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위에 지도를 펼쳐놓은 채 지형을 살펴보고 있던 석진은 정국이 들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흐트러진 옷가지를 대충 정리하며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도 대충 손으로 정국은 입을 열었다.
"그래, 날 찾았다는 건 그쪽에서 소식이 들어왔다는 거겠죠."
"받아든 서신에 따르면 아직 전체적인 진영을 재정비하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아마 대략적인 기간을 따져봤을 때 앞으로 닷새 정도가 걸릴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닷새라...."
한 번 읊조리던 정국이 말을 뱉었다. 굳이 기다려줄 필요는 그 어디에도 없으니, 그 전에 먼저 선수를 쳐야겠군요.
정국이 가까이 다가와 석진이 펼쳐놓은 지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게 전투지로 예상이 된 곳인가요. 여러 개의 길들과 산들로 어지러이 얽혀진 지형을 보며 정국은 흐음, 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래서, 생각해둔 건 뭐래요?"
정국의 질문에 석진이 손끝으로 지형들을 짚어가며 대답했다.
"그쪽의 전략은 이 마른 계곡 안으로 저희를 유인한 다음, 뒤로 풀어놓은 병력들을 통해 위에서부터 치고 내려온다는 겁니다."
"한 번에 몰아넣어 처리하겠다는 건가. 우리의 대응 방안은?"
"그걸 오히려 역이용해서 저희도 나머지 병력들을 숨기는 거죠. 바로 여기에요."
석진이 마른 계곡의 지형 뒤에 위치한 산 중턱을 가리키며 말했다. 적들이 계곡 위에서 매복해있다면 저희는 그보다 더 높은 곳에서 매복한 다음, 그들의 속셈에 일부러 걸려주어 승리했다고 자만해 있을 때 머리부터 싸그리 짓밟는 전략이죠.
석진의 말을 듣고 있던 정국이 의문을 제기했다. 만일 병력을 저 산에 배치한다고 해도, 적들의 눈에 띄지 않게 어떻게 이동시킬 지는 생각해 봤습니까? 그리고 적 측에서 그 산에 다른 무리들은 없나 정찰하러 나올 지도 모르는 일인데. 그러다가 쓸데없이 먼저 발각되기라도 하면 손해보는 건 이 쪽입니다. 정국의 말에 석진이 대답했다.
"전날에 어둠을 타서 이동하면 쉬이 들키지 않을 겁니다. 이걸 제안해온 게 그 아이에요. 아마 손을 써 놓겠죠."
"자신 있다면 괜찮겠지만,"
석진의 말에 정국이 한 쪽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로 비뚜름하게 쳐다보며 물었다. 저번에 그 전략도 그 분한테서 나온 거잖아요. 변수가 있어서 하마터면 내가 죽을 뻔 했는데?
비꼬는 말에도 석진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말했다. 누구나 실수 한 번 쯤은 있는 거죠, 그 실수가 엄청나게 큰 것이긴 했지만. 전하도 용서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석진이 덧붙였다. 전하께서 휩쓸렸다는 걸 알고 당장이라도 다 집어치우고 뛰쳐나와야 되는 거 아니냐며, 자기가 죽어야 실수를 갚을 수 있지 않겠냐며 안절부절했던 아이에요.
"너그럽게 한 번 감싸주세요."
"단장은 동생을 너무 감싸줘요."
정국이 투덜댔다. 그러다가 다시 눈을 장난스럽게 반짝이며 중얼거렸다. 아니다, 사지로 보낸 건 형인 단장이니까 오히려 정이 없다고 봐야 하나요. 오랫동안 알아와도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니까. 정국이 떠봐도 석진은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정국은 한동안 지형을 세세히 들여다보며 석진과 말을 주고받았다. 그리곤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이대로 하면 될 것 같고. 두 번의 실수는 없을 거라고 했으니, 믿어보죠 뭐."
"감사합니다."
"나흘 뒤에 떠날 수 있게 채비를 해 놔요."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중요한 정보들을 보고받은 정국은 대화가 끝난 후에도 한동안 지도를 다시 확인하며 예상 상황을 머릿속에서 전개시키느라 생각에 잠겨 있었다. 몇십 가지의 상황을 그려내고 대처할 수 있는 전략을 펼치던 무렵, 그런 복잡한 머릿속을 파고 든 건 석진의 목소리였다.
"요새 좋아보이십니다."
석진의 목소리에 정국이 생각을 멈추고는 고개를 살짝 들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얼굴에 웃음기가 떠나시질 않던데요.
정국이 피식 웃으며 다시 고개를 내리며 대답했다. 나야 뭐 항상 똑같은 표정이지만 그렇게 보였다면 그렇다는 거겠죠. 아리송하게 넘어가려는 정국의 말을, 석진이 다시 붙잡았다.
"그 분이 그렇게 좋으십니까?"
"말하는 게 이름이라면, 편해요. 나와 잘 맞고, 좋고."
"그저 가볍게 즐기실 거라면 말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깊어지려는 생각이시면 저는 한번 더 생각해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어딘가 묘한 석진의 말에 정국이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웃음기가 남아있던 입매에는 어느 새 미소가 사라진 채였다. 정국이 싸늘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거죠."
정국의 말에 석진이 대답했다. 저는 그 여자, 마음에 걸립니다. 어딘가 불편해요. 사실, 사람을 보내 그녀에 대한 조사를 간단하게 시켰습니다. 그 말에 정국의 눈썹이 꿈틀했다. 화난 기색이 분명히 묻어나오는 어투로 정국은 석진에게 따져들었다. 내가 분명히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했을 텐데요.
"왜 내 말을 무시하고 한 겁니까."
"그래도 전하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이니, 신중한 것이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좀 전에 보고를 받았습니다. 시간이 워낙 짧아서 모든 지역을 흝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들어보세요."
"..........."
"그녀와 관련되어 있는 게 하나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쌍생아라는 존재를 함구하고 있던 가문을 찾아내는 건 어렵다는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이상하게 정보가 하나도 없어요."
석진이 천천히 말했다. 그 정도의 검술 실력을 가진 여자가 평민이라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전하도 보셨잖습니까, 황제 폐하의 직속인 자와 합을 겨룰 수 있던 장면을요. 그 정도로 칼을 자유자재로 놀리기 위해서였더라면 어느 정도 권세가 있는 가문에서 배웠을 테니까요. 석진의 말을 듣고 있던 정국이 입을 열었다.
"하만(夏晩) 지방 출신이겠죠. 그 쪽은 권세 있는 가문이 아니더라도 척박한 환경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녀 모두가 어느 정도의 사냥 실력을 갖춰야 하니까요."
"그럴 수도 있겠죠."
석진이 가볍게 수긍했다. 하지만 곧 한숨을 쉰 채 정국을 바라보았다.
"정국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너도 잘 알잖아."
석진이 호칭과 예법을 떼놓은 채 말을 한다는 건, 그만큼 진지한 이야기를 말하고 싶을 때 하는 것이었다. 네 말대로 시간이 충분하지 않아 아직 전체를 조사해 보지 않아서 그와 비슷한 지방의 출신일 가능성도 있겠지. 그래도 만일의 가능성을 생각하자는 뜻이었어. 석진의 말에 정국도 몸을 바로 한 채 받아쳤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날이 선 채였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알아. 하지만 난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아."
"그건 무슨 뜻이야? 설마 진심이 될 것 같다는 말이야?"
석진이 정국의 말꼬리를 붙잡았다. 정국은 석진의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지은 표정이 답을 말해주고 있었다. 정국의 표정을 읽은 석진이 기함하며 말했다. 제정신이라면 그만둬. 왜 그렇게 그 여자한테만 경계심이 없는 건데?
"내가 지금까지 말했던 건 다 흘려넘기겠다는 거야?"
"그런 말 한 적 없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녀를 보내고 싶은 마음은 없어."
"왜이래, 전정국. 예전의 일은 잊었어?"
석진이 예민한 말을 꺼내자 정국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말하지 마.
하지만 석진은 막무가내였다. 전에도 그러다가 한 번 크게 데인 거 알잖아. 그 일 이후로는 아무도 안 믿으면서, 심지어 나조차도 완전히 믿지는 않는 너잖아. 그런데 그 여자한테는 왜 그래?
"사랑에 눈이 먼 거야? 또 그러ㅁ.....!"
"내가 병신이 아닌 이상 그럴 일 없어. 생각이란 건 나도 해."
더 이상 참견하지 마. 내 성질 그만 긁어. 혹시 목숨이 두 갠가?
정국이 낮게 으르렁대자 석진은 입을 다물었다. 이미 정국한테는 어떠한 말도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석진이 더 이상의 말을 꺼내지 않자, 정국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기고서는 입을 열었다.
"..여기서 그만 하죠. 아까 말했던 대로, 나흘 뒤에 나갈 준비 마치세요."
"...알겠습니다. 이번에도 나가실 거죠."
"당연한 건 묻는 게 아닙니다."
이번 전투에서 깔끔하게 끝낼 겁니다. 다른 사람의 손이 아닌, 제 손으로요. 정국의 고집이 센 건 잘 알았기에 석진은 말리지 않았다. 단지 전투에 나갔다가 또 상처를 얻을까봐 걱정이 되는 것이었다. 전정국의 왼쪽 어깨에 옅게 남아있을 상처도 신경이 쓰였고 말이다. 지도를 정리하고 방을 나가려는 정국의 뒤를 따라 나가면서 석진이 말했다.
"그러면 그 전에 상처나 의원에게 치료받고 가세요."
"이미 다 나았어요."
"거의 다 나은 건 맞지만, 다는 아니잖아요. 그런 상태로 전투에 나가셨다가 혹여나.."
"아아, 그만그만. 가면 되잖아요."
진짜 귀찮게. 무시하면 계속 지겹게 옆에서 말할 석진임을 알기에 정국은 쯧, 하고 혀를 찬 후 몸을 돌렸다. 멀어져가는 정국의 모습을 확인한 석진이 어디론가 걸음을 옮겼다.
-
의자에 앉아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문 밖에서 들려오는 똑똑,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전정국인가? 아까 바쁜 일 있어서 나가는 거 같더니. 왠지 모르게 떨리는 가슴을 하고선 문을 열었던 나는 그 앞에 서 있는 김석진을 보고 아, 하는 소리를 흘렸다.
"늦은 밤에 죄송합니다. 잠시 이름님과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신가요."
".....들어오세요."
대하기 어려운 상대가 날 찾아오자 당황했지만, 딱히 거절할 수도 없어서 나는 그를 방 안으로 들였다. 문을 닫은 후 나는 먼저 걸음을 옮겨 의자에 앉았다. 나를 따라 걸어온 김석진은 자리에 바로 앉지는 않고 열려있는 창문까지 닫고서야 자리에 앉았다. 어딘가 무거워진 분위기. 그와 단 둘이 있는 이 자리가 한없이 어색해서, 나는 애꿎은 손가락만을 만지작거리며 그가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불편하실 테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이름님은 태자 전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네?"
급작스럽게 치고 들어오는 말에 나는 김석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표정 하나 없이 바로 날 보고 있던 그는, 내가 머뭇거리자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나는 최대한 말을 고른 후 대답했다.
"좋은 분이시죠, 또 강한 분이시고..."
"제가 그런 걸 묻기 위래서 던진 질문이 아니란 걸 아시잖습니까."
"........."
역시 껄끄러운 상대다, 고 생각했다. 김석진은 다시 입을 열어 내게 물어왔다.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전하에 대한 마음이 진심인지를 물은 겁니다."
"..........."
"당신은 어떤 쪽입니까."
계속 말을 하지 않았다. 전정국을 볼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건 사실이었는데, 김석진의 질문에 저대로 대답해도 되나 싶어서. 김석진은 침묵을 지키고 있는 날 가만히 보며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 날. 전하를 찾으러 숲 속으로 갔던 날. 전하께서 당신과 같이 있던 걸 발견하고, 궁으로 올 때부터 다른 느낌을 받았습니다. 왜 당신에게 상을 내리고 돌려보내지 않는 대신, 계속 궁에 붙잡아 두려고 하시는지..."
"..뭐였는데요?"
"그건 당신이 마음에 드셔서 하신 행동이셨습니다. 원래 그러실 분이 아닙니다."
"...그럼, 제가 여자라는 것도, 알고 계셨어요?"
"처음부터."
김석진이 바로 대답했다. 생각치도 못한 대답에 나는 깜짝 놀랐다.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었다니, 그런데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니. 소름이 돋았다.
제가 이 자리까지 올라온 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죠. 김석진이 조용하게 내뱉는 말을 나는 멍하니 듣고 있었다.
"사실대로 말할까요. 저는 당신 자체는 좋지도 싫지도 않습니다. 다만, 전하와 관련된 당신은, 무척이나 신경쓰여요."
"..........왜죠."
"드러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잖습니까. 숨기고 있는 게 있을지도 모르고, 그게 전하를 해코지할 수도 있을 건데 어떻게 당신을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찔리는 게 있었다. 나는 김석진의 눈을 피했다.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내 속을 기어코 읽어낼 것만 같았다. 내가 숨기고 있는 그 사실마저도. 김석진이 조용하게 말을 건넸다. 제가 조언을 하나 해드릴까요. 정말 진심으로 전하께 다가갈 수 있겠습니까.
"다칠 수 있을 만한 단 하나의 가시도 없다고, 자신할 수 있으십니까."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김석진이 말을 던졌다.
"그럴 자신이 없으면, 거절하세요."
무엇을? 무엇을 거절하라는 건가. 나는 김석진을 바라보았다. 그는 대체 뭘 짐작하고 있는 걸까. 이어지는 말은, 내가 모르는 전정국의 과거에 대한 짧은 이야기였다. 갈피를 잡지 못하시는 거 같으니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죠.
"자세히 말하지는 못하지만, 전하께서 어렸을 적에 가까운 사람에게 크게 배신당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한동안 사람을 기피하실 정도였죠. 어릴 때부터 옆에서 봐오던 저마저도 일주일간 안 만나줄 정도로. 그 때 입은 외상은 아직도 가슴 윗부분에 흉터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
"하지만 그 때문에, 사람의 온기를 싫어하면서도, 동시에 그리워하시는 분이에요. 누군가가 조금만 관심을 표하면 믿고 싶어하시죠. 나는 그런데 믿을 수가 없어요. 난데없이 나타난 당신을.... 전하는 이미 마음이 기운 듯 하지만."
"................"
"전 그게 무서워요. 혹여나, 또 그런 일이 벌어질까 봐."
전하께서 또 상처받으실까 봐, 그게 두렵습니다. 김석진의 두 눈은 나를 꿰뚫고 있는 듯 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입을 꾹 다문 채 그저 가만히 듣고 있던 나를 잠시 지켜보던 김석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가며 조용히 말했다.
그럼, 현명한 판단을 하시길 바라겠습니다.
-
어제 날 찾아온 김석진의 말을 듣고 밤새 고민하고, 오늘도 고민해봐도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할 수가 없어 나는 어제 전정국과 같이 갔던 작은 연못으로 향했다. 머리가 복잡할 때면 그 곳에서 생각을 정리한다는 전정국의 말처럼, 나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가는 길에 또 박지민을 만난 나는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그를 보내려고 했으나, 전하께서 아끼시는 분을 혼자 보낼 수 없다며 굳이 날 따라나섰다.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릿속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박지민 때문에 한숨이 나왔으나, 결국 포기했다. 나는 약간 날을 세운 채 입을 열었다.
"지민님은 대체 무슨 일을 하시길래 이렇게 여유를 부리시는 거에요."
"저요? 황제 폐하의 직속을 맡고 있지만, 시기가 시기인지라 궁을 감시하는 역할도 하고 있어요."
그럼 이번 전쟁에는 출전하지 않으셨던 건가요? 박지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모든 병력을 밖으로만 뺄 수는 없으니까요. 남아서 나라를 지켜야죠. 박지민이 웃어보였다.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는 것도 중요해요.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여보았다.
연못 속에서 뛰돌고 있던 잉어 한 마리가 높게 뛰어오르며 풍덩, 하는 소리를 냈다. 나는 나무에 등을 기댄 채 한참을 생각에 잠겨있었다. 단 하나의 가시도 없으시다고 자신할 수 있으십니까. 언제까지고 내가 현나라 사람이라는 것을 숨길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전쟁 상황만 아니었다면 내 국적이 다른 건 별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내가 계속 숨기고 있는 게 사실 어쩌면 그리 큰 문제가 아닐지도 모르지. 나는 박지민에게 말을 걸었다. 있잖아요, 이거 되게 이상한 말이긴 한데,
"솔직한 게 좋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솔직한 게 좋다고 말하겠지만 글쎄요, 저는 어쩔 때는 솔직한 게 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해요."
뜬금없이 던져진 말에도 박지민은 되묻는 말없이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가 그렇게 대답했다. 너무 솔직한 거는 오히려 상대를 상처줄 수도 있거든요, 그게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대답에 나는 약간 놀란 눈으로 박지민을 바라보았다. 내 시선에 그는 목을 살짝 긁고, 목을 큼큼 하고 한번 가다듬더니 덧붙였다.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솔직해져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박지민이 조용하게 대답했다. 최소한,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솔직하게 마음을 표현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숨기지 말고, 그대로 모든 걸 보여주는 거. 힘들더라도 차차 열어가는 거. 대답을 듣고 나는 떨어지는 꽃잎들을 바라보며 한참을 생각했다.
"....정말 그럴까요."
"그게 좋은 대답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박지민이 미소지어보였다. 나는 그의 미소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는 말해야 할 것 같았다.
-
어제 밤과 오늘 하루 종일, 오랜 시간을 고민하던 나는 결국 털어놓는 게 맞을 거라고 생각하고 전정국을 찾아나섰다. 솔직히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두려웠지만 화를 내더라도 전정국이라면 끝내 용서해주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사실, 왠지 그라면 내가 현나라 사람이라는 걸 알아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괜히 숨겨두었다가 일을 크게 만드느니 지금 말하는 게 나을 거야. 나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백화궁을 향해 들어섰다.
"전하는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지나가는 시녀에게 물어보니, 곧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위 층에 계십니다. 다른 분과 이야기하고 계실 텐데, 지금쯤이면 다 끝났을 지도 모르니 한 번 들어가보심이 어떠할지요.
원하는 대답도 얻었겠다, 나는 계단을 한 칸 한 칸 올라갔다. 올라갈 때마다 첫날 전정국이 날 불러서 잔뜩 긴장한 마음으로 무겁게 계단을 올라간 것과는 다른 기분이 느껴졌다. 내가 말하기로 결심한 것이라, 마음은 무거웠지만 발걸음은 느려지지 않았다.
마지막 계단을 오른 후, 전정국이 있을 방으로 향해 걸어간 나는 일단 시녀에게 들은 말도 있고 하니 전정국이 아직까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확인했다. 안에서는 역시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구나 해서 도로 내려갈까 하고 몸을 돌리려던 참이었다. 안에서 들려오는 대화가 날 잡아끌었다.
아, 잡아온 포로들은 어떻게 할까요.
지금까지 뭐하러 살려뒀습니까. 정보는 다 알아냈죠?
예.
그럼 죽여야죠.
변화 없이, 뭐하러 살려두었냐며 죽여버리라는 낮은 목소리는 전정국의 것이었다. 포로라고 하면 분명히 내가 있던 현나라의 군사들을 지칭하는 것이겠지.
아무렇지 않게 사람의 생사를 결정해버리는 전정국의 모습에 약간 소름이 돋았으나 적군이기에 그러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살려두었다가 어떤 후환이 남게 될지 몰랐으니까. 나는 애써 놀란 심장을 진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그 다음으로 들려온 대화를 듣고서는 더 이상의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어차피 그 땅,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에요. 후환이 없게, 현나라를 싹 밀어버리려고요.
소름이 끼쳤다.
노인, 여자, 아이 할 것 없이 전부 다.
그리고 나는 도망치듯이 계단을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 암호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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