. 윤기는 우는 어미를 안타까운 눈으로 보았으나 속은 담담히 마음먹었다. 이 아무것도 없는 곳을 벗어나기 위해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우겠다고 생각했다.
“제 2군은 활을 올려라!”
사방에서 들려오는 굉음에 귓전이 얼얼했다. 전쟁터는 어린 윤기의 생각보다 훨씬 더 잔혹하고 무정한 곳이었다. 제 앞에 보이는 것은 살아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베고, 찔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죽었다. 싸우는 군사들 중 윤기는 척 봐도 가장 앳되고 어렸다. 허나 튀기는 선혈에 눈앞이 제대로 안 보일 정도로 치열하고 다급하게 적을 베었다. 윤기는 손이 떨리고 제 심장이 살갗을 뚫을 듯 뛰는 것을 생경히 느꼈다. 생사의 두려움이 생전 처음으로 온몸을 뒤덮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정확히 그의 눈앞에서 아비가 적의 칼에 찔려 쓰러지는 것을 본 순간에는 견딜 수 없이 커졌다.
“아, 아버지….”
윤기는 놀라 온 몸이 경직되었다. 아비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렀다. 그게 그 자신의 것인지, 아니면 정신없이 베던 적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실핏줄이 터진 눈을 뜨고 윤기의 아비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렇게 전쟁통에서 숨을 다했다. 애초에 화살받이 마냥 맨 앞에서 싸우던 북방군이었다. 죽을 확률이 높은 것이 당연했다. 헌데도 윤기는 제 눈앞에서 본 아비의 죽음이 너무도 충격적어서, 한동안 정신도 귓전도 다 멍했다. 살려면 검을 휘둘러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저 죽음이 당장 제 앞에도 찾아올 것 같았다. 두려웠다.
“목숨 줄이 경각인데, 다른 생각할 겨를이 있느냐?”
그때였다. 전쟁의 폭음을 뚫고 또렷한 음성이 들려왔다. 윤기는 멍한 정신을 다잡고 고개를 들었다. 제 앞을 막아서고 윤기를 향해 달려오는 적을 대신 죽이는 사내. 윤기처럼 징집된 병졸들이 입는 고작 면포로 된 장옷이 아니라, 정말 철로 된 갑옷을 입은 중년의 사내. 그가 시선을 돌렸다. 윤기는 애써 멍한 정신으로 상황파악을 하려했다. 척 보아도 신분지위 높아 보이는 사내가 왜 자신을 도와주고 있는지 윤기는 알 수 없었다.
“슬쩍 보니 팔을 제법 잘 쓰더구나. 네 나이가 어찌 되느냐? 약관을 채우지도 않은 듯한데.”
적을 정신없이 상대하면서도 여유가 남았던지 사내는 윤기에게 말을 걸어왔다. 사내의 등장에 정신을 차린 윤기도 검을 다시 제대로 쥐었다. 사내는 여직 윤기의 답을 기다리는 듯 했다.
“열 넷입니다.”
아까부터 계속 이를 꽉 깨문 덕에 입안이 헐어 얼얼했다. 허나 윤기는 목소리를 내어 답했다. 사내가 작게 웃었다. 윤기는 다시 오직 제 목숨을 지키기 위해 남은 힘을 짜내어 싸웠다. 죽이지 않으면 아비처럼 죽을 거란 생각으로, 아버지처럼. 막상 윤기는 이 상황에서 눈물조차 흘리지 않는 자신이 역겨웠다. 이곳에 끌려오기 전에 생각했던 입신양명의 포부는 모래알처럼 흩어진 지 오래였다. 이곳에선 출세가 아니라 정말 살기 위해 버텨내야 했다.
“아까 죽은 사내가 네 아비냐?”
사내는 전부터 윤기를 지켜보았던 것처럼 물었다. 오지에서 솟아나는 전우애이기라도 한 것일까. 그 신분 귀해 보이는 사내가 일개 장졸처럼 보였을 제게 계속해서 말을 걸어왔다. 등을 맞대 윤기의 뒤를 막아주기까지 했다. 아비의 이야기에 윤기의 울대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제 아버지입니다.”
“너는 원래 속오군 출신이냐? 아니면 군역에 동원된 것이냐?”
연신 검을 쥔 손에 힘을 준 탓에 팔이 아렸다. 인상이 써졌다. 윤기가 제 옷소매를 입으로 물어뜯어 그 천으로 손과 검을 함께 동여맸다.
“한漢과 국경인 치악산 북방에 삽니다.”
계속해서 싸웠고, 계속해서 사내의 말에 답했다. 피가 낭자한 전쟁터에서 두 사람은 함께였다.
“허면 이제 돌아갈 곳이 없구나.”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러다 떨어지는 사내의 말에 잠시 숨을 멈춘 윤기가 시선을 돌렸다. 사내는 윤기가 놓친 적의 명치를 칼등으로 치고 목을 베며 말을 이었다.
“치악산 마을은 이미 한의 군대가 점령했다. 거기 사는 백성을 모두 죽이고 마을을 불태웠다고 하더군. 전령이 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어투였지만 윤기는 사내의 말에 순간 이명을 느꼈다. 가채도 몇 안 되는 작은 마을을, 한나라의 군대가 이미 몰살했다고 한다. 허면 마을 사람과 윤기의 어미도, 두 손 모으고 자식의 생사를 기다릴 제 어미도 죽고 말았다는 소리였다. 정신이 어질했다. 윤기가 입신양명을 바랐던 이유는 오직 혈육 때문이었다. 그 추운 북방이 아니라, 그 고된 일들이 아니라 조금 더 나은 곳에서 나은 삶을 살길 바랐다. 그 꿈에는 항상 어미와 아비가 있었다. 그러나 이 망국의 피폐한 전쟁터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사기가 바닥끝까지 떨어졌다. 여기서 살아남아도 사내의 말처럼 이젠 돌아갈 곳이 없다. 무얼 위해 살아야 하는지, 무얼 위해 버텨야 하는지 몰랐다. 그저 속이 쓰라렸다.
“살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냐?”
모든 의지를 잃은 사람처럼 넋을 놓은 윤기를 향해 사내가 물었다. 윤기의 공허한 눈이 사내를 향했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지만 살 이유도 없었다.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허면, 내가 만들어주마.”
기합을 지르며 윤기에게 달려드는 적을 모두 죽인 사내가, 윤기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처음부터 선봉에 말을 타고 올라, 이 앳된 아이를 내려다보았던 그는 윤기가 꽤나 마음에 들었다. 약관도 한참 먼 나이인데 독기 찬 눈이, 출중한 무예가 눈에 띄었다. 피폐한 그 전쟁터에서 총기 어린 그 눈동자가 어떻게든 쓰일만한 아이처럼 보였다. 사내는 윤기를 본 처음부터 그를 거두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네 아비가 되어주마.”
“…….”
사내의 낮은 음성에 윤기가 천천히 눈을 들었다. 그 눈에 비치는 그의 모습은 누구보다 강해보였다. 그의 말은 어떤 것이라도 믿고 신뢰할 수 있을 만큼.
“내 집으로 돌아가, 나의 양자가 되려무나.”
“저를 왜….”
윤기가 여쭈었다. 자신은 선봉에 선 적의 장군을 베지 않았고, 위험에 처한 사내의 목숨을 구한 적도 없었다. 공을 세우지도 못했는데, 어찌해서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인지 몰랐다. 그저 연민 어린 적선인지, 아니면 다신 없을 기회인지 혼란스러웠다. 사내는 태연하게 그런 윤기를 이끌고 적을 헤쳐 나아가며 말했다.
“극한에서 너를 구한 이가 누구냐?”
“…나으리십니다.”
죽음이 난무한 그 곳에서 윤기는 처음으로 마음이 차분해짐을 느꼈다. 사내를 따라 목소리가 더욱 견고해졌다. 윤기는 깜깜한 암흑에서 솟아날 빛을 찾은 것 같았다.
“네게 살아갈 이유를 준 이는 누구냐?”
“그것도 나으리십니다.”
윤기는 사내가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기다리는 답이 무엇인지 점점 알 것만 같았다. 그의 대답에 사내가 웃음 지었다.
“허면 네 목숨은 이제부터 누구의 것이냐?”
“나으리의 것입니다.”
“그래, 그것만 기억하면 된다.”
사내는 알고 있다. 어찌하면 완벽히 누군가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지, 주인이 될 수 있는지. 벼랑 끝에 내몰린 이들은 더 간절하고, 그들의 신의는 훨씬 더 단단한 법이었다. 사내는 자신을 위해 희생하고 일할 아이를 하나쯤은 더 만들어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지나고 보면 그게 정답이었다. 전장에서 처음 본 윤기의 모습은 그가 원하는 모든 것에 들어맞았다. 사내는 윤기가 마음에 들었다.
전쟁이 끝이 났다. 주나라의 완승이었지만 사상자는 만만치 않았다. 윤기가 살던 치악산 마을은 물론이고 북쪽지역이 전부 난리가 났다. 전쟁의 잔해가 수많은 사람들을 상처 입히고 재산을 축냈다. 허나 윤기는 그 오지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사내가 내어준 말을 타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윤기는 생전 처음 가보는 도성이었다. 윤기를 끔찍이 생각하던 아비도 어미도, 그 어떠한 연고하나 없는 그 곳을 사내만 따라갔다. 윤기는 깊이 생각했다. 사내가 자신을 거둬주었으니 남은 생은 그를 위해 살 것이라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저를 양자로 받아준 사내의 은혜를, 평생의 충성으로 갚으며 살리라. 그게 숙명이리라. 그렇게 다짐했다.
“대승상 오셨습니까!”
열흘을 지나 사내, 대승상의 사가에 도착했다. 그의 갑옷이나 전장에서의 위세만 보아도 귀족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허나 그는 윤기의 생각보다 훨씬 높은 자였다. 윤기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백 척의 기와집이 도성 한가운데 성대하게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큰 집에서 나온 수십 명의 하인들이 대승상의 일행을 맞이했다. 윤기는 긴장한 탓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짓씹었다. 손에 땀이 들어찼다. 대승상이 먼저 말에서 내렸다. 위세 높은 집안은 그 아랫것들조차 비단옷을 입는 것인지, 가장 앞에 서 있던 비단도포를 입은 하인이 대승상에게 다가와 검과 짐을 받아들었다.
“오시랑, 저 아이에게 입을 옷을 내어주게.”
“대감마님, 저 아이는….”
오시랑을 비롯해 온갖 하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윤기를 향했다. 윤기는 천천히 말에서 내렸다.
“내가 양자로 들일 아이네. 그러니 별채 옆에 앞으로 지낼 방도 만들어주고.”
“양자? 양자요?”
대승상의 어투가 너무도 태연해서 오시랑은 제가 잘못들은 줄 알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오시랑은 윤기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으나 겉으로 보기엔 그저 남루한 아이였다. 대승상에게 아들이 없으니 언젠가 양자를 들일 것이라곤 예상했지만, 저런 아이를 들인 것은 예상 밖이었다. 대체 왜 이런 중대한 결정을 갑자기 하신 겐지 이해할 수 없었다. 허나 대승상은 굳이 설명을 덧붙이진 않았다.
“내자는?”
“마님께선 여직 누워계시지요 뭐.”
“가보지. 헌데 그 아이는 어디 있느냐?”
“소주께선 저기 뒤에….”
대승상이 누군자를 찾자 오시랑이 하인들 옆에 서있는 유모를 가리켰다. 대승상과 더불어 윤기의 시선도 그쪽을 향했다. 어색하게 웃음 짓는 유모 뒤에 새빨간 당의와 다홍치마가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아이가 고개를 내밀었다. 제대로 묶지 않아 흐트러진 긴 머리칼이 얼굴을 살짝 거렸다. 허나 선명히 드러난 검은 눈동자가 제 아비를 지나 윤기를 향했다. 신기한 것을 보듯 호기심 어린 시선에 당황한 윤기가 부러 차갑게 시선을 돌렸다. 아이의 눈이 흔들렸다. 윤기는 단 한번 상처받아 본 적도, 다쳐본 적도 없을 것 같은 사람의 그런 표정에 심장고동이 들썩였다.
나중에 듣게 된 오시랑의 말에 의하면 그 아이는 대승상의 하나뿐인 여식이라고 했다. 그 아이는 올 해 열 하나가 되었고, 윤기의 누이동생이 되었다. 오시랑에게 이름을 물었더니 이름이 없다고 하였다. 앞으로 태자비가 되실 귀한 몸이라 집안에선 아가, 내지는 소주(少主)라고만 불린다고 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내일부터 태학의 백관이 와서 강론을 지도해주실 것입니다. 대승상께서 사서삼경을 모두 익히게 하라 명하셨습니다. 도련님.”
생전 처음 받아보는 호의와 대우였다. 이것을 누리게 해준 사람은 대승상이었다. 허니 윤기는 그의 어떤 말이든 따라야했다. 깍듯한 오시랑의 말에 윤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가 가져다 준 옷으로 갈아입고 낯설도록 안온한 침상에 올랐다. 처음으로 이곳에서 드는 잠이었다. 침상은 따뜻했지만 가슴은 차가웠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전쟁에서의 잔상이 아직 지워지지 않아서였다. 눈앞에서 눈도 채 감지 못하고 죽은 아비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자꾸만 그때의 모습이 보여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어미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비의 시신은 다른 병사들과 함께 묻었지만 어미의 시신은 찾지도, 수습조차 하지도 못했다. 헌데 저 혼자만 따뜻한 곳에서 편히 잠드는 게 죄악처럼 느껴졌다. 윤기는 가슴이 아팠다.
연신 그러한 생각에 시달리던 윤기가 결국 잠에 들지 못하고 방을 나섰다. 밤이 깊어 사람의 인기척이 없었다. 넓은 마당 앞 계단에 앉아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내내 가지던 긴장이 풀리자 마음이 덧없이 내려앉았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일평생을 함께 하던 가족이 이 세상에 더 이상 없다는 사실은 윤기를 나약하게 만들었다. 이곳에 오는 길에 수없이 마음을 다잡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이건 생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였다. 그는 고작 열 넷이었다.
“…….”
생각이 깊어지니 그제야 눈물이 나왔다. 아비가 눈앞에서 죽을 때에도, 어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흐르지 않았던 눈물이었다. 참으로 웃긴 일이었다. 혹여 약점이 될지도 모르는 눈물이라 그조차 숨죽여 흘렸다. 두 손으로 막은 얼굴이 서럽게 들썩였다. 가슴이 저려 숨이 막혔다. 지옥이었다.
그때 손등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의아한 감각에, 윤기가 얼굴에서 손을 떼고 눈을 들었다. 새빨간 당의, 대승상의 여식이라는 그 아이가 있었다. 언제 나온 것인지, 달빛을 받아 창백하기까지 해 보이는 하얀 얼굴이 걱정스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놀라 젖은 윤기의 눈이 잠시 커졌다. 아이는 말없이 윤기의 손을 쥐었다. 작은 손이 따뜻한 온기를 나눠주었다. 아이의 표정이 의연해서 윤기는 아무 말도 못했다.
“별채에는 저와 유모뿐인데, 유모가 지금 어머니께 갔으니 이곳엔 아무도 없습니다.”
“…….”
은은한 목소리였지만, 그녀는 윤기에서 소리를 참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뜻을 이해한 윤기의 입술이 나약하게 일그러졌다. 서러움에 어깨가 떨렸다. 아이는 알까. 한 순간에 세상 속에 버려진 기분을. 모를 것이다. 티 없이 깨끗하고, 구김 하나 없는 아이는 이런 절망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헌데도 위로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윤기의 어깨를 안았다. 분명 말을 제대로 섞어본 적도 없는 아이였는데, 마치 정말 제 가족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래서 윤기는 그 작은 아이를 붙잡고 울었다. 아무도 없어 괜찮다 했지만 여전히 숨죽여서. 허락되지 않는 비통과 슬픔을 집어 삼켰다. 아이는 가만히 그런 윤기의 등을 두드렸다. 생전 처음 겪는 감정이 어린 사내의 마음을 가차 없이 휩쓸었다.
/ 皇后列傳
한 날은 아이의 생일이었다. 허나 대승상은 타국에 연행 간 지 석 달 째였고, 어머니는 여전히병석에 누워만 계셨다. 그래서 아침부터 풀이 죽은 아이가 울상으로 마당을 거닐었다. 나간다고 하면 언제든 뜯어말리기 위해 유모가 눈에 불을 켜고 제 곁을 지키고 있었다. 오늘 하루만큼은 나가 즐겁게 놀고 싶었는데 허락될 리 만무했다. 마음이 답답했다. 아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취미 삼아 별당 안에 가득 기른 꽃과 나무는 키가 커 담장 밖 도성이라도 훤히 볼 수 있을 테지. 부럽구나. 뭐 이러한 한탄을 하면서.
“도련님.”
그때 윤기가 손을 뒤로 하고 별채에 들어섰다. 그를 알아본 마당을 쓸던 하인 한명과 유모가 인사를 올렸다. 아이는 환하게 반색하며 당장 윤기를 향해 달려갔다.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표정의 윤기는 그런 그녀를 보곤 작게 웃어주었다.
“탄일이라 들었다.”
윤기가 이 집에 와 처음 있는 그녀의 생일이다. 사흘 전 오시랑에게 이를 전해들은 윤기는 무엇을 주어야 할까 한참을 고민했다. 저 나이의 여인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제대로 알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랜 고민 끝에 머리에 꽂는 장신구를 준비하자 결심했다. 옆에서 오시랑이 소주께는 없는 장신구가 없다고 말렸으나 그거 말고 생각나는 게 없었다. 대신 의미라도 두고 싶어 청옥에 글귀를 새기고자 했다. 이름이 가장 적당할 터인데 그러고 보면 아이는 흔한 이름조차 없었다. 이내 윤기는 탄일 선물로 아명(兒名)을 지어주자고 생각했다.
“받거라.”
우선 청옥 머리꽂이를 건네었다. 윤기의 손에 들린 그것을 의아한 듯 빤히 보던 아이가 이내 환하게 웃었다. 오시랑의 말대로 그녀에게 없는 장신구란 없었지만 탄일에 받는 선물이라는 게 기분 좋았다. 한참을 그 귀한 물건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그녀가 고개를 들고 윤기를 보았다. 까만 눈동자가 청옥보다 반짝거렸다.
“고맙습니다. 오라버니.”
이제 아이는 오라버니 소리도 제법 잘했다. 워낙 윤기가 아이의 투정도, 이야기도 잘 받아주어 그랬는지 편하게 대했다.
“헌데 여기 새겨진 글자는 무엇입니까?”
그러다 청옥에 새겨진 옅은 글자를 내밀어 보이며 물었다.
“이름.”
“이름이요?”
윤기의 조용한 대답에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나까지 널 소주小注라 부를 순 없으니 아명이라도 있어야하지 않겠느냐.”
잠시 멍하게 윤기를 보던 아이가 이내 활짝 웃었다. 아명, 생전 처음 있는 것이었다. 황궁에 들어가면 태자비가 되고, 황후가 될 것이다. 그리 귀한 여인은 절대 이름으로 불리지 않고 마마라는 칭호만 붙었다. 애초에 필요가 없었기에 가져본 적 없는 것이었다. 헌데 그걸 윤기가 주었다.
“제 아명, 뜻이 무엇입니까?”
“소소昭笑”
밝은 웃음, 밝은 꽃 이라는 뜻이었다. 처음 생긴 이름을 그녀는 입으로 발음하고 뜻을 새겨 보았다. 윤기는 이 아명을 아주 쉽게 지었다. 그가 이 집에 온 그 첫 날, 달빛 아래서 제게 손 내밀던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기 때문이었다. 하얀 복사꽃처럼 흐드러졌다. 감히 흠모할 수도 없을 만큼. 소소는 제 이름이 마음에 들었는지 윤기에게 달려가 안겼다. 사실 제게 가장 큰 선물은 오라비였다는 것을 알까. 그 누구보다 자신을 위해주는 가족이 생긴 것 말이다. 그녀는 참으로 오랜만에 가슴이 벅찼다.
그리고 그러한 시간은 변치 않고 흘렀다.
“거짓말.”
“참말이다. 내가 언제 네게 허튼 소리 한 적이 있었느냐.”
윤기가 열일곱이 되었을 때부터는 대승상을 따라 국경 전쟁에 나섰다. 대승상은 제 권력이 가만히 앉아 정계에서만 쌓이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직접 생사를 거는 전쟁터에 나가 군사들과 동고동락하며 그들의 마음을 얻고, 국경의 치세도 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해서 어느 정도 학문을 익힌 후 윤기도 그를 따라 나섰다. 문제가 있다면 소소가 그런 오라비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열 밤만 자면 돌아온다고 윤기가 달래어도 소소는 거짓말이라며 그의 손을 붙잡고 떼를 썼다. 그 전까진 윤기 없이 몇 해나 살아놓고 이젠 오라비 없이는 하루도 못 사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런 그녀가 사랑스러웠지만 이리 시간을 끌 때면 윤기는 난감했다.
“아버지를 따르는 병사가 얼마나 많은데 왜 항상 오라버니를 데려가는 것이어요? 오라버니가 간다고 전세가 바뀌지 않아요.”
옆에서 대승상이 듣고 있었다면 하지도 못할 말을 둘만 있기에 겁도 없이 했다. 윤기가 그 당돌한 말에 이번엔 소리 내어 웃었다.
“내가 가지 않는다고 해서 전세가 바뀌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허나 오라버니가 가면 제 마음이 속상해 지잖아요. 득(得)과 실(失)은 확실히 따져야지요. 안 가면 잃는 게 없고, 가면 잃는 게 있는데 어찌 가시려는 것입니까.”
기가 막혔다. 글을 몇 자 읽더니 이젠 말장난까지 청산유수였다. 난감하다는 듯 윤기가 제 이마를 짚었다. 어떻게 그녀를 달래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면서.
“대신 다녀와서 사흘 동안 네 곁에만 있겠다.”
결국 그녀가 가장 바라는 것은 함께 있는 것이라는 걸 상기한 윤기가 제안했다. 전쟁에 나가지 않아도 요새 통 바빠 저와 함께 있어주지 않던 오라비였다. 이 제안에 솔깃해진 소소가 윤기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참입니까?”
“그래.”
힘 빠진 웃음을 뱉으며 윤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금세 심통 난 얼굴에서 배시시 웃음을 지은 소소가 윤기의 손을 들어 약지를 걸었다. 약조라도 받으려는 모양이었다. 윤기는 순순히 그녀가 하자는 대로 해주었다. 여기서 더 지체되면 대승상이 직접 찾으러 올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금방 올 터이니 제발 말썽 피우지 말고, 조용히 기다리거라. 응?”
윤기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소소는 그저 웃으며 콧잔등을 찡그렸다. 사실 이렇게 소소를 두고 집을 떠나 있을 때면 윤기의 마음이 가장 불편하다는 걸, 그녀는 몰랐다. 윤기가 씁쓸하게 웃었다. 이젠 어느새 소소가 옆에 있는 게 익숙해졌다. 그녀가 항상 자신을 기다리고, 작은 입술로 끊임없이 말을 거는 일상이 참으로 안온했다. 오히려 혼자가 낯설 정도로. 윤기는 이러한 적응이 가끔은 두려워졌다. 언젠간 떠나가야 할 아이인데, 당장 지금 놓아주는 것도 힘들었다. 말에 올라 사가를 떠나며 윤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그래도 이 시간이 조금 더 길었으면. 그녀의 웃음을 볼 수 있는 날이 조금만 더 길었으면, 속으로 간절히 염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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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가 이곳에 온 지 여섯 해가 지났다. 약관의 윤기는 애초에 이 가문의 사람이었던 것처럼 많은 것을 빠르게 익히고 배웠다. 보통 당상관의 자제들은 음서를 써 관직을 받았으나, 윤기는 태학 백관들의 천거에 의해 병부시랑을 직임 받았다. 처음 얻은 관직치곤 벼슬이 높았다. 대승상은 명석하고 눈치 빠른 윤기를 아꼈으나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잘못을 하면 별채에서 나오지 못하는 게 다인 소소와 달리, 어릴 때부터 윤기는 광에 갇히고 매를 맞았다. 나이가 자라 그런 식의 벌을 받진 않았지만 관직에 나갔기에 잣대는 더욱 엄격해졌다. 가문을 위해, 오직 가문의 이익만의 위해 살지 않는다면 대승상은 가차 없이 변했다. 그때 망국의 전쟁터에서 천애고아인 윤기를 데려온 것은 대승상 자신을 위한 것이었지, 윤기를 위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어제 잡아들인 이들이 누구냐”
“신호지역에서 민란을 일으킨 이들이옵니다.”
신호지방을 관할하는 수령은 이 가문의 사람이었다. 워낙 착취와 도략이 심한 탓에 살기 어려운 지역이라 소문이 파다한 곳이기도 했다. 그러니 지금처럼 민란이 한없이 일어나는 것이겠지. 누구보다 백성의 사정을 잘 알고 있을 윤기였으나, 그에게 인정이란 없었다. 윤기가 관할하는 병부는 대승상의 뜻과 이치에 합치하게 움직였다. 가문의 사람을 지키는 게 먼저였다. 보고를 받은 윤기는 차가운 얼굴로 마당을 빠르게 나섰다.
“우선 윗선으로 상소가 쓰이는 것을 막아라. 민란의 주모자들은 병부에서 조용히 제거한다.”
“예.”
그 위의 대신들이나 황제가 알아봤자 좋을 것 없는 소식이었다. 민란에 주목하면 수령의 문란한 짓거리에도 관심이 갈 테니, 가문의 폐단에 시선이 쏠리기 전에 병부에서 조용히 처리하는 것이 나았다. 백성들에겐 통탄스러운 일이겠으나 가문을 우선하는 게 그에게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라버니!”
그때, 일을 지시하며 다급하게 움직이던 윤기의 걸음이 멈추었다. 소소가 앞을 막아 세웠기 때문이었다. 소소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걸렸다. 윤기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윤기가 이 집에 와서, 그녀의 오라비가 된 후 네 해 동안 소소는 윤기를 끔찍이 찾았다. 윤기는 다정했고 외로운 소소의 곁을 자주 지켜주었다. 넓고 북적이는 대승상의 사가였으나, 그동안 유모를 제외하곤 그녀와 말을 섞을 이도 제대로 없었다. 윤기가 바로 그 자리를 채운 것이었다. 윤기는 그녀에게 잘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소소의 말은 무엇이든 들어주었고, 그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주었다. 마치 날 적부터 그녀를 곁에서 본 사람처럼. 그래서 소소는 윤기를 좋아했고 따랐다. 허나 네 해가 지난 후 윤기는 갑자기 소소를 피했다. 매정할 거면 차라리 처음부터 그러지 그랬느냐고. 그녀가 원망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서툴렀고 제 마음을 아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터질 듯 부푸는 감정의 정체가 정염이라는 것을, 연정이라는 것을 자각하자마자 그녀를 외면했다. 그녀는 제 오라비라는 자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매일 밤 어떤 욕심에 사로잡히는지 알지도 못했다. 그래서 오라비의 갑작스런 냉대에 놀라 눈물도 흘리고 악도 썼다. 허나 윤기는 소소가 우는 것보다 제가 소소를 사랑하는 게 더 두려웠다. 훌쩍 자라 여인이 된 그녀는 태자의 여인이었지, 제 여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윤기는 소소를 마주하기 싫어 대승상을 따라 매번 전쟁에 나갔고 바쁘게 일했다. 가끔 제 처소 문 앞에 기대어 대체 왜 그러냐고, 투정하는 소소를 볼 때마다 인내가 닳았지만 그는 끝까지 선을 넘지 않았다. 그러한 시간이 이년이나 가니 소소도 예전만큼 윤기를 찾거나 귀찮게 하지 않았다.
“요즘 들어 매일 밤 어머니의 비명소리가 들립니다.”
그런 소소가 윤기의 발 앞에 엎드렸다. 간청이라서가 아니라 다리에 힘이 풀렸기 때문이었다. 한숨을 내쉬던 윤기가 무릎을 굽히고 그녀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그 이후로 그녀가 이렇게 자신을 막아 세우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건 투정이 아니라 무슨 일이 있기 때문일 터였다.
“헌데.”
“아버지가 안채를 막아놓으셨어요….”
소소의 어미는 이미 수 해 전부터 병환을 앓아 누워만 있었다. 허나 요즘은 그 병세가 더 심각한 모양이었다. 사방에서 명의를 불러 치료하지만 매일 밤 비명소리만 늘어갔다. 대승상은 그를 알고 소소가 제 어미를 볼 수 없게 안채를 걸어 잠갔다. 소소는 티 없이 태자비가 되어야 할 고귀한 이여서, 사사로운 어미의 온정 따위에 흔들려선 안됐기 때문이었다. 헌데도 소소는 어머니가 너무도 보고 싶었다. 걱정되고 또 염려되었다.
“어머니 소리에 매일 밤 잠도 못 듭니다. 염려되는데 만날 수도 없습니다.”
눈물을 매달고 비통하게 말했다. 소소를 일으키다 그녀가 다시 힘이 풀리는 바람에 윤기가 그녀를 떠받치듯 안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온기였다. 소소가 울며 윤기의 뒷목을 그러안으려 했다. 윤기는 그녀가 느끼는 두려움을 알았지만 매정하게 그 손을 풀었다.
“해서,”
예전에 늘 그랬던 것처럼 안고 등을 두드리며 괜찮다, 괜찮다 해주길 바랐다. 허나 윤기는 그녀의 얼굴을 똑똑히 바라보고 차갑게 대꾸했다. 소소의 눈물이 멎었다.
“그걸 왜 내게 말하는 것이냐.”
“제 부탁을 들어주세요.”
시리디 시린 윤기의 눈을 주시하면서, 소소는 헐떡임을 멈추고 말했다. 윤기가 미간을 좁혔다.
“아버님이 출타하셨으니, 오라버니가 지금 안채 문을 열어주세요. 오시랑이 제 말은 안 들어도 오라버니 명을 들을 것입니다.”
소소는 윤기가 제 부탁을 들어줄 것이라 확신한 채 말했다. 어째서일까. 어째서. 악착같이 노력했던 그간의 냉대를 다 지워버리고 자신할 정도로, 우리의 정이 그리 깊었나. 소소가 믿는 윤기의 신의는 그 정도로 강했던 것일까. 정말 노력했다고 생각했는데. 윤기는 순간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소소가 다시 눈물을 흘리며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소소는 윤기가 대승상을 거역하는 순간 어떤 벌을 받는지 잘 알았다. 헌데도 그녀는 윤기를 찾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기가 제 청을 들어줄 거라 믿으니까. 제 눈물이 무기가 되는 것처럼 눈앞에서 그를 상처 입혔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지워질 것이라고, 그저 정 때문에 생긴 마음은 실낱까지 가벼운 것이라 흩어지고 말 거라 스스로 얼마나 되뇌었는지 모른다. 윤기는 제 마음이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보면 한없이 마음이 무너졌다. 노력으로 되지 않아 절망하고 또 절망하며 무수한 시간들을 보내었다. 망국의 전쟁터에서 이곳으로 와 처음 만난 그 앳된 얼굴이 매일매일 가슴을 어지럽혔다. 그리고 끝내 그녀가 제 모든 것을 가져갔다. 남은 숨 하나까지 앗아가서 제 멋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남지 않게 했다. 암담했다.
“내가 왜, 무엇 때문에….”
윤기가 허망한 웃음을 뱉으며 물었다. 그 물음은 소소를 향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향한 것이었다. 윤기에게 대승상의 말은 법이다. 그가 실리를 잊지 말라 하였다. 이익을 셈하고 단 한시도 감정에 동요하지 말라 하였다. 그리고 그 대승상이 병든 부인이 있는 안채에 누구도 들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헌데 대체 왜, 무엇 때문에.
“오시랑.”
“예, 도련님.”
“안채를 열어.”
윤기는 기어코 소소를 일으키고 안채 문을 열었다. 오시랑은 걱정스런 얼굴로 윤기를 보며 하인들에게 안채를 열라 손짓했다. 대승상이 없을 때만큼은 윤기가 이 집안의 주인이다. 때문에 그의 명을 받잡아야 한다. 허나 대승상이 돌아오면 그 책임은 온전히 윤기의 것이 되었다. 그럼에도 윤기는 어쩔 수가 없었다. 세상이 끝난 사람처럼 망설임 없이 안채로 뛰어드는 소소의 뒷모습을 무력하게 바라보는 것밖에는. 윤기는 그때 이미 제 끝을 알았다. 저 아이가 내 목숨을 내놓으라 한다면 나는 홀린 듯 주고 말겠구나.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한낱 자신쯤이야 쉽게 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숨이 막혔다. 사랑이 그를 살게 함과 동시에 죽게 만들었다. 윤기에게 그녀는 구원이자, 생이자, 죽음이었다.
二十八
태화를 만나고 반역이 결정된 날 밤 태형은 정국을 알현했다. 태화는 진나라 유민보다 제 복수가 더 중했지만 태형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비록 패망국이나 진 황족의 피가 흘렀다. 그러니 사사로운 감정보다, 단지 투기에 눈이 멀어 황제를 치기보다, 진나라 유민들과 그 미래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 대승상은 믿고 유민들의 내일을 걸 수 있을만한 자가 아니다. 이번 역모가 실패한다면 역적으로 몰려 죽고, 성공한다 해도 이용만 당하다 대승상의 손에 죽을 것이 뻔했다. 나라의 복위, 진의 새로운 번성. 그것은 역모를 통해서가 아니라 주나라 황제와 영합하고 협의해 이뤄내야 할 대업이었다. 태형은 총명했고 제 선택을 후회치 않았다.
“이미 반역의 움직임은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태형의 말에 황제는 태연자약한 얼굴을 했다. 그런 지배자를 보면 견디기 어려운 무력감과 투기심에 휩싸였다. 허나 태형은 이성을 붙잡았다. 자신은 유민들을 책임져야 했다. 명석한 황제는 이미 역모의 흐름을 알고 있을 터. 대승상의 사병 규모가 큰 만큼 황제도 나름대로 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거기에 제 도움까지 있다면 훨씬 승산이 컸다. 진이 역적과 손을 잡는 게 아니라, 황제와 손을 잡는다. 이는 공신이 될 수 있는 기회였다. 진의 황족이었던 태형이 역모를 몰아내고 공신이 된다면 유민들의 삶도 훨씬 평안해질 수 있었다. 해서 태형은 그 길을 택했다.
“폐하께서 짐작하시는 바는 해주와 도성의 사병, 그리고 대승상이 직접 설득하러 간 행성주들이겠지요.”
“너는 무얼 더 안다는 소리처럼 들리는군.”
황제의 얼굴에 제법 흥미가 서렸다. 태형은 침착하고 신중히 입을 열었다.
“정면으로 내전을 일으키는 것이기에 대승상도 더 확실한 승부수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모르시는 마지막 하나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걸 너는 아느냐?”
“국경을 떠도는 진나라 유민, 대승상은 그들을 포섭해 반란군 세력을 키웠습니다.”
처음으로 정국의 표정에 거센 동요가 일었다. 익위사도 대승상에게 더 큰 무기가 있을 거라 짐작했지만 진의 유민은 전혀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이미 진이 패망한 지는 몇 해나 지났다. 뿔뿔이 흩어졌거나 나름대로 정착하며 살고 있을 그들을 어찌 영합한 것이지. 아니, 그것보다 정국은 태형이 이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인지가 더 궁금했다. 그를 알아차린 것인지 정국이 하문하기 전에 태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신은 죽은 진왕제의 아들이며 유민들을 통솔하는 지도부와 내통하고 있습니다.”
“뭐라?”
방금 자신이 무엇을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정국이 미간을 좁히며 반문했다. 허나 태형은 뻔뻔하게도 제 할 말을 이어갔다. 황제는 어이가 없어 실소가 나오는데 태형은 담담했다.
“대승상은 진의 복위를 도와주겠다고 접근했고, 지금까진 저희와 한패인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헌데 그걸 왜 내게 말하는 것이지?”
황제가 가늘게 눈을 뜨며 태형을 보았다. 대승상과 손을 잡은 게 아니기 때문에 제게 이걸 고하는 것일 터였다. 그는 태형의 생각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저는 유민들을 망치는 것이 아니라, 살리고 싶습니다.”
“…….”
“한치 앞을 걸기엔 대승상보다는 폐하가 적격일 것 같아서요.”
살리고 싶다라. 퍽이나 책임감 있는 말이었다. 정국이 묘한 얼굴로 태형을 바라봤다. 그동안의 당돌했던 행동도 다 황족의 피가 흘러 가능했던 것이었군. 곱씹어도 통탄할 일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어찌되었건 태형으로 인해 일이 더 쉽게 풀릴 것 같았다.
“신이 폐하의 힘이 되어드리겠습니다. 허면 폐하께선 진의 유민들과….”
“…….”
“황후를 살리시면 됩니다.”
허나, 이어지는 말에 정국의 표정이 굳었다. 태형의 목소리는 흔들림 없었다. 그도 황제가 황후를 해하진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것만은 확실히 보장받고 싶었다. 그리고 알리고 싶었다. 여직 제 마음은 흔들림이 없다고, 그러니 자신도 황제 당신도 같이 이 일에서 걸리는 이는 오직 그녀 하나뿐이라고. 정국이 느리게 한숨을 쉬었다.
“네 얕은 걱정이 없어도 다치게 두지 않아.”
“허나 원망을 피할 수도 없겠지요.”
모두 알고 있다. 이 모든 것이 황후에게 얼마나 가혹한 일이 될지. 그럼에도 무엇도 잃지 않고 모든 것을 얻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역모에 뜻을 보탠 이들이 조정과 행성, 그리고 군에 누가 있는지 파악할 수 있게 명부를 만들겠습니다. 그리고 최대한 내전의 규모가 확대되지 않게 전략이 세워지면 바로 폐하께 보고하지요.”
처음부터 결정된 일이었다. 태형이 거사 날에 황제의 편으로 돌아서는 것은. 태형의 확신어린 말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계획되고 진행되는 동안 정해진 것들을 태형은 황제에게 일일이 보고해 올렸다. 총 네 지역의 잠복군이 사방에 매복할 것이라는 것도, 진의 유민이 먼저 성문을 뚫으면 뒤 이어 대승상의 군이 올 것이라는 것도. 황제는 태형의 보고를 들으며 황궁 안을 정비하고 대비했다. 확보할 수 있는 도성 내의 군사들은 물론, 상비군도 집결시켰다. 질이 좋은 무기를 나누어주고 매복한 군사들을 먼저 척결할 동선 또한 확보했다. 이는 모두 태형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빼어난 기지로 진나라 유민들을 설득했고, 황제와 손을 잡으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한 대승상의 세력을 제게 유리한 대로 움직였다.
그리고 거사 날, 태형은 진의 선봉에서 황군을 향해 달려갔다. 허나 이내 정해진 대로 돌아서 대승상의 군을 쳤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당황한 대승상군이 헤매는 사이 속전속결로 내전이 이어졌다. 태형은 자신의 나라, 진이 멸망할 때에도 국경을 넘느라 싸우지 못했던 울분을 태워 사력을 다했다.
“누이!!”
그러는 동안 태화는 성벽에서 나오지 못하게 했다. 애초에 황제에 대한 복수심으로 대승상과 손을 잡으려 했던 태화였다. 그러니 태형의 뜻에 따라줄 리 만무했다. 해서, 내전이 끝날 때까지만, 무사히 진의 유민들이 살아남을 때까지만 그녀를 그 곳에 가두고자 했다. 이는 대승상과 문하시중 뿐 아니라 태화마저 배신한 것이었으니, 끝나고 나면 어떠한 원망이든 들을 생각이었다. 헌데 그런 태화가 성벽에 올라 활을 들었다.
말에 올라 가차 없이 적을 베던 태형이 그런 태화를 보았다. 그녀가 울분에 찬 눈으로 이 정신 없는 전장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었다. 태형은 그녀의 시선 끝에 걸린 소소를 보았다.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애초에 이곳에 소소가 있다는 것 자체가 당황스러웠지만, 제 누이가 황후를 노린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황제의 손에 부군을 잃은 누이. 해서 똑같이 황후를 죽이려는 누이. 이를 알아차리자마자 태형은 돌진했다. 성벽을 향하며 날아오는 화살을 쳐냈다. 자신을 발견한 태화가 서둘러 활을 놓고 내려오는 게 보였다.
“누이!”
다급히 말에서 내려 성벽을 올랐다. 그리곤 정신없이 내려오는 태화와 마주쳤다. 태형을 보자 놀라 어깨를 흠칫하던 태화는 이내 일그러진 표정을 했다. 태형이 달려가 태화의 어깨를 잡았다.
“네가 모든 것을 망쳤어! 이게 어떤 기회였는데, 내 마지막….”
태화는 애초에 대승상과 손을 잡았든, 잡지 않았든 이 전란을 기회로 황후를 죽일 생각이었다. 태화의 목적은 정말 진의 복위와는 전혀 관련 없이 오직 사사로운 복수뿐이었어. 절망스러운 누이의 눈이 그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태형이 한숨을 내쉬었다. 주저앉으려는 그녀를 붙잡았다.
“어찌 이리 미련해. 황후를 죽이면, 누이는 살 수 있을 것 같아?”
태형의 음성이 애달팠다. 복수가 삶의 가장 큰 버팀목이 되는 것이 얼마나 미련하고 고달픈 일인지 가장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태형의 말에 태화는 실소를 내뱉었다.
“언제 내가 살 거라 했느냐. 복수를 마치고 나면 나도 죽을 것이다. 내 부군의 뒤를 따라 나도 갈 것이야.”
이채 어린 눈이 이미 넋을 놓았다. 태형은 누이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대로 둔다면 정말 황후와 황제를 죽이고도 남을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 결국 태형의 태화의 목 급소를 가볍게 쳤다. 순식간에 정신을 잃은 태화가 눈을 감고 쓰러졌다. 태형이 그녀를 받아들었다. 누이가 깨어나면, 유민들에게 말해 멀리 떠나게 하려했다. 원망도, 미움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전처럼 제 하고픈 것을 하며 살라고. 그리고 평생 자신을 원망한다 해도 담담히 그걸 받아드리겠노라고. 그녀의 죄가 자신의 죄악이 된 마냥 받아들고 서서, 태형은 성벽을 내려왔다. 그를 보고 달려온 유민군이 쓰러진 태화를 놀란 듯이 보았다.
“주군, 어찌….”
“누이를 안전한 곳에 데려다다오. 그리고 누이가 깰 때까지 절대 나갈 수 없게 밖을 지켜. 장소는 황궁 안이 좋겠구나.”
유민군 중 한명에게 태화를 맡겼다. 내전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절대 그녀가 황후나 황제와 만나게 해선 안 되니까. 태형은 그렇게 멀어지는 누이의 모습을 천천히 보았다. 내전은 애초에 황제와 태형이 무엇을 얻고 무엇을 버릴 것인지 선택하는 것에 달린 일이었다. 황제는 황후의 손을 놓았고, 태형은 태화의 손을 놓았다. 이 거사의 승리는 그렇게 얻어진 것이었다.
/ 황 후 열 전
내전이 끝났다. 더 많은 희생을 막고 대승상과 문하시중의 죽음으로 반역군은 백기를 들었다. 황제는 황청과 별감의 인력을 동원해 엉망이 된 성문 앞을 정리하라 명했다. 시신을 수습하고, 망가진 백성들의 사가와 살림을 정비했다. 피냄새 가득하던 전쟁터가 어느새 일상의 흔적을 회복하고 있었다.
“역적의 무리를 발본색원(拔本塞源)하신 것을 감축드리옵니다.”
그러한 여파는 조정까지 이어졌다. 태형이 가져온 명부에 적힌 대로, 내전에 제 사병을 하나라도 보냈거나 뜻을 같이 한 자는 모두 참형에 처했다. 역도의 무리를 몰살하는 병부는 평소보다 살상의 기운이 강했다. 황궁 밖뿐 아니라 안까지 모다 죽은 자의 피로 물들었다. 또한 대전회의에 더 이상 대승상의 사람은 없었다. 대승상과 문하시중, 그들을 조력하던 태사까지 죄다 죽고 나니 태부의 시대가 열렸다. 태부와 내사령을 비롯하여 평소 대승상의 세력에 반기를 들던 자들을 주축으로 신진세력들이 조정을 채웠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 용상에는 어느 때보다 단호하고 무정한 얼굴을 한 천자(天子)가 있었다. 그의 뺨과 목에 내전에서 생긴 자상들이 가득했다. 허나 그럼에도 황제는 단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어보였다.
“대승상의 남은 사병들은 모두 북방의 진으로 보냈사옵니다.”
“곧 있을 하(夏)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지금부터 그 곳에서 훈련받을 것이옵니다.”
“예 폐하. 또한 대승상이 사가에 모아둔 재물과 토지 역시 황궁으로 환속하였습니다.”
가진 것이 많던 대승상이라, 남긴 것도 많았다. 황제가 따로 명하지 않아도 병부와 이부, 그리고 예부에서는 그의 재산을 알아서 잘 처리해 두었다. 대승상의 흔적은 이례 없이 지워져 가고 있었다.
“이번 역모를 처단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채운 것은 단연 태형공이 아니겠습니까.”
그때 태부의 반대편에 정갈히 서있던 태보가 입을 열었다. ‘태형공’ 한낱 별감에서 삼정승 중 하나인 태보의 공대를 받는 태형, 그 역시 당연하다는 듯이 이 대전회의에 참석해 있었다. 이미 태보를 비롯해 그의 뒤에 줄을 선 자들이 늘어났다. 새로운 권력을 탐하는 일은 늘 뜻밖인 법이니. 대승상이 죽은 후 재상의 권력은 태부가 아니라 진의 왕족이었던 태형, 그가 가질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태보와 눈치 빠른 몇 대신은 태형과 한 패가 되어 권력을 쥐고자 하였다. 정국의 시선이 태형을 향했다. 그는 차분한 얼굴로 묵묵히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허나, 그 자는 제 신분을 숨기고 별감으로 황궁에 숨어들었던 자입니다. 아무리 공을 세웠다고 하나 믿고 쓸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
이때다 싶어 그를 견제하기 위한 태부 측의 간언도 이어졌다. 허나 태보도 잔 뼈 굵은 주나라의 오랜 대신. 그는 그들의 새로운 주군이 될지도 모르는 태형을 열심히 변호했다.
“태형공이 황궁에 잠입해 무슨 일을 저지르기라도 했습니까? 제 나라의 복위를 위해 폐하를 위협하거나, 황궁의 기밀을 진의 유민들에게 누출하거나, 모두 할 수 있었음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요. 이게 바로 태형공이 신뢰할만하다는 반증입니다!”
태보의 자신 있는 말에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기회를 노린 것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자신이 공을 세울 때까지 몸을 웅크리고 기다렸다가, 내전을 틈 타 폐하의 마음을 현혹한 것입니다. 결국 저 자의 목표는 진의 복위일 것입니다 폐하!”
“이보시오 태부! 감히 공신의 심중을 함부로 넘겨 집지 마시오!”
뜻이 맞지 않은 이들끼리 언쟁이 거세졌다. 그럼에도 정국은 담담한 얼굴로 태형을 보았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 이만큼 논쟁이 불거진 것인데도, 마치 관련조차 없는 이처럼 침착하고 태연하기만 했다. 태형은 저들의 말처럼 복위를 탐하지도, 관직을 탐하지도 않기 때문이었다. 그저 그의 바람은,
“태부가 염려하는 것이 무엇인지, 짐도 알고 있다.”
“폐하.”
한참 만에 황제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 시끄럽던 장내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천자가 태형을 빤히 보았다.
“저 자는, 진의 복위를 위해 주나라를 망하게 할 칼날이 될지도 모르지.”
“…….”
“허나, 이번 역모를 처단하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것도 사실이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그 공을 모른 척 할 수는 없어.”
황제의 목소리는 일말의 고민도 의구심도 없었다. 그저 제가 하는 말은 모두 법이 되고 치세가 될 것이라는 걸 아는 사람처럼, 딱 그만큼만 오만했다. 태부는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태형은 이리 짐에게 가까이 오라.”
정국이 용상에서 살짝 몸을 일으키고 태형을 향해 손짓했다. 처음으로 시선을 든 태형이 그를 보고 발을 움직였다. 정렬한 대신들의 틈을 지나 황제의 용상 앞에, 그 높은 계단 앞 붉은 길에 가만히 섰다. 흡사 천자와 제후의 모습이었다. 태형은 천천히 한쪽 무릎을 완전히 굽히고 부복하듯이 앉았다.
“마침 연호부(衍弧部)가 이번 일로 인해 비었더군.”
황제의 통찰처럼 연호부령은 제 가산을 역모에 가담한 탓에 목이 잘려 죽었다. 비통한 일이었다.
“패진(敗眞)의 태형을 연호부령에 명한다.”
고민 없이 떨어지는 정국의 말에 장내가 다시 한 번 술렁였다. 연호부라면 어떤 곳인가. 바로 관리의 비리를 감찰하고 감시하여 보고하는 관청이었다. 관직과 인사발령을 총괄하는 이부와 더불어 가장 기세가 강하며 모두 대신들이 눈치 보는 관청이기도 했다. 연호부에선 황제의 명 없이도 관리를 데려다 문초하고 고문하는 일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헌데 그 막중한 연호부령의 자리에 태형을 세운다고 하시었다. 순식간에 머리가 아뜩해진 태부와 내사령이 한없이 폐하,를 불렀다.
“폐하.”
“폐하, 어찌 연호부령은 육부의 관리 중에서도 그간의 실적을 보아 뽑습니다. 헌데 저 자를….”
잔뜩 당황한 내사령의 말에 정국은 태연히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허면, 내사령직을 줘야 했나?”
그 한마디에 내사령의 얼굴이 굳었다. 그의 입이 약속한 마냥 꾹 다물렸다. 저건 경고였다. 네 자리를 내어놓을 것이 아니라면, 감히 황제의 말에 토 달지 말라는 경고. 그 어느 때보다 황권이 강한 때였다. 이때 어심의 노를 살 바엔 다른 쪽을 뚫어봄이 옳았다. 조용히 한숨을 내쉰 태부가 이야기의 노선을 틀었다.
“폐하, 황후는 어찌 처결하실 것이옵니까?”
태부는 팔 한쪽을 내어주는 대신 머리를 노리고자 했다. 황후의 자리. 그 말에 정국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었다. 황제의 마지막 남은 근심이자, 가장 가슴 깊이 박힌 염려였다. 이미 모든 이가 문하시중이 죽기 전 황후를 말에 태우고 달아났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애초에 황제는 황후를 황후전에 가두고 역모에 대해 일말 아는 바도 없었다 꾸며내 그 직위를 지키고자 했다. 허나 황후는 전장에 모습을 보였고, 제 오라비의 목숨을 구걸하기까지 했다. 빠져갈 구멍이 없었다. 정국이 제 이마를 짚었다.
“역적의 여식에, 문하시중과 도망까지 꾀했던 자입니다.”
“예, 폐하. 황후도 즉시 참형에 처하심이 옳습니다!”
이번만은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 태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황제의 앞에 부복하고 선 태형의 표정도 점차 암담해졌다.
“그렇습니다. 폐하. 내전을 도성의 백성들이 두 눈으로 목격하였습니다. 민심이 더 들끓기 전에, 황후를 참형하거나 관노로 보내야 합니다.”
이번엔 태보의 뜻도 같은 듯 싶었다. 조정의 모두가 황후를 쳐내라고, 그것도 모자라 죽여버리라고 청하고 있었다. 허나 정국은 그리 할 수 없었다. 이 모든 대신의 반발보다, 하물며 황위의 위협보다 그게 더 어려운 일이었다. 어찌되었건 지금 상황에서 황후자리를 사수할 순 없었다. 그녀의 목숨이라도 지키려면 이는 당연히 내놓아야 할 것이었다.
“황실에 역적의 여식이 황후가 되었던 전례는 없지. 당연히 폐위해야 마땅하다.”
“…….”
단단한 황제의 음성에, 태형이 고개를 들어 그를 빤히 보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태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말 내치실 거냐고, 그리 묻는 것 같았다. 정국은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렸다. 저 주제 넘는, 황후에 대한 걱정이 보기 싫었다.
“연호부령 태형에게는 황제의 교지를 내리마.”
그래서 서둘러 눈 앞에서 치워버릴 작정으로 교지부터 내렸다. 옆에 선 환관이 황제가 옥새를 찍은 교지를 가지고 내려가 태형에게 주었다. 태형은 천천히 그것을 받아들고 다시 황제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황은이 만극하옵니다. 폐하.”
분명 황제가 제 입으로 황후를 폐위하겠다고 하였다. 태형이 연호부령이 된 것은 통탄할 일이었지만 그래도 황후자리가 공석이 되었으니 마냥 손해도 아니었다. 교지를 들고 다시 자리로 들어가는 태형을 보며 태부는 조용히 웃었다.
“허면 당장 황후를 병부로 잡아들이라 명할까요?”
성격 급한 병부령이 옆에서 여쭈었다.
“아니, 황후에게 폐위를 명할 것이나 참형에 처하진 않을 것이다.”
“예?”
죄다 놀람의 탄식과 말을 얹는 바람에 대전 안이 술렁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냐며 자신을 보는 대신들에 정국은 가만히 얼굴을 쓸 뿐이었다. 모두 위의 황제이나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이 우스웠다.
“대승상의 여식이라 하나, 황후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대승상에게 자금이나 병력을 조력한 적이 없다. 내전에 모습을 보였건, 문하시중과 함께 도망쳤건 짐은 그를 높이 사 황후를 살려 줄 생각이야.”
“폐하! 허나….”
“나의 태자비로, 짐의 황후로 몇 년을 동고동락한 여인이다. 짐이 그 정도 관용도 베풀지 못하는가?”
처음으로 황제의 언성이 높아졌다. 상석에 앉은 황제는 전장에서는 그 누구보다 무정하고 잔혹한 이였다. 붉은 투구를 썼음에도 제 얼굴이 피로 붉게 물들 정도로 가차 없이 사람을 베던 자. 그런 이가 제 여인에게 관용을 말했다. 모순적이지만 그만큼 절대적이기도 한 말이었다. 태부는 이번에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바란 것은 백야가 황후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었기에, 한낱 폐후의 목숨 쯤은 살려 줄 수 있었다.
“허면 관노로 내치시겠습니까?”
누그러진 어투로 여쭈는 내사령에, 정국이 고개를 저었다.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어심에 대신들은 모두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폐서인은 액정궁에 무수리로 보낸다.”
액정궁. 뜻밖의 장소에 놀란 대신들이 눈을 굴렸다. 액정궁 무수리가 관노와 비슷한 위치이긴 하지만 일이 고되고 힘든 탓에 상상도 못했던 자리였다. 그래서 모두가 폐하께서 관용은 베푸시되, 황후를 제대로 내치시려 함이구나 생각했다. 태형만을 제외하고. 그는 느릿한 숨을 뱉었다. 기어코 제 황궁에 두려 하시는 구나. 절대 그녀를 제 손아귀에서 놓아주지 않고, 원망을 받아도 제 품 안에서 하게 하시는 구나. 참으로 이기적이고, 참으로 자약했다. 황제는 변함없이 그런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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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아래 혼자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황궁에 들어와 외롭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이제는 정말 혼자였다. 되돌아갈 사가가 사라지고, 유일한 혈육이었던 대승상과 오라비가 죽었다. 그녀의 곁에는 가족도, 수족 같던 도미도, 끈질기게 붙잡았던 연정조차 남지 않았다. 눈물이 흘러 흘러 시간을 밀어내고, 짙었던 감정도 남김없이 앗아갔다. 그녀의 마음에는 메마른 분노만 도사렸다.
“폐서인은 황제폐하의 교지를 받아라.”
황제, 그 이름만 들어도 피가 차갑게 식었다. 황제이기에 자신을 버리고, 황제이기에 오라비를 죽여야 한다고 했다. 그 전의 모짐은 모두 여린 속살을 숨긴 껍데기에 불과했던 것처럼 미련했던 윤기의 마지막 한마디가 귓전을 어지럽혔다. 네 잘못이 아니라고, 허나 그녀는 스스로 자책하는 걸 멈출 수도 없었다.
황후는 더 이상 황후가 아니다. 그녀는 손아귀에 남은 것 하나 없이 역적의 딸이자 폐서인이 되었다. 비단 의복이 아닌 새하얗고 초라한 장의를 입은 그녀는 가장 존귀한 황후에서 나락으로 떨어졌다. 역적의 여식이기에 폐위뿐 아니라 죽이거나 관노로 삼아야 한다는 조정대신들의 의견이 빗발쳤다. 허나 황제는 그녀를 액정궁 무수리로 보내는 것으로 일단락 했다. 보통 황궁 밖 사가나 감업사로 내쫓는 것과 달리 액정궁은 아주 생소한 결정이었다. 모두가 의아해 했으나 감히 지존의 말에 토를 달 수도 없었다. 소소가 제게 온 교지를 받아들고, 황후전 모든 것을 버리고 나왔다. 맨발로 딛는 황궁은 시리고 추웠다. 마치 무정한 현실처럼.
“폐서인은 황후의 직위를 거두고 폐위한다. 역모의 전말을 조사하고, 짐의 하교가 있을 때까지 액정궁에서 제 소임을 다하라.”
환관이 황제의 교지를 대신 읽어 내렸다. 소소가 가는 액정궁은 냉궁 중에서도 냉궁이다. 선대 황제의 후궁 중 감업사로 쫓겨 가지 않은 이들이 남아있거나, 나이가 찼으나 상궁이 되지 못하고 노쇠한 궁녀들이 모여 살았다. 그 중에서도 액정궁 무수리는 후궁과 궁녀들의 수발을 들며 황궁의 궂은일을 다 맡아서 했다.
“따르시지요.”
아직은 존대하는 환관이 소소를 향해 말했다. 소소는 버썩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쓴 물이 올라왔다. 먹은 것이 없었지만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액정궁으로 갈 바에 이대로 호수에 몸을 던져 죽을까, 혀를 깨물까 수없이 고민했다. 허나 죽지 말고 살라고, 제 목숨보다 더 자신의 생을 걱정하던 윤기가 생각 나 그럴 수도 없었다. 소소는 정말 죽지 못해 살아있었다.
“폐하.”
“폐하를 뵈옵니다.”
그때 그녀의 옆에서 액정궁으로 인도하던 환관과 상궁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예를 올렸다. 황제가 행차했기 때문이었다. 제 마지막 모습이 얼마나 비참한지 구경이라도 하러 온 것일까. 허망한 얼굴로 바닥만 보던 소소가 시선을 들었다. 반대편 교각에서 정국이 걸어오고 있었다. 소소는 그를 똑똑히 보았다. 한 치의 흐트러짐과 없이 전과 다를 바 없는 황제의 모습에 화가 치밀었다. 소소는 제 감정의 폭이 퍽이나 얄궂다고 생각했다. 다신 어떤 일에도 흥분하지 않을 것처럼 죽어버린 마음이었는데, 황제를 보자 피가 거꾸로 솟았다. 망설임 없이 아비를 치고 오라비를 죽이던 무정한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그녀가 치맛자락을 거세게 쥐었다. 눈이 부시게 고아한 용포를 입은 정국은 평소처럼 이지적이고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
“…….”
제 모든 걸 주어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눈이 시리고 가슴이 아파 차라리 눈이 멀어버리고 싶었다. 허나 황제는 미욱한 사랑을 더없이 짓밟았다. 당신 하나만 바랐던 그 마음을 이용하고 진창에 밀어 넣었다. 목숨을 빌던 마지막 간청도 그 오만한 옷자락 앞에서 비참하게 묵살 당했다. 가만두고 싶지 않았다. 소소는 그도 자신처럼 비참하게 만들고 싶었다. 하찮은 감정놀음 따위가 아니라 그 고고한 황제의 가슴팍에 칼날을 밀어 넣어 정말 숨을 거두고 싶었다. 붉게 충혈된 소소의 눈이 분노에 차 일렁였다. 더 이상 그 앞에서 눈물을 보이기 싫은데, 자꾸만 눈물이 흘러 나왔다. 정국은 가만히 그런 그녀를 보았다.
“그대는 나를 원망하겠지.”
“…….”
황제의 목소리가 느릿했다. 그는 답을 알면서 물었다. 헌데도 그녀의 답을 기다리는 동안,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이기적이었다. 끝까지 그녀의 청을 들어주지 않고 그녀에게 소중한 모든 이를 죽인 자신이었다. 헌데도 원망하느냐는 물음을 던졌다. 결국 상기된 얼굴로 울며 제 이름을 부르던 그날 밤처럼, 이번에도 사실은 나를 잊지 못하였다고 말해주기라도 할까봐. 긴장한 탓에 황제의 울대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메마른 입술을 다물고 소소는 잠시 멍하게 그를 보았다. 그리곤 이내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바람 빠진 웃음과 달리 그녀의 눈은 곧 죽을 것 같았다.
“하아…, 지존의 그 오만함이 참으로 무섭습니다.”
“…….”
“대체 제게 무얼 더 바라십니까?”
거칠고 낮은 목소리가 정국을 조롱하듯 이어졌다. 기가 막혀서 그녀는 헛웃음도 더 나오지 않았다. 소소의 말에 정국은 눈동자를 옅게 떨었다.
“폐하께선 이기적이십니다. 원망이 싫으시거나 제 목숨도 똑같이 거두어 가십시오. 영원히 곁에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게 죽이십시오.”
예상한 모습이었다. 그녀가 이렇게 화내고 원망하는 것은. 그러나 도통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외척을 처단했고, 진의 유민도 포섭하였고, 뭣하나 아쉬울 것 없는 결과인데도 해선 안 되는 후회 따위가 찾아왔다. 정국은 애써 마음을 다잡으려 한숨을 쉬고 입술을 축였다. 단호해 지려고, 끝까지 매정하려고 애썼지만 자꾸만 마음이 새어나왔다.
“내게 너를 죽이라니, 가혹하구나.”
말이 매끄럽지 못하게 나왔다. 그런 황제에 소소는 웃음을 터뜨렸다.
“저는 지금 당장이라도 폐하를 죽이고픈 마음을 겨우 참고 있는데, 참으로 신기합니다. 굳이 역적의 여식에게까지 성군이 되실 필요는 없습니다. 폐하.”
“…….”
“제 아비와 오라비는 지체 없이 베시던 분이, 이제와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저도 역적의 핏줄입니다. 언제든 폐하의 목에 칼을 들이댈 수 있어요. 그러니 어서 죽이십시오.”
차라리 황제의 손에 죽는 게 나았다. 윤기의 말 때문에 스스로 죽을 수도 없는 자신이었으니. 곁에 누구도 없이, 평생 어제의 기억을 안고 살 바엔 죽어 없어지고 싶었다. 악밖에 남지 않은 소소의 목소리가 점차 격앙되었다.
“폐하의 얼굴을 보고, 숨소리를 듣는 것조차 고역입니다. 신첩이 죽거나 폐하를 죽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를 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차라리 자신이 죽는 게 나았다. 그녀의 손에 죽는다면 적어도 속죄는 할 수 있을 테니까. 감정의 풍파가 황제를 덮쳤다. 오롯한 원망의 눈길이 버거웠다.
“허면 죽이거라.”
그래서 정국이 나직이 말했다. 내시백과 상궁들이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황제의 그 말에 소소는 무어가 담겨있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을 했다. 그리 쉽게 내어줄 수 있는 것이었나. 천자의 목숨이. 또다시 자신을 가혹하게 짓밟고도 기대를 안기려 애쓰는 황제에 숨이 막혔다. 원망 한 번 마음대로 할 수 없게 흔든 정국이 증오스러웠다. 일순간 소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녀가 제 팔을 잡은 상궁을 뿌리치고 정국을 향해 달려갔다.
“신첩이, 못할 거 같으십니까? 어찌해서,”
순식간에 달려드는 소소에 황제 앞을 막으려던 환관들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저지했기 때문이었다. 맨발로 달려온 소소는 정국의 용포를 움켜쥐었다. 가까이 마주하는 그녀의 얼굴에 정국의 가슴은 터질 듯 부풀었다.
“내가, 그리 빌었는데, 가문도 가족도 모두 버리고 모든 것을 네게 걸었는데!!”
“…….”
“왜!! 대체 왜….”
원망은 끝내 울부짖음이 되었다. 격앙된 소소가 품에 지닌 단도를 빼들었다. 언제든 결심이 서면 자결하기 위해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순간 주위 상궁과 환관들이 당황해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허나 황제의 지시가 있었던 터라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었다. 미칠 노릇이었다. 허나 정국은 누구보다 침착하게 소소의 눈만 바라봤다. 그녀가 단도를 다잡고 손을 들어 올릴 때에도, 그는 그녀를 품에 안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했잖아….”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한 소소가 정국의 어깨에 단도를 찔렀다.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있었지만 황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제게 오는 그녀를 받아 안았다. 소소를 안으면서 어깨에 칼날이 함께 밀려들어왔다. 고통스러웠지만 이 칼에 찔려 죽어도 좋은 만큼 심장이 뛰었다.
“하….”
소소가 자신이 방금 무슨 짓을 한지 몰라 숨을 뱉었다. 손에 잡은 단도의 감각이 생생해 질 때 쯤, 떨리는 손은 그걸 쥔 채 힘이 풀렸다. 따뜻한 품이 느껴졌다. 그리고 뒷통수를 그러안는 다정한 손길도.
“…….”
왜 피하지 않은 거야. 왜 또다시 나를 진창으로 밀어넣어, 왜.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어.”
“…….”
“그대가 내 품에서 영영…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푸른 용포자락을 적시며 퍼지는 피가 꿈처럼 보였다. 힘이 빠져 정국은 한쪽 무릎을 주저앉았다.
“폐하!!”
“폐하!”
순식간에 내시백과 환관들이 달려왔다. 주위는 분주했지만 소소는 순간 귓전이 먹먹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하면 모든 게 지워질 거라고 생각한 걸까.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태의를, 태의를 불러라 어서!”
내시백의 다급한 외침이 이어졌다. 어깨가 찢어질 듯 아팠지만 인상을 찌푸리고 참은 정국이 황급히 구는 내시백을 저지했다. 손을 달달 떨던 소소는 이내 손끝에서 단도를 놓치고 뒷걸음질 쳤다. 황제의 선혈이 묻은 칼이 바닥을 뒹굴었다. 폐서인 주제에 황제의 옥체에 상처를 냈으니 참수라도 당하려나. 그보다 제 손으로 다른 누구도 아닌 정국을 찌를 수 있다는 게 놀라왔다. 전에는 그를 상하게 하느니 차라리 자신이 다치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그녀였다. 역시 옅은 감정 따위 도려내는 것이 맞았다. 이리 쉬운 것을. 그녀가 떨리는 눈으로 제 앞에서 무너지는 정국을 보았다. 어깨를 움켜쥐고 자신을 끝까지 바라보는 황제는 그 자리에서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소소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폐하, 저, 저 폐서인을!….”
“…두어라.”
소소가 그대로 황제를 지나쳤다. 황제를 부축한 환관이 서둘러 뭐라 말을 꺼냈으나 황제는 그를 막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감히 폐하께 단도를 휘둘렀으니 당장 옥에 갇혀도 시원찮을 판에, 황제는 그녀를 그대로 보내주었다. 남은 이들은 그녀를 붙잡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소소가 깊이 숨을 내쉬었다. 손끝에 느껴졌던 감각이 환영처럼 흩어졌다. 상궁들 중 몇이 급히 그녀를 쫓아와 따랐다. 미쳤다고 생각할 테지. 겨우 목숨을 부지했으면 몸을 웅크려도 모자랄 판에 황제를 다치게 하다니. 제 눈치를 보는 상궁들의 시선이 느껴져 소소는 웃음을 내뱉었다.
“벌하려거든 지금 벌하시라 전해라.”
이대로 자신을 붙잡아 가도 좋다는 뜻이었다. 그에 상궁들은 어쩔 줄 몰라 고개를 숙였다. 우스운 일이었다. 역적의 여식이 감히 황제를 찔렀는데 이리 황궁을 활보할 수 있다니. 교각이 너무 시려 발의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소소는 순간마저도 심장을 겨누지 못한 자신이 미련했다. 정국은 제게 기회를 주었다. 자신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당장 목을 긋거나 심장을 찔러 복수라면 복수를 할 수도 있었는데, 우습게도 그녀가 찌른 곳은 고작 황제의 어깨였다. 황제가 역린을 내 보였는데, 턱 끝 비늘 하나 베는 것밖엔 못했다. 헛웃음이 나왔다. 헌데 왜인지 모르게 눈물도 뺨을 타고 흘렀다. 그냥 모든 게 덧없었다. 마지막으로 주는 적선이기라도 한 것인지, 아무리 걸어도 소소를 잡으러 오는 환관들은 없었다. 소소는 그게 우스웠다.
“…….”
그렇게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천천히 걷던 소소가 멈춰 섰다. 긴 교각을 걸어 액정궁 앞 황청 즈음이었다. 고개를 들었다.
“어찌 나의 최악을 축하해주러 오는 이들이 이리 많은 것이냐.”
그 앞에 태형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소가 질린다는 얼굴을 했다. 태형은 더 이상 별감의 복색이 아니었다. 하긴 역적을 배반하고 황제를 도운 충신 중에 충신일진대 별감에 머무르는 것이 이상했다. 태형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제 앞의 소소를 보았다. 거사가 일어나기 전날 밤, 황후전 뒤에서 본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소소는 그 날과 전혀 다른 모습, 전혀 다른 표정이었다. 생기 하나 없는 눈은 위태롭기만 했다. 태형은 그 이유를 가장 잘 알았기에, 그녀의 앞에서 입을 떼기가 더 힘들었다.
“방금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왔는지 아느냐?”
“…….”
“폐하의 몸에 칼을 밀어 넣었다.”
소소의 나직한 말에 태형이 놀란 눈을 했다. 그도 며칠 밤을 자지 못한 사람처럼 건조한 얼굴이었지만 애석하게도 감정은 오롯이 남았다. 그가 소소를 찬찬히 살폈다. 무엇에도 초연한 사람처럼 굴었으나 손 끝 떨림이 보였다. 태형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네게 그리할까?”
“…….”
“아아, 이젠 단도가 내게 없으니 아쉽구나.”
메마른 웃음이었다. 입을 열기가 어려워 태형은 자꾸만 입술을 달싹였다. 눈을 마주하기도 어려웠다. 그런 태형의 반응에 소소는 작게 웃었다.
“널 원망하지 않아. 네가 오라버니를 배반한 건 살기 위해서였겠지. 너도 사람이고, 누군가의 주군이니까.”
“…….”
“그래, 내게 접근한 것도 그래서였느냐? 독수공방만 하는 박복한 황후라기에 쉽게 맘도 주고, 네 나라의 복위에도 도움을 줄 까봐서?”
태형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대승상과 문하시중을 배반한 건 진나라 백성을 위해서였지만, 당신에게 다가간 이후로 단 한 순간도 진심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고. 그렇게 말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태형이 입안을 세게 짓씹었다. 그녀의 무감한 시선에 마음이 불안해져 당장 달려가 그녀를 붙잡고 싶었다.
“그래도 내게 속죄하고 싶거든 죽거라.”
“…….”
“스스로 못 하겠거든 내가 해줄 테니 단도를 가져 오던지.”
소소는 가혹한 말을 잘도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녀도 제 곁에서 보였던 태형의 마음과 행동이 모두 거짓이라 생각지는 않았다. 허나 그것도 그저 연민이었겠지. 아니 이젠 그마저도 중요치 않았다. 일말의 남은 정도 모두 떼고 싶었다. 황제뿐 아니라 태형을 보는 것도 괴로웠다. 그래서 더 무정히도 말했다.
“죽을 생각이 없다면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 난 널,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역겨우니….”
“…마마.”
물기어린 태형의 목소리였다. 허나 소소는 동요치 않았다.
“폐서인에게 마마라니. 당치도 않구나. 이젠 네가 나보다 더 상전이니 공대를 받을 터이냐?”
“조금만,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신이 어떻게든 마마를 액정궁에서…,”
“이젠 벼슬을 얻었다고 적선이라도 베풀 모양이지? 되었다. 네 도움을 받느니 평생 액정궁에서 늙어 죽을 것이니.”
태형이 어렵사리 꺼낸 말에 소소는 일말의 틈도. 미련도 주지 않았다. 태형은 서러웠다. 착잡한 마음에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자 소소가 그대로 그를 지나쳤다. 이렇게 보내면 안될 것 같았다. 헌데도 태형은 그녀를 붙잡지 못했다. 다시 그 야멸찬 눈을 마주하기 힘들었다. 그게 형벌처럼 느껴졌다.
二十九
“공 태감.”
액정궁에 들어서자마자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액정궁은 황궁 주요 전각들을 둘러싼 담장 밖, 멀리 떨어진 곳에 따로 위치했는데 같은 황궁이지만 어쩐지 더 스산하고, 삭막했다. 외부에 한 옻칠이 죄다 벗겨졌으나 보수조차 되지 않아 전각이 하나같이 볼품없었다. 냉궁 중에 냉궁이라, 공태감과 훈육태감을 제외한 사내 한명이 없었다. 그저 가는 길에 빨래나 청소 따위의 소일을 맡는 무수리 몇을 보았을 뿐이었다.
액정궁 무수리들을 총괄하는 공 태감. 그는 소소가 오자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어보았다. 안 그래도 가는 그의 눈이 더 가늘어졌다.
“이 분, 아니 이 아이입니까?”
“소소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그녀를 데려온 상궁을 향해 미심쩍게 묻는 공태감에, 소소가 담담히 말했다. 이 이름은 윤기가 어릴 때 지어준 그녀의 아명. 입으로 발음할 때마다 가시가 돋는 것처럼 아팠다. 허나 이것 말고는 오라비가 남긴 것이 없었다. 그래서 소소는 그 하나만은 남기고 싶었다. 공 태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소소. 내 이 액정궁 밖으론 잘 나가지 않아 뵌 적은 없다만, 아무리 귀한 신분이었다해도 너는 이제 액정궁 무수리다. 네가 맡은 바는 무엇이든 스스로 해내야 할 것이야.”
그리 말하면서, 정작 공태감은 하대와 존대를 섞어 하며 요상한 태도 소소를 대했다. 아무래도 그저 하찮은 무수리로만 대하기엔 그녀가 많이 어려운 모양이었다. 생전 귀하지 않은 적이 없었던 그녀라 이곳이 어울리지 않았다. 허나 소소는 내색치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제 처지를 꽤나 잘 알았다. 이름만으로 모두를 무릎 꿇리던 대승상의 위세도, 황후라는 존귀한 신분도 없었다. 역적의 여식 주제에 목숨을 부지한 것도 천운이었다. 허니 오라비의 말대로 살기 위해선 엎드릴 수 있는 데까지 엎드려야 했다. 이 상황에서 자존심 세우는 것만큼 미련한 짓도 없었다.
“허면 묵으실 곳은….”
“태감어른. 말씀 편히 하십시오.”
덕분에 소소가 공태감을 향해 편히 말하라 운을 뗐다. 황후로 살아온 날보다 어쩌면 무수리로 살아가야 할 날이 더 많이 남았는지도 몰랐다. 그러니 모두가 적응을 해야 했다. 소소의 말에 저도 모르게 공대를 했던 공태감은 헛기침을 했다.
“허면 네가 묵을 곳을 알려주마. 따라오너라.”
그리곤 그가 소소를 데리고 간 곳은 액정궁에서도 외진 곳에 있는 한 처소였다. 불을 자주 떼지 않는지 안으로 들어가서도 한기가 여전했다. 소소가 관심 있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건물 안도 외부와 마찬가지로 옻칠이 다 벗겨져있었다. 바닥도 발을 딛을 때마다 삐걱대는 것이 건실하진 못한 모양이었다.
“이 처소는 전부 무수리들이 나눠쓴다. 남쪽에 있어 남재(南在)이고 방은 총 여덟 개지.”
“예.”
“개중 네가 쓸 방은 여기다.”
여러 개의 문을 지나 한 방 앞에서 공태감이 멈춰 섰다. 소소에게 한 번 눈길을 준 태감이 이내 문을 열었다. 안에는 이미 열 명 정도 돼 보이는 무수리들이 두열로 서서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읍하고 있었다. 소소는 이리 예를 취하는 것을 보는 게 익숙했다. 허나 이 무수리들은 자신이 아니라, 공태감을 향해 예를 갖추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상기하며 기시감에 몸을 움찔하던 소소가 이내 함께 고개를 숙였다.
“태감 어른 오셨습니까.”
그 중 맨 앞에 서있던 아이가 허리를 숙인 채 한 발 앞으로 나와 입을 열었다. 태감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
“혼의방(繉依房) 방장 가혜니라.”
소소는 공태감이 가리킨 가혜를 보았다. 비록 무수리라는 신분이나 매섭고 당돌해 보이는 눈이었다.
“이 아이는 소소다. 앞으로 이 방에서 함께 지낼 것이니 모르는 것이 있거든 너희가 잘 알려 주어라.”
“예, 태감어른.”
공 태감의 소개에 소소가 혼의방 무수리들을 향해 짧게 인사했다. 이내 태감이 방을 나가고, 소소가 완전히 안으로 들어왔다. 안 그래도 좁은 방이었으나 그녀에게 할당된 자리는 더없이 비좁았다. 작은 방을 여러 명에서 함께 쓰려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의 자리에는 이미 짐이 옮겨져 있었다. 무수리는 감히 비단옷을 입지도 못하고 값비싼 장식을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짐이라 해봤자 단촐한 무수리복 하나뿐이었다.
“역적의 여식 주제 어찌 이리 고개를 판판히 들고 다녀?”
자리를 정리하던 소소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가혜와 무수리들이 모여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에 명백한 적의가 보였다. 이런 류의 대응은 예상했던 바이나, 뒤에서 수군대거나 함께 어울리지 않는 정도일 줄 알았다. 이리 대놓고 묻거나 면박을 줄 줄은 몰랐다. 허나 소소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굽혔던 허리를 곧게 펴고 무리 중 가장 앞에 나선 가혜를 빤히 쳐다봤다. 가혜의 새침한 얼굴이 순식간에 매섭게 변했다.
“묻는 말에 답은 안 하고 뭘 똑바로 쳐다봐?!”
“여직 버릇을 못 고쳤나보네. 지가 무슨 상전인 줄 아나!”
역적의 여식에 폐서인까지 된 주제에 기죽지 않는 반응이 더 기분 나쁜 모양이었다. 소소는 어이가 없어 새어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아내었다. 이런 것까지 상대해 줄 기운도 여력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역적의 여식인 게 너희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어차피 지금은 모두 같은 무수리인 것을.”
소소가 무감히 말했다. 그저 던지듯 뱉은 말이었으나 가혜와 그 뒤 무수리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이 났다.
“네가 액정궁이 처음이라 뭘 모르나 본데, 어디 무수리라고 다 같은 무수리인 줄 알아?”
“그래! 우린 액정궁에서만 전부 십년이 넘게 있었어. 아무리 황후였다고 한들 역적의 여식인 네 년 따위와 같아, 우리가?”
격앙되어 뱉는 말들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이 액정궁은 무수리도 경력 싸움이다 뭐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아무리 화를 내며 소리 질러도 그것쯤은 하나도 위협이 되지 않는 다는 걸 모르는 듯했다. 소소가 한숨을 내쉬었다.
“분수를 모르는 걸 보니 왜 폐하께 버려졌는지 알겠구나. 대승상이 반역을 일으키자마자 이때다 싶어 폐위하셨다지?”
허나 가혜의 의기양양한 말에 소소의 얼굴이 점점 굳었다. 전엔 그저 신경을 긁기 위한 의도가 빤히 보이는 말들이라 너그러이 넘겼다. 허나 그녀의 입에서 황제의 이름이 나오자 소소는 피가 멎는 기분이 들었다. 상기되는 일들이 마음을 조각냈다.
“폐서인이 되었으면 황궁 밖이나 감업사로 내쫓으시고 금족령을 내리면 되지 왜 굳이 널 이 험한 액정궁에 들이셨겠느냐? 무수리로 고생 한 번 해보라 이거지.”
“그럼. 황후일 때도 폐하의 총애를 얻지 못해 허구한 날 패악을 부렸다지?”
가혜의 뒤에 있던 용아가 소소의 어깨를 툭툭 치며 조롱하듯 웃었다. 이들은 최대한 소소가 견디지 못할 때까지 몰아붙이려 이따위 말들을 하는 것이었다. 역적의 여식과 한 방을 쓰는 게 기분 나쁜 것이든, 그저 그녀의 존재 자체가 거슬리는 것이든, 적의가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소소는 이깟 괴롭힘 쯤이야 아무런 자극이 되지 않았다. 허나, 앞으로의 생활이 평안하려면 한 번 정도는 이들의 기를 눌러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지.
“이제 어쩌나, 여기선 널 지켜줄 뒷배도 없는데. 그리 기세등등하던 대승상과 문하시중이 죄다 죽어버렸으니 말이다.”
“너도 액정궁 물이나 흐리지 말고 내보내달라 빌어. 아니면 자결을 하던지.”
어깨를 치는 행동이 강해졌다. 소소는 가만히 그녀들이 하는 짓거리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가혜를 빤히 보다 그녀의 머리에 꼽힌 비녀를 빠르게 빼앗아 들었다. 치장을 하는 것도 죄가 되는 무수리들이 겨우 할 수 있는, 은도 아닌 쇠로 된 비녀였다. 이것으로라도 치장을 하고 싶긴 했는지 가혜는 그 볼품없는 비녀를 항상 꽂고 다녔다.
“뭣하는 짓이냐!!”
소소의 갑작스런 행동에 뒤늦게 제 머리를 붙잡은 가혜가 놀라 앙칼지게 물었다.
“꺄악!!”
허나 가혜가 화낼 새도 없이 소소는 그 비녀로 가혜의 손목을 망설임 없이 그었다. 의복 아래 새하얀 팔목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놀라고 고통스러워 가혜는 소리 지르며 제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곤 털썩 주저앉았다. 뒤에 있던 무수리들도 이 갑작스런 광경에 사색이 되어 소리 질렀다.
“미,미친 게야… 액정궁에서 사달을 내면 어찌 되는 줄 아느냐?! 곧바로 장을 맞는다!”
“내 당장 태감어른께 네 년이 가혜를 다치게 했다고…”
놀란 무수리들이 무어라 더 지껄이지 전에, 소소는 차분한 얼굴로 제 팔목도 그었다. 피를 흘리며 옆에 주저앉아 있던 가혜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런 소소를 보았다. 그녀의 손목에서도 피가 흘렀다. 무수리들이 경악을 했다.
“태감 어른을 부르면, 가혜 저 아이가 제 비녀로 먼저 날 그었다고 고할 것이다.”
소소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당장 공태감을 부르러 문을 열려던 무수리들이 멈칫했다.
“허, 여기 목격자가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 우리 모두가 네 년이 먼저 가혜를 다치게 하는 걸 똑똑히 보았는데 그딴 변명이 통할 듯 싶어?”
용아가 애써 목소리에 힘을 주고 대표해 말했다. 그 말에 무수리들이 놀란 낯을 숨기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소소는 입꼬리를 끌어 싸늘하게 웃었다.
“너희들 전부가 날 모함하기 위해 말을 맞추고 거짓을 고한다 말할 것이다.”
“뭐야?”
가혜와 무수리들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했다. 여직 소소의 손에서 피가 흐르는데 아프지도 않은지, 그녀는 어떠한 내색도 하지 않았다.
“네 년이 혼자 지껄이는 말을 태감어른께서 믿어주실 것 같으냐?!”
“글쎄.”
차분히 대응하던 소소가 이번에는 쇠비녀를 제 목에 가져다댔다. 모든 무수리들이 사색이 되어 대체 뭐하는 짓이냐는 듯 그녀를 보았다.
“이 비녀로 내 목을 그어도 안 믿어주실까?”
“…….”
“죽지 않을 만큼 내 목에 상처를 내고, 네 짓이라 고할 것이다.”
“…내, 내가 언제.”
소소가 용아를 콕 집어 말하자 그녀가 기겁을 했다. 이미 태감에게 이를 생각은 지운 듯 혼의방 문은 다시 굳게 닫혀 있었다.
“액정궁에서 사달을 내면 장을 맞는다 하였지? 그래, 어디 한 번 함께 맞던지. 해보겠느냐?”
장은 족히 다섯 대만 맞아도 정신을 잃고 사지하나 못쓰게 된다. 무수리들은 제 동료나 다른 궁녀가 장을 맞아 그리 된 것을 직접 목격한 적이 많았다. 때문에 소소의 말에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리는 무수리도 있었다.
“잘 들어. 난 너희와 친우가 될 생각도, 적이 될 생각도 없다. 그저 조용하게 아무 일 없이 지내길 바랄 뿐이야.”
“…….”
“더 이상의 분란은 나도 일으키고 싶지 않구나. 허니, 제발 나를 건들지 마라.”
나긋하게 경고의 말을 건넨 소소가 그대로 손에서 쇠비녀를 떨어뜨렸다. 피가 묻은 비녀가 땅바닥에 소리를 내며 뒹굴었다. 마치 그게 몸에 닿으면 안 되는 것이라도 되는 냥, 무수리들은 소리 지르며 발을 피했다.
/ 皇后列傳
“미쳤어, 미친 게야. 그 계집이 이번 일로 정신을 놓아도 단단히 놓은 것이 틀림없어.”
“마마, 다치십니다 천천히!”
상궁의 만류에도 백야의 걸음은 느려질 줄 몰랐다. 오늘은 그녀가 태부와 함께 축배를 들어도 모자란 날이었다. 대승상의 가문이 몰락했다. 황제는 태형이 가져온 명부에 있던 대신들을 전부 참형에 처했고, 그 기세등등하던 황후도 폐위되어 액정궁으로 쫓겨났다. 자신을 밀어주던 태부가 이번 기회로 세력을 키우게 되었으니 모든 것이 그들의 뜻대로 되어가고 있었다. 헌데 백야의 기분은 그리 좋지 못했다. 이는 소소가 겁도 없이 정국을 다치게 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감히 폐하의 옥체를 상하게 해? 감히, 제 까짓 게. 감히….”
“태의가 이미 폐하를 살피러 갔고,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 하지 않았습니까. 마마.”
황후가 폐위되었기에 후궁들은 더더욱 언행과 발걸음을 조심해야 했다. 그게 아니면 괜한 오해를 받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 장상궁은 최대한 백야가 처소에 가만히 있기를 바랐으나, 그녀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미 벌써 폐서인이 있다는 액정궁에 발을 들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정작 옥체가 상하신 폐하께서 가만 두었다는데 대체 자신이 가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그러는 것일까. 애꿎은 장상궁만 한숨을 푹푹 쉬었다.
“아니, 재인마마!!”
거침없이 들어서는 백야와 그 뒤의 궁인들을 발견한 공태감은 화들짝 놀라 들고 있던 두루마리들을 죄다 쏟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이 냉궁인 액정궁에는 평소 후궁마마의 출입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폐서인이 이곳에 무수리로왔다는 전례 없는 사실을 제하고 액정궁 역사상 가장 뜻밖의 일이었다. 공태감은 쏟은 것을 줍기도 전에 먼저 백야의 앞으로 달려가 공손이 허리를 숙였다.
“귀하신 재인마마께서 이 액정궁까진 무슨 일로….”
“액정궁 무수리들을 모두 내 앞에 불러라.”
“예?”
조금도 망설임 없이 당당히 떨어지는 백야의 명에 공태감이 의아한 소리를 내었다. 액정궁 무수리는 총 사십명이 조금 넘는데 죄다 허드렛일만 하여 백야같은 웃전마마를 뵌 일도 없을 것었다. 헌데 대체 무슨 용무로 그들을 찾는 것이지. 호기심 가득했으나 감히 반문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태감은 서둘러 궁녀들에게 손짓해 액정궁 곳곳의 무수리들을 불러 모으라 했다. 백야는 액정궁 궐문 앞 마당에 고고히 앉았다. 모다 공태감이 바리바리 가져온 의자와 차양막이었다.
“서두르지 못하겠느냐!”
상궁의 호통 속에, 놀란 무수리들이 다급히 모였다. 백야가 앉은 마당 앞에 줄을 지어 공손히 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백야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그녀의 입꼬리가 언제 그랬냐는 듯 예쁘게 올라갔다. 소소. 눈에 익을 정도로 매일 눈부신 비단자락만 몸에 걸치던 귀한 몸께서 자신이 항아시절에도 안 입었을 법한 무수리복을 입고 있었다. 아무 장신구 없이 빗어내린 긴 머리칼이 처연했다. 다른 이들과 달리 느릿하게 무리에 섞인 소소도 시선을 들어 백야를 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백야가 먼저 웃어보였다. 소소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소소의 눈치를 보던 가혜를 포함한 혼의방 무수리들도 그녀의 옆에 섰다. 가혜는 방금 전 소소에게 베인 상처를 흰 천으로 대충 감고 있었다.
“인사드려라, 백 재인마마시다!”
공태감의 호통과 함께 모든 무수리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아무리 후궁이라 하나 황제폐하의 후궁, 이런 무수리들과는 천지상간의 신분이었다. 허나 소소는 좀처럼 굳은 입술이 움직이지도, 고개가 조아려지지도 않았다. 공허한 두 눈에 힘이 들어갔다. 백야는 그런 반응을 기대했다는 듯 웃는 얼굴을 거둘 줄 몰랐다.
“최근에 본궁에서 액정궁으로 오는 다리를 닦은 것이 누구냐.”
백야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그녀는 뜬금없이 황제와 비빈들이 사는 본궁과 액정궁을 잇는 다리, 청호각(靑濠脚)을 누가 청소한 것인지 물었다. 당장 그녀의 행차도 당황스러운데 저리 콕집어 하는 질문이라니. 혼란스러워진 무수리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백야는 그 순간마저 소소만 보았다. 그저 태연한 척 하며 그 고고한 얼굴을 치켜들고 있는 그녀를.
“대체 그 다리를 어찌 닦았길래 그리 미끄러운 것이지? 내가 행차하다 미끄러져 다리 하나라도 부러졌으면 어찌하려고?”
닦은 이를 찾는 이유는 혼을 내시려고 그런 것이었구나. 의중을 파악한 무수리들은 더욱 사색이 되었다. 다리를 닦은 이가 누구든 싸잡혀 매를 맞는 일은 무수리에게 흔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자신이 청호각 청소를 최근에 맡았던 무수리라 해도 백야가 저런 기세로 묻는데, 감히 소인이 했다 말하기도 무서웠다. 다들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마마께서 다리를 닦은 년이 누구냐 묻질 않느냐!”
저들끼리 웅성거리기만 할 뿐 사실을 고하지 않자, 백야 옆에 있던 장상궁이 호통을 쳤다. 무수리들은 잔뜩 지레 겁을 먹었다.
“어허, 이것들이….”
“그만, 장상궁.”
백야는 그런 장상궁을 부드럽게 저지했다. 소소가 황제의 옥체를 상하게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리 길길이 날뛰더니 어찌 지금은 웃음기를 가득 머금고 즐거워 보이기만 했다. 장상궁은 그런 백야의 심중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백야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느릿한 걸음으로 무수리들에게 다가갔다.
“청호각을 누가 닦았는지 아는 아이가 없느냐?”
“…….”
노기 하나 없는 물음이었지만 무수리들은 몸을 떨며 아무 말도 못했다. 대게 웃전 중에서는 저렇게 웃는 얼굴로 장을 쳐라 명하시는 분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정갈하게 서있는 무수리들을 천천히 지나치며 백야는 제 뺨을 쓸었다.
“어찌 모르지? 나는 알겠는데.”
그렇게 지나던 백야가, 소소의 곁에 다다랐을 때 걸음을 멈춰 섰다. 그녀가 소소를 빤히 보았다. 소소의 시선도 백야를 향했다. 여전히 기 하나 죽지 않고 또렷한 그 눈에, 순간 기분이 나빠진 백야가 옅게 인상을 썼다. 애초에 이러려고 온 것이었지만 정작 그 오만한 얼굴을 보자 열이 뻗혔다. 그래서 백야는 곧장 입을 열었다.
“너, 네 년이 청호각을 닦지 않았느냐.”
백야가 소소를 가리키며 말했다. 무수리들은 물론 공태감도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소소라면 바로 오늘, 이 액정궁에 배정되어 왔다. 청호각은 못해도 어제 새벽에 닦아졌을 것이었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소소는 분명히 아니었다. 헌데 어째서, 백야는 저리 확신하며 소소를 지목하는 것일까. 그건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었다. 백야는 폐하의 후궁, 그리고 소소는 황후의 자리에서 폐서인이 된 여인이었다. 백야는 그녀가 황후일 때 당했던 일들을 이번 기회에 갚아주려고 저러는 게야. 황후가 아니라 한낱 무수리에 불과하다면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도 아주 쉬울 테니까. 이를 알아차린 가혜와 옆의 다른 무수리들이 눈을 번뜩였다. 애초에 재인마마께서 노리신 건 저들 무수리들이 아니라 소소 하나뿐이었어. 가혜는 당장 바닥에 엎드렸다. 바닥을 짚은 그녀의 손목에는 흰 천이 매어져 있었다.
“예, 마마 이 아이가 청호각을 청소했습니다. 소인이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재인마마!”
그리곤 백야가 듣고 싶어 하던 말을 그대로 고해주었다. 백야의 얼굴에 만족한 미소가 들어찼다.
“무수리가 제 소임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면 벌을 받아야 겠지?”
백야의 오만한 손끝이 소소의 턱에 닿았다. 그녀가 소소의 얼굴을 치켜들며 그 눈을 똑똑히 보았다. 모든 것을 잃어 공허한 소소의 눈동자는 담기도 하찮다는 듯 백야를 외면했다. 거기에 성이 난 백야가 손을 획 놓았다.
“여봐라, 저년을 꿇리고 채찍을 가져와라!”
“마마, 하오나….”
무수리가 죄를 지으면 그들을 따로 관할하는 곳에서 장을 맞는 것이 법도였다. 지금처럼 후궁이 직접 매를 때리다니, 전례 없던 일이었다. 갑작스런 명에 장상궁이 말을 얼버무렸다.
“어허, 지금은 황후자리가 공석이니 내가 내명부의 수장이다. 아랫것들을 훈육하는 것이 내명부 수장의 일임을 모르느냐?!”
소소는 그저, 저 방자하고 오만한 백야가 우스울 뿐이었다. 백야는 궁녀들을 시켜 소소를 무수리들 사이에서 끌고 왔다. 그리곤 바로 제 앞에 무릎 꿇렸다. 소소는 저항 없이 받아드렸다. 여전히 두려움도 치욕도 없는 그 얼굴에 화가 난 백야는 장상궁이 가져온 채찍을 다잡았다. 그리곤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이성을 찾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그래도 평생 숙일 줄 모르던 고고한 황후께서 제 앞에 무릎까지 꿇었는데, 자신이 흥분할 이유는 없었다.
“네 년이 무얼 잘못했는지 알겠느냐?”
“모르겠나이다.”
백야가 기가 찬다는 듯이 웃었다. 순간 그녀가 소소의 뺨에 손을 날렸다.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소소의 고개가 돌아갔다. 무수리들 사이에서 놀란 비명이 짧게 들려왔다. 백야는 웃었고, 소소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붉어진 그녀의 뺨이 안쓰럽게 터져 있었다. 허나 소소는 이를 악 물고 비명을 참았다. 저 계집 앞에서 우스운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방자한 년.”
“…….”
소소의 입에서 깊은 숨이 천천히 터져 나왔다. 뺨이 쓰라렸다.
“네 년이 감히, 폐하의 옥체에 손을 대었다지?”
청호각 청소는 정말 단지 핑계였다는 듯이 백야의 본심이 나왔다. 그녀는 감히 소소가 정국을 다치게 했다는 것에 분노했다.
“폐하께서 피하지 않으신 것뿐입니다.”
격앙된 백야의 음성에도 소소는 태연하게 말했다. 다시 한 번 백야의 실소가 들려왔다.
“그래, 평생을 그리 오만하게 살아왔을 텐데 하루아침에 고치기는 힘들겠지. 그러니 내가 도와주마. 내 오늘 네 버릇을 단단히 고쳐줄 것이야.”
“…….”
“잘 들어. 너는 이제 한낱 힘없는 무수리에 불과하다. 여기서 내가 널 아무리 때려도 그 누구도 말리지 않을 것이야.”
“…….”
“그래도 일말의 체통이라도 있다면 비명은 삼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알겠느냐?”
옆에서 보고 있던 공태감이 되려 눈을 질끈 감았다. 말려야 하나, 아니면 정말 백야의 손에 맞도록 두어야 하나 고민했다. 허나 자신이 나선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소소는 정말 무수리에 불과했고, 백야는 황제폐하의 후궁이었으니. 청호각이 핑계에 불과하다 해도 재인마마가 무수리를 벌하시겠다면 그저 그런 것이었다. 매서운 채찍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선명히 들렸다. 그와 함께 백야가 든 채찍이 소소의 등을 강타했다. 순식간에 핏빛서린 자국이 흰 의복 위로 감돌았다. 소소는 이를 악물고 비명을 참았다.
“지금이라도 폐하를 대신해 내게 빈다면 용서해주마. 머리를 조아리고 잘못했다 빌어.”
적선하는 듯한 말투였다. 백야는 비열하게 웃으며 소소를 내려다보았다. 소소가 입 안 여린 살을 씹었다. 등에 닿는 고통이 너무도 아팠다. 그럼에도 백야 따위에게 져줄 생각은 추어도 없었다.
“재인마마는 단지 후궁에 불과한데, 어찌 제가 마마를 폐하로 보고 대신 사죄할 수 있겠습니까. 황후가 되시거든 다시 오시지요.”
방자하여라. 공태감과 무수리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존대를 했지만 전혀 윗사람에게 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여전히 나를 아랫것 보듯이 하고 있어. 분노한 백야가 이를 악 물고 채찍을 휘둘렸다. 무릎 꿇고 앉은 소소의 몸이 휘청였다. 그것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조용하던 액정궁 안이 채찍 소리와 선혈의 냄새로 들어찼다. 소소는 기절해 죽을 지언정 결코 비명 따윈 지르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등이 찢어질 듯 아프고 식은땀이 흘렀다.
“마마….”
소소가 정말 곧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백야는 가차 없이 쳤다. 놀란 공태감이 말려보려 백야를 불렀지만 듣지도 않았다. 이대로 두었다간 소소가 죽을 것 같았다.
“멈추어라!”
그때였다. 거세고 다급한 사내의 목소리가 냉궁 중 냉궁이라는 액정궁에 울려 퍼졌다. 모두가 그쪽을 보았다. 채찍을 놀리던 백야역시 매질을 멈추고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허, 순간 백야의 입에선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소소도 흐릿한 시야로 그를 보았다. 이럴 순간이면 언제든 달려왔던 그는, 태형이었다. 여기는 또 어찌 온 것이야.
잔뜩 성이 난 얼굴로 다급히 이쪽으로 걸어오는 태형은 몇 번이고 제 입술을 감쳐 물었다. 그의 떨리는 눈에 피투성이가 된 소소가 비췄다. 머리의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다가온 그가 채찍을 손에 쥐고 있는 백야를 밀어냈다. 그리곤 소소의 어깨를 붙들었다. 소소는 공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네 얼굴 보는 것조차 역겹고 숨이 막힌다 그렇게까지 말했는데, 이 무모한 자는 대체 언제까지 이럴까. 화가 나면서도 마음이 아렸다. 언제쯤이면 이 지독한 생이 끝이 날까. 그녀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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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오랜만이에요.. 6개월 만인가 그렇죠..?
변명을 해보자면 역시나 현생이 너무 바빴기 때문..이고
게다가 시간이 엄청 띄엄띄엄 나서 흐름 없이 글을
쓰려니 진짜 너무나 안 써지라구요..ㅜㅜ
지금 올리는 것도 마음에 안 들어 죽을 것 같아요...
뭘 쓴건지 모르겠고.. 뭘 써야할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꼭 완결 내겠다는 약속은 너무 너무 지키고 싶어서
머리를 쥐어 싸매고 어떻게든 이어서 휘갈겨 봤어요..
완결은 아마 40편정도가 될 것 같아요 제일 굵은
사건 하나만 남았는데..!! 진짜 6월 안에 완결이
저의 목표입니다 앞으로의 전개 구도는 태형이와 정국이의
대립, 그리고 소소의 연명.. 이정도일 것 같습니다
정말 항상 이 답답한 글 읽어주시는 독자님들 너무 감사드리고ㅜㅜ
딱 이 다음편까지의 연재텀이 살짝 있고 그 뒤로는 쭉쭉 연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어디까지나 저의 희망사항..)
기다려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S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