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유설원도
夢遊雪原圖
:: 01
눈앞이 핑핑 돌았다. 초점이 흐려져 뿌옇게 변질된 시야가 닿는 장소마다 속이 텅 비어 생기를 잃은 초록색 병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억지로 삼켜내는 들숨 속에서조차 역겨운 술 냄새가 났다. 실제로는 한곳에 가만히 고여 있는 피사체들이 내 목전에서는 하나같이 온전치 못하게 뒤흔들렸다. 금방이라도 울렁이는 속을 잔뜩 게워낼 것만 같아 아랫입술을 세게 짓씹었다.
어린아이처럼 목 놓아 울고 싶은 마음이 막연히 차올라 목구멍을 쳤다. 울컥거리며 차오르는 눈물이 만연하게 느껴졌다. 애써 그 뜨거운 것을 도로 삼켜내었다. 속이 헛헛해졌다.
갈 곳을 잃어 한참을 방황하던 손끝이 이내 탁자를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목재 탁자의 한쪽 모서리 끄트머리에 아스라이 걸쳐있던 책의 귀퉁이가 내 손아귀에 들어찼다. 나는 더 이상의 주저 없이 그것을 낚아채고는 힘주어 펼쳐 미색 종이에 빼곡하게 찬, 번지듯이 흔들리는 활자들을 천천히 손끝으로 훑고 입으로 읊었다. 혀뿌리 밑에 고인 단어들이 무람없이 입안을 헤집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울렁이는 속은 그칠 줄을 몰랐다. 애석한 마음에 두꺼운 책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둔탁한 마찰음이 호적한 방 안을 메웠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방금 내던진 책을 쏘아보았다.
흐릿한 시야 속, 바닥에 짓뭉개져 보기 흉하게 접히고 구겨진 그 책의 저자는 다름 아닌 나였으니까.
인정하기 싫기는 하지만, 애통하게도 나는 슬럼프 속에 갇혀 있었다. 대낮부터 종이의 버석버석한 질감이 한여름의 습도에 눅눅해질 때까지 책장을 넘기어 봐도,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며 여가 생활을 충분히 즐겨보아도 당최 떠오를 기미조차 보이질 않는 영감에 옥죄여버린 탓에 흐르는 하루하루가 고역이었다.
이전의 나는 도대체 어느 곳에서 그리 깊은 감명을 받았기에 큰 역경이나 고난에 부딪히지 않고 글을 쓰는 과정에서 늘 순항할 수 있었던가. 한참을 머리를 싸매고 고뇌하여도 돌아올 기미가 보이질 않는 마침표에 이제는 골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이번에는 더 잘 써야 하는데·····”
게다가 그 위에 느지막이 얹힌 부담감까지. 결코 무엇 하나 가벼운 것이 없었다. 이전에는 누리기에 급급했던 사람들의 시선과 기대에 이제서야 숨통이 턱 막혀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름대로 발걸음을 바삐 하고는 있지만 시간이 그런 나를 등지고 훌쩍 달아나버린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성취해내지 못한 채 제자리에 고여있는 나와 달리 물 흐르듯이 쉬이 흘러가버리는 날들이었다.
이전과 같지 못한 현실은 나에게 위로 한 마디 없이 두 손아귀에 상실감만 벅차도록 쥐여주었다. 무력감으로부터 파생된 심도 깊은 우울이 내 발목을 그러쥐고 심연 속으로 끌어당겼다.
어찌할 수 없이 눈앞이 가물가물했다. 오늘도 이루어 낸 성과가 없는데, 이렇게 또 날이 저물어간다는 의미였다. 허벅지를 꼬집으며 참아왔던 졸음이 한순간에 내 위로 쏟아졌다. 나를 무겁게 짓눌러오는 눈꺼풀이 온 세상을 암흑으로 덮었다. 그리 깊은 잠에 빠지기 직전, 나는 실로 소망했다.
누구라도 좋으니 나를 이 구렁텅이에서 꺼내어 달라고.
정말 이러다 죽는 한이 있다 한들, 나는 날 옥죄는 지독한 현실에서 간절히 벗어나고 싶었다.
夢遊雪原圖
Bgm/ 히사이시 조 - First Love
어디선가 새어 들어오는 듯한 차가운 바람에 몸을 최대한 작게 웅크렸다. 잔뜩 움츠린 바람에 훤히 드러난 맨 살갗에 닿는 한기가 여실히 느껴졌다. 이상하다. 지금은 여름인데. 그것도 푹푹 찌는 한여름.
아무래도 에어컨 온도를 너무 낮게 설정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찌뿌둥한 몸을 뒤척이는 순간, 유난히 차가운 칼바람이 발바닥을 간질이는 듯한 감각에 소스라치며 잠에서 깨어났다.
에어컨 바람이 이렇게까지 차가울 수가 있나?
급작스레 훅 물러가버린 잠 기운에 얼떨떨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인제야 서서히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는 수면의 여파로 흐릿한 내 시야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우리 집 거실의 고동빛 마룻바닥이 아닌, 눈으로 뒤덮인 땅바닥이었다.
"······· 도대체 이게 뭐야?"
얼떨결에 손으로 냉기 서린 바닥을 더듬거렸다. 그 순간 손바닥에 느껴지는 차갑고 얼얼한 감각을 보아하니 확실히 눈이 맞는 듯싶었다. 하지만···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한여름에 웬 눈이냔 말이다. 파도처럼 순식간에 밀려 들어오는 당혹감에 미간이 여과없이 찌푸려졌다.
상황 파악도 채 다하기 전에 고개를 돌려 이곳저곳을 살피었다. 잠에 들기 전만 해도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술병들 하며, 탁자, 심지어는 티브이와 소파까지 온데간데없이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그저 쉬이 풀어 말하자면, 이곳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빈 광활한 설원이었다. 그제서야 겨우 알 수 있었다.
이곳은 꿈속이었다.
나를 집어삼킬 것처럼 다가오는 이 눈바람도, 발끝이 얼어붙을 만큼 낮은 이 온도도. 모두 꿈속의 무용한 것일 뿐인 거다. 속으로 한참을 이리 되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믿기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아까 느꼈던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냉기가 지극히 현실적 이었던 탓인 듯싶었다.
그래서 결국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여기는 꿈속이니 볼을 꼬집든 뺨을 후려치든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을 거다. 이 모든 것은 내가 만들어 낸 허상일 뿐이니까.
긴장되는 마음을 달래려 호흡을 가다듬고는 눈을 질끈 감으며 볼을 세게 꼬집었다. 일순 얼굴에서 아릿한 감각이 퍼졌다. 어라, 아프다. 분명 이럴 리가 없는데. 이번에는 뺨을 약하게 내려쳤다. 정말 나를 골리기라도 하는 건지 이번에도 얼얼한 고통이 느껴졌다.
넋을 잃고 수차례 내 뺨을 때렸다. 살과 살이 맞닿으며 발생한 날카로운 마찰음이 유난히 아득하게 들렸다. 스쳐 지나가던 찬 바람이 부드럽게 오른쪽 볼을 감쌌다. 바람에 스친 것만으로도 이토록 쉬이 아릿한 느낌이 드는 것을 보아하니 필시 퉁퉁 부어올랐으리라. 믿을 수가 없었다. 뺨을 때리려 들어 올린 손이 벌벌 떨리다 이내 허공에 툭 떨구어졌다.
“꿈인데.... 분명 꿈인데.”
누군가가 지나간 흔적조차 없는 설원에 주저앉은 내 꼴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했다. 추운 날씨에 발갛게 물든 피부, 매서운 눈바람에 엉키고 얽힌 머리카락, 꽁꽁 얼어 감각조차 없는 발끝. 끝도 없이 목구멍에서 울컥이는 설움에 목이 메었다.
그러다 문득 이게 꿈이 아니라면, 정말 이렇게 곧 죽는 건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만일 그렇다면 차라리 날 좀 빨리 거두어 달라고 신에게 빌고 싶었다. 세상은 고단하고 나는 이미 지쳐버렸다. 내가 꿈꾸어 왔던 모든 것이 오직 나로 인해 신기루로 변해 버린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욱 끔찍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동시에 모순적이게도 벌겋게 달아오른 눈가를 비집고 뜨거운 눈물이 새어 나왔다. 이곳에서 마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무력감에 얼굴을 손에 묻고 처음으로 눈물을 쏟아내었다. 여태껏 남들 앞에서 차마 드러내지 못하고 억눌러왔던 감정들이 결국 터져 나오는 듯하였다.
얼마나 하릴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을까. 언뜻 팔 부근에서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닿아 온 뜻밖의 온기에 깜짝 놀라 몸을 흠칫 떨며 눈을 떴다. 지필대로 지쳐 녹초가 되어버린 나를 향해 선뜻 내밀어진 구원의 손길일까, 하는 헛된 희망이 싹을 틔웠다.
"···········"
잔뜩 몸을 웅크리고 앉은 내 앞에는 어디서 나타난 건지도 모를 남자가 있었다. 어딘가 미심쩍은 그 남자는 아무 말도 없이 나와 마주 본 상태로 쪼그려 앉아 한참을 내 눈만 지그시 쳐다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는 그런 그가 탐탁찮았다. 울고 있는 사람을 달래주질 못할망정 구경이나 하고 있다니.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어딘가 다정한 그 눈빛에 홀린 듯, 속절없이 그의 품 속을 파고들었다. 이 사람이 서툰 방식으로나마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사실이 은연중에 느껴지기라도 한 것 마냥.
꿈틀대며 애써 파고들어간 남자의 품은 생각보다 아늑했다. 이상하게 사람치고는 피부의 온도가 깨나 낮았으나, 얼음장처럼 차가운 내 몸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따뜻하게 느껴지는 효과가 일었다.
얼마간 남자의 어깨에 턱을 괸 채 온기를 나누었다. 설움으로 불안정했던 호흡이 남자의 느릿한 심장 고동 소리와 함께 차츰 정돈되었다. 외간 남자의 품에 안겨 안정감을 찾는 꼴이 이상했지만, 수상쩍게도 이 사람은 나를 밀어내지도 않고 있었다. 오히려 내 등 뒤에 제 팔을 둘러 더욱 단단하게 나를 고쳐 안을 뿐이었다.
점차 놓아버린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하자 남자의 품에 기대 안긴 내 자세에 공연히 머쓱해졌다. 눈동자를 굴리다,어색하게 웃으며 남자의 가슴팍을 살짝 밀었다.
" 죄송해요. 초면에 실례했·····."
내가 말도 다 끝맺기 전에 남자는 급작스레 퉁퉁 부은 내 뺨을 조심스레 손안에 쥐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엄지손가락으로 물기 어린 내 얼굴을 매만졌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당최 파악할 수가 없었다. 정신이 아득히 몽롱했다.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새하얗게 비워진 구질구질한 잡념을 대신하여 눈앞의 남자에게 입 맞추고 싶다는 욕구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분명히 이 남자는 어딘가 매혹적인 구석이 있었다.
이걸 잡아먹어, 말아?
남자가 웃으며 혼잣말을 조용히 읊조렸다. 그 순간조차 그는 내 뺨을 쓰다듬고 있었다. 위험하다. 이것만큼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본능적인 감각으로 인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동시에 눈앞의 남자에게 강한 끌림을 느꼈다. 나는 알게 모르게 그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좁히고 싶어 했다. 이것은 이룰 말할 수 없이 명백한 갈망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죽이기에는 좀 아깝단 말이지.”
“··········”
“안 그래, 응?”
그 말을 끝으로 남자는 내 목덜미에 제 얼굴을 묻었다. 애초에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이 아니었다는 듯이. 쇄골 부근에서 느껴지는 남자의 입술에 나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뻣뻣하게 경직된 내 상태를 알아채기라도 했는지 그는 잠시 피식 웃더니 다시 내 목에 묻은 입술을 움직이며 허리를 쓰다듬었다.
쇄골의 여린 살이 자극되는 느낌에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의 입술이 닿았던 곳부터 냉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작은 지점에서 시작된 한기가 급속도로 온몸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갔다. 불안정한 호흡이 가빠져오는 것이 막연히 느껴졌다.
“그러면 조금 있다가 보자.”
“··········”
“한여주.”
다시금 눈앞이 가물가물했다. 생긋 웃는 남자의 반반한 인상이 점차 흐릿해졌다. 저 사람이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는지 의구심이 들기는커녕, 정신만 아득했다. 조금 있다가 보자는 그의 의미심장한 한 마디와 함께 세상이 암전 됐다.
정신을 잃는 그 순간마저도 뼈 마디마디가 시린 추위만큼은 여전했다. 정말이지 이상한 첫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