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남은 건 그집에서 빼온 짐 뿐이었다.
하나 더 있다면 그를 향한 분노 뿐.
철썩같이 그를 믿고 있던 내가 바보였을까.
엄마를 볼 낯이 없어, 잠시 모텔에서 지내기로 했다.
이 동네는 교통이 편리하면서도 시끄럽지는 않다고 들어, 지내보고 괜찮으면 부동산쪽을 알아보기로 결심했다.
"...괜찮네."
실연... (이라기에도 웃기지만) 을 당해서일까.
부쩍 혼잣말이 늘었다.
다른 기지배들은 일찍 좋은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을 부러워했다.
물론 나도 기뻤다.
결혼은 내 인생 1순위의 꿈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꿈에 발을 디딘지 얼마 지나지 않아 꿈이라는 단어가 더렵혀졌다.
나를 할멈마귀 보는 듯했던 그 여자.
그 여자는 몇 살일까.
20살? 아니, 어쩌면 미성년자 일지도 모른다.
아직 때묻지 않은 듯한 눈과 피부가 반짝이며 나를 두려워했다.
그것은 콧방귀를 뀌며 내려보는 건방진 모습보다도 더 나를 위축되게 만들었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끊었던 담배를 쥐게 만들었다.
그래, 애초부터 담배피던 여자는 당신이랑 걸맞지 않았어.
그저 당신 곁에서 설설 기는, 그런 우렁각시가 필요했던 거지.
"후우우...."
담배를 끊은 지는 5년.
연애 4년, 결혼 1년동안 나는 대체 왜 몰랐던 걸까.
그가 날 진심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고.
그저 자신을 잘 맞춰주던 나를 마음에 들어했을 뿐이라고.
"콜록콜록..."
오랜만에 핀 담배는 조금 독했다.
잘 멎지 않는 기침 때문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담배를 지져 껐다.
나도 어느 새 그 인간에게 길들여져 있던 증거겠지.
말없이 모텔방 안의 바보상자에 눈을 돌렸다.
바보상자 안에는 우스꽝스러운 인형옷을 입은 남자가 맥주인지 여자의 젖가슴인지를 보고 헤벌레 한다.
덕분에 기분이 나빠져서 맥주를 마시고 싶어졌다.
"광고 아주 제대로 하네."
치익-
맥주캔 따는 소리가 시원하게 들려오고, 목넘김 소리가 메아리처럼 되돌아온다.
그래, 이 맛을 내가 너무 잊고 살았나보다.
난 아직 젊은데, 그 인간의 뒤에 서서 그 빛을 못 보고 살았다.
입가를 쓰윽 닦으며 비닐봉다리를 들고 쫄래쫄래 모텔로 돌아왔다.
TV에선 재미없는 개그 코너가 나왔다.
하지만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술 기운 탓일까?
버터향이 풍기는 오징어를 집어 들어 질겅질겅 씹자, 개그 코너가 끝이 난다.
"어라..."
캔을 입에다 털었는데 맥주가 다 떨어졌다.
아, 다시 나가기 귀찮은데.
주섬주섬 지갑을 챙겨서 모텔 앞 편의점으로 나선다.
눈 앞에 사람들이 아른아른 거린다.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조금씩 흐느적 거리는 것만 같다.
난 용케 음료 코너에서 캔 맥주를 몇 개 집어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담배도 하나 주세요."
술에 취한 와중에도 난 담배 하나까지 챙기며 계산을 마쳤다.
카운터의 고운 손이 내게 봉투를 내민다.
"안녕히 가세요."
"......"
저 알바생 나이 정도 됐으려나.
그 여자도 어디선가 이런 알바나 하고 있진.... 아니다.
그 돈 많은 인간이 용돈이나 실컷 주겠지.
혼자 씁쓸히 웃으며 편의점 문을 열어 나가려는데, 손을 맞잡고 있는 여자와 부딪혔다.
"......!"
뒤를 돌아본 순간, 여자의 찌릿거리는 눈빛을 보며 그와 그 여자애를 보았다.
순식간에 온몸에 소름이 끼쳐, 난 한마디 말도 없이 편의점 앞을 벗어났다.
여기 그가 있을리 없다. 분명 알고 있다, 헛것인 것을...
하지만 나의 이런 초췌한 모습을 보고 낄낄댈 그 둘을 생각하니 어디론가 숨고 싶어졌다.
"하아... 하아..."
모텔 문을 앞에 두고, 벽에 기대어 숨을 골랐다.
나 없이도 하하호호 거리며 잘 살 그들에 비해, 내 꼴은 너무나도 비참했다.
평소엔 아무렇지 않았을, 손에 들린 비닐봉투가 거슬려 바닥에 내동댕이 쳤다.
"흐윽...."
흐느꼈다.
지난 5년동안 사랑이라고 속았던 것이 분하고,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 한심하고,
또 그런 사람 때문에 울고 있는 것이 싫어서... 또 운다.
"이거 아줌마꺼예요?"
"....?!"
어린 목소리가 들려와 떨구었던 고갤 들어봤다.
길다란 젓가락이 서있는 것처럼 마른 남자가 앞에 있었다.
아줌마라는 단어가 그제서야 신경을 건드렸는데,
"어, 누나네."
"......"
내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난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닦으며, 흔들리는 시야를 확보하려 찡그렸다.
나보다 훨씬 키가 큰 그 남자는 손에 맥주캔을 들고와 내게 내밀었다.
"이거 떨어뜨렸어요."
"...큽, 고맙습니다...."
내가 맥주를 손에 쥐었다.
그런데 어쩐지 눈물이 자꾸 나와, 또 다시 울어제꼈다.
이번엔 아예 쪼그려앉았다.
앞에서 '에휴.'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내 옆으로 신발을 버적인다.
"누나 차였어요?"
"...흑....."
"...그래요, 계속 울어요."
그 남자는 내 사연도 모른 채 다가와서 내 등을 토닥였다.
난 가만히 그 토닥임을 받으며 쏟아냈다.
날 잠시 토닥이던 그 남자는 내 앞에 떨어져있는 봉투를 집어 들어올렸다.
"...맥주밖에 없네."
"......"
"어라, 담배... 이건 압수."
"....크흡, 뭐?.."
"담배피면 안 좋아요."
"...너도 그 XX랑 똑같애."
"....?"
난 벌떡 일어나서 말했다.
"사람들이 너한테 맞춰줘야 되는 줄 알지?
착각하지마, 이 XX야.
뭐? 여자는 담배를 피면 안돼?! 그럼 남자는! 남자는 왜 펴!"
"....워워... 진정해요."
"아무튼 사내 XX들이란 다 지 말만 맞고..!... 엇...!"
내가 미쳐 날뛰자, 그 남자는 내 손목을 잡아당겨 앉혔다.
난 얼떨결에 엉덩이를 찧으며 앉아, 얌전해져 있었다.
"그런 게 아니라 다 누나 위해서예요.
그런 인간 때문에 술먹고, 담배피고... 아깝잖아요."
"......"
"그 인간은 지 좋으라고 그런 건지 몰라도
난 아니니까 내 말은 들어요."
"......"
난 어쩐지 거부를 할 수가 없어서 얌전히 고갤 떨궜다.
그 남자는 내 손에 쥐어진 캔을 봉지에 담아서 다시 내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는 어두워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런 남자 때문에 울기엔 누난 너무 아까워요."
"......"
"힘내요! 내일 또 봐요."
그러고는 벌떡 일어나서 저만치 달아나버렸다.
...내일?
"....에?! 어제 그게..."
"저였어요. 기억 안나요?"
내 앞에 서 있는 교복입은 학생이 그렇게 말했다.
이렇게 어렸을 줄은....
"어제 내 품에서 울어놓고는..."
"!..내가 언제...!"
"...기억 나는 모양이네."
"......"
"근데 왜 모른 척 해요?"
"...난 네가...."
"...?"
'그렇게 어린 줄도 모르고...'
"..그런데 너 여기서 뭐해?"
"일 돕는 데요."
"...무슨 일?"
"여기 저희 부모님이 하시는 데에요."
"여기 아들이야?!"
왠지 조금 움찔했다.
내가 왜?
그건 정말 내 마음 깊은 속에서 부터 우러나오는 양심이었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그애에게 물었다.
"이런 것 따로 하시는 분들 계시지 않아?"
"...그, 그냥 제가 돕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그래? 착하네..."
"...누난 여기 얼마나 계실 거예요?"
"글쎄...."
"......"
"...그건 왜?"
"...오, 오래 있으면..."
"....?"
"...제가 싸게 해드린다구요."
"뭐?... 어디가, 야!"
그애는 1층 로비를 쓸다말고, 빗자루랑 쓰레받이까지 내팽개치고 달아났다.
난 황당하고 당황스러운 전개에 어쩔 줄 모르다가 일단 수습은 해야할 것 같아서 그것을 집어들었다.
괜히 내가 다 죄송해서 카운터에 계시는 어머님께 조심히 그것을 내밀었다.
"저... 아드님이 이걸 두고 나가서..."
"아...! 미안해요, 아가씨!
..저저 얼빠진 놈."
"..하하...."
"내 웬일로 청소를 돕는다고 한다했더니... 에휴."
"......"
그건 마치, 내게 착각하라는 소리로 들려왔다.
그로부터 얼마지나지 않아, 난 주변 원룸을 하나 구했다.
ㅇㅇ
ㅇ
ㅇ