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감화서
w.규닝
02.
궐에 입궁하기 직전, 지나가다 들린 반촌(泮村) 어귀에 성규의 발이 묶였다. 일부러 최대한 해찰조차 줄이며 바쁜 걸음을 놀리던 와중에 성규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반촌 골목에 즐비한 장사치들의 수레였다. 성규가 홀린 듯 그 앞에 멈춰 서 갖가지 물건들을 물끄러미 훑고 있었다.
곱다…. 성규는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감탄사에 제 입을 틀어막았다. 색색의 화려한 조각보며 여러 모양의 떡살, 가지고 다니기 쉽게 만들어진 얼레빗과 은장도. 심지어는 여인들의 노리개와 은비녀마저도 예뻐 보여 성규의 눈이 바쁘게 굴러갔다. 본디 예쁜 것을 좋아하는 성규에게 있어서 반촌의 시장 어귀는 별천지나 다름없었다. 사실은 모두 저와 관련 없는 물건들이었지만 성규의 눈은 애달프게도 그것들에 닿아 있었다. 가지고는 싶지만, 가까이 할 수 없는 것. 성규가 아쉬운 눈을 질끈 감고 발길을 틀었다. 이런 것들에 한 눈 팔아봤자 시간만 뺏긴다니까. 결국에는 역시나 해찰을 한 셈이 되어 버렸다. 성규가 제 등에 짊어진 필낭이며 귀주머니를 단단히 여미고 다시금 걸음을 재촉했다.
전의감에 다다른 성규의 손에 약제 보따리가 이따만큼씩 들렸다. 입구에 놓여있는 명부에 제 이름을 꾹꾹 눌러 쓰는 손이 힘에 부쳐 덜덜 떨었다. 기껏 해봐야 풀 따위인 물건들이 이리 무거워서야 살겠나. 성규는 이를 악물고 양 손 가득 보따리를 동여매고 궐을 나섰다. 성균관은 멀쩡한 수복을 여럿 두고서도 전부 어디다 써 먹는거야…. 성규가 싫은 소리를 중얼거렸다. 집춘문(集春門)(창경궁에서 성균관으로 통하는 문) 옆 샛길로 빠져나가는 성규의 종종걸음에 속도가 붙었다.
“약방에 약제 공급을 전담하는 혜민서 의관이요.”
하지만 이렇게 성균관 문 앞을 지키고 섰는 수복들에게 저의 소개를 늘어놓을 때에는 이유 모르게 어깨가 으쓱했다. 의관 선비님 납셨냐며 넙죽 문을 열어주는 수복들 앞에서는 낑낑거리며 약제를 들고 오느라 굽혔던 허리도 절로 펴졌다. 유생도 아니건만, 제 신분 하나로 이렇게나 쉽게 성균관에 입성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일말의 자부심 같은 것이 작용한 탓이었다. 그런 뿌듯함을 느끼기도 잠시 성규의 걸음이 약방 쪽으로 바삐 틀어졌다.
“아이고, 혜민서 선비님 오셨습니까!”
“내가 좀 늦었소.”
칸칸이 들어 찬 약제를 살피던 수복이 성규의 기척에 부리나케 달려와 맞았다. 성규가 양 손 가득 들고 왔던 약제 보따리를 마룻바닥 위로 내려놓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혹 그간 약제가 떨어지진 않았소?”
“말도 마십쇼, 정말이지 턱없이 부족합니다. 아직도!”
혹시나 싶어 물었던 말에 수복이 단연 안타까운 표정과 함께 손사래를 쳤다. 성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부족하단 말이오? 내 팔뚝만한 약제더미를 가지고 온 게 바로 엊그제 같소만…?”
어깨를 두드리던 손이 뚝 멈췄다. 약제가 그새 몽땅 떨어졌다니 그게 말이나 된단 소린가. 성규의 표정을 살핀 수복이 반응이 그러실 줄 알았다며 측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쇤네가 무슨 덕을 보자고 의관 선비님께 거짓부렁을 늘어놓겠습니까. 수복이 살펴보고 있던 약제 통 앞에 서서 성규에게 손짓을 했다. 재게 놀린 탓에 힘이 빠진 다리를 어디에 앉힐 새도 없이 약제 통 앞으로 걸어온 성규는 칸칸마다 텅텅 빈 약방 수레의 꼴을 보아야 했다. 성규가 절로 혀를 내둘렀다.
“고 많던 약제들이 벌써 다 나갔단 말이오?”
“요사이 환절기에 접어든 탓 아닐 성 싶습니다. 약방을 찾아오는 상유께오서들 하는 말씀이신데, 주학 강의 내내 상유들의 기침소리가 끊이질 않는다들 합니다요.”
수복이 저도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성규는 약제가 다녀갔다는 흔적만 남은 채 텅텅 빈 나무 칸들을 바라보다가 보따리를 풀었다. 아이고, 제가 도와드립죠. 수복이 얼른 거들며 말했다. 꼭꼭 매어놓았던 새끼줄이 풀려나가며 있는 대로 눌러 담은 약제를 한 움큼씩 빼어다 나무 칸에 집어넣었다. 성규의 한숨소리가 짙어졌다.
“이렇게나 비어있을 줄은 꿈에도 알지 못하였소.”
“그럴 만도 하십니다. 요사이 내내 약방에 들르시는 상유들을 지켜보던 쇤네도 제 눈이 잘못된 줄 알았을 정도였습니다요.”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 재직들 몫은 나눠주지 못할 듯하오.”
성규의 눈썹이 기운 없이 내려갔다.
사실은 여지껏 유생들을 위한 약제를 날라오는 김에 조금 더 떼어다가 아픈 재직들을 위한 몫을 따로 챙겨오고는 했던 터였다. 궐 안으로 들어오는 최고급 약재란 약재는 죄다 내의원에서 긁어모아 가 약제를 만들어 신하들에게 하사하고 있었기 때문에ㅡ 궐이나 성균관에서 일하는 관리들이 대책 없이 앓고 있는 꼴을 눈으로만 지켜보아야 했던 게 안타까워 저지른 성규의 독단적인 행동이었다. 성균관이라고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상유들은 무상으로 공급되는 약제를 아무 때나 가져가 복용할 수 있었던 반면에 아직 나이도 채 다 차지 않은 어린 재직들은 겨우 내내 입에 감기를 달고 사는 실상이 태반이었다.
그렇기에 전의감 몰래 두어 주먹 씩 훔쳐오던 약제를 재직들을 위해 마련한 쥐주머니가 아닌 약제 칸에 꼭꼭 담아 넣으며 성규가 쓴웃음을 흘렸다.
“미안하오. 다음번에는 이러한 변수를 염려해 좀 더 빼돌려보겠소.”
성규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고 있던 수복이 화들짝 놀랐다.
“아닙니다요! 전하께서 하사하시는 것도 아니고, 선비님께서 재직들 좋으라고 하시는 선행인데 미안해하지 마십쇼. 그렇게 매일같이 많은 양을 빼돌리다가 전의감에 들통이 나기라도 한다면 선비님 출세 줄이 도리어 위험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수복이 성규의 눈치를 힐끔이며 말귀를 얼버무렸다.
“그렇잖아도 다음부터는 재직들 몫까지 챙겨다주시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리려 했습죠.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은 공으로 받아 챙기는 입장이기 때문에 영 마음이….”
“아니오. 다 내가 걱정되어서 하는 일이니 그런 말은 하지 마시오.”
약제 칸을 채우는 성규의 손이 느려졌다.
“…혹 그간 아픈 아이들은 없는 거요?”
“예. 다행이도 고뿔은 모두 비껴간 듯합니다.”
확 가라앉은 성규의 표정을 기웃거리던 수복이 성규의 염려를 덜어놓으려 거짓을 늘어놓았다. 사실은 성균관 내의 상유들 따라, 고뿔을 앓는 수복이며 재직들이 넘쳐나고 있었지만 바른 말을 전해줄 수는 없었다. 성규가 미안한 표정을 거두지 못하고 쓰게 웃었다. 아프지는 않다니 그건 참 다행이지만….
약방을 나서는 성규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것은 불공정하다. 최상급 약재들만 전부 모아들여 약제를 제조한다는 것도 아니꼬왔지만 그것은 전부 내의원으로만 흘러들어간다는 것도, 관리들에게 하사하는 약은 결국 눈꼽 만큼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직은 아픈 재직들이 없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영 편치 않는 맘에 성규의 어깨가 기운 없이 떨어져 있었다. 그렇게 기력 없는 걸음이 비복청 앞을 지나 명륜당 샛길로 돌아 나갔을 때였다.
으아! 하마터면 괴상한 소리를 내지를 뻔 한 것을 눌러 담으며 성규가 급하게 몸을 숨겼다.
“다시 한 번 묻겠네. 자네는 지금 고뿔이 들었어. 그렇지?”
아주 낯이 익은 목소리가 눈 바로 앞에서 터져나온 탓이었다. 성규는 미처 악 소리를 낼 틈도 없이 서까래 뒤로 몸을 숨기고 무조건적으로 쿵쾅쿵쾅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몇 번 만난 적도 없지만 이미 벌써 저의 몸은 그의 목소리에 놀라 자빠지도록 길들여져버린 듯 싶었다. 성규는 모서리 뒤쪽에서 무어라 얘기를 나누고 있느라 웅성거리는 소음에서 멀찍이 떨어져 섰다. 그러다가 잠시 후에는, 고개만 빼끔 들이밀어 목소리가 들려오던 쪽을 훔쳐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인기척의 주인공은 우현이 맞았다. 오늘도 알게 모르게 비뚤어진 유건을 쓴 그의 뒷모습이 적나라하게 눈에 들어왔다. 우현은 자꾸만 뭐라 해대며 제 앞에 섰는 동기 유생의 옷깃을 올려 잡고 몰아세우고 있었다. 싸움인가? 성규의 놀란 눈이 동그래졌다. 그렇게 우현은 몇 번이나 유생의 멱살을 들어올리다시피 해 짤짤짤 흔들어대다가 그 손을 놓았다. 그제서야 높았던 그의 목청도 한 층 낮아진 듯 했다. 성규는 우현이 다짜고짜 뒤를 돌아볼세라 서까래 뒤로 다시 몸을 숨겼다.
역시 괴팍한 유생이 맞았어. 성규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성균관 내에서 싸움이라니. 역시 저를 대할 때부터 그렇게 생겨먹었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혹시나가 역시나인 셈이었다. 향관청 벽에 붙어서 성규가 게걸음을 하였다. 혹시나 우현의 눈에 발각될까 무서워 다른 쪽 샛길로 도망길에 올랐다.
*
“방금 기침 했잖아! 그게 아픈 게 아니고 뭐란 말인가?”
동기 유생의 멱살을 잡아 챈 우현의 목소리에 독기가 어렸다. 그에 다짜고짜 멱살을 잡혀 당황해버린 유생의 입에서 어이없는 헛바람만 터져 나왔다. 왜, 왜, 왜 이러는 게요? 도헌. 우현이 금방 도끼눈을 떴다.
“자네는 틀림없이 고뿔에 들었어. 내 말이 틀렸는가?”
“그, 그럴지도 모르네만 나는 단지…”
“내 자네 대신 약을 받아다 주겠네.”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대답만 걸러 들은 우현이 그의 말이 채 다하기도 전에 쥐었던 옷깃을 힘주어 놓으며 손을 털었다. 뭐? 약? 기가 찬 유생의 목소리에 우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절친한 자네를 위해 내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그러니까 내 친히 자네 대신 약방에 들려줌세.”
“허, 이 사람….”
“내가 아파서 들르는 게 아니고.”
자네 때문에 내가 들르는거네. 그 말만 남긴 우현이 바쁘게도 몸을 돌려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어이! 도헌! 멱살을 잡혔었다는 것에, 뒤늦게 열이 뻗힌 유생의 목소리가 우현의 등 뒤에 꽂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약방을 향하는 우현의 발걸음에 속도가 더해졌다.
평소보다 더욱 재게 놀렸던 걸음이 약방 근처에 다다라서는 아닌 척 평소마냥 느려졌다. 우현은 멀리서부터 보았을 때, 아무도 없어 뵈는 약방 문턱을 일부러 소리 나도록 밟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큼, 흠흠.
“게 아무도 없느냐?”
“아이고, 쇤네 있습니다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몸을 수그리고 약제를 정리하고 있던 수복의 몸이 불쑥 튀어 올랐다. 우현이 아주 느린 걸음으로 약방 안으로 들어서며 뒷짐을 졌다. 고뿔이…, 다짜고짜 용건을 뱉으려던 입이 멈추었다. 시치미를 뚝 떼고 약방 안을 훑어보던 우현의 눈이 약제로 가득 채워진 나무 칸에 고정되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텅텅 비어있던 약고가 그득그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 의관이 다녀갔느냐?”
우현의 걸음이 나무 칸 앞에 멈추었다. 수복이 약제 가루가 묻은 두 손을 탈탈 털며 가까이 다가왔다.
“혜민서 선비님 말씀하시는겁지요? 일 다경 즈음에 들렀다 가셨습죠. 도헌 도령님께서는 아주 운이 좋으십니다. 일 다경 전만 해도 채워놓았던 약제가 다 떨어졌었기에….”
“벌써 들렀다 갔다고?”
우현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그러자 두 손을 싹싹 비비며 목소리를 굽히던 수복이 당황스럽게 표정을 굳혔다. 예. 들렀다 가셨습니다만. 우현은 짐짓 등 뒤로 묶어두었던 제 손을 풀며 인상을 구겼다.
우현의 심기가 좋지 않은 것을 지레 짐작한 수복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인 일이십니까요? 혜민서 의관님한테 용건이라도….”
“용건! 그래 용건!”
우현이 별안간 수복의 뒷말을 잡아채며 말을 끊었다. 수복이 거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내었다.
“그, 그러시면 쇤네가 다음번에 선비님께…”
“아니! 이건 내가 직접 전할 게야.”
우현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수복의 눈이 도륵거리며 굴러왔다. 우현은 짐짓 화난 체를 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본래는 용건 같은 것은 추호도 있지 않음이었다. 짧은 새에 용건을 만들어내려는 우현의 머리가 그 여느 때보다 바쁘게 굴러갔다. 옳거니, 우현이 몸을 홱 틀어서며 목을 가다듬었다.
“약제에서 해충이 나왔네.”
“해충이라굽쇼?”
수복이 놀란 듯 묻자 우현이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네. 해충. 그것도 아주 지독해 빠진데다가 흉측하고 모난 해충 말일세.”
우현이 반 바퀴 돌렸던 몸을 홱 틀어 수복의 얼굴 앞에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흐익! 수복의 몸이 절로 뒤로 넘어갔다. 우현의 화난 얼굴이 눈 앞 가득 들이찼다.
“이건 참으로 심각한 일이네. 절대 가벼이 넘겨서는 될 일이 아니야. 하마터면 내 상처에 해충 묻은 약초를 처바를 뻔 했단 말일세. 이리 말하면 심각성이 느껴지는가?”
우현의 으름장에 수복의 눈꺼풀이 빠르게 깜빡여졌다. 아, 예. 예. 그러믄요. 그러자 잠시 후에서야 우현의 얼굴이 다시 뒤로 빠졌다. 수복이 뒤로 넘겼던 허리를 곧추 세워 한숨을 내쉬었다. 우현은 잔뜩 기분이 상했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다음번에 의관이 찾아오면 당장 내게 들라 하게.”
“혜민서 선비님 말입죠…?”
우현은 대답조차 아깝다는 듯 두어번 손을 휘휘 젓고 약방문을 나섰다. 수복이 뒷모습마저 성나 보이는 우현에게서 끝까지 눈을 떼고 있지 못하다가 겨우 한숨을 돌렸다. 갑작스러운 으름장에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 것인지 뒷걸음질을 치다가 약제 칸을 짚고 선 수복이 제 얼굴에 흐르는 식은땀을 옷 소매로 닦아냈다.
“혜민서 선비님, 이제 죽었다….”
선한 분이신데. 수복의 혼잣말에 짠내가 담겼다.
*
“뭐요? 해충?”
그로부터 삼일 뒤였다. 저번보다 두어 주먹 많이 약제를 챙겨 온 탓에 뿌듯하기도 하여 붕붕 떴던 성규의 기분에 찬물이 끼얹어졌다. 수복의 얼굴에 민망함이 가득 찼다.
“예. 쇤네도 정확한 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상유께서 그리 일러 달라 하셨기에….”
성규가 양 손 가득 들었던 보따리를 문턱 아래 천천히 내려놓았다. 약제에 해충이라. 헤아려볼수록 황당한 말이었다. 성규의 얼굴이 유감스러운 빛으로 물들었다. 도리어 머쓱해진 수복이 제 뒷머리를 긁적였다.
“선비님도 참 난감하게 되셨습니다요.”
“난감하지 않고서야 말이나 되는 소리오? 약재를 제조하여 약제로 만드는 것은 모두 전의감에서 담당하는 일인데다가 혜민서에 소속된 나는 내의원 도제조 대감의 명으로 단지 공급만을 담당하고 있을진데… 설령 해충이 나왔다 하더라도 그 책임을 내게 물으시면….”
말을 이을수록 억울함이 담겨가는 성규의 말꼬리가 결국에는 흐려졌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성규는 당장에 저를 데려오라던 전갈에 등 뒤로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수복이 쩔쩔매며 성규의 눈치를 살폈다.
“선비님 인품은 제가 잘 압죠, 절대 남에게 해가 되는 일은 자처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라는 걸. 쇤네도 이번 일을 선비님께 전해야 한다는 사실에 줄곧 마음이 아파서,”
“그래서 뉘시라 하오?”
성규가 수복의 말을 덜컥 자르며 물었다. 수복이 어쩔 줄 몰라하는 제 손을 싹싹 빌었다.
“도헌 도령이올시다.”
“도헌? 호 인가?”
“예. 도헌은 별호(別號)이옵고 본명은 남우현. 동재에 기거하시는 진사님이옵죠.”
남우현…. 그 이름도 처음 듣기는 매한가지였다. 성규는 애꿎은 그의 별호와 이름만을 번갈아 중얼거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나 잡고 그 이름만 대면 되는거요?”
“아마 그렇습니다. 아무 상유께나 물으셔도 쉽게 만나 뵐 수 있을 것으로 압니다요.”
성규는 저보다 더 안타까워 뵈는 수복의 얼굴을 등지고 약방을 나섰다. 갑갑하다. 성규가 괜히 더워지는 제 얼굴에 손부채질을 시작했다. 성규에게 있어 억울하거나 답답한 상황이 닥쳐오면 가장 먼저 드러나는 적신호는 바로 얼굴이 단시간에 상기된다는 것이었다. 성규가 터덜터덜거리며 걸음을 놀렸다. 이제 어찌 변명을 늘어놓으면 좋을까…. 성규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어지럽혀졌다. 그렇게 마악 향관청 앞을 걸음하려고 했을 때였다.
땅만을 본 채 기운 없이 걷던 성규의 시야에 번쩍번쩍한 태사혜가 들어왔다. 난데없이 제 앞길을 가로막은 인기척에 성규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아.”
“…….”
“오래간만이옵니다.”
멍청하게 벌어졌던 입이 지독히도 형식적인 말을 뱉었다. 성규는 꼬박 일주일만에 보는 낯익은 얼굴에, 얌전히도 멈췄던 심장이 다시금 두근두근 뛰는 것을 느꼈다. 존재만으로도 무서운 사람이 홍길동마냥 이리 번쩍 저리 번쩍 나타나니 심장이 제멋대로 뛰는 것은 당연지사인 일이었다. 성규가 제 가슴께를 움키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자 뒷짐을 지고 떡하니 버티고 섰던 유생의 입가가 자연스레 올라갔다.
“양심 값은 매일 잘 걷고 있다.”
“…매일같이 옥그릇에 엽전이 비어있는 걸 보고 지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성규가 어색하게 웃으며 맞장구를 쳐 주었다. 우현이 저의 표정을 짐짓 엄하게 고쳤다.
“이런 꼭두 대낮에 성균관에 나타났다 함은, 약방에 약제를 놓으러 온 것인 줄로 안다. 헌데 이곳은 약방으로 향하는 길목이 아니다. 너는 어딜 가던 길이었느냐?”
성규의 눈매가 어색하게 굳었다. 그게…. 손목 끝을 덮은 도포자락을 괜스레 만지작거리며 성규의 말이 느려졌다.
“상유께서는 혹 도헌 도령을 아십니까?”
“도헌?”
“예. 그 분을 만나 뵈어야 하는데 얼굴도 모르는 상태에서는 어느 유생을 보아도 식별이 불가하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흐음, 우현이 제 턱을 만지작거렸다. 도헌이라…. 성규가 잔뜩 풀이 죽은 눈으로 우현의 말소리를 듣고 있었다. 도헌이라. 도헌이라 함은. 자꾸만 뜸을 들이는 목소리가 성규의 귓가를 어지럽혔다. 우현의 목소리가 생각에 잠기는 듯하다가 번뜩 뱉어졌다. 들은 바 있다. 그에 성규의 눈이 우현의 얼굴을 향했다.
“아십니까?”
“내 별호와 같구나.”
“예?”
“내 별호와 같다 하였다.”
우현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내가 약방에 일러둔 기별을 전해들은 모양이로다. 나를 찾아오던 길이었느냐?”
상황 파악에 늦은 성규의 입이 아주 천천히 벌어졌다.
*
어찌되었건 다른 유생들의 눈은 피해야했기에 우현이 찾은 곳은 명륜당 뒷켠에 위치한 육일각이었다. 주로 수복이나 재직, 비복들이 많이 이용하고 있거니와 창고의 용도로 쓰이는 게 전부였기 때문에 남들의 발길이 쉬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성규는 저만치 앞서 걸어가는 우현의 뒤를 조각걸음으로 좇아가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필이면 걸려도 저 분께… 성규는 한참 후에서야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돈 우현의 앞에서 머리를 푹 숙였다. 빙글 몸을 돌린 우현이 갓머리밖에 보이지 않는 성규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내가 약방 수복에게 이른 말은 전해 들었느냐?”
성규의 고개가 보일 듯 말듯하게 끄덕여졌다.
“예. 전해 들었습니다.”
“전해 들었다라…. 허면 무엇이든 느낀 바가 있느냐?”
부러 진지하게 내는 목소리가 슬슬 성규에게 책임을 묻고 있었다. 성규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슬쩍 들었다.
“느낀 바라 함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내가 고약한 해충을 상해에 덧댈 뻔 했던 것에 대해서 조금도 느끼는 바가 없다는 소린거냐?”
휴. 성규가 우현의 말에 소리 나게 한숨을 뱉었다. 그러자 우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한숨을 쉬어? 어딘가 모르게 발끈한 우현이 다음 말을 거들기 전에 성규가 먼저 운을 떼었다.
“소인은 아직 일개 의학생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 아니하십니까.”
그러자 우현의 얼떨떨한 대답이 떨어졌다.
“그…러하지.”
“허면 소인에게는 약제를 제조할 능력이 턱없이 모자라다는 것을 인지하시고 계신단 소리일 겁니다. 게다가 소인이 약방에 공급하고 있는 약제들은 모두 내의원에서 가져온 것이오며 소인이 맡은 임무라고는 그저 그것을 성균관에 가져다 나르는 것밖에 없사온데 이리 으름장을 놓으시면 어찌한단 말입니까?”
이제는 제법 대담해진 성규의 말이 우현의 허를 찔렀다. 우현은 막힘없이 줄줄 쏟아지는 성규의 변명에 기가 찼다. 며칠 보지 아니한 사이에 전보다 야무지게 변한 성규의 얼굴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여지껏 서책을 읽어온 게 아니라 칼을 갈았나.
“게다가 약제는 본디 약초더미에서 제조되는 것이 맞사온데 비일비재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을 갖다가 해충이니 뭐니 이르시면 곤란하옵니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잘못은 네게 있다!”
우현이 척 하니 팔짱을 꼈다.
“애초에 상부에서 너에게 성균관의 약제 전담을 맡긴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이로운 약제인지, 혹여 해충이 붙어있지 아니한지를 따져보고 해로운 것은 마땅히 가려내어 비치해두어야 하는 것을. 어찌 제 잘못을 부인하고 해를 입은 성균관 유생을 기만하는 것이냐?”
이럴 때에는 막힘없이 술술 터져 나오는 거짓 화가 짐짓 엄한 목소리를 담고 있었다. 우현은 당돌하게 세워져 있다가 점점 기울어가는 성규의 눈꼬리를 확인하자 저도 몰래 입가가 흐뭇해지려는 것을 꾹 눌러 담았다.
방금 전까지도 옳은 소리를 줄줄 이르던 성규가 금방이라도 울 듯 눈을 접었다. 그 모양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우현이 저와는 상관치 아니한 척 고개를 돌렸다.
“그것이 혹 독충이었다면, 또 그것을 내 상해에 문댔다면 어찌하였겠냐는 말이다.”
“…….”
“앞으로 내가 복용할 약제는 모두 네놈이 전담하라.”
예? 우현의 말에 대꾸 없이 입을 악물던 성규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소인이 말입니까? 우현은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 네가. 우현이 기대고 섰던 벽면에서 몸을 떼었다.
“그리하여야 나중에 해충이 다시 나온다손 치더라도 누구에게든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 아니겠느냐. 나는 전의감에서 검열도 채 거치지 않고 내려온 약제는 못미더워 쓸 수 없으니 네녀석이 이로운 것으로 하나하나 골라내어 내게 바쳐라.”
성규가 무섭도록 뻔뻔스러운 목소리에 헛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꾹 참고 침착하게 얼굴 표정을 굳혔다.
“허나 소인은 아직 이로운 약제를 분별할 수 있을 만큼 실력이…”
“잔말이 많다.”
우현이 성규의 말을 댕강 잘라먹으며 손을 저었다. 대답만 하여라. 그리 하겠느냐, 아니하겠느냐? 얼굴 표정은 이미 ‘그렇지 아니하면 경을 칠 것이다’ 정도로 험악하게 굳어있으면서 선택지를 넘긴 우현의 표정은 그 여느때보다 얄미워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차라리 양심 값을 한두 푼 더 받아내시지. 성규는 그 야속한 얼굴을 들여다보다 입술을 물었다.
“도헌께서… 언제 어느 때, 어찌 아프실 줄 소인이 알고 약을 대령합니까?”
“그것은 내가 일러 주겠다.”
“아플 것도 미리 알고 아프시렵니까?”
역시 괜한 고집이 맞는 모양이었다. 성규는 대책 없이 떨어진 우현의 말에 역시나 저를 괜히 놀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직감하자 고 미웠던 얼굴이 걷잡을 수 없이 얄미워지기 시작했다. 한껏 미운 목소리가 우현의 허를 쿡 찔렀다. 우현이 잠시 말을 얼버무리다 여유롭게 웃어보였다.
“아까도 이른 말이지만, 잔말이 많다 하였다.”
잔말이 많은 건 아무리 보아도 우현 쪽이었다. 성규는 그 뻔뻔스러운 입을 당장에라도 꿰매고 싶었다.
*
한 식경(30분) 전 까지만 해도 소간을 나눠 먹는 유생들의 말소리로 도란도란히 북적거렸던 청재 앞마루에 어스름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날씨가 차졌네. 동기 유생의 넋두리가 스치듯 지나가 쪽방 안으로 사라지자 우현이 간지러운 귓가를 긁었다. 주무십시오. 하릴없이 발을 달랑거리며 반대편 마루에 앉아 있던 재직 하나가 꼬박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비복청 쪽으로 달음박질하였다. 우현은 그저 터줏대감처럼 마루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뉘엿뉘엿 지는 해를 보고 있었다.
주무십시오. 이번에는 다른 재직 하나가 앞서 그랬던 것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가 일어났다. 오냐. 별스럽지 않게 대꾸한 우현이 편하게 끼려던 팔짱을 풀고 총총거리며 사라지려는 재직 하나를 붙들었다. 야. 꼬마. 너 이리 와 봐. 다짜고짜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재직의 몸이 화들짝 떨렸다.
“쇤네를 부르셨습니까?”
작은 몸이 후닥닥 달려와 우현 앞에 서서 굽신거렸다. 우현이 의아한 눈을 하고 재직 하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혹, 고뿔에 들었느냐?”
“예?”
방금 전, 무심결에 들었던 어린아이의 기침소리가 우현의 신경을 가로채었기에 묻는 것이었다. 고사리처럼 마른 손이 제 입을 틀어막으며 금방이라도 넘어올 것 같은 딸꾹질을 이겨냈다. 그러자 답답하게 끊겨오는 대화가 지루해 우현의 눈썹이 지겹다는 듯 올라갔다.
“물었지 않느냐. 고뿔에 들었냐고?”
“아. 예, 예. 쇤네 닷새 전에….”
평소에는 표정이 험악하게 굳어져 말도 몇 마디 나눠보지 않은 유생이 다그쳐 오는 통에 잔뜩 겁을 움켜먹은 재직이 말끝을 얼버무리며 안절부절 하고 있었다. 우현은 재직의 말에 흐음, 하는 소리와 함께 앞으로 내었던 몸을 다시금 뒤로 뺐다.
어물쩡한 대답을 뱉어내는 와중에도 조아린 머리 아래에서는 간간히 마른기침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우현이 그 꼴을 잠시 동안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일렀다. 거기서 기다리거라. 우현은 바로 제 등 뒤에 있는 방으로 몸을 틀어 사라졌다. 예 어디 두었는데…. 재직은 물건을 뒤적거리느라 소란스러워진 방 안을 빼꼼 들여다보았다. 우현이 벽장 속을 꽤 오래 뒤지고 있었다. 재직이 차게 얼은 발을 꼼지락거렸다.
일 촌각(1~2분) 후에서야 방 안에서 걸음 한 우현이 마루에 털썩 엉덩이를 대고 앉으며 도포 옷깃에 감추고 나왔던 꾸러미를 재직에게로 던져 주었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든 재직이 그것이 무엇인지도 채 알아차리지 못한 와중에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고…고맙습니다!”
“고뿔에 듣는 약이다. 어떻게 달여 먹는지는 나도 모른다. 비복들에게 물어보면 될 것이니라. 다른 재직들도 다 그리하는 듯 하니.”
약제다! 재직이 우현에게 연신 허리를 꾸벅이며 고맙단 말을 연발했다. 며칠 전 약방에 들렀을 때에는 분명 재고가 하나도 없다고 들었던 터라 갑작스레 받은 선물과도 같은 기분이었다. 우현은 비복청으로 드는 샛길로 걸음할 때까지 조그막한 머리를 꼬박이는 재직을 바라보다가 저도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동안 조금씩 약방에서 갖은 약제를 훔쳐다 놓은 것이 도움이 될 줄이야. 우현이 차진 바람에 코를 훌쩍이며 도포 자락에 제 손을 집어넣었다.
약제가 얼른 떨어지면 그만큼 서생원이 성균관에 들르게 되는 횟수가 많아질까 하여, 고 작은 놈을 놀려주고자ㅡ 아픈 기색도 없건만 꾸준히 훔쳐다 두었던 약을 선의에 베풀고 나니 조금은 뿌듯해지려는 참이었다. 우현이 청재 앞마당 빈 감나무 가지에 걸리려는 초승달을 올려다보다가 괜히 어깨에 힘을 주었다.
*
반촌[ 泮村 ]
조선시대 성균관(成均館)의 사역인들이 거주하던 성균관 동·서편에 있던 동네.
집춘문[ 集春門 ]
창경궁에서 성균관(成均館)으로 통하는 문이다. 임금이 문묘를 참배할 때 집춘문을 통해서 성균관으로 갔다.
비복청[ 婢僕廳 ]
정록청의 동쪽에 유생들의 식사를 만드는 여인들이 거처하던 곳.
육일각[ 六一閣 ]
성균관(成均館)의 무기고.
향관청[ 享官廳 ]
문묘(文廟) 향사 때 헌관 및 제집사들이 거처하며 심신을 청재(淸齋)하는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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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어렵다시는 분들이 계시어 각주를 추가했사옵니당 그리고 님들 자꾸 저보고 취향이라는 것을 저격한다고 하시는데.. 나 총 잡는 법도 몰라여~ㅎ.ㅎ~ㅎㅎ~ㅎ~ㅎ 미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