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감화서
w.규닝
01.
전의감에서 내린 방이 붙었다. 제생원에 발을 들일 겸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시간이 남아 활인서 쪽으로 발길을 틀려 했을 때야 들은 전보였다. 당장에 목적지의 방향을 튼 성규는 발등에 불덩이라도 떨어진 듯 부리나케 걸음을 옮겼다. 수의 대감께오서 알아놓으라 이르셨던 의과 초시생과 다모의 수. 그리고 무엇보다 취재(의학생도에게 부여되는 자체적인 시험)의 결과를 밤낮 기다려왔기에 성규의 발걸음은 거리를 더할수록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기어코 방 앞으로 다다랐을 때 즈음에는 초시를 치른 문무관 지망생들의 머리꼭지에 가려져 나붙은 종이의 끝부분만이 어롱거릴 뿐이었다.
이미 헤진 짚신 끝으로 까치발을 디딘 성규가 불쑥불쑥 튀어나온 머리통들을 헤치고 앞쪽까지 끼어들어갔다. 비켜 보시오! 확인을 마친 자들은 잠시만 바깥으로 물러 서주시오! 누군가가 내지르는 소리에 따라 빽빽이 들어섰던 발자욱들이 조금씩 길을 비키는 것 같았다. 인파를 헤치고 나오느라 잔뜩 찡그려져 있었던 성규의 미간이 방 앞에 서자 씻기듯 판판히 펴졌다.
“취재, 탐화….”
있다. 성규는 일부러 아래쪽부터 읽어가던 이름들 중에서 상위권에 위치한 제 이름을 기어이 찾아냈다. 혹 결과가 좋지 않을까 무서워 게슴츠레 떴던 눈이 단번에 확 피었다. 탐화! 성규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번 시험에는 책을 많이 읽지 못해 탐화(장원, 아원을 이은 합격자) 안에도 들지 못하면 제 스승의 얼굴을 어찌 보나 밤낮을 고민해왔던 터였다. 성규의 얼굴이 불에 덴 듯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아, 거 다 보셨으면 가로 나오시오! 아까보다 한 층 짜증이 섞인 목소리가 성화였다. 성규는 저도 모르게 헤실거리는 입을 채 다물지 못하고 슬금거리며 옆쪽으로 비켜났다. 탐화. 제가 노력했던 것에 비하면 무던히도 과한 자리에, 이기적이지만 들뜨는 마음이 성규의 기분을 하늘 끝까지 솟구치게 만들었다. 내가 탐화래! 비교적 한산한 곳까지 밀려난 성규가 신이 나 과장된 몸짓으로 발차기도 해보고, 허공에 주먹질도 매겨보았다. 비록 장원에 비할 바는 못 되었지만, 적어도 쓴 소리는 비켜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휘어진 눈꼬리가 풀릴 줄을 몰랐다.
수의 대감의 집으로 거의 달려가다시피 걸음한 성규가 오랜만에 뵙는 스승의 아래에 넙죽 엎드렸다.
“탐화(探花)이옵니다!”
다짜고짜 저의 등급부터 아뢴 목소리에 신이 배겨 있었다. 성규가 찾아왔다는 말에 들라 한지 일 촌각(1~2분)도 되지 않아 절을 받은 꼴이 된 수의 대감이 얼떨떨하게 그의 머리통을 내려다보았다. 넙죽 엎드린 탓에 거의 땅에 박힌 정수리 아래에서 실실거리는 웃음소리가 새어나오는 것을 보아하니, 기분이 적잖이 좋은 모양이다. 잠시 후에서야 수의 대감의 얼굴에서 당황스러움이 걷혔다.
“보름 전 취재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소인, 장원, 아원에는 비할 바 못 되나 탐화에 올랐습니다. 전부 대감마님 덕이옵기에 제일 먼저 찾아 아룁니다!”
수의 대감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게 어이 내 덕이란 말이냐. 이번에 혜민서로 배치된 의학교수들의 실력이 뛰어나단 말은 풍문으로 들었건만… 너는 아마 그 덕을 본 것일 게다.”
“아닙니다. 저에게 있어서는 덕을 봐도 대감마님 덕이고, 덕을 보지 못했어도 대감마님 덕택입니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 줄은 알겠다만, 뒷말은 아마 네 뜻과는 맞지 않는 말이지 않겠느냐.”
수의 대감이 넉살좋게 성규의 말실수를 짚어주었다. 구둣장이 꺼지도록 바닥에 이마를 박은 채 실실거리던 고개가 번뜩이며 들렸다. 너무 신이 난 덕에 아무 말이나 지껄여버린 꼴이 됐다. 성규가 아연실색하며 손을 번쩍 들었다.
“실언입니다!”
“실언이라 고쳐 말하지 않아도 알아들었다.”
대감은 퍼득이며 손사래를 치는 성규를 진정시켰다. 네가 악한 마음을 먹고 한 말이 아니지 않느냐. 순전히 지나치게 들떠버린 탓에 따른 실언일 뿐이렷다. 대감의 말에 성규의 얼굴에서 놀란 기색이 씻겼다. 수의 대감이 제 무릎을 짚었다.
“잘했다.”
“…….”
“주상전하의 어환이 깊어질수록 궐에서 삼의사(三醫司)(조선시대 의료기관인 내의원, 전의감, 혜민서를 일컫는 말)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게다.”
“그렇습니다.”
“이번 취재가 좋은 기회였을 게야. 내의원 당상관들의 눈에 들기에 말이다.”
그들에게 이름 한 번 더 아로새기는 것이 출세의 지름길이니라. 대감의 목소리에 확신이 실렸다.
“어의로 등극하는 것은 네가 알다시피 쉬운 일이 아닐 거다.”
“…….”
“허나 염려할 건 없다. 아주 잘 따라오고 있어. 과인의 수제자라 칭해도 전혀 부끄러움이 없어 다행이니라.”
대감의 말이 채 끊기기도 전에 성규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성규에게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이 최상급의 칭찬인 격이었다. 쓴 소리만 겨우 피해볼 수 있겠다 싶은 결과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칭찬을 듣고 있어 성규의 기분은 거의 황홀경에 가까웠다. 수제자란 칭호도 그러했다. 어릴 적부터 줄곧 들어오던 말이긴 해도 이토록이나 벅찬 가슴에 와 닿았던 적은 없었으니까.
“전보다 서책을 가까이하는 모양이더구나.”
예? 귓가에 걸려있던 성규의 입꼬리가 뚝 굳었다. 멍청한 반문으로 당황한 목소리가 엇나갔지만 대감의 표정만큼은 온화했다. 취재뿐만 아니라 작문 실력도 발전한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단순한 칭찬이었던 모양인지, 흘러가듯이 지나가는 목소리가 성규의 양심을 흔들어놓았다. 다시금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린 성규의 가슴이 무언가를 들키기라도 한 듯 두근두근 뛰어댔다.
그러기를 잠시, 막 나갈 채비를 하던 중이었는지 수의 대감은 자리에서 일어나 도포 깃을 여몄다. 대책 없이 넙죽 엎드려있던 성규도 발딱 몸을 일으키며 그 앞에 섰다.
“나가십니까?”
“의약동참청에 나가보아야겠다. 너도 알다시피 요사이 강녕전의 기운이 심상치 않질 않느냐.”
“주상전하께오서….”
대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아낄수록 금이라. 원체 자세한 설명은 덧붙이지 않는 대감이었기에 성규의 고개도 그저 끄덕여지고 말았다. 허나 굳이 전해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은 일이었다. 멀쩡히 강녕하시다가도 하루가 멀다 하고, 격일 꼴로 어전의 새벽이 바빠지기 일쑤였다. 그리하여 임금의 어환이 깊어질수록 삼의사(三醫司)를 향한 관심에 팽팽한 시위가 당겨졌다.
하루도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되는 실정이었다. 그것은 모든 내의원들도 자각하고 있는 바였고, 성규에게도 다를 것 없는 일이었다.
*
명륜당을 나선 걸음이 두 식경(한 시간) 사이에 몇 번이나 존경각과 청재를 오갔다. 그러자 그의 곁에서 말벗을 같이 하던 이들의 눈도 의심스럽게 한 데 모아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점잖게 바둑을 두다가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내 다녀옴세! 하며 자리를 떠나는 모습이 수상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러다가도 한 다경 후에는 역시나처럼 심술맞은 표정과 함께 돌아오는 우현의 어깨 위로 다른 상유의 손이 얹어졌다.
“새벽 비 맞기 좋아하는 강아지처럼 어딜 그리 돌아다니는겐가? 잠시도 가만있질 못하고 자리를 뜨고 있으니, 정신 사나워 죽겠으니 하는 말일세.”
우현이 제 어깨에 얹어진 손을 걷어냈다.
“아무것도 아닐세.”
“아니긴 뭐가 아니란 말인가? 며칠 전부터 시간만 났다 하면 존경각에 드나드는 걸 모를 줄 알았나? 자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책을 찾는 위인이었다고.”
상유의 말에 우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점잖이 가부좌를 틀고 있던 몸이 우현 쪽으로 돌아왔다. 그렇지 않은가. 요사이 자네 행적은 수상스럽기 짝이 없어. 오죽하면 동재생 뿐만 아니라 모든 상재생들이 자네 발길 닿는 곳만 살펴보고 있다네. 그 말에 우현은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유생은 미심쩍다는 듯 우현의 얼굴을 살폈다.
“혹여….”
유생이 제 턱을 괴었다.
“존경각 도적의 정체가 자네란 말인가?”
“뭐야?”
한순간 우현의 심기가 틀어졌다. 불편한 기색을 여지없이 드러낸 얼굴이 유생을 사정없이 쏘아보았다.
“그게 내게 할 말인가? 자네 말마따나 책 한자 읽기 싫어하는 놈이 바로 난데, 내가 서책을 훔쳐?”
“그러니까 말해보란 거네. 그런 자네가 어인 연유로 자꾸만 존경각을 힐끔거리고 있는건지.”
유생이 유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네 눈은 벌써 하루에도 백 번은 존경각에 다녀오고 있질 않은가. 그에 우현의 눈빛이 조금 풀렸다.
이내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바둑을 올려놓는 손에 힘이 실렸다. 우현은 비뚤어진 유건을 심심하게 고쳐 당기며 코를 훌쩍였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지 않는가.”
“그렇지.”
우현이 별안간 목소리를 죽이며 주위를 살폈다.
“성균관 쥐새끼 한 달이면 서책을 읊는다네.”
“그게 무슨 소린가?”
유생의 눈썹이 의아하게 올라갔다. 우현은 재차 물어오는 말에 귀찮다는 듯이 어서 돌이나 놓으라는 눈으로 다음 수를 재촉했다. 유생은 얼른 아무 곳에나 바둑돌을 올려놓고 다시 추궁했다. 성균관에 쥐가 들었단 말인가? 그에 우현의 고개가 느리게 끄덕여졌다. 판이 지겨워지는 듯, 제 턱을 괸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서생원 한 마리가 숨어들었네.”
“서생원이라.”
“그렇네 서생원. 고 째끄마한 게 밤마다 찍찍거려대는 통에 매일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고 있으니 말 다했잖는가. 그러니 내 친히 잡아다가 족쳐 두려고 그럼세.”
찍찍거린다. 물론 제 머릿속에서 매일을. 우현은 정말 쥐새끼마냥 쭉 찢어졌던 가늘은 두 눈을 떠올리다가 입을 비죽였다. 밤마다 집 천장을 뛰어다니는 생쥐처럼 새벽녘 머릿속을 어찌나 흔들어놓던지. 우현은 정말로 귀신처럼 존경각에 들렀다 사라지는 성규의 존재를 속으로만 미워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날 이후로는 정말로 얼굴을 맞댈 일이 전혀 생기질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날 마주쳤던 것은 정말 우연 중의 우연이었던 모양인지, 존경각에 들를 때마다 우현을 반기는 건 자그마한 옥색 그릇에 담긴 소액의 푼돈뿐이었다. 아마 우현의 으름장으로 발길을 끊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성규는 매일같이 착실하게 존경각으로 출석 도장을 찍고 있었고, 하라는 대로 엽전 몇 냥을 놓고 사라졌다. 그리고 우현은 매일같이 그것을 놓치고 있을 뿐이었다.
대충 시시한 바둑을 끝마친 우현은 청재로 돌아가 아무도 없는 빈 방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동기 유생의 말마따나 열 번은 꼬박 도서고를 들렀다가 오는 턱에 힘이 빠진 탓이었다. 우현은 대자로 뻗어 누워 제 팔을 베고 눕다가 여우같은 서책 도적을 문득 떠올려냈다.
*
“다시는 걸음하지 않겠다는 단언은 못 하겠습니다.”
성규는 졸지에 엎어지듯 드러누워 더러워진 제 도포를 탈탈 털어내며 말했었다. 그는 우현이 다음 말을 채 꺼내기도 전에 제 할 말을 덧붙였다. 이것은 모두 가진 것 없는 서생이 기생하는 방법이라 생각하여 주십사 합니다.
“소인이 몸담고 있는 혜민서에는 아직도 서책이 턱없이 부족한 실정입니다.”
“…….”
“배우는 것은 늘어만 가는데 비치되어 있는 서책은 한정되어있기에 곤혹을 겪는 의학생도들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귀동냥으로 들은 바로는, 스승께 배웠던 의술을 비치되어 있는 서책들에서 찾을 수 없어 시험에 응하지 못한 의녀들이 다모로 전락하는 일도 대거로 일어났다 하더이다.”
성규가 힐끔거리며 우현의 눈치를 살폈었다.
“궐 안에 있는 개유와를 이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상유께서 소인의 처지를 눈 딱 감고 헤아려 주시기를 청합니다.”
“장황하게 늘어놓았지만 결국 네놈의 말은, 도제조 대감의 명 따라 성균관 약방의 약제 공급을 떠맡은 참에 도서고를 이용해보겠다 함이냐?”
차마 아니라는 말을 뱉을 수 없어 성규의 고개가 기운 없이 뚝 떨어졌다. 가만히 그의 변명을 듣고 있던 우현이 힘주어 흘겨보고 있던 눈시위에서 힘을 풀었다. 염치없지만 그렇습니다. 거의 기어들어가다시피 낮아진 목소리가 발끝으로 떨어졌다. 성규는 제 무릎 위에 얌전히 올려 둔 서책의 끄트머리를 괜스레 만지작거리며 우현의 태사혜 끄트머리를 자꾸만 훔쳐보고 있었다. 우현이 흐음, 하는 소리와 함께 성규의 갓 머리 위를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우현의 마땅한 대답을 기다리는 듯 얌전히 가라앉은 어깨가 자꾸만 꼬물거리고 있었다.
“품삯을 내놓도록 해라.”
“예?”
단박에 억울해진 눈이 홱 쳐들리며 우현을 향했다. 그에 묘하게 통쾌한 느낌이 들어 슬금슬금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손으로 가린 우현이 괜한 헛기침으로 그의 눈을 피했다.
“네놈의 말귀를 빌려보자면, 서책을 넉넉히 읽지 못해 의학생도들이 종종 좌천되고 있는 상황이라 하지 않았더냐?”
“그것은…그러하온데.”
“그런 자들에 비해서 이렇게 존경각에 숨어 지내며 지식을 훔쳐 채운다는 것은 마땅치 못한 일이다. 상유들을 위한 도서고에 숨어들어 우리와 맞먹는 자격으로 공부를 하고 있는 일개 서생을 성균관에서 어찌 눈감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
허나 그것 또한 맞는 말이라, 제 사정이 딱하다는 것을 들먹이려던 성규의 입이 딱 굳었다. 사실 우현의 말에서 틀린 구색이란 한 점도 없었다. 성규가 기운없이 눈을 떨어트렸다. 그러자 우현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양심의 값을 지불하라는 얘기다. 아무것도 모르는 성균관을 대신해 내게 품삯을 내겠느냐, 그게 아니면…”
“…….”
“대사성 영감에게 친히 내겠느냐?”
대사성이라 함은 성균관에 있어서 주상과 같은 이치였다. 성규의 고개가 어쩔 수 없이 뚝 떨어졌다.
*
시간은 해시(오후 9시~11시). 청재의 앞마당에 칠흙같은 어둠이 얹어졌다. 한 쪽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담화를 나누던 재직들마저 떠난 마당 위에는 드문드문 돌멩이들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얇은 창호문 사이로 유생들이 나누는 말소리가 동재 앞마루에 조용히도 떨어졌다. 조금 오래 기다렸다 싶을 때 즈음에는 각 방의 호롱불이 하나 둘 꺼지기 시작했다. 어둠은 한 번 시작하니 옆 칸마다 옮겨가듯 들어찼다. 그로부터 일 다경 후에, 역시나 마찬가지로 캄캄하게 불이 꺼졌던 끄트머리 방의 문이 소리없이 열렸다.
빼꼼 고개를 내민 우현이 최대한 소리를 죽여가며 마룻바닥에 발을 디뎠다. 방문까지는 조용히 닫기에 성공했다지만 삐걱거리는 마루를 걸을 때마다 나는 소음은 한 발 한 발 딛을 때마다 우현의 소름을 돋게 하기에 충분했다. 우현은 에라 모르겠다 싶은 심정으로 마루 끝에 아무렇게나 구겨 앉아 태사혜를 갖춰 신었다.
“하긴, 이렇게나 어두운데 아무리 쥐새끼라 하더라도….”
나와 있을 리는 없었지만 설마 하는 마음이었다. 우현이 빈 나무 가지 끝에 걸려 있는 초승달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걸음을 바삐 옮겼다. 존경각으로 향하는 발소리가 사각사각 어둠을 갈랐다.
명륜당 옆길로 돌아 나가 존경각에 도착해 앞을 보니, 출입구를 막고 있는 나무판자가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다. 우현은 비스듬히 내려진 판자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 이렇게 떨어져 있어야 맞는 물건인지,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내려놓은 것인지를 가늠할 수 없었다. 원체 밤에는 찾는 곳이 아니니 뭘 알 수가 있어야지. 우현은 곰곰이 제 턱을 어루만져보다가 문을 열었다. 무거운 문짝이 꽤나 묵직한 소리와 함께 천천히 열렸다. 우현이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어렵게 열어젖힌 문 안쪽에는 바깥과 맞먹도록 어두운 공기가 가득 차 있었다. 벌써 어둠에 눈이 익어 침침하지만 앞쪽에 위치한 책장의 윤곽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우현이 찬찬히 눈을 돌렸다. 그러다가 느낀 것은 개미새끼 한 마리가 지나간다 하면 날 법한 작은 기척이었다.
우현은 어디선가 난 조그마한 기척에 반사적으로 옥색 그릇에 눈길을 돌렸다. 바깥에서 새어 들어오는 달빛을 받아 두어푼의 엽전이 한 눈에 들어왔다. 우현이 속으로 옳거니,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선 곧바로 헛기침을 시작했다.
“밤 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이 딱 그 짝이로구나.”
도서고 안이 워낙 고요했던 탓인지, 우현의 말소리는 가히 암행어사의 출두 소식을 알리는 그것과도 같이 들렸다. 물론 체감상의 문제였겠지만. 우현은 제가 뱉은 말에 자신이 흡족해 여유 만만한 미소를 띠었다. 아직까지도 기척을 죽인 무언가를 향한 목소리에 신이 담겼다.
“숨어서 듣는 서생원은 부끄러운 줄 알거라.”
우현이 짐짓 장난스레 위엄을 담은 목소리로 호령했다.
“정말로 도둑처럼 한밤중에 걸음하면, 그 누가 너를 도둑이라고 의심하지 아니하겠느냐? 이 같은 짓은 바로 제가 도둑이요 하며 자청하는 꼴 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게 말을 꺼내놓고, 두어번 숨을 내쉬었을 때 즈음에는 한 발작 느리게 구석 단칸방의 문이 열렸다. 우현의 고개가 인기척이 나는 곳으로 휙 틀어졌다. 자주 이용하지 않는 책들을 쌓아 올려 둔 창고 같은 곳이었다. 조그맣게 난 나무문이 작은 기척과 함께 열리면서 퍽 밝은 빛으로 우현을 맞았다.
가지고 온 호롱불을 제 얼굴 앞으로 올려놓은 성규가 겁을 집어먹은 얼굴을 하고서 우현과 마주했다.
“꼬박꼬박 엽전은 놓아두고 있습니다만…”
“…….”
“어찌하여 잡으러 오십니까?”
밉지 않게 새침한 목소리에 우현의 입가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
나란히 앉은 고서 창고 안쪽의 공기는 바깥보다 훨씬 찼다. 그대로 바깥에서 떠들어댔다간 도적이고 유생이고 한꺼번에 발각되어버릴 위험이 있었기에 꾸역꾸역 들어앉은 창고는 생각보다 훨씬 더 좁고 갑갑했다. 머리맡 책 더미에 올려둔 호롱불이 자꾸만 깜빡이며 어둠을 껐다가 켰다. 막상 들어와 놓고서는 어색하게 입을 다문 우현의 눈치를 보느라 성규의 눈알이 바쁘게 굴러갔다.
사실은 우현이 입을 딱 다문 것은, 고서의 묵은 향이 자꾸만 머릿속을 갑갑하게 파고들어와 미칠 지경인 탓이었다. 워낙 서책과는 될 수 있는 대로 담을 쌓고 지내다보니 이토록 책들 사이에 파묻혀 앉아있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노릇이었다. 우현이 알게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가 뻐근한 어깨를 으쓱했다.
“책을 훔쳤느냐?”
우현의 입에서 느닷없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성규가 한껏 기가 막힌 표정으로 옆자리를 돌아다보았다.
“갑자기 또 어인 의심이십니까?”
“이토록 늦은 시간에 나타나였기에 묻는 말이다. 보통 도적들이 활동한다는 시각이 아니더냐. 나는 물론 우연히 요 앞을 지나다가 문패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기에 걸음하였지만 말이다.”
우현이 시치미를 뚝 떼며 말했다. 그에 성규가 저도 모르게 비죽여지려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무릎 위로 올려둔 손을 꼼지락댔다.
“저번에도 했던 말이오지만 맹세코 도적질은 하지 않았습니다.”
“…….”
“달이 뜬 직후부터 아침까지는 거의 아무도 걸음하지 않는 곳입니다.”
성규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상유들께서는 거의 대부분 정오 즈음에 서책을 빌려가시더군요. 아무도 호롱불을 들고 와서까지 서책을 찾아 읽지는 않습니다. 나무 걸쇠까지 채워지기도 하고요.”
“그건 그러하지.”
“제가 있을 곳은 여깁니다.”
이 시간, 이 곳. 딱 그만큼만 자리하겠습니다. 성규의 목소리가 조곤조곤히 귓가를 울렸다. 우현은 마치 절로 알아서 제 분수를 차리겠다는 듯 몸을 사리는 목소리가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한 번 다그쳐놓았더니 이렇게까지나 풀 죽어 있는 꼴이라니. 우현은 자꾸만 어깨 맡으로 사각거리며 닿는 성규의 옷자락에서 제 옷을 떼어놓으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마냥 성규의 얼굴이 저번보다 어두워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첫 대면에서 저를 보고 아연했던 얼굴이 떠오르면서 우현이 조금 소리 내어 웃었다. 물론 그 때와 지금 얼굴은 확연히 차이가 났다. 한 결 걱정을 감수한 얼굴은 오랜만에 보니 살짝 평안한 끼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성규는 우현의 웃음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떠 옆을 보았다.
“왜 웃으십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우현이 제 입가를 손으로 틀어막아 킥킥 웃었다.
“처음 보았을 때 네 허옇게 질렸던 얼굴이 떠올라 웃은 것뿐이다.”
찬찬히 우현의 얼굴을 뜯어보던 성규가 별안간 눈을 가늘게 접어 떴다.
“갑자기 왜요?”
“왜랄 것이 있느냐, 네 얼굴을 보니 자연히 떠오르는 걸. 헌데 오늘은 그 때보다 얼굴이 펴 보이는구나.”
성규는 알쏭달쏭한 얼굴을 하고서는 제 얼굴을 콕 집어 보았다. 제 얼굴 말씀이십니까? 묻는 목소리도 저번보다는 밝은 기색이 담겨 있었다. 우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성규가 두 눈을 꿈뻑였다.
딱히 얼굴 표정에 신경 쓰고 다니던 것은 아니었던지라 제 얼굴 상태에 관해서는 알 리가 없는 성규였다. 그러나 이윽고 얼굴이 밝아 보인다는 것은 모두 취재 덕이 아닌가 싶자 담담하게 내려가 있던 입가에 웃음기가 걸렸다. 이번에는 우현 쪽에서 앞서 했던 것과 같은 질문이 돌아왔다.
“왜 웃는 거냐?”
“사실 소인이 오늘 존경각의 덕 좀 보았던 참입니다.”
성규가 삐죽이 튀어나온 옆머리를 만지작거리다가 대답했다. 덕? 우현이 흥미롭다는 듯 묻자 성규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눈앞을 노랗게 채운 호롱불이 차갑게 내려앉은 창고 속 공기를 어느 정도 재우고 있었다. 성규가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취재라고 있사온데, 혜민서에서 소인이 치렀던 의술 시험입니다. 매일같이 이곳에서 도둑 공부를 했던 덕인지 이번 취재에서 탐화에 올라 스승님께 칭찬도 들었습니다. 도련님께서 제게 얼굴이 좋아보인다 이르신 말은 모두 그 일 덕택이 아닌가합니다.”
제가 말해놓고도 제 자랑을 늘어놓은 것 같아 외려 부끄러워진 성규가 제 뺨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우현이 들이닥치기 전까지 읽고 있던 서책을 발치 앞에 엎어놓았던 터라 사락거리며 종이가 마루에 스치는 소리가 창고를 울렸다. 우현은 꽤나 진지하게 성규의 자랑을 들어주고 있었다. 제 말이 끝나자마자 성격대로 타박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잠잠하자 성규가 어색한 침묵을 엇누르며 헛기침을 시작했다.
큼, 흠흠. 성규의 마른 기침소리가 호롱불에 가 닿았다. 우현이 퍽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까지 끄덕였다. 성규가 그의 표정을 흘긋거리며 관찰했다. 그러자 잠시 후에는 예상치도 못했던 말이 떨어졌다.
“품삯을 더 받아야겠다.”
“예?”
성규의 목소리가 삐끗했다.
“뭐라 이르셨습니까?”
“품삯을 더 받아야겠다고 일렀다.”
우현의 얼굴에서 진지했던 표정이 걷히고 예의 그 얄미운 입가가 드러났다.
“네 말로 따지자면, 너는 지금 출세를 돈으로 사는 격이 아니냐?”
성규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것을 그런 식으로 해석해내다니! 악착같이 얄미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언뜻 스쳤다. 우현이 제 왼손을 척 하니 호롱불 앞으로 내밀었다.
“양심 값을 하란 말이다.”
“도련님!”
“그게 아니면…”
도둑밖에 더 되겠느냐? 우현이 마치 저는 진지하게 논하는 것이라는 듯 표정을 바로 했다. 성규의 눈썹이 억울하게 내려갔다. 창고 안에 들이찬 공기가 아까보다 한층 더 차갑게 느껴진 것은 기필코 ‘기분 탓’이라 칭하겠음이라.
성규는 그날부로 옥색 그릇에 엽전을 한 두 푼 더 집어넣으면서 이를 갈았다. 출세하고 보자. 출세하고 보자! 하지만 중인인 제가 아무리 출세해보았자 잘난 대감 댁 자제를 뛰어넘어 설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더 분했다. 성규는 저의 피같은 돈이 제 손을 떠나 옥그릇에 떨어질 때마다 먹먹하게 차오르는 가슴 속의 눈물을 감내했다.
우현의 하루 일과 중 가장 신나는 일은, 매일 아침마다 옥그릇 속의 푼돈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유생 체면에 기껏 네다섯냥 정도의 돈으로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정말로 그 엽전 몇 푼이 우현의 기분을 하루 종일 띄워놓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사실인 일이었다. 우현은 명륜당 끄트머리 자리에 몸을 숙이고 앉아 책상 위로 엽전들을 늘어놓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그릇 속으로 던져놓았을 게 뻔해, 그 때 지었을 성규의 표정이 머릿속에 절로 그려지자 퍽 통쾌한 탓이었다. 강의 내내 우현은 자꾸만 새어나오는 웃음을 삼켜내느라 어깨를 들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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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륜당[ 明倫堂 ]
성균관의 대성전 북쪽, 유생들이 강학을 하던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